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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메신저 - 청보리 | 🎈빠리사(parisa)를 망각한 한국불교의 업보~ - Daum 카페여기를 눌러 링크를 확인하세요.cafe.daum.net
🎈‘우리 빠리사’로 불교중흥 ․ 동포들 중흥 해낸다
- 빠리사, 부처님도 둘러 앉는다.
** 이번 '빠리사-parisa' 관련 자료는 "붓다의 불교"에서 여러 차례 강조한 붓다 당시의 불교도 공동체(빠리사-parisa)의 역사적 실체와 사회적 역할을 학문적으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밝히는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불교가 뛰어난 사상과 수행법을 지녔슴에도 지금 이렇게 우리사회에서 많은 대중들에게 외면 받으며 쇠락해 가는 이유가 어디에 있고, 한국불교가 다시 기사회생하여 민족사와 동포들을 향도하는 주도세력으로 설 수 있는 실제적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불교의 지금과 내일을 염려하시는 도반님들의 많은 관심을 기대해 봅니다. ^^
#♦스터디자료
#붓다의현장 22
🕸 짜빨라 사당의 ‘빠리사 법문’
• 생존의지를 포기하다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오전에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발우 들고 가사 입고 걸식하기 위하여 웨살리(Vesāli)로 들어가셨다. 웨살리에서 걸식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와, 아난다 존자를 불러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좌구(방석)를 챙겨라. 낮 동안에 머물기 위해 짜빨라 사당으로 가자.”
“세존이시여, 그리하겠습니다.”
2 마침내 세존께서는 짜빨라(Cāpāla-cetiya) 사당에서 바르게 마음 지켜보고 바르게 알고(sati, 正念正知), 생존의지(sañkhāra/상카라)를 포기하셨다.
붓다께서 말씀하신다.
“여래는 석 달 뒤에 열반에 들 것이다.”
대지가 진동하고, 큰 지진이 일어나고, 사람들 털을 곤두서게 하는 무서운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아난다(Anamda) 비구가 뒤늦게 알아차리고 호소한다.
“세존이시여, 부디 일 겁 동안이라도 더 머물러 주소서-”
• “여덟 개의 빠리사(八衆)가 있다”
3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여, 여덟 가지 빠리사가 있다.
캇띠야-빠리사·
브라흐마나-빠리사·
가하빠띠-빠리사·
사마나-빠리사·
사천왕-빠리사·
도리천-빠리사·
악마-빠리사·
범천-빠리사(神/하느님)이다.
아난다여,
전에 나는 수백의 캇띠야-빠리사를 만나러 가서, 거기에 함께 앉았고 대화하였고 토론에 몰두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거기서 그들이 어떤 빼어난 용모를 가졌다 할지라도 나도 그런 [빼어난]용모를 가졌으며, 그들이 어떤 [좋은] 음성을 가졌다 할지라도 나도 그런 [좋은] 음성을 가졌다.
나는 그들에게 법을 설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지만, 그들은 내가 그렇게 말할 때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그는 신(神)인가 인간인가?’라고 하면서 나를 알지 못하였다.
아난다야, 전에 나는 수백의 브라흐마나-빠리사·가하빠띠-빠리사·사마나-빠리사·사천왕-빠리사·악마-빠리사·범천-빠리사를 만나러 가서, 거기에 함께 앉았고 대화하였고 토론에 몰두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 ”」
- 디가니까야 16 「대반열반경」3, 21-23 -
#♦스터디자료
#정사유의~숲길 24
🎈‘우리 빠리사’로 불교중흥 ․ 동포들 중흥 해낸다
- 빠리사, 부처님도 둘러앉는다
전법 김재영(불교학박사, 청보리법사)
1. 누가 전등자(傳燈者)인가?
1) ‘빠리사 법문’의 절박한 상황
기원전 549년경, 전법 44년, 붓다 79세
전법고행 사십오년, 늙고 병들고 지친 팔순의 노(老)붓다~
마지막 유행 길, 고향 가빌라로 가는 북행(北行)길~
왓지(Vajji)연맹의 서울 웨살리(Vesāli) 짜빨라 사당~
더 살고 싶다는 생존 의지(bhava-sañkhāra/바와 상카라)를 포기하시고-
왜 여기서 붓다께서 이 ‘빠리사 법문’을 설하실까?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면서, 왜 이런 ‘빠리사 법문’을 설하고 계실까?
그만큼 긴박하고 절실한 사정이 있는 것일까?
지금 붓다께서 죽음 뒤의 문제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일까?
자신이 떠난 뒤, 불교도공동체의 후사(後嗣) 문제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일까?
부처님이 아니 계시는 상황을 생각하고 앞으로 전개될 불교도
공동체의 운명을 염려하고 계시는 것일까?
붓다의 법등을 이어갈 전등(傳燈)의 주역 문제를 고민하고 계시는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는 웨살리의 전후 사정을 되돌아본다.
이 ‘빠리사 법문’의 실제적 상황을 되돌아본다.
이 법문이 있기 며칠 전, 붓다께서 웰루와가마(Veluvagāma, 대숲 마을)에서 마지막 안거를 보내시다 중병에 걸려 심한 고통을 받으시다, 사띠로 정신 집중하여 겨우 기력을 회복하신다.
이때 아난다 비구가 스승의 회복을 기뻐하며 후계자 문제를 언급한다. 이에 응하여 붓다는 역사적인 ‘자등명 법등명의 대문’을 설하신다.
여기서 붓다께서는 이런 취지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내게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하는가?
나는 상가(僧伽)의 지도자가 아니다.
내가 상가를 이끌고 있다든지, 상가가 나를 따른다든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후계자 문제를 나에게 묻지 말라.
나는 이제 여든 살, 늙고 쇠하였다.
마치 낡은 수레처럼 가죽끈에 묶여 간신히 굴러가고 있다.
아난다여,
그대들은 그대들 자신을 등불 삼고
그대들 자신에게 귀의하라.
남들에게 귀의하지 말라.
그대들은 담마를 등불 삼고
담마에 귀의하라.
다른 것에 귀의하지 말라. … ”
- 디가니까야 16 「대반열반경」 2, 26 -
2) 부처님의 깊고 깊은 속내는?
‘Atta-dīpa/앗따 디빠
그대 자신을 등불 삼고(自燈明)
Atta-saraṅa/앗따 사라나
그대 자신에게 귀의하라(自歸依).-’
‘자신’이 누구일까?
등불삼고 귀의처가 될 ‘자신(atta/앗따)’ ‘그대 자신’ ‘나 자신’이 누구일까?
불교의 마지막 보루가 될 ‘그대들 자신’ ‘자신’은 실제로 누구일까?
지금 붓다는 빠리사를 내세우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짜빨라 사당에서 빠리사를 내세우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직후, 붓다는 느닷없다 싶게 빠리사를 내세우고 있다. 이 절박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붓다는 팔중(八衆)-여덟 가지 빠리사를 내세우고 있다. 실제로는 이렇게 사중(四衆)-네 빠리사를 내세우고 있다.
‘수백의 캇띠야 빠리사(Khattiyas-parisā)-전사(戰士) 귀족들
수백의 브라흐마나 빠리사(Brahmin-parisā)-지식인/종교인들
수백의 가하빠띠 빠리사(Gahapati-parisā)-상인(商人)/자산가/기업인들
수백의 사마나 빠리사(Samana-parisā)-출가 유행자(遊行者)들-’
부처님 뜻은 무엇일까?
죽음을 앞두고, 특정 개인이나 특정 집단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일부 우월적 출가집단에 ‘전등(傳燈)’하지 않고, ‘등블(法燈) 전하지’ 않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bahujana), 수백 수천의 빠리사-대중들에게 무한 신뢰를 보내는 부처님 속내는 무엇일까?
지금 부처님은 이들 많은 사람들에게 전등(傳燈)하시는 것일까? 이들 수백 수천의 빠리사-대중들에게 등불 전하고 있는 것일까?
붓다의 삶(法)을 등불삼아 열심히 살아가는 이 땅의 많은 동포들에게 법등(法燈) 전하는 것일까?
3) 붓다의 등불, 만인 앞에 활짝 열려있다
‘붓다의 등불
법등(法燈, dhamma-dīpa/담마 디빠)-’
이것은 실로 만인 앞에 열려있다.
천신(天神,Brahma parisā)으로부터 악마(惡魔, Māra-parisā)에 이르기까지, 이 우주법계 많은 대중들(parisā) 앞에 열려있다. 우리들 앞에, 그대와 나 앞에 활짝 열려있다.
바로 우리가 부처님의 법등 이어받은 붓다의 상속자들이다.
바로 그대와 내가 부처님의 법맥(法脈) 이어받은 붓다의 직계 자녀들, 전등(傳燈)의 상속자들이다.
우리 말고 누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그대들 자신을 등불삼고
그대들 자신에게 귀의하라.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
이것은 붓다 석가모니의 일관된 가르침이다.
경전 도처에서 이렇게 설해지고 있다.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는 절박한 상황에서,
‘나는 승가(僧伽)의 지도자가 아니다’,
이렇게 전제하고, 다시 한번 이 가르침을 설함으로써 붓다는 자신의 법등(法燈,Dhamma-dīpa)이 어느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만인 앞에 크게 열려있다는 진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우리들 자신이 불교의 당당(堂)주인이라는 붓다정신을 새삼 분명히 확립하고 있다.
불교는 어떤 형태의 선민주의(選民主義)나 우월주의(優越主義)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엄중히 경책하고 있는 것이다.
2. 빠리사, 이것이 불교도공동체다
1) 불교에도 공동체 있는가?
‘불교도공동체를 뭣이라 하는가?
불교교단을 뭣이라 하는가?’
‘아니, 불교에 교단은 존재하는가?
불교에 공동체란 것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우리는 늘 이런 의문 앞에 부딪쳐왔다. 이런 의문은 우리가 보고 듣는 불교집안에서 어떤 공동체적 유대와 일체성(一體性)을 거의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많은 불교도들의 상실감을 반영하는 것이다.
도처에서 부딪치는 일방적인 독주(獨走), 독선(獨善)-,
다수 불교도들의 맹목적인 추종, 허울뿐인 사부대중-.
단위 사찰에서부터 종단, 교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출가승들이 독점하고, 출가승 독단으로 결정하고 지배하는 세계 종교사에 유례없는 우리 불교계 현실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늘 깊은 회의를 지녀왔었다.
평생을 절에 열심히 보시하고 다녀도 출가승 한마디로 내쫓기고,
평생 헌신한 불자가 죽음에 임해서도 돈 없으면 독경 한번 듣기 힘들어 다른 종교 성직자들의 자원기도 들어야 하고,
출가승들이 끊임없이 권력투쟁을 벌이고 각목을 휘둘러도, 절대다수의 재가대중들은 말 한 마디 할 수 없고-,
이 기막힌 불의(不義)의 풍토를 지켜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회의하고 절망해 왔다. 그러다가 끝내 답을 찾지 못하고, 수없이 수없이 버리고 떠나간다. 그래서 우리 불교 이렇게 쓸쓸히 무너져 가고 있다.
‘승가(僧伽)다.
승가(僧伽, saṅgha/상가)가 곧 교단이다.
승가가 곧 불교도 공동체다.-'
우리는 이런 말 많이 들어왔다.
또 이렇게들 배워 왔다. ‘불교교단’하면, ‘승가’, ‘사부대중의 공동체’하면, 역시 ‘승가’라고 배워 왔다. 지금도 이렇게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아니다. 착각이다.
‘승가’는 사부대중의 공동체가 결코 아니다.
‘승가(僧伽, saṅgha)’는 출가승(出家僧)들만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승가’는 비구·비구니들만의 공동체이다. 재가대중들은 아무리 원해도 이 승가에 들어갈 수 없다. 이것은 붓다께서 확립하신 엄격한 규칙이다. 누구도 바꿀 수 없다.
승가를 교단으로 보는 ‘승가교단론(僧伽敎團論)’은 곧 수많은 재가대중들-시민들 민중들을 불교교단에서 배제시키는 차별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엄중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우리 빠리사(Parisā)’, 이것이 곧 공동체다
그럼 뭣일까?
‘승가’가 아니라면, 불교도공동체, 사부대중의 공동체는 뭣일까? 불교에는 사부대중의 공동체 같은 것은 아예 없는 것일까?
기원전 545년경, 붓다 연세 79세경
이때 붓다께서는 라자가하 독수리봉을 출발하여 마지막 유행길을 가고 있었다.
웨살리로 가는 도중 욱까쩰라
(Ukkacelā) 마을에서 붓다께서 특히 신뢰하고 사랑하신 상수제자 사리뿟따 비구와 목갈라나 비구의 입적 소식을 듣고 이렇게 토로하고 계신다.
“수행승들이여, 제자로서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수행승들이여, 제자로서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들이 어떻게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그들이 어떻게 가르침 따라 조언을 주고, 그들이 어떻게 사부(四部)의 빠리사(Cataso-parisā)로부터 사랑받고 어떻게 기쁨 받고 어떻게 존경받았는지를 생각해보라.”
‘Cataso-parisā/짜따소-빠리사
사부(四部)의 빠리사
사부대중(四部大衆)-’
하아-, 놀라운 발견이다.
바로 이것이다.
바로 이 빠리사(Parisā)다.
바로 이 사부의 빠리사(Cataso-parisā), 이것이 교단이다.
이것이 붓다께서 확립하신 불교교단이다. 이것이 붓다 석가모니께서 확립하신 불교도 공동체이다.
이것이 서로 둘러앉아 대화하고 토론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기쁨 주고 서로 존경하는 사부대중의 공동체다.
3) ‘빠리사’, 왜 우리는 이름조차 망각한 것일까?
사부 빠리사(Cataso-Parisā, 四部大衆)
비구 빠리사(Bhikkhu-Parisā, 比丘衆)
비구니 빠리사(Bhikkhunī-Parisā, 比丘尼衆)
우바새 빠리사(Upāsaka-Parisā, 優婆塞衆)
우바이 빠리사(Upāsikā-Parisā, 優婆夷衆)
이 빠리사가 곧 불교교단이다.
이 빠리사가 곧 불교교단, 공동체, 사부대중의 실체(實體)다.
초기불교 이래 불교의 주역이고 주체이다.
짜빨라 사당의 ‘빠리사 법문’,
불경 도처에서 이 ‘빠리사’가 나오고 있다. 불교도 공동체, 교단, 사부대중을 말할 때, ‘빠리사’ ‘빠리사’-, 이렇게 하고 있다.
그런데 왜 망각한 것일까? 경전 도처에 나오는 이 ‘빠리사’, 이 명칭, 이 고귀한 존재, 왜 이름도 모르게 까맣게 망각하고만 것일까?
이 멀쩡한 실체를 두고 왜 ‘승가(僧伽)’다 ‘뭐다’ 해왔을까?
‘우바새-빠리사’ ‘우바이 빠리사’, 재가의 남성, 여성 불자들, 시민들 민중들이 불교교단의 당당 주역으로 나서는 것을 내켜하지 않은 이들의 고의적인 의도일까?
경전에 수없이 나오는 이 ‘빠리사’를 드러내지 못한 것은 우리 불교공부 하는 사람들의 안이한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의식이 없으니까, 역사의 현장-사회현장을 외면하고 개념분석에만 열중하고 앉았으니까, 마음만 찾고 앉았으니까, 빠리사가 안 보이는 것이다.
‘우리 민중들이 불교 속에서 어디에 서야 할 것인가?’-
나 자신부터 이런 고민 없으니까, 부족하니까, ‘빠리사’라는 주역의 자리를 망각하고 다른 무엇에 추종해 온 것이다.
‘빠리사’ 망각
서로 자유롭게 대화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존경하는 따뜻한 공동체 부재(不在)-,
이것이 세계 불교의 치명적 취약점이다.
주체를 상실한 불교, 시민적 민중적 주체를 상실한 불교, 어찌 설 수 있을까? 어찌 역할 할 수 있을까? 그래서 세계불교가 선민(選民)불교, 은둔(隱遁) 회피(回避)불교로 왜곡되고,
그래서, 부처님의 그 고결한 사상적 정신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세계사의 경쟁에서 설 자리를 잃고, 주변적 종교로 소외되고 쇠망해 가고 있다.
이 땅에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불교 지금도 여전히-
3. 부처님도 둘러앉는다
1) 둘러(pari) 앉는다(sā)
“아난다여, 전에 나는 수백의 캇띠야 빠리사를 만나러 가서 거기에 함께 앉았고 대화를 하였고 토론에 몰두하였음을 잘 알고 있다. …
나는 그들에게 법을 설하고 격려하고 분발하게 하고 기쁘게 하였지만, 그들은 내가 그렇게 말할 때, ‘누가 이런 말을 하는가, 그는 신(神)인가 인간인가?’라고 하면서 나를 알지 못하였다. … ”
- 디가니까야 16, 대반열반경 3, 21-23 -
하아-,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소식인가.
얼마나 통쾌한 광경인가.
여기서 붓다와 빠리사들은 진정 함께하는 동반자들 아닌가.
아니, 오히려 붓다가 저들 전사빠리사들을 표준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붓다가 저 전사 대중들을 주인으로, 주역으로 높이 세우고 있지 않은가.
빠리사(parisā)
빠리사드(parisad)~
‘parisā’의 ‘pari’는, ‘둥그렇게’ ‘빙 둘러서’, 이런 뜻이고, ‘sā(d)’는, ‘앉다’ ‘둥그렇게 모여 앉다(輪座)’, 이런 뜻이다.
‘parisā’는, ‘여러 사람들-대중들이 둥그렇게 앉다’, 이런 뜻이다.
따라서 ‘parisā’는 ‘둥그렇게 모여 앉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우리가 흔히 쓰는 ‘대중들’ ‘사부 대중들’ ‘중(衆)’은 곧 이 parisā를 뜻으로 옮긴 용어이다.
출가승들 보고 ’중(衆)’이라고 부르지만, 재가대중들도 중(衆)이다. 지금 이 ‘중(衆)’이 비하하는 호칭으로 취급되지만, 그래서 스님들 보고 ‘중’ 하면 싫어하지만, 본래로 좋은 호칭이다. 아니, 거룩하고 뜻 깊은 호칭이다.
2) 빠리사에는 어떤 갑(甲)도 을(乙)도 없다
‘빠리사(parisā, parisad)’
‘부처님도 둘러앉는 빠리사-’
이것이 ‘빠리사’다. 이렇게 둘러앉아서 관찰하고 대화하고 토론하고 공감하고 합의하고 원력 세워 대중울력으로 함께 일하는 것이 ‘우리 빠리사’다.
‘빠리사’는 이렇게 둘러앉아 관찰하고 토론하고 함께 일하는 불교도 공동체를 일컫는 것이다.
‘둘러앉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곧 ‘평등하다’는 것이다. 위아래(上下) ‧ 주종(主從) 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빠리사’, 곧 불교도
공동체가 본질적으로 평등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상(上)/하(下)없이, 우월자/추종자 없이, 갑(甲)/을(乙) 없이, 출가/재가 없이, 남(男)/여(女) 없이 …, 모든 구성원들이, 어떤 형태의 신분적 차별 없이, 한 가지로 평등하다(一味平等)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구성원들이, 출가 재가들이 각자 자기 고유의 특성을 지니면서도 본질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평등한 상호관계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불교도는 서로 평등하다.
사부대중은 아무 차별이 없다.
붓다의 세계에서는 모든 존재들이 평등하다. 신(神, Brahma)도 악마(惡魔, Māra)도 진정 평등하다. 귀족도 수행인들도 천민도 노비도 진정 평등하다.
부처님도 시민·민중들도 진정 평등하다.
어떤 우월주의도 권위주의도 존재할 수 없다. 붓다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사람들은 일체의 차별적 신분을 벗어나, ‘빠리사’ ‘대중(大衆)’ ‘도반(道伴)’ 한 이름으로 불린다.
3) 빠리사는 시대정신이다
‘대평등(大平等)
평등 무차별(平等無差別)
부처님도 함께 둘러앉는 평등 무차별-’
이것은 관념 아니다.
교리에서나 들먹이는 이론 아니다.
이것은 눈앞에서 추구하는 시대정신이다.
붓다와 불교도들이 이 땅에서 추구해가는 엄연한 역사적 사회적 정의(正義)다.
붓다와 불교도들이 이 땅에서, 이 사회 속에서 신명(身命) 바쳐 실현해가는 변혁과 개척의 정의다. 만인견성-만인해탈의 화엄불국토, 화엄코리아의 정의다. 인도 민중들이, 이 땅의 민중들이 목마르게 대망(待望)하는 구원의 메시지다.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지금 붓다는 저 캇띠야 대중들과 함께 위·아래 없이 둘러앉아 있다.
이 놀라운 평등-평등성(平等性)
부처님도 함께 둘러앉아 대화하고 토론하는 이 놀라운 평등 무차별자유롭고 평등한 이 공동체적 일체감~
여기서 솟아나는 치열한 자발적 동기 순수열정(純粹熱情, chanda/찬다)-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인도불교 성공의 비밀이다.
Buddhst-India, 그 경이로운 성공의 비밀이다.
엄혹한 카스트(caste)적 차별과 학대 때문에 인간 대접 받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죽어가던 수많은 인도 시민들, 민중들은 이 빠리사를 보고 놀라고 감동한 것이다.
부처님도 둘러앉는 이 빠리사의 현장을 실제상황으로 보고, 인도 시민들 민중들-많은 사람들은 거의 유일한 희망의 빛을 보고 모여든 것이다. 그리고 당당(堂堂)주인으로 일어선 것이다. 변혁과 개척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불교사상이 뛰어나서’ ‘무상·무아·공사상이 뛰어나서’ ‘삼보가 거룩해서’-,
이것 때문에 인도민중들 불교로 모여온 것 아니다.
눈에 보이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 그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둘러앉는 빠리사의 충격-,
이것이 법이다. 이것이 깨달음이다.
이것 아니면 그들 많은 사람들 동포들 움직일 수 없다.
4. 깨달음은 대중적 사회적 합의과정이다
1) 깨달음은 대중적 합의과정이다
‘관찰(sati)과 토론(parisā)
현장직시(sati)와 대중적 합의(parisā)
관찰과 토론, 합의의 과정을 통한 사회적 실천-’
이렇게 빠리사는 단순한 모임, 공동체가 아니다.
이렇게 빠리사는 깨달음을 실현하는 전제적 조건이다.
‘깨달음’은 대중들의 대화와 토론, 공감과 합의의 과정이다.
대중들, 많은 사람들과의 상호존중, 연민과 섬김의 과정이다.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대화와 토론, 합의를 전제로 한다.
곧 빠리사(parisā, 둘러앉다)와 삼만나띠(sammannati, 합의하다)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바로 대중공사(大衆公事), 대중공의(大衆公議)다.
저 ‘뿐나 여인 빠리사 사건’에서 보듯,
‘빔비사라 왕과 12만 시민 빠리사 사건’에서 보듯,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맞대고 평등하게 둘러앉아서,
우리 사회가 직면한 사회적 민중적 문제들, 고통들을 놓고,
서로 다른 견해들 상호존중하고 경청하고 끄덕이면서,
고집 비우고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고 토론하고, 바른 해결방법에 합의하고, 협력하여 실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 고통을 해소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 사회정의, 평화를 이뤄내고-
깨달음은 이렇게 상호존중과 자유로운 토론, 합의의 과정이다.
보리수하의 항마, 관찰~
사슴동산 다섯 수행자와의 만남~
야사(Yasa)와 그 가족들, 친구들과의 만남~
기생을 좇아 달려가는 서른 명 자산가의 자녀들과의 만남~
깟사빠(Kassapa) 삼형제와의 목숨 건 토론~
라자가하 12만 시민들과의 만남~
라자가하 거리 뿐나 여인, 시민들과 붓다의 만남~
붓다의 깨달음도 이런 관찰과 토론, 대중적 합의의 과정을 거쳐서 확립된 것이다.
그래서 붓다의 깨달음을 ‘정각(正覺, Sambodhi)’ ‘대각(大覺, Mahā-bodhi)’이라 일컫는다.
이런 일련의 진지하고 심각한 토론과 대중적 합의의 짜빨라 사당의 ‘빠리사 법문’ 통하여, 붓다께서도 ‘바르게 깨달으신 붓다(Sammāsambuddha, 正等覺者)’로 역사적, 사회적으로 공인된 것이다.
‘정각(正覺, Sambodhi)’은 ‘더불어, 함께(together) 깨닫는 것’ ‘대중견성’이고,
‘정등각자(正等覺者, Sammāsambuddha)’는 ‘많은 사람들, 대중들과 함께 깨닫는 붓다’이다.
‘sam(=saṃ, sammāsam, 正等)’은 바로 이런 뜻이다.
2) 만인견성은 사회적 각성의 과정이다
부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아니다.
저 높은 도솔천에서 강생(降生)하신 것 아니다.
‘하늘’은 곧 ‘인도 민중들’이다. ‘도솔천’은 우월적 카스트체제를 혁파하고 만민평등-대중적 민중적 합의의 신천지를 기다리는 ‘인도 민중들의 대망(待望)’이다.
붓다는 이 민중들의 간절한 대망의 하늘에서 오신 것이다. 따라서 붓다의 깨달음은 홀로 깨달은 것 아니다. 독각(獨覺) 아니다.
대각(大覺, Mahā-bodhi)이다. 정각(正覺, Sambodhi)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깨닫는 것이다.
곧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만인견성’, ‘만인깨달음’이다. 깨달음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각성운동(覺醒運動)’이다. ‘시민적 각성운동’이다.
대각(大覺)-정각(正覺)
만인견성-사회적 시민적 각성운동
관찰과 토론, 대중적 합의를 통한 많은 사람들의 깨달음-
붓다의 전생애를 통하여, 이런 관찰과 토론의 사회적 각성운동이 줄기차게 지속되고 있다.
붓다의 설법은 대부분 이런 토론과 합의의 사회적 과정으로 전개된다. 지금 우리가 하는 것 같은 일방적 독단적 한소식이거나 설교가 아니다.
홀로 수행해서 깨달았다 해도, 대중들의 검증과 인가(認可)라는 합의의 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상호탁마(相互琢磨)의 과정, 대중적 집단적 검증의 과정을 요구하고 있다.
합송(合誦)이 이런 과정이다. 대중공의가 이런 과정이다. 이런 대중적 토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하여 사회적 각성, 만인깨달음이 현실로 실현된다. 해탈열반이 현실로 실현된다.
아무개 대선사가 고고하게 오도송을 읊는다고 깨달은 것이 결코 아니다.
깨달음, 해탈열반은 이렇게 본질적으로 사회적 과정이다. 사회화(社會化)의 과정이다. 깨달음은 고독한 영혼의 산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아름답지만 독각(獨覺)의 길, 벽지불(辟支佛, pacceka buddha)의 길이다.
그것은 고상하지만 만인의 길이 아니다.
3) 우리가 깨달아야 세상이 살아난다
부처님 한 분 깨달아서 되는 것 아니다.
아라한, 도인 한 분 깨달아서 되는 것 아니다.
나 혼자 깨달아서 되는 것 아니다.
이 세상 문제, 괴로움 죽음의 문제 해결되는 것 아니다.
이 뿌리 깊고 광범한 민중들 동포들의 고통, 해결되는 것 아니다.
부처님은 전지전능한 신(神)이 아니다. 그런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처님 신비주의’, ‘깨달음 만능주의’ 타파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 동포들, 중생들, 속인들이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만인견성이다. 만인해탈이다. 그래야 이 세상이 살아난다.
이것이 현실이다. 우리가 보아오고 경험해 온 역사적 현실이다.
위대한 붓다 석가모니의 위없는 바른 깨달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 민중들의 고통, 인도사회의 불의(不義)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 세상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부처님 한 분, 도인 한 분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아야 한다.
사회전체가 각성해야 한다. 집단지성(集團知性), 집단이성(集團理性)이 실현돼야 한다.
그래야 이 절박한 우리시대의 문제, 우리 사회의 고통들 해결될 수 있다.
대승불교가 ‘많은 부처님’의 다불설(多佛說), 다보살설(多菩薩說), ‘만인성불’을 주창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괜한 허풍이 아니다.
깨달음을 이렇게 만인견성운동으로, 사회적 각성운동으로 시작하였다는 데에 붓다 석가모니의 위대성(偉大性)이 빛난다. 이 위대한 이상(理想)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빠리사다. 함께 둘러앉는 평등 빠리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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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 스터디 제 1부
"화엄코리아" (김재영/동쪽나라)
🗝 자료출처;
붓다께서 몸소하신 불교를 전하는
"붓다의 불교" 밴드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