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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24년 겨울사경회를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종교개혁사' 강의를 병행하여 '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주제로 1월 13일(토요일)-14일(주일)에 가지며 강의한 내용입니다. 강사는 고경태 목사님(주님의 교회, 조직신학 교수)입니다. 열 번째 시간인 10강은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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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의 신학과 신앙
- 종교개혁 이야기 -
목 차
1.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개혁 진영이란
2.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들
3. 종교개혁 대략
4. 때가 찬 종교개혁
5. 루터의 종교개혁
6. 칼빈의 종교개혁
7. 잉글랜드의 종교개혁
8.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9. 재세례파와 신령주의(신비주의)
10.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11. 도르트 총회(1618-1619: the Synod of Dordrecht (Dort) in 1618-1619)
12. 웨스트민스터 총회(1643-1649)
※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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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사경회 둘째 날 : 열 번째 시간 -
10강 로마 카톨릭주의와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프랜시스 튜레틴 Francis Turretin, 1623-1687)은 제네바의 신학자로 변증신학(theologiae elencticae, Elenctic Theology) 혹은 논박신학을 진행했다. ‘Elenctic’는 ‘논증적인’, ‘논박하는’으로 어떤 진영에 대해서 명확하게 세우는 방법이다. 튜레틴이 거부한 신학은 로마 카톨릭주의, 소시니안, 알미니안이다. 이러한 풍토는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신앙고백서를 작성할 때 세운 원칙이기도 하다. 1619년 도르트 교령이후에 알미니안은 개혁파 진영에서 배격될 핵심 사상 중 하나가 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의 핵심 요체를 이신칭의라고 하는데, “이신칭의와 구원의 확실성”과 “이신칭의와 구원의 탈락가능성”으로 대별된다. justification by faith를 이신칭의(以信稱義)로 번역할 것인가? 이신득의(以信得義)로 번역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로마 카톨릭주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20년 마틴 루터를 정죄하면, 개혁을 요구하는 모든 세력은 이단으로 간주했다. 1534년 잉글랜드 헨리 8세가 수장령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 우산에서 이탈했다. 스코틀랜드는 1560년에 전환했다. 로마 교황주의는 개혁신학의 주장에 대해서 체계를 강화시켰다. 그것을 개혁파에서는 반종교개혁(Contrareformatio, Counter-Reformation)이라고 하고, 로마 교황주의에서는 개혁파를 반종교개혁이라고 한다. 두 측은 모두 개혁은 계속되어야 한다(Semper Reformanda)고 주장한다. 교회가 변화하고 쇄신하는 것이 반드시 개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은 기독교 고유의 복음을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가톨릭대사전> - 반종교개혁 - 1522년에서 1648년 사이에 일어났던 가톨릭 개혁(Catholic Reform)을 일부에서는 반종교개혁이라 불렀다. 종교개혁에서 제기된 문제를 가톨릭교회 나름대로 극복하고 참된 개혁을 통해 프로테스탄티즘의 사조를 종식시키려 한 운동이었다. 예를 들면 이냐시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는 예수회(the Society of Jesus)를 창설하여 참된 가톨릭 생활을 부흥시키려 하였고, 아빌라의 데레사(St. Teresa of Avila)에 의한 가르멜회의 부흥운동 등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이 계속적으로 수행될 수 있었던 것은 교황과 트리엔트 공의회의 영향 때문이었다. 밀라노의 가롤로 보로메오(St. Calolus Borromaeus)는 공의회의 모든 결정사항을 실행에 옮겼고, 제네바의 프란치스코 살레지오(St. Francis de Sales)는 참된 가톨릭 교의(doctrine)와 신심을 부흥시키는 데 전력을 쏟았다. 세속군주 중에서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그의 왕비인 영국인 메리 튜더(Mary Tudor) 같은 이는 이 개혁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영국과 스페인, 폴란드와 스웨덴 사이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거의 2세기에 이르는 기간의 종교전쟁에 한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의 결과 가톨릭교회는 제도와 조직이 강화되었고, 세속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복음전파사업에 전념하였다. (⇒) 가톨릭개혁
※ 로마 카톨릭에서 반종교개혁의 시작을 스페인의 필립 2세와 잉글랜드 여왕인 메리 튜더(1516-1558)를 제시하고 있다.
[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71) 반종교 개혁 – 카톨릭신문 -
16세기 가톨릭 교회는 한편으로는 시대적인 혼란과 신앙 교리, 교회 관습과 전통의 혼돈으로 점철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개혁과 쇄신의 노력이 빛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15세기초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는 서구 대이교 사건(1378~1417)을 종결지었지만 교회의 쇄신이라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이는 세속적인 정치 권력의 간섭과 영향 때문이기도 했지만 세속화된 교회 자체의 약점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한 교회는 다양한 계층에서 복음과 초기 교회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쇄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쇄신의 여정은 쉽지 않았고 성과는 미진했다.
그런 가운데 15세기 말에서 16세기에 걸쳐 루터 등에 의한 종교 개혁 운동으로 교회는 분열됐고 이 분열을 치유하려는 운동이 16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이러한 가톨릭 개혁을 19세기 초 역사가들은 「반종교 개혁」(Gegenreformation)이라고 불렀다.
16세기 교회 분열 치유 노력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가톨릭 개혁」과 「반종교 개혁」이 결코 동일한 역사적 운동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은 기본적으로 가톨릭 신앙에서 분열된 프로테스탄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지칭하는 「종교 개혁」의 개념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반종교 개혁이 루터의 시대에 일어난 가톨릭 교회의 모든 쇄신 운동 전체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개혁과 프로테스탄트에 대응해 가톨릭교회의 영향력을 회복하고 교회의 쇄신을 이루기 위해 특정 지역에 한정돼 발생한 운동이다. 하지만 교회의 쇄신 운동은 이러한 반종교 개혁보다 훨씬 앞서 이미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반종교 개혁이 일어나기 이미 오래 전부터 교회 안에서는 쇄신을 열망하는 수많은 주교와 수도자, 평신도들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교회 쇄신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가톨릭 교회의 쇄신 운동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탈리아와 스페인이 중심이 되어 점차 전체 교회로 확산됐지만 반종교 개혁은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에 생겨난 것으로 반가톨릭적인 개혁 운동의 확산을 저지하고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하려고 했다. 반종교 개혁은 특히 가톨릭 교회의 내외적인 개혁을 정치적으로 후원했으며 정치적 결속을 공고히 하고 잃어버린 교회의 영향력과 영토 회복을 도모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반종교 개혁을 수행한 대표적인 나라가 독일이었다.
개혁 중추는 ‘예수회’
가톨릭 교회는 날로 거세지던 프로테스탄트의 반가톨릭적인 가르침들을 논박하고 정통 신앙 교리를 재확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로 돌아선 사람들을 다시금 교회의 품안으로 끌어안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에서 가톨릭 교회가 침체를 거듭하고 있을 때 1560년 경부터 여러 곳에서 활발하게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오직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는 투쟁으로서만 인식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즉 이 운동은 가톨릭 교회 안에서 이미 지속되고 있던 개혁 운동과 보조를 맞춰 진행됐다.
교황청은 공의회에서 결의한 것을 각 지역교회가 충분히 이해하고 과감하게 실행하도록 촉구했고 교황으로부터 쇄신의 주역으로 각별한 관심을 받던 예수회는 16세기 가톨릭 개혁 운동의 중추가 됐다. 예수회는 특히 영성 생활 지도와 선교 활동, 자선 사업, 청소년 교육과 신학 연구 등을 통해 독일에서 반종교 개혁과 가톨릭 신앙 복구의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운동은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 여러 유럽 제국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독일의 가톨릭 제후들은 새롭게 변모하는 가톨릭 교회의 모습에 고무돼 쇄신을 실행했고 자기들의 영지 안에서 가톨릭만을 인정했다. 이에 따라 가톨릭 제후들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확산되면서 정치적 종교적 갈등이 야기됐고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 회의를 통해 제국의 가톨릭 제후들은 자기 영토 안에서 가톨릭 신앙만을 인정하도록 허용됐다.
합스부르크가의 헝가리 왕도 동유럽에 프로테스탄트가 확산되는 것을 억제했고 신성 로마 제국의 페르디난드 1세(1556~1564)와 페르디난드 2세(1619~1637)도 제국 전체를 가톨릭 신앙의 전통대로 수호했다.
1617년 페르디난드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됐을 때 프로테스탄트를 억제하려 함으로써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을 때 정치적으로는 독일 황제의 권위가 실추됐고 종교적으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동등한 권리를 갖는데 합의함으로써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반종교 개혁과 종교 분쟁이 종결됐다.
전체 교회의 쇄신을 위한 역사적인 물결을 가리키는 용어는 「가톨릭 쇄신 운동」이 적절할 것이다. 반종교 개혁 운동은 대부분의 경우 특정 지역의 한정된 지역에서 일어난 운동이기 때문이다.
반종교 개혁이 가톨릭교회의 개혁과 쇄신 전체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그 성과는 적지 않았다. 교회는 제도와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개혁과 쇄신의 발걸음을 더욱 힘차게 내디딜 수 있었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 반종교 개혁으로 인해 가톨릭에 대해 더욱 공격적이 됐고 첨예한 종파적 대립을 야기했다.
반종교개혁의 충추에는 트렌트 회의에 있다. 트렌트 회의는 루터 별세 직전에 시작했고, 칼빈 별세 직전에 끝났다.
트렌트 회의(1545-1563)
Concilium Tridentinum(Council of Trent, 1545-1563)는 서방 교회에서 로마 교황주의 진영에서 개최한 회의이다. 회의를 개최한 목적은 루터와 칼빈 진영의 종교개혁에 대한 확고한 자기 교령을 구축하는 것이다. Concilium Tridentinum는 트렌트 혹은 트리엔트로 번역하는데, 우리는 트렌트라고 할 것이고, 공의회, 교회회의, 종교회의, 회의 등은 교차로 사용할 것이다. 트렌트 회의에 대한 평가는 개혁파 교회에서는 역(逆) 혹은 반(反)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고 평가하고, 로마 교회(천주교) 측에서는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이라고 평가한다.
트렌트 회의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소천하기 전에(1545년) 개회되었고,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이 소천하기 전에(1563년) 폐회되었다. 트렌트 회의는 막 형성된 예수회(Societas Iesu, 1539년 창립),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의 주동으로 개최되었다고 한다. 로욜라와 칼빈은 몽테규 대학(college of Montaigu)에서 수학하였다. 예수회 공동창설자인 프란시스 자비에르(Franciscus Xaverius, 1506-1552)는 인도와 명(明) 국(國), 왜(倭) 국(國)에서 성경과 신학을 번역하여 정착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어휘들은 자비에르가 창작한 어휘를 답습하고 있을 것이다. 예수회 사제들은 들어가서 활동해서 서양 학문 어휘를 한자어로 연결시켰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도 예수회 소속이고, 1582년 마카오에 상륙하여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저술하는 등 열성적인 포교 활동을 하였다. 최근에 예수회 소속 사제가 교황이 되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의 종군사제로 세스페데스가 들어와서(1593년) 왜군을 상대로 활동했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r)1513-1521)는 마틴 루터의 글에서 41가지 문제(4l propositions)를 정리해서 정죄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교황 진영과 개혁파 진영은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협정문을 채택했지만 결렬되었다. 그리고 교황측에서 1차 소집 통고를 했지만 개혁파에서 거부했고, 1545년에 2차 통보를 했을 때도 응하지 않았다. 루터가 소천한 뒤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군대를 동원해서 개혁파를 강제 소환하려고 했다. 슈말칼덴 전쟁으로 교황측이 우세를 차지했지만, 개혁파 진영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항전했고, 1555년 아우스부르크 회의를 통해서 종교의 자유를 확보했다. 그렇게 트렌트 회의는 로마 교회의 자체 회의로 진행되어 결론했다. 개혁파 진영에서 참가하지 않은 것은 결코 자기들의 견해를 수용하지 않을 것이며, 약속도 지키지 않을 것으로 파악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트렌트 회의는 1545년에 시작하여 1563년에 마친 18년의 기간이지만, 3기로 활동하였고 중간에 휴지 기간(10년)도 있다. 1기는 1545년 12월 13일부터 1547년 3월 11일까지 진행했다(교황 바울 3세). 2기는 제2기 1551년 5월 1일부터 1552년 3월 28일까지 진행했다(교황 율리우스 3세). 3기는 1559년부터 1565년까지 진행했다(교황 피우스 4세).
트렌트 1차 결정(1546년 2월 20일-3월 8일까지 4회기(session))은 성경(DECREE CONCERNING THE CANONICAL SCRIPTURES)에 관해서 결정했다. 종교개혁파의 오직 성경에 대해서, 성경 목록을 결정하고 성경과 전통을 공동 권위(pari pietatis affectu ac reverentia )로 결정했다. 벌케이트(Vulgate)와 원어 성경(original texts by Greek and Hebrew)의 권위를 인정했다. Canon 없음, 1장으로 구성함. ※ Canon에 Anathema가 선언됨.
트렌트 2차 결정(1546년 7월 17일, 5회기(session))은 원죄(DECREE CONCERNING ORIGINAL SI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5항, 4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3차 결정(1547년 1월 13일, 6회기(session))은 칭의(DECREE ON JUSTIFICATIO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33항, 16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4차 결정(1547년 3월 3일, 7회기(session))은 성사 중 성만찬(DECREE ON THE SACRAMENTS/ ON THE SACRAMENTS IN GENERAL)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3항, 1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5차 결정(1547년 3월 3일, 7회기(session))은 성사 중 영세(DECREE ON THE SACRAMENTS/ ON BAPTISM)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4항, 0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6차 결정(1547년 4월 4일, 7회기(session))은 성사 중 견진례(DECREE ON THE SACRAMENTS/ ON CONFIRMATIO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3 항, 0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7차 결정(1551년 10월 11일, 13회기(session))은 성체성사DECREE CONCERNING THE MOST HOLY SACRAMENT OF THE EUCHARIST)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1 항, 8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8차 결정(1551년 11월 14일, 14회기(session))은 고해성사(ON THE MOST HOLY SACRAMENTS OF PENANCE)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5 항, 15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9차 결정(1551년 11월 25일, 14회기(session))은 도유성사(ON THE SACRAMENT OF EXTREME UNCTION)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4 항, 3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10차 결정(1563년 11월 11일, 24회기(session))은 혼인(DOCTRINE ON THE SACRAMENT OF MATRIMONY)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12 항, 10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11차 결정(1563년 12월 4일, 25회기(session))은 연옥 교리(DECREE CONCERNING PURGATORY)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0 항, 3 장으로 구성함.
트렌트 12차 결정(1563년 12월 4일, 25회기(session))은 계속법(DECREE FOR CONTINUING THE SESSION ON THE FOLLOWING DAY)에 관해서 결정했다. Canon 0 항, 1 장으로 구성함. 면벌부(DECREE CONCERNING INDULGENCES)의 사안에 대해서 결정을 보류한 것이며, 공의회를 폐회하지 않음으로, 1차 바티칸 회의, 2차 바티칸 회의로 연결된다.
트렌트 회의에서는 25회(session)으로 12 분야에서 법령(decree)을 규정했다. 개혁파를 향해서 110개의 Canon(규범, Anathema)를 선언했다. 그 중에서 칭의 부분(6 회기)에서 33회로 가장 많다. 트렌트 회의에 대해서 칼빈의 기독교강요 4권(1559년)에 교황주의를 비판과 비교할 수 있겠다. 그것은 트렌트 회의에서 개혁파의 주장을 전혀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1646년)에서는 혼인(24장)을 신앙고백서에 포함시킨 것은 트렌트 회의에 대한 작용으로 추측할 수 있겠다. 이신칭의 교리를 견고하게 지킨다는 것은 결국 트렌트 회의의 결정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자세이고, 이신칭의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포기하는 것은 트렌트 회의로 들어가려는 것이다. 윌리엄 커닝함의 <역사신학> 3권(서창원 번역) 21장의 “칭의” 부분을 읽어보라.
세르베투스주의(소시니안)
소시니안(Socinianism)은 삼위일체를 거부하는 사상(Nontrinitarian belief system)으로 개혁파 진영에서 절대적으로 거부한 신학사조이다.
이탈리아 출신 두 명의 평신도 신학자 소시니(Sozzini Lelio, 1525-1562, 조카 Sozzini Fausto, 1539-1604: Socinus, 소시누스)에서 시작된 단일신론 체계이다. 단일신론 체계는 이신론(理神論, Deism)이 구체화된 근대 시대의 사조이다. 자연 종교(自然宗敎, natural religion) 또는 자연신교(自然神敎)이다. 이신론의 배경에는 중세에 등장한 불가지론과 초기 기독교시대의 영지주의가 있다. 초기 이신론자인 17세기초 잉글랜드의 이신론자들은 매우 신중했는데, 미국혁명과 프랑스 혁명기의 토마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에 이르면 그리스도교를 거부하는 성향으로 나타났다. 이신론은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거부하고 파괴했다.
파우스투스 소시누스(Faustus Socinus, 1539-1504)는 이탈리아의 시에나 출신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물려받은 유산으로 그는 법률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폭넓게 접하고 추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신학에 관심을 돌리면서 그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은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삼촌 라일리우스 소시누스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았는데, 그는 당시 멜 랑톤, 칼빈, 불링거 등과 친분을 나누며 개혁신앙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철저하게 반 카톨릭주의자로서 로마 카톨릭교회가 유린한 신앙의 참된 유산들을 찾아내는데 목말라 했던 인물이었다.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류 종교개혁자들뿐 아니라 극단적 성향을 가진 다양한 계층의 진영과 교류했다. 이러한 삼촌의 영향을 받은 소시누스는 삼촌이 남긴 저술들의 영향 아래 그의 이성주의적 신학 체계를 확립해 가기 시작했다. 특히 삼위일체 교리를 부정하고 분리주의적 성향을 가진 폴란드 형제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소시누스는 믿음의 궁극적 권위에 대해서 인간의 이성이 계시보다 우위에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부류는 이신론 체계와 너무나 일치한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 인간의 상식과 이성에 수용되지 않는 전통적 견해들은 거부했다. 성경은 공교회의 공적 교리라는 울타리에 매이지 않으면서 독자 중심의 해석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사조는 중세 수도원 운동에서 수도사들의 성독(聖讀 ,Lectio divina, 렉티오 디바나) 수행과 공통된 요소이다. 수도사들의 신일합일적 사상과 이성과 직관이 같은 근거를 가질 수 있는 현상이다. 우리는 소시니안들도 오직성경과 전체성경을 견지했다는 것을 한 번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성경의 충족성(The sufficiency of Scripture)을 고수했다. 그것이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여지가 충분하다는 변증이었다.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 1511-1553)이다. 세르베투스가 “화형되었다”고만 인지하지만, 세르베투스주의가 현재까지 엄청난 위세를 발휘하고 있다. 세르베투스주의는 소시니안(혹은 소키누스주의, Socinianism)로 그리고 유니테리언(Unitarian Universalism)으로 변형되었다. 유니테리언 사상은 회중파가 세운 하바드 대학까지 확산되었다. 다수의 재세례파들이 견지한 신관이다. 유일신론은 이신론적 체계에서 구체화된 신관이다. 소시누스주의는 이신론과도 연관되어 있다. 개혁파 진영에서 소시누스주의에 대해서 수 많은 비판을 쏟았지만 그 영향력을 막지 못했다. 왜 정통파 교회는 이단적 위세를 막지 못할까?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성경적 위로는 우물을 파는 이삭을 본받는 것(창 26장)으로 말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