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사직에 대하여(2)
부천개혁교회 이천우 목사
에베소서 4장 7-12절 / 7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낮은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1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시작하는 말
칼빈은 성경 저자의 마음(mind)을 드러내면 성경의 마음(mind)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교회에서 목사는 설교를 통해서 그 마음(mind)을 회중에게 전하여 알게 해 주는 일을 한다. 이때 목사의 설교는 필연적으로 먼저 성경 해석의 과정을 거친다. 즉, 성경 해석을 통해서 설교로 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목사는 (1)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성경해석자라고 할 수 있으며 또한 (2)해석한 그 성경을 설교하는 일을 하는 설교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목사의 성경해석과 설교는 교회에서 행하여지는데, 교회를 이루고 있는 성도에게 이다. 본 강의 글에서는 앞서의 첫 번째 글에서 다룬‘목사직에 대하여(1)’에 이어서, 두 번째 글로 교회의 성도에게 행하여지는 목사의 성경해석과 설교와 관련하여서 다루려고 하는 것으로, (1) 먼저 목사는 교회에서 사역하는 자로 교회와 목사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에‘교회’에 대해 기술하고 나서 이어서‘목사직’을 설명하고자 한다. (2) 그리고 나서 다음으로 목사와 설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가져나갈 수 있도록‘목사와 설교’, 그리고‘목사의 설교가 갖는 성경해석학적 관점의 중요성’의 순으로 설명해 나가고자 한다.
1. 교회와 목사
1-1. 교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 교회를 목회에 뜻을 두어 목사가 된 사람이 개척하여 목회에 비젼을 가진‘자신의 교회’를 세우는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로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세우시는 것이다. 이 교회를‘그리스도의 교회’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주로서의 공생애 사역에서 말기 사역에 들어가시게 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이끌어 내실 때 자신의 교회를 세워나가실 것을 알리셨으며, 그와 함께 사도의 일을 맡길 자로 부르신 열 두 제자를 그 교회가 세워지는 시작이 되게 할 것에서 교회의 요인이 되는 그리스도께 가진 신앙고백을 이끌어 내셨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 16:13-19)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교회를 성령의 강림을 통해 사도들의 입에 맡긴 자신의 구속의 죽음과 생명의 부활을 증거함에 의해서 해 나가실 것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그에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세워지게 되었다. 이 교회는‘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리며, 그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르는 신자(신도)는‘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 전파에 나타내신 성령의 권능에 의해 각 처에 세워져 나갔으나, 박해 속에 있었다.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였다. 이 박해의 역사는 로마의 박해로 이어져 A.D. 64년에 네로(Nero) 황제에 의해 시작되어 디오클레티안 갈레리우스(DiocletianGalerius) 황제의 통치가 끝나던 A.D. 311년까지에 이르는 250년간의 기나긴 박해 시대로 계속되었으나,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의 공인과 국교가 되게 섭리하시며 기독교로 온 세상의 교회가 되게 확장해 나가셨다.
개혁교회의 등장 : 그리스도인들이 한데 모이면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의 교회인 것을 나타내는 생명의 활동을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그것이다. 물론 이와 관련하여 여러 다른 일들도 병행이 된다. 그러나 그 모든 일로 인해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의 모습을 갖는데 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중요하게 가르침을 받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전능하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데 그분이 그리스도로서 성육신 하시고 빌라도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신 후 죽으시고 장사 지내고 음부에 내려 가셨으나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일과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데, 거기로부터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사죄와 육의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하나의 몸을 이루고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지금 무엇을 믿는 사람들인지를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항상 인식하고 있게 했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도 시대를 거쳐 교부 시대에서도 여전히 설교의 핵심이었다. 그럴 뿐만 아니라 교회는 주후 200년경에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세례를 받고자 할 때 그들이 가진 신앙을 확인하고 검증하는 것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하였는데, "당신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까?",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까?" 이었다. 이러한 질문들은 점차 설명 형식으로 바뀌어서, 처음에는 그렇게 매번 모임을 갖고 하나님을 예배 할 때마다 고백했던 신앙은 훗날 신앙고백서(신조/신경)로 작성되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로마제국 서부에서 사용되었던 로마신경이다. 그리고 이 신경에 근거해서 주후 5세기경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도신경'(사도신조, Apostles' Creed)이 작성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도신경에서 보는 대로 이것은 성경으로부터 기독교의 신앙 내용을 간략히 간추린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에서 널리 고백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역사 속에서 좀 더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보강하게 된다. 그것은 이단의 출현으로 그들의 주장에 대응하는 형식을 띠기 때문이었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교리에서 정통 교회와는 다른 주장이 나왔다. 안디옥의 신학자인 루씨안(Lucianus)의 영향을 받은 아리우스(Arius)에 의하여 일어난 신학상의 주장이기 때문에 아리우스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의 이단성을 규정하면서 정통 교리를 재차 확인하는 신경이 작성되었다. A.D. 325년에 열린 니케아(Nicaea) 회의를 거쳐 381년에 열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회의에서 작성된 니케아 신조(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라고도 부름)에서는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심이 채택되었고, 451년 칼케돈(Chalcedon) 회의에서 작성된 칼케돈 신조에서는 예수는 참 하나님인 동시에 참 사람이심을 결정하였다. 또한 6세기 초에 작성되어서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A.D.293-373)의 이름을 따라 명명한 아타나시우스 신조가 있는데 이것에서도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싸우며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인 신인양성의 통일성을 다룬 교리를 진술하고 있다. 그리고 라이덴 대학의 교수였던 알미니우스(Arminius)가 예지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 무제한적 속죄,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 등을 주장함으로써 개혁교회의 신앙으로부터 이탈하고 그 추종자들인 알미니안주의가 생겨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르트레히트에서 개혁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하는 다섯 조항, 곧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을 개혁교리로서 확증한 1618년에 작성된 돌트 신조(Dort Creed)도 있다.
그 외에 종교개혁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개혁교회가 가진 신앙을 바탕으로 작성한 신앙고백서도 있는데 1559년에 작성된 프랑스 신앙고백서와 1560년에 작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561년에 작성된 벨직 신앙고백서, 1566년에 작성된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가 그것이다. 이와 더불어 교리문답서도 만들어졌는데 1542년에 작성된 제네바 교리문답과 1563년에 작성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있다. 그런가 하면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1648년에 작성된 대.소교리문답서도 빼 놓을 수 없다.
교회는 1517년을 기점으로 한 종교개혁으로 구교와 신교로 구분된다. 구교는 우리가 로마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Rome Catholic Church)라고 부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교는 개혁신교, 곧 개혁교회(Reformed Church)를 말하는 것인데, 종교개혁 이후 이 개혁교회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성례에 대한 교리와 예배의식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로마 교회의 것을 수용하는 루터의 교회를 따르는 교회이고, 다른 하나는 로마 교회와는 완전히 단절하고 오직 성경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일명 칼빈의 교리와 교회생활을 따르는 교회이다. 우리는 같은 개혁교회이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이 두 교회를 각기 루터교회(루터파 교회;Lutheran Church)와 개혁교회(개혁파 교회;Reformed Church)라고 불러 왔다.
이 중에서 개혁교회(개혁파 교회;Reformed Church)는 칼빈이 하나님의 도성을 건설하고자 하였던 스위스의 제네바 시를 중심으로 독일, 헝가리 등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중에서도 지역적으로 가장 확고히 자리를 잡은 곳은 화란(The Netherlands)이다. 그 후 17세기 초에 화란의 개혁교회 신자들이 신대륙 미주에 이주하여 개혁교회를 세움에 따라서 미국에도 개혁교회라는 이름을 지닌 몇몇 교파가 생겨났다.
개혁교회의 확장 : 개혁교회가 세워지는 종교개혁이 마틴 루터의 항거에 의해 독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개혁교회의 중심지가 되는 곳은 스위스의 제네바이며, 이곳을 중심으로 유럽 대륙으로 확장되어 갔다. 그리고 개혁교회가 스코틀랜드에도 큰 영향을 미쳐 그곳에도 개혁교회가 정착하였을 때는 교회정치 원리에서 성격을 달리하는 형태로 띤다. 필자는 이것 또한 개혁교회의 확장 된 모습으로 이해한다. 개혁교회가 지역에서의 확장으로도 있어갔지만, 또한 교회정치 원리에 의해서도 또 다른 형태로의 확장으로도 있어갔다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는 이미 있어 온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와는 다른 노선을 걸었다. 그것은 감독에 의한 교권정치를 반대하고 장로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장로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이 장로교회는 칼빈에 의해 영향을 받은 존 낙스(John Nox; 1514-1572)와 앤드류 멜빌러(Andrew Melville; 1545-1622)의 개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 스코트랜드의 장로교회는 영국교회의 개혁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 산물로 웨스트민스터 삼대 표준문서(신앙고백서, 대.소교리문답)가 작성되었다. 이렇게 영국교회의 개혁에 큰 영향을 끼친 장로교회는 아일랜드와 17세기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영국, 아일랜드 등으로부터 많은 장로교 신자들이 신대륙 미주로 이주함에 따라서 그곳에도 장로교회가 세워졌다.
이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루면서 함께 개혁교회의 등장과 그 개혁교회의 확장을 다루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아 사역을 하는 목사는 어떤 교회에서 세움을 받아 활동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인식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목사는 개혁교회에서 목사 임직을 받아 개혁교회에서 목사직을 수행하는 자이다. 그 개혁교회가 스코틀랜드처럼 개혁장로교회로서이든 또는 우리 한국처럼 장로교회로서이든 이곳에서 목사 임직을 받아 목사직을 수행하는 목사는 개혁교회의 신학을 배우고 개혁교회의 신앙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개혁교회와의 관련에서 목사직에 대하여 이해를 올바르게 가져야 할 것이다.
한국에 세워진 개혁파 교회의 장로교회의 특징 :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주에 정착한 장로교회의 선교사역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그에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는 교리적인 면과 교회 정치적인 면에서 미주 장로교회의 영향 속에 있다. 그러면서도 일면 간접적으로는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도 함께 받고 있다. 그것은 개혁교회의 영향 속에 있는 국가에서 신학을 공부한 분들이 귀국한 분들이나 또는 개혁주의 신앙의 서적을 통하여 개혁교회에 눈을 뜨고 의식을 가진 분들이 학교 강단에서, 또는 본인들이 섬기는 교회와 그와 함께 하는 다른 교회의 동역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친 데 따른 것이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대다수가 아닌 일부가 유럽 대륙의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한국 교회의 실정에서는 이나마도 얼마나 큰 다행인가!
한국 장로교회의 문제점 : 그러나 한국 교회는 개혁교회의 영향을 받은 장로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여러 교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개신교’임을 자부하고 있다. 그렇지만 개혁교회가 대항하여서 싸우며 확증한 신조들에서 가지고 있는 사상과는 전혀 맞지 않는 교파들이다. 곧 알미니우스의 영향 속에 있는 감리교회나 성결교회가 그것이다. 물론 침례교회나 다른 교파들도 그 나름대로 일치할 수 없는 차이점들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한국의 장로교회가 정통 개혁교회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교파를‘교회’로 다루고 있어서 노회가 개교회의 상급 기관으로 자리하고 있어서 계급주의의 정치 색채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장로교회에서 개교회는 하급 기관의 교회에 불과한 듯이 되어 있는 모습이다. 노회의 지교회라고 하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본래‘지교회’의 용어적 성격은 그런 의미에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을 뜻하는 지체의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세계 공교회의 하나이다. 그런 것을 노회 교회에 속해 있는 지역 교회의 개념을 갖고 있다. 그러기에 개혁교회의‘협의체’의 성격이 아닌 상급과 하급 간의 관계 형태의 성격을 띠고 있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한국의 장로교회는 신조와 교리문답에서 보는 성경적 신앙과 그 사상에서 심각하게 이탈되어 있다. 각기 자신들이 신앙의 표준문서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조와 교리문답이 어떤 것인지를 천명하고 있으면서도 그 신앙의 표준에서 벗어나 이교화 된 기독교란 사이비성을 띠고 있다. 우선 성경을 해명하여 하는 설교에서 그렇다. 또한 온갖 인위적인 신앙을 조장한다. 도무지 신본주의 신앙을 볼 수 없다. 인본주의 신앙이 마치 성경적이요 정통 신앙인 것처럼 되어 있다.
성경적 교회로의 회복 : 해서, 한국의 장로교회는 본래의 교회 모습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개혁교회로 서 온 실체의 교회를 대하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 존재하는 개혁교회의 하나로 있는 장로교회조차도 진정한 개혁 장로교회로 있어오지 않았다. 신학에서는 개혁주의 신학을 말하며 강조하지만, 교단과 목회에서는 개혁교회도, 개혁 장로교회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개혁교회와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에 의식을 가진 분들과 개교회에서 개혁교회로 서 나가고자 할 뿐이다. 거기에다가 그러한 분들과 교회는 교회정치 원리라든지의 색깔 있는 특성으로 연합이 쉽지 않다. 그에 따라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참된 교회요 바른 교회로의 회복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본이 되는 어느 한 교회를 모델로 삼아서가 아니라, 교회의 역사 속에서 개혁교회가 성경적 교회로의 모습으로 있고자 한 것에서 찾게 된다. 감독 정치 체제이니 장로 정치 체제이니 하는 것이 아닌, 또는 교회가 세상의 모범이 되는 이런 일 저런 일을 하는 것에서가 아닌,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있으면서 그분의 통치 속에서 참된 교회의 표식을 드러내는 그런 교회 이다. 이는 세 가지로 말해져 왔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파하는 교회. 둘째는, 성례전을 올바르게 시행하는 교회. 셋째는, 권징을 정당하게 행사하는 교회. 이 중에서 핵심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함으로 전파함에 있다. 주님의 참된 교회는 이것으로써 비로소 말해진다. 성례전의 올바른 시행과 권징의 정당한 시행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순전함으로 있어 가고 또한 있어 가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1-2. 목사
교회의 직분인 목사 : 목사는 교회의 직분에 속한다. 이는 목사직이 교회에 한정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사는 교회 외의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자가 아니다. 목사직은 (1)교회의 성도를 위하여 (2)그리스도에 의해서 교회에 주어지는 봉사직이다. 목사직은 목사 임직을 받는 그 사람의 개인을 위하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의해서 교회의 성도를 섬김에 있게 하기 위하여 주어는 것이다.
목사직의 성경적 근거 : 목사직은 성경에 근거하며, 또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실제 목사직이 임명되어 교회의 직분으로 세워진 것에 근거한다. 성경에서‘목사’란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본문 성경구절로 삼은 에베소서 4:11에서 보게 된다. 이곳에서“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다”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다. 여기서‘목사’에 사용된 원어‘포이메나스’(poimhvnaς)는 원형이‘포이멘’(poimhvn)으로‘보호하다’란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한 것으로‘양치는 목자’를 뜻한다. 이는 목사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맡아 돌보는 자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목사는‘목사와 교사’라고 말해 주시고 있다. 이는‘목사요 겸하여 교사’라고 하는 것으로‘목사는 곧 교사’를 의미하여 양 무리를 맡아 돌보는 목사는 곧 그들을 가르치는 자라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목사와 교사’를 한 사람이 각각의 다른 직분을 맡은 자로 보는 견해를 갖기도 한다. 그것은 목사를‘감독과 장로’로 나뉘어지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보고, 그 직분에서 교사를 성경을 해석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고 가르쳐 영적으로 인도하는 직분으로 보는 것에서이다. 대체적으로는 전자의 견해를 더 타당하다고 보고 지지하나, 어느 것으로의 견해를 갖든 교사는 목사의 가르치는 기능에 있으니, 목사는‘목자’의 개념과 함께‘가르치는 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칼빈의 교회관에서 보는 목사직 : 전통적인 개신교 역사에서 칼빈만큼 직분에 큰 의미를 부여한 사람은 없는데 칼빈의 교회관은‘직분을 중심한 교회’이다. 칼빈은“하나님께서는 교회에 주신 직분의 질서를 통하여 교회를 다스리시기 원하셨다”고 하였는데, 그 직분에서 목사는 용어에 의해서 설명하였듯이 (1) 목자와 (2) 교사의 두 가지 기능의 일을 설교를 통해서 한다. 양을 먹이는 목자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며 하나님의 법도 안에서 인도하고 가르치는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는 설교를 위하여 헌신되도록 부름을 입었다. 목사가 일반 종교계에서 말하는 성직자와 다른 점은 목사라는 직이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고서 자아 존재 의식에 의해 스스로 헌신하기로 결정함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입은 소명의식과 그에 따른 사명의식에 의해 헌신하여 나가는 것이다. 다음에서 그 실례를 본다.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1:1; 2:1; 6:8)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이에 그가 가서. (호 1:1-3)
목사의 소명과 사명 :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우리에게 알리기 위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심에 의하여 되어졌듯이, 목사 또한 철저하게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속에서 하나님의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된 가운데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는 자로 속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목사는 소명의식과 사명의식에 있어서 투철해야 한다.
목사직을 맡은 자가 힘쓸 것 : 목사는 두 가지의 기능 면에서 그 위치를 지켜야 한다. 목사는 목자로서 끝나지 않고 교사로서의 목사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맡은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옴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였다. 엘리야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
목사는 무엇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맡아 그들을 양육하는가? 무엇으로 맡은 백성을 먹이고 돌보는가? 그것은 가르치는 일로써 이다. 그러기에 목사의 목사 됨은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된다. 그러므로 목사가 가르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또한 가르치는 자로서의 일을 하기 위하여 배우며 연구하는 일에 게을러서도 안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였다. 이 말은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성경의 지식과 그 지혜에 있을 것을 당부하는 것이었다.
목사는 이처럼“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됨에 있는 교회를 그리스도로 충만함에 있게 한다. 목사가 되어서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것에 모든 것을 쏟는 분들을 본다. 그런데 그 부흥에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하나는, 믿는 자인 성도가 온전한 구원을 이루는 데 있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하여 그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물적, 인적, 재정적 증가로 하려고 하는 것이다.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신앙하는 자로서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어 있는 자이다. 따라서 이들이 성령님의 전파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을 성령님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써, 곧 서로 연합하여 다같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케 됨으로써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로 충만한 상태에 이르러 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부흥의 방법에 문제가 있다. 무엇으로 부흥시키려고 애쓰는가 할 때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하려고 하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신앙고백을 하는 자들로 믿음의 무리들에게 더해지는 것은‘주께서’하시는 일이다. 주님은 믿는 자들에게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된 십자가의 복음을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맡겨 자신을 증언케 하시며, 이에 따라서 믿는 자들은 그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항상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시는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시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멸시하고 무시하여 멸망에 이르게 하시는 심판의 능력도 나타내신다. 그럼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들도 있다. 이렇게 복음의 능력의 이중성이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심으로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 믿음의 무리(교회)의 수에 가입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구원의 복음이 지닌 능력을 나타내시는 것으로 주께서 그 은혜를 입게 하심으로써 되는 것이지, 교회가 이런 저런 전도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고 사용하여서 자신들의 생각에 따른 계획과 실천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더욱이 사람을 전도케 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을 고려하여서 각종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닌 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지닌 복음의 능력이 그러한 것에 의존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믿는 자들이 교회의 수에 가입하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아는 것에 의해서, 그 진리를 고백하고 신앙하는 것에 의해서 되는 것이며, 그러한 교회는 이처럼 진리를 아는 것에 의해서 모든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 그분의 몸으로 자라 가는 것에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믿는 자들 한 개인의 자라남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의 몸의 자라남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부흥을 말한다면, 그 개념은‘수적 증가’란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의 진리를 알고 믿는 자들이 서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으로서의 이해이어야 한다.
2. 목사의 설교
2-1. 설교자인 목사
아무리 반복하며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목사는 설교자라고 하는 것이다. 목사는 장로와 함께 하나의 기관(corpus)을 이루는데 그럼에도 장로에 앞서 목사의 직분이 먼저 언급되는 것은 우열의 관계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설교되는 말씀의 중요성 때문이다.
(1)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목사는 설교자여야 하는가? 사람의 영혼[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자라는 점에서 설교자이다. 설교하는 직분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특권으로서 그리스도의 생명의 도를 전하여 영원히 죽을 인생을 영생의 길로 구원하는 것이다. 목사가 강단에 서서 설교를 한다고 하면 이 분명한 목적의식에 의해서 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이 목적의식이 없이 설교를 한다고 하면 목사의 직분이 직업화되고 만다. 그러나 목사의 직은 호구지책으로 이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2)목사의 목사 됨은 설교를 바르게 하는 데 있으며, 이것이 아니면 결코 교회를 유익되게 하고 성도를 위하여 섬기는 자로 사는 것이 되지 못한다. 설교가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와 선지자들이 전한 그 복음을 있는 내용과 그 내용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드러내서 올바르게 해석하여 강론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복음이 아닌‘다른 복음’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저주를 받으며, 다른 복음을 듣는 자들도 저주를 받는다. 그런 까닭에 목사가 설교를 올바르게 함에 있기 위해서는 이 설교를 하게 되는 성경 해석을 올바르게 해서 성경이 지니고 있는 하나님의 본의를 올바르고도 제대로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3)설교자인 목사는‘복음이 부끄럽지 아니한 자’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복음이 자랑스러운 자’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설교자인 목사 그 자신이 복음에 빚진 자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주어지지 않았고, 또한 그 복음을 전할 자가 보내지지 않았다고 할 때에 바울이 아니라 천하에 그 어떤 사람도 구원을 얻을 근거가 없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다. 그런 자신을 복음을 듣게 하여서 구원하시고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은혜를 입히셨다. 그러므로 설교자인 목사는 일생에 있어서 복음의 사역자로 살게 된 만큼 은혜가 달리 또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설교자인 목사는 설교 그 자체가 자신에게 있어 일생이어야 하고, 하는 일이어야 한다. 설교를 위해서 목사는 있다. 설교자인 목사는 그 설교가 자기 생명이어야 한다. 그래서 자기 생명으로서 하는 일이어야 한다. 복음에 빚진 자이기에 더욱 설교에 자기 생명이 있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면 왜 있을까? 성도들이 있기 때문이다.
(4)목사가 설교자일 때 성경이 설교하여야 한다.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참조하는 식이어서는 안 된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드는 중요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정말 설교가 자기의 생명 문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설교를 어찌 설교를 작성하기 위하여서 성경을 보는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목사가 하는 설교는 성경에 대한 뚜렷한 관을 가지고서 성경에 기록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이해하여서 그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전달해 주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자라가서 믿는 일에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2-2. 목사의 설교에 있어서 성경해석학적 관점의 중요성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성경 말씀을 많이 알고 지식이 있다고 해서 목회를 잘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관하여서는 지식이 없어도 성령 충만한 목회자가 되어 있으면 목회를 잘 할 수 있다!”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말인가? 성경의 지식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행동을 하는 자들은 대개가 신비주의로 그릇되게 감을 본다. 목사는 성경 신앙을 가져야 한다. 이 말은 목사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 근거한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신학을 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알기 위한 신학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알고자 하는 공부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신학을 하여서 노회가 말씀의 섬김을 위하여 임직한 목사가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일을 제대로 하지 않거나 또한 모른다면 그 심각성은 대단히 큰 것이다. 그러기에 사전에 검증하여 이 사실을 인지하고 걸러내는 일이 필요하다. 이러한 일을 하지 않을 경우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고 설교해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설교는 성경 신앙으로 하지를 않으며 소위 이론과 실천을 다르다고 하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목회 기술을 습득하고 목회를 방법화 시켜 나가게 된다. 하지만, 목사는 성경 신앙에 의해 목회를 하여야 한다. 철저히 말씀에 근거한 목회여야 한다는 말이다. 종교개혁주의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라고 한 그 가치는 성경 신앙으로 목회하지를 않고 성경 신앙으로 생활하지를 않는 그 모든 것은 다 그릇된 목회요 비신앙이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목사의 성경해석학적 관점의 중심이 있다. 목사의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에 근거한 신앙에 둔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을 바른 해석에 두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성경해석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자칫하면 해석한다는 것이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오석(誤釋) 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경우가 일반화 현상처럼 되고 있다. 가령, 샤마니즘적 기복신앙이 성경 오석의 척추가 되어 있다. 특히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설교들이 어느 분의 표현대로‘복조리 신학’의 바탕 위에 성경오석을 하고 있다. 왜 이처럼 성경해석을 오석하는가? 그것은 성경이 갖고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시의 진전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계시의 진전이란 차원이 있기 때문에 단순한 해석이라기보다는 해석에 기초한 진전이 있다. 구약은 그 자체 내에서 이후 말씀이 이전 말씀의 해석 형태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 속에 구약의 인용이 있는데 그것은 단순한 인용만이 아니라 해석적 인용의 양상을 띠고 있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구약을 해석하면서 점진적 계시를 말씀한 것이다. 또한 신약 속에서도 바울 사도가 예수님 말씀을 해석한 것이나(반드시 명시적으로 인용하고 해석한 것은 아닐지라도) 복음서 이외의 부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해석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신약 속에 이후 말씀이 이전 말씀의 해석으로 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성경 자체 속에 성경해석이 나오는데 점진적 계시의 특성을 파악하여 그 이해에 의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해석하고 설명하여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본문의 원래 의미를 가장 개연성 있게 나타내고 있다면 그 설교는 옳다고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끝맺는 말
이제까지 교회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 교회 설교자의 직분으로 임직을 받는 목사에 대하여, 그리고 목사의 설교와 그 설교에 있어서의 성경해석학적 관점의 중요성을 다루었다. (1)목사직은 (2)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시는 교회의 직분이며, (3)교회를 맡아 봉사를 통해서 섬기는 목사의 직분이 설교에 있기 때문에 (4)그 설교가 갖는 성경해석학적 관점의 중요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목사의 설교는 바른 성경해석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의 관점에서 행해져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본의를 바르게 해석하고 설명해 주어서 교회의 성도가 참된 신앙으로 주님의 교회를 바르게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목자로서의 목사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 |
첫댓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에게 각각 다른 은총을 알맞게 나누어주셨습니다.
8.성서에도 "그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서 사로잡은 자들을 데리고 가셨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나누어주셨다."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9.그런데 올라가셨다는 말은 또한 땅 아래의 세계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말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10.그리로 내려가셨던 바로 그분이 모든 것을 완성하시려고 하늘 위로 올라가셨습니다.
11.바로 그분이 사람들에게 각각 다른 선물을 은총으로 주셔서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예언하는 사람으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12.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 활동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자라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공동번역본 : 목자와 교사
원어 잘 아시는 분들이 억지 쓰는 것중 대표적인것이 침례와 목자[세례와 목사로 오역~변역]
속한 교단교파와 권력지향적인 복음의 변개 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