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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부천개혁교회가 2011년 12월 25일에 겨울사경회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와 출생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사"란 주제로 강의한 것에서 마태복음의 관점에 집중하여 '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이름을 '예수'라 하라"에 함의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를 성경적설교아카데미(BPA)에서 발표하였던 것을 이번 2016년 겨울사경회로 가지며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자 강의한 것입니다. 겨울사경회에 참여했던 분은 본 글을 통해서 들음으로써 이해하였던 것에 도움이 되며, 또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으면 이 글을 통해서 다시 한번 확인하며 점검하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람과 아울러 본 개혁주의신앙공동체를 찾아주시는 회원들께도 복음의 진리를 인하여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은혜를 함께 공유함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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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장 21절에서
“이름을 ‘예수’라 하라”에 함의된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1. 서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이를 이해하는 것을 어떤 관점에서 가져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그 이해에 있는 것은 성경의 관점 외에는 있을 수 없는데다가, 성경의 관점은 다양하게 가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에 성경을 다양한 관점에서 보고 또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갖는다면, 이는 필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도에서 벗어나서 성경을 대하는 인간적인 사고(思考)에 따른 것이 될 것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이유는 성경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하여 알려주시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보고 알아가는 관점은 다양하게 여럿으로 가져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의도를 파악하여 보는 하나의 관점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구속사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이며 성경을 대하는 바른 자세이다. 하나님의 구속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에 의해서 전개되는 까닭이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성경별로 구분되어 있거나, 그래서 성경별로 분류하여서 보아야 할 것은 아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이 그 내용에서 통일되어 있는 것이며, 따라서 구약과 신약은 구속사에서 하나의 일치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 어느 곳의 하나를 택하여서 보게 되더라도 모든 성경에서는 동일하게 말씀해 주고 있는 구속사를 대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이다.
이때, 구속사를 해석하여서 그 내용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사를 이루어 가실 때 이에 대한 약속을 주셔서 해나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약속과 성취란 방식의 과정을 취하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속사는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구속사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두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른다.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는 복음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에서 보게 되는 구속 사역에 의해서 나타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은 각각의 저자에 의한 독립적인 독특한 특성 속에서 또한 공관(共觀),1) 즉 공통되는 관점의 특성도 함께 지니면서 예수 그리스의 구속사는 다섯 가지의 의미 있는 기독론적이고도 종말론적인 신학 구조를 띤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과 비하의 신분을 다루게 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계보로 오는 성육신이 갖는 의미 (2) 예수 그리스도의 성질을 다루게 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시작하게 되는 세례와 시험을 받으심이 갖는 의미 (3)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삼직론]이 잘 나타나는 구속 사역을 다루게 되는 것으로 주의 은혜의 해가 임함과 함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의 전파와 이적 행함, 그리고 속죄 사역, 그리고 또한 교회를 세우심과 통치가 갖는 의미 (4)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이것의 현재성이 동시에 잘 나타나는 인자의 오실 때를 다루게 되는 것으로 종말론 강론이 갖는 의미 (5) 예수 그리스도의 승귀의 신분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와의 관계에서 어떤 것인지를 다루게 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교회에 위임한 명령이 갖는 의미 이다.
마태복음 1장은 여기에 있어서 그 첫 번째인 예수 그리스도의 명칭과 비하의 신분을 다루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계보로 오는 성육신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 마태는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심을 증거하면서, 그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불릴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그 이름이 지닌 뜻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이시다’라고 설명해 주시면서 말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이 일을 이루실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또한 불리우게 된다. 그럼으로써 선지자 이사야에 의해서 약속해 주신 뜻을 이루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다루는 사복음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기독론적으로 그 이름이 갖는 명칭과 성육신이 갖는 비하의 신분을 다루게 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를 통해서 되어진다는 것과 또한 그로 말미암은 성육신이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지의 의미를 알게 해주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의 증거를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서 볼 것이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관련해서 이렇게 4복음서의 대조를 통해서 보게 되는 것은, (1) 마태복음 1장 1-17절, 누가복음 3장 23-38절에서 예수님의 계보[족보]를 다루고 있으며, (2) 마태복음 1장 18-25절, 누가복음 2장 1-7절에서 성육신을 통한 예수님의 탄생을 다루고 있다. (3)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선포로 시작되는 그리스도의 증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 무엇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언급하여 다룰 뿐 성육신 그 자체에 대하여 침묵하여 아무런 기록을 갖고 있지 않으며, 요한복음은 1장 1-1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다루는 성육신을 그 탄생의 직접적인 기록으로서가 아닌 이것이 갖는 신적 기원의 진리성과 그 은혜성을 다루는 것에서 하고 있다.
이에, 본 글에서는 (1)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기록하여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1장 1-17절과 누가복음 3장 23-38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룸으로써 여기에서 있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나타내시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자를 보게 될 것이다. (2) 그런 후에 마태복음 1장 18-25절과 누가복음 2장 1-7절을 통하여서는 성육신하심으로써 불리게 되는 이름이 갖는 명칭과 이 이름을 통해서 보게 되는 성육신의 신분인 비하의 의미를 살펴볼 것이다. (3) 그리고 요한복음 1장 1-17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갖는 신적 기원의 진리성과 그 은혜성을 살펴 볼 것이다.
2-1.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는 성육신의 사건을 다루는데, 그에 대하여 설명해 나가는 증거는 각각의 독특성을 띤다.
마태복음 1장 1-17절 / 1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2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3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4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5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8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9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10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11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12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13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14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15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17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
누가복음 3장 23-38절 / 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심 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25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26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27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28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29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30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31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32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33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34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위 두 곳의 기록을 보면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에서 다룬다. 그래서 마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라는 형태를 취하면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 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 네대요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 네 대러라”라고 기록함으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의 나심에까지 이른다.2) 그러나 누가는 예수께서 삼십때쯤에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으로 그리스도의 공생애를 시작하시게 되었는데, 그 그리스도의 오심은 어디서인가 하는 그리스도의 시작을 알려주는 하나님을 다룬다. 이러한 두 저자의 각각의 기록은 기록상의 차이점을 말해주고자 하는데 그 핵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각각의 기록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설명해주는데 있는 것이다.
(1) 마태복음의 증거
먼저 마태복음에 나타난 구속사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다. 마태복음은 모두 28장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출생과 사역 준비, 천국 복음 전파와 권능을 행하심, 죽음과 부활의 예고와 배척, 고난 주간의 사역과 부활 및 승천의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이 모두의 내용은 하나님이 부르셔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복음이다.
마태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가, 곧 자기 백성을 죄에서 용서하여 구원하시는 구속주가 어떻게 자기 백성들에게로 오셨는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다. 우리는 그 사실을 1장에서 대하게 된다.
마태복음 1장은 모두 25절로 되어 있으며, 이는 다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곧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1절에서 17절까지이다. 이 구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서 등장하게 되는 중요한 두 인물인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심을 다룬다. 그리고 후반부는 18절부터 25절까지이다. 이 구절에서는 마리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아이를 가진 잉태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는 소식을 알려주는 것과 드디어 마리아가 아기를 낳자 요셉이 주의 사자가 알려 준대로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은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기록자인 마태는 1-17절에서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시기 전까지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십니다만 이 혈통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집사 스데반이 “너희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선지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그 이름을 대어보라!.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의로우신 메시야가 오실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다!”(행 7:52)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은 언제나 메시야를 보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였다.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열거하면서 사실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언약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저 유대인들의 조상들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대단히 큰 충격적인 일이었다.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자신들의 불신앙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다루면서 아브라함과 예수 그리스도까지의 역사를 삼등분하고 있다. 각 시대를 14명의 인물로 열거하고 있다. 이러한 배열은 저자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별히 성경에 등장하는 족보의 특징이 그러하다. 단순히 인간의 역사를 나열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족보를 나열하면서 저자는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자 한 것이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약 1,000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리고 다윗 때부터 바벨론 포로까지는 약 600년의 역사를, 그리고 또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는 약 450년의 역사를 가진다. 그런데 동일하게 14대의 인물로 채우고 있다. 그러니까 인물이 몇 명인가를 말하는데 족보의 나열이 있지 않았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메시야이시며 그 언약을 하나님이 신실히 지켜 오셨다는 것을 각 인물들을 열거하여 주시는 것을 통하여 보여주어 알게 해 주시는 것이다. 역사의 징검다리로, 언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이정표로 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설명되어지고 있는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신 역사에 관한 이해는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의 책이라”고 직역할 수 있는 것에서 집약하여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실 것으로 언약되어 왔다. 창세기 12장 1-3절에서는 창세기 17장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실 언약에 앞서 언약의 내용이 될 약속이 주어져 있다. 첫째, 아브라함이 들어갈 땅을 약속하셨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둘째, 그 땅에서 있게 될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셋째, 아브람에게 복을 주어 그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전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것을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그 구체적인 실행의 계획을 알려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주가 되어 그와 함께 하시며 그를 보호하여 가심으로써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하여 천하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좇아 그가 받은 복을 통해 복 받게 하시는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리고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은 약속으로 주신 땅에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육의 혈통을 닫고 대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한 아들을 주실 것을 언약하시며 그 의식을 치르셨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시는 분이심을 말씀한 것은 갈라디아서 3장 16절에서 가리키고 있는 대로 아브라함에게 주시겠다고 언약한 그 아들로 오셨다는 것을 이르는 말인 것이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출생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약속의 성취의 결과인 것이다.
디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자손과 함께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것으로도 언약되어졌다. 마태는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사실을 말씀하면서 2절에서 6절 상반절은 아브라함부터 다윗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마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다루는 1-17절에서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 이어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 이르는 모두 다섯 명의 여인을 등장시키는 것을 통해서 다윗왕의 계보와 그의 왕국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까지 이르는 경로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선택적인 은혜가 ‘여자의 후손에 의한 메시야 약속’(창 3:15)에 의해 작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다윗이 등장하는 시점에까지에는 다말, 라합, 룻, 세 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다. 이렇게 여인들의 이름이 계보에 등장하는 것은 유대인 관점에서의 통상적인 법칙에는 위배되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족보에는 여인들의 이름이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세 명의 여인을 비롯하여서 모두 다섯 명의 여인들이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교훈적인 견지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루어지는 유대 나라의 근간이 되는 다윗 왕과 맺으시는 언약의 씨로 오시는 것이라는 사실(롬 1:3; 딤후 2:8; 계 22:16)과 이것이 하나님의 선택적인 은혜의 주권에 의해서라고 하는 것이다. 유다는 이방인 며느리 다말에게서 계대적 수혼법이 실행되는 것에 의해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 것을 통해서 언약의 씨가 다윗 왕에 이르는 경로에 있게 되는 것을 통해서 그의 형제들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더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선택적인 은혜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라합과 룻에 대한 언급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라합은 여리고의 기생인 이방여인이었다. 그리고 룻도 모압 사람으로서 역시 이방여인이다. 그러나 이방인인 이 두 여인은 다윗 왕의 할머니들이 된다. 라합은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서 오벳을 낳는데 오벳은 다윗을 낳은 이새를 낳는다. 라합과 룻은 다같이 이방여인으로서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나 다윗을 낳는데 하나님의 선택을 입는다. 이들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의 치욕스러운 교만과 독신(瀆神), 그리고 죄악상이 여실이 들어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유대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게 하신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과 함께 다윗과도 맺게 되는 언약을 신실히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서이다.
6절 하반절에서 11절은 다윗 왕 때부터 바벨론 포로까지의 역사이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윗에게서 한 여인이 언급이 된다. 그 여인은 솔로몬을 낳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이다. 이 여인은 본래 우리야 장군의 아내였으나 다윗이 통간하였고, 다윗은 그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차지하기 위하여서 충신인 우리야 장군을 의도적으로 전쟁터에 보내 전사하게 하고서 빼앗았다. 이렇게 다윗 왕은 악한 죄의 충동으로 우리야에게서 빼앗아 아내를 삼았다. 그런데 다윗이 그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하면, 다윗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11-19)을 파기하지 않고 신실하게 이행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왕국을 반드시 이루어 가시는 것으로서 이다. 인간 편에서 끊임없이 배반하고 불순종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에 있는 택하신 자기 백성을 향한 꺾이지 않는 언약적 사랑은 식을 줄 몰라 마침내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시게 되었다는 사실을 계시해 주고 있다. 그 사실은 다윗 왕국에서 확증되고 있다. 다윗의 손자인 르호보암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은 남유다 왕국, 북이스라엘 왕국으로 분단된다. 분단된 왕국은 바벨론 포로 때까지 계속 된다. 그러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하나님은 다윗의 집, 그의 왕국을 견고히 지켜나가신다. 그러다가 북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게 멸망한다. 그리고 남유다는 B.C.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한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은 완전히 없어지는 듯 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도 다윗에게 주신 언약을 통해서 그의 집과 왕국을 견고히 해 나가신다. 이스라엘은 70년 만에 바벨론에 포로되어 있는 것에서 해방되어 귀환하는 기쁨을 갖게 되는데, 그들의 땅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와 파괴된 성과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다.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은 당시의 사람에게는 절망이었다. 유대인들은 과거 그들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70년의 포로기간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때는 암흑기였으며 하나님의 손길이 끊어졌다고 할 정도로 많은 이들은 절망하고 있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제 다윗의 왕국은 망하였다. 왕족과 귀족을 비롯하여서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과 다윗왕국을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는 취소되거나 멈추어지지 않고 계속 진행되어진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자손이요 또한 다윗과 맺은 언약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집과 왕국이 영속되게 하신다. 그에 따라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또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것에서 있는 언약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고 영원히 그들의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는 것이다.
12절에서 17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까지의 역사가 그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 받아 포로로 잡혀감으로써 이스라엘은 완전히 망했는데,3) 70년 만에 세 차례에 걸쳐서 있게 되는 스룹바벨(B.C. 537), 에스라(B.C. 458), 느헤미야(B.C. 444)의 인도 하에 귀환한다. 그러나 이러한 귀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국을 잇는 왕조는 시드기야(요시야 왕의 네 아들 요하난, 여호야김 또는 엘리아김, 마타냐후, 살룸[여호아하스] 중 마타냐후가 본명으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시드기야로 개명하여 왕으로 앉혔었다) 왕이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가 그곳에서 비참하게 있다가 죽어간 이후 페르시아, 헬라, 로마 시대에 이르면서도 왕조가 계속해서 이어지지를 못하여 회복되지를 못한다. 그래서 다윗 왕조는 망하여 없어진 듯이 보인다. 이것이 이후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 간다. 그러나 마태는 그리스도까지의 역사를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과 언약하신 그리스도를 보내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주[왕]가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다윗 왕조는 결코 없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어져 오고 있었다.
마태는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역사를 삼등분하고 14명씩의 인물을 열거하고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그리고 다시 다윗에게서 바벨론 포로까지, 그리고 또한 바벨론 포로에서 그리스도에게 까지를 각각 언급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그 언약을 어떻게 보존하시고 진행해 가셨는지를 보여주시고 있다. 그리고서 18절에서 25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 잉태와 출생을 ‘여자의 후손에 의한 메시야 약속’의 관련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을 다루는 계보에 등장하는 다섯 번째 여인인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서 행하시는 것을 다룬다.
(2) 누가복음의 증거
누가복음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 의한 구속사를 다루는데,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하여 기록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삼십 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으로 가르침을 베푸시는 것과 관련하여서 다루고 있다. 누가복음이 기록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마태복음의 기록과는 다른 양상의 구조를 띠고 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알게 해주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이 계보의 중심에 있으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에서 보는 대로 누가 누구를 ‘낳고’하는 양상의 구조를 띠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아브라함과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따른 것임을 말해 주시고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은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하나님에게서 출발되고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해주시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의 시작을 인류의 첫사람인 아담에게서 끝내지 않고 아담 위에 계신 분을 말하여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누가복음에서는 이러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적 배경에 의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설명하는 것에서 다룬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에 의해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다윗왕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누가는 알려주고 있음으로써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이 다윗 왕조와의 관련에 있는 분이신 것을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마태는 마태복음 1장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1절) 라고 하였고,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16-17절) 라고 기록하여 예수님이 다윗의 왕조를 통한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신 다윗 왕의 계보에 있는 그리스도이심을 알려주고 있다. 이에 대하여 누가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계보를 요셉으로부터 시작하여서 그를 낳은 위로 추적하여 올라가 “그 위는 다윗이요”(눅 3:31)에 이름으로써 다윗 왕의 계보에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위는 아브라함이요”(눅 3:34) 라고 말하여 줌으로써 마태가 말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의 계보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이처럼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 계보에 있는 것은 예수님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에 있지 않다. 아브라함의 자손, 그리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계보는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이요”(눅 3:38)에 이르며, 아담의 위는 “하나님이시다.”(눅 3:38)를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심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심에 의해서 되어졌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예수께서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 왕의 계보에 있는 것은 이 계보를 통해서 오셨다는 것에 있는데 이 계보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혈통의 방법을 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아들은 육의 혈통을 취하지 않으시고 약속의 씨<후사>를 주시는 것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을 잇는 자를 주시는 것이었다. 그 아들이 이삭이며, 이삭에게서 야곱을, 야곱에게서 유다를, 유다에게서 다윗이 오게 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약속의 씨의 흐름이 있었다. 이는 다윗에 이르러서도 그렇다. 다윗에게서 그의 왕조를 잇는 솔로몬은 다윗이 단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서 낳았다는데 있지 않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에 의한 왕조를 닫으시고 -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 아비나답과 말기수아은 전투에서 전사하였으며, 남은 아들인 이스보셋은 사울에 이어 왕에 올랐으나 얼마 후 암살을 당하였고,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에게 남은 아들 므비보셋이 있으나 그는 절뚝발이의 장애를 가지고 있어서 왕 위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울 왕에게는 두 딸이 있었으며 그 중에 둘째인 미갈이 다윗의 아내가 되지만 그녀는 죽는 날까지 자식을 갖지 못하였다. 이로써 사울 왕가에는 왕 위를 이을 대가 끊기고 왕조는 멸문하였다. -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에게서 낳은 아들인 솔로몬이 다윗의 왕 위를 잇게 하시는 섭리를 하심으로써 다윗 왕조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출생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다윗에게 있었던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어진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자손(씨)이요 다윗과 맺은 언약의 자손(씨)으로 오신 분이시다. 이렇게 언약의 자손(씨)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탄생하시는 것이다. 특히 다윗의 계보에 의해서 오시는 그리스도이심이 아기 예수님의 탄생에서 이야기 되고 있는 것에서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주가 되심으로 있는 ‘임마누엘’, 곧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다.”는 것에서 예수께서 행하시는 자기 백성의 구원이 다윗 왕과 함께 하시며 통치력을 행사하셨던 그 왕권에서 되어질 것이란 사실을 구속론적으로 알게 해주시고 있다.
2-2.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마태복음은 1-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오시는 분이심을 증거한 후 이제 18-25절에 이르러서는 예수로 불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는 성육신을 증거하신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1장에서 예수님의 성육신에 앞서 있게 되는 세례 요한의 출생을 함께 다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하나님의 정하심과 그 준비에 의해서 되어진 일임을 나타내시면서 2장에서 예수님의 베들레헴에서의 탄생이 갖는 구약적 배경을 말해주어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가 갖는 의미를 입증한다.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에 의해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다윗왕의 고향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누가는 알려주고 있음으로써 이곳에서 탄생하시는 아기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마태복음 1장 18-25절 / 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함이라 24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 왔으나 25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누가복음 2장 1-7절 / 1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1) 마태복음의 증거
그리스도이신 예수는‘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저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 이분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하여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한 것이다.4)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사건인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로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 되심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권능을 행하심으로써 드러내시며, 이를 유대인의 배척을 통하여 훼방하여 막으려는 사단의 적대로 십자가에 달리시는 일을 당하지만 오히려 이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음을 당하시는 것에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자신의 몸으로 드려 희생하시는 헌제제물이 되심으로써 구속 사역을 이루시는 일을 하셨으며,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생명의 주가 되셨다. 그래서 이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주가 되셨다.
마태복음에 나타난 이러한 구속사의 설명은 마태복음에 한 한 구속사가 아니라 사실은 성경 전체의 구속사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아브라함의 언약과 다윗의 언약에서만이 아니라 언약사의 총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보다 자세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것으로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믿음의 주가 되시는지를 아는 것에는 부족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온 땅에 있는 자기 백성들의 주님이시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 가운데 오셔서 그들의 주님이 되신다. 그들이 자신들의 주님이심을 알아보고 섬김에 있어 그 주님을 바라보며 따름에 있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는 ‘예수’라고 불리게 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있은 잉태는 성령으로 되어진 것임을 알린 주의 사자는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그 뜻을 알려주셨다. 우리말 ‘예수’란 이름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보게 되는“여호와이신 하나님은 구원이시다”가 말씀되어 온 하나님의 구속사가 예수님이 속죄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사자는“예수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라고 일러주었다. 예수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심이 무엇으로 있게 된 일인지를 알게 해주시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들 가운데 오시는 일을 하신 것이다. 성육신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갖는 의미기 여기에 있다.
성육신은 영어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이라고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 8:3).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사람의 몸으로 보내 자기 백성들을 지배하는 죄를 멸하시려고 그의 몸을 속죄하는 희생제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예수님을, 곧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으신 성육신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호하여 그 몸을 지켜 보전해 가셨는지를 설명해 준다.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신 분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고 행하신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한 우리로 창세 전에 가지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을 마침내 이루신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한 거룩한 자들을 하늘에 있는 자이든 땅에 있는 자이든 하나님의 아들들로 하나 됨에 있는 통일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죄에서 구원한 모든 자들의 주님이 되셔서 그들 모두를 자신과 연합하여 하나 된 몸이 되게 하신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에서 이렇게 만물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고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심에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 관계에 있는 것을 ‘교회’로 정의한다. 이 교회가 세워짐으로써 그리스도는 ‘예수’로 불릴 것인데 또한 ‘임마누엘’로 불릴 것이 마침내 성취됨에 있다.
(2) 누가복음의 증거
누가복음에서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해 주고 있는데 세례 요한의 출생과 함께 다루고 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출생이 그가 증거 할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 이다.
누가는 그렇게 세례 요한의 증거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전하는데,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하면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의 역사적 배경이 갖는 구약 예언의 성취로 있는 것임을 알게 해 주신다.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고한 예수님의 탄생은(눅 1:26-37) 아구스도가 가이사 - 로마의 황제 - 로 있은 때에 있게 된다. 아구스도의 원래 이름은 옥타비안<옥타비아누스>이었으나 후에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로 호칭했다. 아구스도는 B.C. 27년 1월 6일에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정기적으로 호적령을 내려 로마 제국 통치하에 있는 모든 땅의 인구 조사를 하였다. 로마 제국에서 행하는 정기 인구 조사는 세금 부과와 강제 병역에 동원한 자들을 파악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는데, 유대인들은 병역이 면제되어 있어 군대에 동원되지 않았으므로 팔레스틴에서의 인구 조사는 주로 과세가 목적이었다. 유대는 수리아의 한 지방으로서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다. 그는 B.C. 12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그 후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다. 그는 총독의 자리에 오르자 아구스도의 호적령에 따라 온 유대에도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첫 번 한 것이다. 이 호적령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고향, 곧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서 제각기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 - 다윗의 후손 - 이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거리가 대략 120-150km 된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해 주신 예언의 성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서 한 예언을 해 주셨다. 그것은 장차 베들레헴 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유대 땅으로 나아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 그 예언이 성취되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께서 출생하실 때가 가까울 즈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가이사 아구스도로 하여금 호적령을 내리도록 하는 섭리를 베푸셨다. 이 호적령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자신의 고향이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구약 예언을 성취하게 되어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출산하게 되는 것이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내린 호적령에 의해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데 그때는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그것은 사관5)<동네 여관>이 다 차서 그들이 들어가 있을 수 있는 방이 없었기 때문에 가축들이 있는 곳에라도 들어가 아기 예수를 출산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도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의한 섭리의 손길이 기독론적 관점에서 있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마 3:17)로서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시다. 그 예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런데 세상에 임하신 모습을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 하면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고 있으며(빌 2:6-7), 베들레헴 마굿간<또는 외양간>이요 구유 안에 뉘었다고 하고 있다. 이러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신 모습이 너무나도 비천하게 나타나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비천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강보에 싸여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 있을 수 있느냐에 있지 않다.
예수께서 아기가 탄생할 요건이 갖추어진 따뜻한 방에서 탄생하지 않고 마굿간에 놓여 있는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은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계시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예수님의 출생에서 보는 비천함은 그가 장차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 제물이 되실 자신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구유에서 출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원하심에 의해서였다. 예수님의 출생이 베들레헴에 있는 한 마굿간의 구유에서 있은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상태에서 우연히,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있어져 나간 것에서가 아니라 이 일도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있는 일인 것에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는 비천함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에서 보는 비하의 성격 그대로 이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여기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의 출생은 본래 하나님이시나, 가장 고귀하신 신분으로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음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곧, 예수님의 비하의 신분과 상태에 처하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출생에서 보는 이 비하의 성격은 예수님의 구속사의 절정을 이루는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인데 그들을 위하여 대신 희생되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의해서이다.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스스로 증거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하였다.
이러한 예수님을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았으며 싫어버림을 당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이렇게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셨다. 이 죽음의 고난은 죄인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른 형벌을 다 받으시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그렇게 비하되신 것은 율법의 정죄 아래 놓여 있는 사람 그들 안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받을 율법의 요구 - 하나님의 진노 - 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여 다 받으시는 자격으로서 이다. 이에 대해 루이스 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기독론 제2편 그리스도의 신분에서‘비하의 신분’을 다루면서 다음과 말하였다.
“빌립보서에 있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비하의 신분에서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는 모든 지상의 주님, 즉 최고의 율법 수여자이셨던 분이 그의 백성을 위해 그 언약적이고 형벌적인 의무들을 면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율법 아래에 두셨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우리의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이 주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다. 누가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와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려준다. 2장 1절에서 ‘그 때에’는 앞서에서의 사가랴의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이 성취한 때의 시점을 알려준다. 즉, 사가랴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마침내 임하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통치가 미치는 영역>에 있는 사람은 모두다 호적 등록을 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구레뇨가 수리아<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다. 이 영에 따라 모든 사람은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각각 자기 고향으로 갔다. 그리고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마을을 떠나 다윗의 마을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갔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그곳에 갔는데, 이 때 마리아의 복중에는 아이가 잉태된 중이었고,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해산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다. 마리아는 낳은 아기를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마리아가 이처럼 아기를 구유에 뉘인 것은 온 천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로 베들레헴에는 여행객으로 만원을 이뤄 이미 여관마다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서 들어갈 빈 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요셉은 임시방편으로 짐승들이 묶는 처소인 마굿간을 사용하였다. 여기서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으며, 짐승들의 먹이통으로 사용하는 구유를 이용하여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뉘여 놓았다.
상식적인 이해에서는 마리아가 아기를 낳는 장소는 산모와 아기를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방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기를 낳는 장소가 사람이 들어갈 방이 아닌 짐승이 머무르는 마굿간이며, 강보에 싸인 아기가 뉘일 곳으로서의 방이 아닌 짐승들이 먹이통으로 사용하는 구유이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린 호적 등록 시기에 예수님의 나심이 있게 하시는데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을 얻지 못하여 짐승의 마굿간에서 예수님의 나심이 있게 하고 구유에 뉘여 있게 한 것은,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0-12절)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하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표적’을 행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고, 그 낳은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은 이 아기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시고 계신 것이며, 그래서 이를 통하여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당시에 근방에 있던 목자들은 이 표적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 할 수가 있었다(눅 2:15-20). 그런가 하면, 별을 연구하는 동방으로부터 올라온 박사들에게는 그들이 연구하는 별을 표적으로 주셔서 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별이 안내해 준 아기 예수님이 뉘인 곳에 찾아 들어가 아기에게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 2:2, 9-11).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낳은 곳을 한 지붕 밑에 방 한 칸짜리 본체와 마굿간이 함께 있는 가정인 팔레스타인의 한 농부의 가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맞지 않다. 방 한 칸짜리의 집이라고 할지라도, 그것도 작고 좁은 방이라고 할지라도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방이 있으며 낳은 아기를 뉠 공간이 있는데 굳이 낳은 아기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였다고 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여 놓기 위하여 마굿간의 구유 - 구유가 마굿간에 자유롭게 놓여 있든지 또는 마굿간의 벽에 부착되어 있든지 또는 마굿간에 인접한 본채 마루 위에 놓여져 있든지 간에 - 를 굳이 방 안으로까지 갖고 들어와서 그곳에 뉘여 놓음으로써 이것이 표적이 되게 하기 위하여 연출하듯이 표적이 되게 할 이유가 때문이다. 더욱이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6-7절)는 요셉이 해산할 때가 이른 마리아를 들일 방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며, 그것은 여관의 방이 없었던 것이며, 여관이 아닌 팔레스타인의 한 농부의 가정의 방, 그러니까 민박할 집의 방을, 그것도 마굿간이 딸린 방 하나를 겨우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곳에서 낳은 아기 예수님을 굳이 구유에 뉠 까닭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누가가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뉜 사실을 기록하면서, 이것을 “이것이 너희(목자들)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절)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은 여관이든, 민박이든 요셉과 마리아가 그 집에 들어가서 방을 얻지 못하므로 구유가 있는 마굿간을 이용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상황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이곳에서 낳은 아기 예수님을 구유에 뉜 것을 하나님께서는 목자들이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나신 분이심을 알아보는 표적으로 주시는 일을 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뉜 것은 이 아기가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목자들이 이제 곧 찾아와 그 표적을 보고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마굿간의 구유에 뉘이는 방식을 통해서 그분을 알아 볼 수 있게 하셨다. 그래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경배에 있게 하셨다.
이는 오늘날의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아기 예수께 목자들이 한 경배에 우리들이 있게 하는 것이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이신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에 있은 목자들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세상 끝날이 이를 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에 있는 믿음에 있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 우리는 그 믿음에 있는 복 있는 자이다.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이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경배에 있었던 자들은 그를 낳은 요셉과 마리아, 이들의 친족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표적을 받은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 등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그늘에 있는 자들이 세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며 배척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다. 이는 요한에 의해서 증거되고 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5-11)
라고 말한다.
그러한 세상에서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 준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서는 참으로 당연한 일이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시라는 소식을 들어도 그러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표적을 받아도 그렇다.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에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다. 그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으므로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우리에게서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큰 자비를 입음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는가. 우리가 무엇을 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믿음을 우리에게 주셨겠는가. 우리는 이러한 오해에 있는 듯 하다.“내가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예쁜 짓을 많이 해야지.” 라고 하는 생각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쁜 짓을 많이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기쁘게 되면 우리를 사랑하실 뜻을 가지신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생각을 갖기 때문에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방법을 모색한다. 그래서 이것저것 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는 말한다. 어린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고서는“할머니, 할아버지, 나 잘했지, 나 이뻐!” 하는 것처럼 말이죠“하나님, 아시죠? 내가 하나님께 사랑 받을 수 있는 일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그러니 말이죠. 하나님 저를 이뻐해 주실 거죠?”라고 말이다. 그래서“복 많이 주실 거죠?”,“이것도 주시고 저것도 주실 거죠?”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이쁜 짓을 하기도 전에, 그러한 행동을 하건 하지 않건 간에 하나님은“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라고 하시면서,“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것을 말씀한다. 하나님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신다.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게 하신 것을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게 하신다. 그래서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께 경배에 있게 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믿음에 있는 것은 다른 어떤 행동을 해 보이며 온갖 사랑 받고자 하는 예쁜 짓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결코 얻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힘으로서는 결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서는 결코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있다. 사람이 저들 힘으로서는 결코 하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들여 그분을 경배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믿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 이 믿음에 날마다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믿음에 말이다. 이 믿음이 지닌 하나님의 능력,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해주시는 것이 믿음이다.
2-3.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갖는 신적 기원과 그 은혜성
요한복음 1장 1-18절 /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반면에 마가복음에서는 이 부분이 다루어지지 않고서 세례 요한의 선포에 의해 바로 그리스도의 증거로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요한복음은 본문에서 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이야기 해 주는 것과는 또 다른 이해의 관점에서 증거해 주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갖는 신적 기원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여 우리와 함께 사심으로써 우리가 입고 있는 은혜가 어떤 것인지를 전해 주시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내용의 구조상 다음과 같이 구분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1) 1-9절 :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①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 (2) 10-14절 :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②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3)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③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은혜성
(1) 1-9절 :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① ‘그리스도의 신적 기원’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다음의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 1:18, 25)
누가복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눅 1:30, 31; 2:5-7.)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련하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증거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있은 예수로 불리는 아들을 잉태한 것이 하나님께서 언약적 구속사에 의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하고자 하실 일을 행하시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은 성령으로 되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있다.
반면에 요한복음의 증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요 1:14)
는 것으로 전해 주면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요 1:1-4, 9)
라고 증거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설명해 주고 있다. 여기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직접적인 표현으로 말하지 않고 달리 표현하여 말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14절)에서‘말씀’은 헬라어‘로고스’의 우리말 번역이다. 요한이“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에 의해 언약의 자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셨으니 곧 그분은 예수이시다.“ 라고 말하면 될 것인데, 왜 의도적으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그리스도’를 ‘말씀’이라는 ‘로고스’로 대체하여서 말하는 것인가? 이것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오해하여 잘못 인식하고 있는데 따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는데 따른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인 예수님이 사람의 몸(육신)이신 것에서 사람들의 한 사람으로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베드로가 고백한 바인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마 16:16)라고 하는 증거에 요한은 있고자 한다. 즉, 주는 그리스도이신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인데, 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오 또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냐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고자 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주님이신데, 그분은 그리스도이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믿음을 통해서 사람들이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그 설명을 당시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는 헬라 사상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는 용어인‘로고스’를 가지고 설명해 나간 것이다.
헬라인들은 이데아 사상6)에 의해서 인간을 영혼과 육신으로 구성된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그에 따라서 영혼은 순결하여 깨끗하나 육신은 악하여 더럽다고 보았다. 헬라인들은 악하여 더러운 육신에 순결하여 깨끗한 영혼이 가둬 있다고 보았으며,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에 있는 것을 영혼의 구원 개념으로 가져나갔다. 그러면서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을 ‘로고스’라는 개념으로 가져나갔다. 로고스는 이데아와 현상을 총망라하여 우주의 질서를 만들고 운영하는 절대적 힘이다. 인간이 영혼의 구원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이 ‘로고스’의 씨가 인간의 영혼 안에 있어 우주를 다스리는 로고스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치를 터득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헬라인들은‘로고스’를 구원 얻는‘계시의 수단’으로 보았으며, 그‘로고스’가 계시한 것으로‘지식’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그런 까닭에‘로고스’에 의해서‘지식’을 가진 자는 구원의 수단인 이 지식에 의해서 악하여 더러운 육신에서 영혼이 벗어나 자유 할 수 있다고 여겼으므로,‘지식’, 또는‘지혜’를 최고로 생각하고 지혜 있는 자가 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로고스’는 헬라인에게만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도 그리스도를 이해시키는데 적절한 용어였다.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음으로 세상에 오신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와 그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계시해 주는 수단인 지혜요 이 지혜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해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리스도를‘말씀’인‘로고스’를 가지고 설명하는 것은“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벧후 3:5)이니,“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시 33:5)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설명하는데 가장 적절한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그리스도’라는 말 대신에‘로고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요한은 그가 쓴 다른 서신인 요한일서 1장 1-2절에서는‘그 말씀’인‘로고스’를“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소개하면서, 이 생명이 나타나신 바 되었다며, 이 생명을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이 함께 보았고 또한 자신들이 본 것을 증거하여 전하는데, 이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바 된 분이시라고 하였다. 따라서‘말씀’인‘로고스’는 헬라인에게만 아니라 또한 유대인에게도 익숙해 있는 용어이다.
요한은 이러한‘말씀’, 곧‘로고스’를 사용하여서 다음의 논증으로 신적 기원을 설명해 나간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천지가 창조되기 전부터 계신 분이셨으며, 그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런 분이신 까닭에 그리스도는 천지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으니, 이 생명은 온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에게 생명으로 나아오게 하는 빛을 주신다. 요한 자신은 이 생명을 주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을 따름이다.
(2) 10-14절 :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②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부터 계시되어 온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하여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은 혈통이나 육체의 욕망이나 인간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말씀’이신‘로고스’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은‘임마누엘’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서 인데, 그분에게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여 이것의 빛을 받은 사람들은 그분의 영광을, 곧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은 이러한 논증을 하는 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육을 따라서 온 것이 아닌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로 직접 오신 것임을 증거하면서 또한 그리스도를 영접함에 있는 자의 믿음도 말씀<로고스>으로 되어진 것임을 말하였다. 따라서 말씀<그리스도>이 없이는 계시의 정신<지혜>도, 구원의 능력도 없다. 우리에게서 계시의 정신<지혜>도, 구원의 능력도 있는 것은 말씀<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다.
(3) 15-18절 :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한 논증③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은혜성!’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인 말씀이 육신이 되심으로 해서 자신이 증거하는 것임을 말한다. 요한은 전에 자신 뒤에 오시는 분을 증거하였는데, 그분은 자신보다 앞선 분으로서 자신이 있기 전부터 계신 분이라고 말하였다. 그러기에 자신이 그분을 증거하는 일을 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사람들은 그분에게 있는 은혜와 진리의 충만함으로부터 오는 넘치는 은혜를 받음으로써 지금까지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던 하나님을 보는 복을 받고 있다는 것을 말하였다.
3. 결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그리스도께서 성육신하심으로 세상에 모습을 나타내시고 그 이름이‘예수’라고 불리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사시는‘임마누엘’이 하나님의 언약 성취로 있는 것임을 알게 해 주시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각각의 증거를 통해서 이 사실을 증거해 나가고 있는 것이기에 이를 대조하여 살펴보는 것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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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반적으로 4복음서(The Fourth Gospel)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4권을 말하나, 공관복음(The Synoptic) 또는 공관복음서라고 말할 때는 요한복음을 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3권을 말한다. 이러한 이해는 4복음서 각권이 동일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어느 정도나 그 내용의 일치를 띠고 있는지에 따른 것이다. 공관복음에서‘공관’이란 말은 두 개의 헬라어 단어, 즉‘순’('함께’)과‘옵타노마이’(‘본다’)가 결합되어“함께 본다”는 뜻을 지닌 영어‘Synoptic'의 번역이다. 이러한 명칭을 갖는 것은 각각의 복음서가 서로 공통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관복음이란 말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3권에 적용되는 말로서 요한복음과 구별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이렇게 요한복음과 구별하여서 부르는 것은 보는 관점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이 서로 같기 때문이며, 이 3권은 내용상에 있어서 같은 내용을 기록하여 다루고 있어서 그 유사점이 매우 큰 데다가 -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과 거의 일치 되어 있으며,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대략 반 정도가 일치되어 있다. 마가복음의 661절 가운데 610절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다 - 문체와 단어도 서로 비슷하나, 요한복음은 문체와 단어가 3권과는 전혀 다른 데다가 내용 또한 3권에 들어 있지 않은, 즉 요한복음에서만 기록하고 있는 독자적인 내용이 많은데 따른 차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이 다른 복음서와 내용의 일치점을 보이는 것은 대략적으로 8% 정도에 불과하며 이는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서도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심을 갖는 목요일에서 체포되고 심문을 받으신 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에 주로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계시적 선포와 이적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기록이 많아 요한복음서에만 볼 수 있는 내용이 92%에 해당된다. 이러한 이유로 4복음서의 하나인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에서는 제외되어 공관복음과 차이를 두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4복음서의 하나인 요한복음은‘복음서‘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며, 내용상 같이 다루고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내용상의 일치점과 차이점을 갖는 것이 아닌데다가 서로 상호 보충하며 보완하여 주는 역할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하고도 올바르게 함께 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요한복음을 포함한 4복음서는 공관복음(서)라고 불리우는 것이 옳다고 본다. 그래서 4복음서는 그 대조에 의하여 순차적인 순서에 의해서 기록의 내용이 갖는 확률적 - 몇 퍼센트의 내용이 같은가 하는 것으로서의 확률적 공통성 - 인 공관이란 관점에서가 아닌 4복음서 각각의 내용에서 함께 보게 되는 공통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인 계시를 보는 것으로서의 공관복음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2) 양용의는 France, Davies and Allison, Hagner의 마태복음 주석을 인용하여 마태복음 1장에서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계보)에서‘낳다’(‘겐나오’) 동사의 사용 회수를 따라 계산할 경우(배타적 방식), 만일 나타나는 이름의 개수를 따라 계산할 경우(포괄적 방식) 처음과 마지막 대수는 14대가 되나 가운데 대수는 15대가 된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마태복음의 첫 부분을 차지하는 이 계보(1:1-17)가 지니는 의의를“이 계보는 예수의 조상에 대한 역사적 정보를 있는 그대로 나열한 일상적인 계보가 아니다. 이 계보는 특정한 의도 하에 선별된 이름들을 규칙적이고도 균형 잡힌 구조 가운데 제시함으로써, 예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되어 왔던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입증해 보여 주는 신학적 선언서이다”라고 하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이 준비해 왔던 구속사의 정점을 가져오는‘그리스도’
의 기원을 알리기 위해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예수 그리스도-다윗-아브라함’(1:1)으로 시작하고‘아브라함-다윗-예수 그리스도’(1:17)로 끝냄으로써, 계보 전체를 세 이름들로 감싸는 세 겹‘인클루지오’구조를 채택하고 있다고 하였다. 양용의,‘신학적 선언서 : 마태복음 1-2장에 나타난 기독론적 관점 이해’,『성경과 교회』3(2005), 123. 각주 7). 121-122.
3) 남유다 왕국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3차에 걸친 침공(B.C. 605, 597, 586)에 의해 멸망당했다.
4)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관련하여 예수님이 ‘임마누엘’로 불려질 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주신 한 징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징조로 주신 것이다. 이것은 그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로 불릴 것에서 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징조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아람과 에브라임의 침공으로부터 지켜 보호하실 것을 징조를 내세워 그 확실성을 확증시키신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온 이적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과 왕국을 지켜 보호하시는 것은 사람을 의지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적으로 되는 것이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수 없는데 그 일이 일어난다면 이는 이적이며, 그 이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함께 하시며 지켜 보호하실 것을 나타내신 것이다. 혹자는‘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처녀’가 아닌‘젊은 여자’로 보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보라, 젊은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가 옳다면, 젊은 여자에게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그래서 사람의 의지와 힘으로 되어질 수 있는 아들의 잉태와 출생이 무슨 표적이 되고, 그것이 믿음이 없는 아하스 왕에게 무슨 징조가 되겠는가? 더욱이 마태복음 1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고 또한 출생하는 성육신과 연결하여 생각한다면 이 모든 일은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예언을 이루려는 것에서 되어진 것으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을 확고히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반드시 이룰 이적의 징조를 내세워 하나님께서 유다와 함께 하심을 공고히 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징조는 이사야를 통하여 불신앙에 있는 아하스 왕에게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으로부터의 보호와 침략국의 멸망을 말씀하신 약속의 확증이기 때문이었으며 그대로 성취되었다. 그리고 이것에 있는 처녀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있게 되는‘임마누엘’징조는 장차 되어질 일인 메시야의 오실 것이 예언되는 것으로 있게 되었다. 그런데 양용의는 이와는 좀 다른 이해의 견해를 갖는다. 그는‘처녀’를 뜻하는 헬라어‘파르데노스’가‘(결혼하지 않은 여자를 지칭하거나 결혼 여부와는 상관없이 지칭되고 있는 것에서)젊은 여자’를 뜻하는 구약의 히브리어‘알마’에 대한 필연적인 번역은 아니라면서, 사 7:14에서 번역되고 있는‘처녀’는‘알마’보다는 일반적으로‘여자(여성)’을 뜻하는 개념에서 사용되고 있는‘이솨’가 더 어울리는 단어라고 보았다. 그런 그는 사 7:14에서의‘알마’는 주전 8세기경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한 어린아이의 출생에 대한 현세적 예언인 동시에, 이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에서의 특이한 상황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에서 메시야, 곧 예수의 탄생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으로도 이해될 수 있는 것으로, 마태가 사 7:14을 예수의 처녀 잉태와 탄생에 적용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렇게 보는 까닭은 사 7:14은 원래 주전 735년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 왕 아하스를 대적하여 연합 공격을 펴던 상황에서 아하스에게 주어진 징조로서, 그 징조는 한‘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유다를 공격하던 연합군 두 왕이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것(사 7:15-16)으로서 표면적으로는 예수의 처녀 잉태와는 무관한 예언인 듯 보이나 문제의 해결은 ‘임마누엘’에서 보게 되는 역사적 한 사건의 단편적인 예언으로 끝나지 않고 메시야 사상의 전개의 시발점으로 드러나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에서 이다. 양용의, 위의 책, 131-132.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사 7:14의 예언은 아하스 왕에게 주어지나 그의 당대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앞으로 되어 질 일이다. 유다를 공격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은 패망을 맞이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의 시간적 역사에 의할 때 그 일은 멀지 않은 때에 있을‘65년 이내에’곧 일어날 일인데,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에 예언되고 있는 약속인 메시야를 보내는 권능으로 행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하스 왕에게 예언되고 있는‘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이요’,‘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불릴 것’은‘아직’일어나지 않은, 곧 장차 될 일의 약속에 있는 것이나 이것의 성취를 유다는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의 패망에서‘이미’보게 되는 시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 7:14에서의‘처녀’는‘젊은 여자’로 이해하며 그 번역의 견해에 갖는 것에 반대한다.
5) ‘사관’에 쓰인 단어는 ‘카탈뤼마’로 사람(여행객)들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곳’을 의미하는 동네 여관을 말한다.
6)이데아 사상은 현상 세계와 물질들은 이것의 원형인 실체의 투영으로 이해하며, 실체는 순결하고 깨끗한 영적 세계이나 현상 세계와 이곳의 물질들은 악하여 더럽다고 보았다. 이 이데아 사상은 인간 이해에도 영향을 끼쳐 인간을 이원론적으로 사고한다. 그래서 영혼이라는 이데아가 있는데, 이것이 육신이라는 물질 안에 갇혀 있다고 보고서 이 육신으로부터 벗어나 자유한 영혼에 있는 것을 구원이라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