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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교회가 유아세례를 행함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주께로부터 받은 복음의 진실성에서 떠나 하나님의 말씀이 띤 순전성을 잃어버리므로 종교개혁으로 불리는 교회개혁에 직면했습니다. 개혁교회는 이 교회개혁에 의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는데, 잘못된 예전을 바로 잡으며 진리를 올바르게 전파하는 것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의 터전이며 또 그 진리를 높이 선양함에 있는 곳으로 우뚝 서 있는 기둥 본연의 모습에 있게 하였습니다(.딤전 3:15)
이를 위해 루터와 칼빈에게서 보듯이 목숨을 위협 받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교회의 개혁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여기에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같이 하며 동참하고 동반한 많은 분들의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 결실로 교회가 회의를 통해 작성하고 후대의 교회에 대대로 신앙의 유산으로 물려주며 진리에 선 바른 신앙으로 주님의 참된 교회를 이루는데 좋은 전통을 잇게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서(신조, 신경)와 교리문답서가 그것입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의 채택에 의해 교회를 진리에 의한 교회로 굳건히 세워 나갔으며, 이는 교회의 신학 사상으로 체계화되었습니다. 개혁교회 역사에서는 전통적으로‘보편신조’로 불리는 세 신조가 있었습니다. (1) 400년경에 작성된 로마 신경에 근거한 사도신조, (2) 주후 325년에 열린 니케아(Nicaea) 공회를 거쳐 381년에 채택된 니케아 신경(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3) 6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아타나시우스 신조입니다. 사도 신조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교리적으로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니케아 신조는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 정통 교회와 견해를 달리하는 아리우스주의에 반대하며 예수는 하나님과 동일 본질이심을, 그리고 성령의 폭넓은 고백을 채택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삼위일체 교리를 공격하는 아리우스의 주장과 싸운 아타나시우스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 것이나 이것이 아타나시우스 본인에 의해서 작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신경은 정통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고 그리스도의 두 본성인 신인양성의 통일성을 다룬 교리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여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이 만들어졌습니다. 1536년 제1스위스 신앙고백서, 1537년 제네바 신조, 1541년 제네바 교리문답서, 1560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 1561년 벨직 신앙고백서, 1563년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그리고 영국교회 39개 신조, 1566년 제2스위스 신앙고백서, 1619년 돌트 신조, 164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이것에 의해서 작성된 대.소교리문답서가 그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개혁교회는 (1) 벨직 신앙고백서 (2)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 (3) 돌트 신조는‘일치신조’로 삼고‘보편신조’와 함께 개혁교회가 소유한 중요한 신조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 신조를 비롯해서 열거된 여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은 종교개혁으로 새롭게 모습을 갖게 된 개혁교회 신앙의 유산입니다. 이것은 말입니다. 개혁교회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신앙고백과 교리로 견해를 밝히고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으로, 개혁교회가 믿음의 주께 가진 신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개혁교회의 개혁사(改革史)사였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신앙에 신학을 세워나가는 것으로서의 교회 개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뒤집고 바꿔 나가고 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교회에 바른 사상을 갖게 하여 깨어있게 하는 것의 성격이었습니다. 가령 돌트 신조(Dort Creed)가 채택된 배경을 보게 되면, 라이덴 대학의 교수였던 알미니우스(Arminius)가 예지에 근거한 조건적 선택, 무제한적 속죄, 부분적 타락, 저항할 수 있는 은혜 그리고 은혜로부터의 타락 가능성 등을 주장함으로써 개혁신앙으로부터 이탈하고 그 추종자들인 알미니안주의가 생겨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도르트레히트에서 개혁 종교회의를 소집하여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하는 다섯 조항, 곧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전적 타락, 불가항력적 은혜, 그리고 성도의 견인 등을 개혁교리로서 확증한 것이 돌트 신조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인 것에는 하나님의 복음인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제공된 것에서 이며, 이 성경을 기반으로 하여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가 작성되고 채택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 제 74문항에는 유아세례의 성경적 타당성이 긍정적으로 천명돼 있습니다. 본 교리문답서는 독일의 영주였던 일렉토 프레데릭(Elector Frederick) 3세의 요청에 따라 1563년 1월 19일에 하이델베르그에서 출판 되었습니다. 당시 제후였던 프레데릭 3세는 하이델베르그 대학 교수였던 28세의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와, 프레데릭 궁중 설교자였던 26세의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를 지명하여 로마 카톨릭교회와 대비되는 개혁교회 교리문답서를 작성토록 명령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리문답서의 작성 동기는 첫째로 로마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와의 차이점을 밝히는 것이고, 둘째는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체계적으로 밝혀 정립함으로 당시 팽배돼 있었던 미사 중심의 카톨릭교회의 신앙관을 배격하고 말씀중심의 개혁교회 신앙관을 확립하려는 데 집중되었습니다. 이 교리문답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중심 사상은 칼빈과 루터의 관점에 많이 의존돼 있었음은 자명합니다.
신앙고백서의 경우는 교회가 신앙하고 이를 고백하는 내용이 서술형식으로 순서적으로 나열되어 체계 있게 가르치려 하고 있습니다만, 교리문답은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고백하는 신앙의 내용들로 일반적으로 질문하고 이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교육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함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경우를 실예로 들면, 제1문은“사나 죽으나 당신의 유일한 위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사나 죽으나 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 몸과 영혼이 모두 미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주께서 보배로운 피로 나의 모든 죄 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듯이 주는 나를 지켜주십니다. 실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 내가 주의 것이기에 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 이번에 다루고자 하는 유아세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제74문 :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1)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2)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증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3) 구약에는 이것이 할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며4) 신약에 와서 세례로 대치된 것입니다.5) 1)창세기 17:7; 마태복음 19:14; 2)이사야 44:1-3; 사도행전 2:38,39; 16:31; 3)사도행전 10:47; 고린도전서 7:14; 4)창세기 17:9-14; 5)골로새서 2:11-13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74문답은 유아세례의 성경적 당위성을 아래의 다섯 항목을 통해 기술하면서 이를 뒷받침하는 성경본문들을 그 증거로 제시합니다.
(1)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공동체에 속하여 있다.
(2)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약속 받았다.
(3)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증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에 있다.
(4) 구약에는 이것이 할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니, 언약백성과 불신자와의 구별이 유아를 포함하여 모든 남자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졌다.
(5) 언약의 표징인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이르러서 세례로 대치되었으므로 유아에게 행한 할례 또한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이러한 유아세례를 가르치는 교리문답에 따른 전통에 의하여 개혁교회는 유아세례를 대체적으로 이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 전통 있게 따랐습니다. 그럼에도 여기에 반대하고 따르지 않는 교파들도 있습니다. 침례교회가 그것입니다.
침례교회(浸禮敎會, Baptists)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의 기원과 그 유래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재침례파(Anabaptist)와 이들 가운데 네덜란드에서 활동하였던 메노나이트파(Mennonite), 그리고 17세기 영국의 회중교회에서 분파된 청교도들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침례교회란 이름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644년쯤 영국침례교회의 발현에서부터입니다. 그러니 침례교회란 정식 명칭이 등장한 것은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된 1517년으로부터 약 130년 가까이 흘러서입니다. 이 침례교회는 개혁교회의 흐름 속에서 한 부류로 있어왔기 때문에 개혁주의 교회임을 표방하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개혁교회와는 두 가지에서 큰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적 신앙고백에 의한 성인침례만 인정하여 유아세례를 받았던 자는 다시 세례를 받게 했으며 이는 타 교파에서의 세례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교회에서 행하는 침례만 인정하여 다시 침례(세례)를 받게 하였기 때문에 재침례교회로 불렸습니다, 또한 세례의식의 방법에서 소위 물을 뿌리거나 끼얹거나 하여 물을 붓는 형태를 띤 세례를 부정하고 몸 전체를 물 속에 잠기게 하는 형태를 띤, 곧 몸을 물에 담그는 침수에 의한 세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침례교회란 명칭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개혁교회가 갖는 (유아)세례관과는 다른 것이기에 초기 개혁교회 시대에서는 박해를 많이 당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가톨릭교회는 물론 영국 국교회(성공회), 루터교회, 장로교회 모두에게서‘침례교도’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재)침례교회가 재침례를 주장하는 것은 차치하고 유아세례를 반대하는 것은 유아를 비롯하여 성인 이전의 어린아이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인식하고 신앙고백 할 수 있는 상태의 나이에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유아에게 교회가 세례를 베풀고 또한 유아가 그 세례를 받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아세례를 받은 자가 자라서 불신앙에 있는 등의 변수가 깔려 있어 유아에게 베푼 세례가 가볍게 다루어지거나 또는 이를 통해서 모독될 수 있는 것을 간주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 스스로 신앙고백 할 수 있는 때까지 신앙 교육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주께 가진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75문에서 묻고 대답하는 것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몸을 먹고 흘리신 피를 마심에 있는 믿음에 있는 것에서 성찬의 참여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것인데, 그것은 믿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믿음으로 사죄와 영생을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더욱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된 몸에 연합됨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에 대한 분명한 이해에 의한 그리스도를 아는 신지식에 의해서 그분께 가진 믿음을 고백함에 있음이 그만한 지식의 연령과 상태에 있어야 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러한 주장의 견해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74문답과는 배치가 됩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어느 것이 맞는지요. 어느 것을 따라야 하는지요. 지금까지 개혁교회는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의 가르침에 그에 따라서 유아세례를 베풀고 믿음의 부모들은 자녀를 낳으면 당연히 자신의 자녀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했는데 말입니다. 유아세례에 있어온 그리스도인들은 (재)침례교회가 유아세례를 반대하여 거부하고 유아세례를 받았던 자를 성인이 되어서 다시 세례(침례)를 받게 하는 것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고 그들을 또한 반대할 것입니다.
이에,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에서 가르치는 유아세례에 대한 진의를 통해 그 옳고 그름을 먼저 확인해야겠습니다.
제74문 :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답 : 그렇습니다.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약속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증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이것이 할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며, 신약에 와서 세례로 대치된 것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유아들도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분명하고도 확신 있게“그렇습니다.”라는 대답에 있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래야만 하는 이유를 다섯 가지를 들어서 가르쳤습니다.
(1) 어른들뿐만 아니라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유아들도 하나님의 언약과 교회공동체에 속하여 있다.
(2) 유아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의 용서와 믿음을 주시는 성령을 약속 받았다.
(3) 그러므로 유아들은 언약의 증표인 세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교회에 속하게 되고 불신자들의 자녀들과 구별되는 것에 있다.
(4) 구약에는 이것이 할례로 말미암아 이루어졌으니, 언약백성과 불신자와의 구별이 유아를 포함하여 모든 남자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졌다.
(5) 언약의 표징인 구약의 할례는 신약에 이르러서 세례로 대치되었으므로 유아에게 행한 할례 또한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대치되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1)-(3)까지에서의 유아세례의 정당성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설명은 이의 제기할 것이 없습니다만, (4)-(5)의 두 가지 이유는 이 교리문답을 작성하여 가르치게 된 당시에 가진 이해에서 더 성숙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구약의 할례와 이것과의 관계에서 알고 있는 유아세례에 대한 이해가 당시의 이해보다는 오늘날의 이해가 해당 근거 구절과 그 본문에 대한 해석에 의해서 보다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1)-(3)에 의하여 (4)에서는 신약에서 언약의 증표인 유아세례가 구약에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에 의해서 행해졌다며, 언약백성과 불신자와의 구별이 유아를 포함하여 모든 남자는 언약의 표징인 할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서 언약 백성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며 불신자는 이방인이고, 신약에서는 언약 백성은 그리스도인이며 불신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서 언약 백성이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언약 백성은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 놓여진 백성을 뜻합니다. 이 언약 백성이 약속되고 있는 것을 할례 언약에서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때의 할례를 흔히 구원 받은 백성을 뜻하는 표로 주신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과연 그러한지요. 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세기 12장에서부터 17장에 흐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시는 언약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창세기 12장 1-3절에서 보는 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세 가지를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자손입니다. 두 번째는 그 자손들이 거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룰 땅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나라의 그 자손들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에 의하여서 받아 누릴 복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언약을 주셨으며, 또한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서 이 큰 언약을 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습니다. 그의 아내인 사라는 65세였구요. 이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 아브라함이었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그로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사실 안에서 한 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도 아브라함에게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언약이 성취될 기미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서 이룰 언약의 성취를 자신의 몸을 통해서 날 자인‘아들’에서 자기 집에서 기른 자인 다메섹 사람이요 충복인 엘리에셀에게로 기대가 옮겨졌을 뿐입니다. 그 당시에 아들이 없는 아브라함으로서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줄 사람으로 자기 집 재산을 잘 관리하고 있는 그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하며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다는 확증의 사건을 갖게 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고 하시며“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시고(창 15:5),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굳게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또한“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창 15:7)라고 말씀하여 주셔서 하나님이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것은 그와 그의 자손이 지금 그가 있는 이 땅을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손과 함께 땅도 언약으로 받았었습니다만 그는 그동안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서 저리로 또한 그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 유목민 생활을 이방인처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로서는 단 한 평의 땅도 소유하고 있지를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주께서 나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였사오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 15:3)과 말한 것과 함께“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 무엇으로 알리이까”(창 15:8)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말씀한 이 땅을 자신과 자신의 후손이 차지하게 될 것을 믿을 수 있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렇게 그때까지 아직도 후손과 땅에 대한 언약이 실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언약의 실현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번에는 삼 년 된 소 암컷과 삼 년 된 염소 암컷과 삼 년 된 양 수컷을 각각 한 마리씩, 그리고 어린 산비둘기 한 마리와 어린 집비둘기 한 마리를 하나님에게 가져 나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가져다가 반으로 쪼개어 각을 뜨게 한 후에는 양쪽으로 놓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둘기들만은 쪼개지 않고 그냥 놓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지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어느덧 해가 저물어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 말씀하셨습니다. 내용인즉 하나님은 그의 후손들이 이방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또한 400년 동안 종살이로 혹독한 세월을 보낼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이방 나라를 치고 그 후손들을 나오게 하여 하나님이 언약하신 땅으로 들어올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표징으로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신 것은“내가 만일 너와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다면 내가 이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알게 하여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대해 친히 보증이 되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시 언약을 재차 맺어 그 사실을 확증시키는 말씀을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이 차지할 땅이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구체적인 지역을 언급하심으로써 하셨습니다(창 15:9-21).
그런 후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에 이르렀을 때 다시 한 번 그에게 나타나셔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가 가져야 할 신앙적인 자세를 언급하시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임을 재차 확인하시며 그를 그 수많은 무리의 조상이 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름을‘아브람’에서‘아브라함’으로 개명시켜 주신 것이 바로 이때입니다. 그러면서 이때“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반드시 지킬 것이며 또한 그의 후손들과도 지켜 나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그의 모든 후손과도 맺는 것임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아브라함만 지킬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그 언약을 굳게 지키도록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 17:1-9).
할례는 이때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아브라함과 그의 모든 후손들과 맺은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도록 하라고 한 후에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그 할례는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그 후의 모든 세대에서 행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은 언약의 표징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누구든지 사내아이로 태어난 자는 8일 만에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하는데, 집에서 태어난 종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 돈을 주고 사온 종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할례를 받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고 하는 표징이 그들의 몸에 남아 있게 하였습니다. 만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는 것을 그들 스스로가 원치 않으며 그래서 거부하여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까닭에 반드시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에서 쫓아낸다는 것입니다(창 17:10-14). 여기에서 보는 대로 할례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세운 때부터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난 자들 만의 것이 아닌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있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할례가 지닌 참된 의미는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에서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성'의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할례를 받는 사람은 그것에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아 있는다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내인 사래의 이름을 '사래'에서 '사라'로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라에게 복을 내려 아이를 낳게 하고 모든 나라의 어미가 되게 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창 17:15-16).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심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낳게 하신 것에서, 그리고 이삭은 조상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또한 이을 자로 있는 것에서 증거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수다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그의 후손으로 오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아브라함이 가진 언약의 믿음 안에서 할례를 받는 모든 이방인들도, 그래서 땅의 모든 족속들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이 지닌 언약적인 믿음 안에서 베푸는 복을 받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 안에서 언약의 복을 받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요.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와 함께 한 자인 할례를 받은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또한 아브라함의 후사로 오는 야곱, 그리고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사로 이스라엘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할례를 받은 자는 이삭, 야곱, 이스라엘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야 했으며, 여기에는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아브라함의 기업을 잇는 후사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기업을 잇는 후사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이삭 한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기업을 잇는 후사였습니다. 이스마엘도, 그리고 그의 후사들도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와 함께 하며, 그래서 할례 받은 백성으로 있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만, 이스마엘이 받은 할례가 곧 아브라함과 함께 받는 복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이 받은 할례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서 아브라함이 받은 복 안에서 그 복을 볼 수 있었을 뿐이지, 정작 그 자신은 그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는 이삭에게서 떨어져 나가 이삭과 갈등 구조를 이루고서 이삭과와 그의 후손들을 적대시하는 관계를 가져나갈 뿐이었습니다. 이런 이스마엘과 그 후손들이 비로소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깨닫고 그 복에 참여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세우신 새언약에 들어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받음에 있음으로서 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서, 그리고 이 후의 시대에서 언약 백성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지고, 그래서 그 언약을 받은 자들을 언약 백성으로 부르는데, 이것이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이란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언약의 빛을 통해서 받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 언약의 빛을 통해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것을 정하시고 이에 자신이 택한 자들을 언약하신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하여 그분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십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 언약의 빛이 있어도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 있고 그 빛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있고 그 빛의 깨달음이 있지 못하는 마음이 참으로 강팎한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자들이 아닌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언약과 그로 말미암은 복음은 그들의 마음을 깨끗케 하여 참으로 맑고 밝게 하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더욱 더 굳게 닫아 놓게 하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있는 것입니다.
할례가 언약의 표징인지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 받은 피 묻은 살에 하나님의 언약이 새겨 있습니다. 이삭과 야곱 또한 그렇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구요. 그들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 이삭과 야곱의 집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그러하며, 이스라엘 모든 남자들이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이 언약 백성들에게서 오직 이삭만이, 그리고 야곱만이, 그리고 그들이 받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잇는 언약의 씨(자손)만이 언약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으로 복 받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언약 백성 삼으셨는데,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은요. 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며, 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이 표현한 바에서 알 수 있듯이 표면적 유대인(이스라엘)이요 이면적 유대인(이스라엘)은 아닌 언약 밖에 있는 이방의 세계에 있는 자들과 다름 아닙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할례 받음이 언약 백성과 불신자, 곧 이방인들과 구별을 갖게 하며, 이는 분명히 그렇습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언약 백성은 곧 모든 자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백성이란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할례는 그리스도에게 와서 그분이 후에 율법 언약에 속하게 하신 할례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심으로 할례는 폐지가 되어 다만 구약 율법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할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해 줄 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성령으로 자신이 베풀 세례를“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마 26:38; 막 14:24; 눅 22:20)라고 하신 새언약 안에서 행하십니다. 이 세례는 할례 언약에서 보는 언약의 표징(징표, 증표)가 아닙니다. 언약의 실행입니다. 그러기에 세례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난 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하여 주로 섬김에 있는 자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그분께 믿음을 가진 자들을 죄에 대하여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하여서는 산 자가 되는 생명의 연합체로 하나 된 몸이 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입니다. 따라서 주께 대한 믿음의 고백, 곧 신앙고백에 있는 자에게서 세례가 말해집니다. 이 신앙고백이 없는 자에게서는 세례라는 것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유아들에게서는 그것도 이제 겨우 만2세 아래에 있는 영아들에게서 신앙고백과 함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세례를 받음에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의 글에서는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진리의 약속을 인치고 보증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수세자의 그들이 언약의 백성으로 약속된 복의 후사임을 확신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세례를 받는 어린이들은 거듭났으며, 따라서 믿음의 씨앗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오묘하신 방법으로 그 믿음의 씨앗을 결실케 하신다며 언약 은혜의 통일성과 연속성으로부터 도출되는 결론은 동일한 특권이 새 언약하에서 신자들의 영아에게 속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봅니다만, 할례와 세례와에 대한 이해와 그 관계성을 오해하고 있는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유아세례는 (재)침례교회에서 주장하듯이 반대하며 거부하여야 할 것인지요. 과연 그러한지요. 아닙니다. 우선 말입니다.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은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이 세례 받음에 있는 믿음에 있는 자의 가족, 곧 식구에서 유아가 부모와 함께 세례 받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로 베풀어지는 세례인 물세례입니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그 밤 그 시각에 간수가 그들을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어 주고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 주고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니라.(행 16:29-34)
에서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간수의 가족 모두, 곧 온 식구가 다 세례를 받음에서 그 가족을 구성하고 있는 식구가 다 자란 성인으로만 있는 것인지, 아니면 여기에는 아직 사리를 분별할 수 없는 없는 어린아이나, 그보다 더 어린 영.유아도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온 식구가 다 세례를 받음에서 전자이든 후자이든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인지든 모두가 가능한 것에서 유아세례의 경우도 배제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경우에서의 알아들을 만한 나이에 있는 경우는 그의 아버지와 같이 신앙고백을 하였기 때문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신앙고백의 가르침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충분히 들었을 것이며 유아의 경우 세례를 받음은 아버지가 신앙고백한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안에 있기를 소망하는 것에서 아버지와 그의 가족이 세례 받음에 함께 참여함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신앙고백에 있는 자의 세례 받음인 물세례는 그들이 주께 가진 죄사함을 얻는 구원의 신앙고백에 대해 공적인 인정의 증표가 되고 있는 것이며, 유아는 부모가 가진 신앙고백에 있는 주께서 주신 새언약 안에 두고서 언약의 주를 바라보며 신실히 교육을 받음을 통하여 자라감에 있게 할 것에서 언약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 교회의 자녀로 맡김에 있는 것이요, 교회는 이를 받아들여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신앙고백서 및 교리문답서 등을 통해서 진리로 양육함에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지식으로 장성함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마땅히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입니다. 언약의 자녀들 중에서 많은 사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그의 모습을 드러냄에 있는 것에는 믿음의 부모와 함께 믿음의 교회가 함께 돕는 자로서의 역할을 한 것에 큰 힘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9장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문제를 다룹니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한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혈통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으로 난다고 할지라도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잇는 자손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데 있었습니다. 이삭은 본처의 소생이요 이스라엘은 사라의 몸종으로 있었던 하갈의 소생인 차이에 있기 때문에 본처의 소생인 이삭만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만 사라의 몸을 통해서 날 자인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정하신 데 따른 것입니다. 이삭이나 이스마엘이나 그들이 본처의 소생이든 첩의 소생이든 모두 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갈의 몸에서 날 아들인 이스마엘이 아닌 사라의 몸에서 날 아들인 이삭을 약속의 자녀로 정하셨고, 또한 그와 그를 통하여 날 자를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속에 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당신의 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데 있어서 '언약'에 충실하셨으며, 여기에 '선택'이란 구원론적인 교리가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의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역으로 이해가 되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사랑하고 이스마엘은 미워하셨으며, 이러한 사실은 이삭의 아들에게서도 그래도 나타나고 있는데 동생 야곱은 사랑하고 형 에서는 미워하였습니다. 이삭이,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이삭을 약속을 이을 자인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으며 또한 야곱을 그의 조상에게 주신 약속을 이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면 말이죠. 우리가 자녀를 낳아서 기를 때, 그것도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를 때(사실 한 명의 자녀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자녀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부모는 자신의 신앙고백 속에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고 맡기신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인식하면서 유아세례를 베풀고 신앙 안에서 양육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럴지라도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해 가시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선택으로 인한 구원의 서정이 이해가 되어지지만, 그 택자로서의 구원 설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요소로 여겨지기에 아무리 우리가 낳은 자녀를 언약의 자녀로 인식하고서 유아세례를 베풀며 하나님의 권속[가족]으로 둘지라도 그 중에 어떤 자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으며, 반면에 어떤 자녀는 그렇지 못할 것인데 유아세례를 베푸는 것이 무슨 효력이 있겠는지요. 즉 구원의 효력이 유아세례를 받은 자녀들에게 유효하겠는가? 효과적으로 작용하겠는가? 하는 것이죠.
우리가 유아세례를 생각하기에 앞서 그것이 '세례'의 예식으로 행해지는 것이기에 (물)세례 문제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말이죠. 유아세례를 행하는 예식이 과연 구원의 효력에 관한 문제이겠습니까? 앞서 세례를 다루면서 이 문제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아닙니다. (물)세례가 죄사함의 표이요 또한 죄사함의 약속으로서, 그 세례가 죄사함을 받아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서는 인침의 증표인 동시에 또한 그 은혜를 바라보는 자들에게는 죄사함의 약속에 두고 이끄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구약의 할례와 다른 것은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의 가족 공동체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했을 때는 당연히 민족적 국가의 거룩한 예식으로 행해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있고자 하면 할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할례는 가족 구성원이든 또는 민족 구성원이든 '공동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세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교회의 공적인 인증(認證)을 받아 교회 구성원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할례와 다른 것은, 세례는 분명한 신앙고백 속에서 행해집니다. 할례는 자녀의 신앙고백과는 관계없습니다. 부모의 신앙공동체 안에서 한 일원으로서 난지 8일 만에 행해집니다. 그리고 부모를 통해서 자신들의 조상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교육받으며 자라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들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신앙고백에 있든지 또는 없든지 간에 그들은 할례 받은 백성의 한 공동체 일원으로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섬기는 신앙을 가진 그 고백에 의해서 행해집니다. 우리는 교회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5-18)에 충실합니다. 세례[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는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과 한몸으로서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는 산 자가 된 것에 대한 신앙적인 행위(롬 6:4)이며, 이러한 사실은 장차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가져오는 일을 할 것이라는 진리에 대한 하늘의 재가를 뜻하는 성격을 갖습니다. 그러한 사실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물세례]를 받는 것이며, 여기에서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 세례를 받은 사람은 생명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로 서서 출발하게 됩니다. 이렇게 교회의 실질적인 생명의 탄생을 가져오는 신앙고백과 관련이 있습니다.
바빙크(H. Bavink)는 유아세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졌습니다. "개혁신학자들은 유아세례의 근거가 성경에 있다고 하며 하나님의 은혜 언약[계약]은 성인된 신자들만이 아니라 그 자녀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이 말하듯이 성인이 세례를 받는 것처럼 유아가 세례를 받는 것이 정당한 것은 그것이 반드시 중생이나 신앙이나 회개를 이유로 함이 아니고 오직 은혜 언약 때문이다. 유아세례의 근거로서 이보다 더 이상 깊고 튼튼한 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할례로부터 세례에 이르기까지에 따를 경우 유아세례에 대해 교회들이 가져온 견해들은 찬성과 반대, 지지와 거부의 논리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교부들이 유아세례의 전통을 사도들에 의하여서 갖게 된 것으로 말하지만 그 또한 사실 여부를 그들의 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로 무조건 유아세례의 부당함으로만 몰고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에는 분명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의 이해 속에서 주어진 '죄사함의 약속'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으며, 신앙의 부모는 자기의 자녀들을 '언약의 자녀'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은, 세례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유아세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아이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행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시고....” 하는 차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성인된 남자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가지고 있는 신앙을 세례 의식을 통해 고백하면서 교회원으로 가입하는 공적인 인정을 받습니다만, 유아는 지금 하나님의 새 언약의 은혜 안에 있는 부모의 책임 아래서 그 아이를 또한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는 자녀를 향한 부모의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앞서 한 내용의 부분에서도 말했듯이 교회가 베푸는 세례인 물세례는 이 세례를 받음에 있는 자들이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 행하게 됩니다. 그가 지닌 신앙의 진실 되고 그렇지 않은 사실은 전적으로 그가 하는 고백에 따릅니다. 그래서 교회가 객관적으로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진 신앙을 인정하고 그래서 교회의 신앙과 동질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가 고백하는 신앙에 의해서입니다. 이것이 아닌 한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어떤 사람의 신앙의 유무와 그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없음을 말하였습니다. 그렇기에 물세례는 어떤 한 신자에게 구원의 효력으로서 행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효력은 전적으로 그 사람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께서 갖게 하시는데 따르는 것입니다. 물세례는 다만 그러한 사실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교회에 선포하여서 교회가 그를 교회의 한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세례가 지닌 역할과 그 기능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와 혼동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아세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난 지 만 2년도 안 되는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은 구원의 효력 차원에서가 아닙니다. 아무런 인식력도 없는 아이에게 신앙고백과 구원의 효력이라니요!. 더욱이 세례를 받는 유아들이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난 자들인가 하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작정과 관련하여서는 그 유아들이 훗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갖고 그 신앙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입하는 것을 통해서 입증될 터인데 유아 때에 베푸는 세례에서 구원의 효력 운운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영아를 비롯하여 어린아이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제한하며, 어린아이가 키가 자라며 지혜가 함께 하는 것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착 달라붙어서 엄마를 따라 예배에 참여하며, 엄마가 하는 말을 따라서 종알거려 하는 한 마디의 말인 ‘하나님’, ‘예수님’ 조차도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하게 하심으로 있을 수 있으며, 좀 더 자라서 짧은 한 마디인 ‘나는 예수님을 믿어요’ 하는 말이 그 아이의 진실함에서 나오는 신앙고백이며, 더욱 자라서 논리적이며 이치적으로 말할 수 있는 연령에서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서 나오는 말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하며 주로 섬겨 따르는 성도임을 고백하는 말에 있어나가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서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어느덧 성숙한 참으로 다 자란 모습에서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기도 합니다.
이제 글의 끝부분에 이르러서 교회 헌법의 예배모범에서 말하고 있는 유아세례와 그에 대한 부모의 책임을 "유아세례의 예식을 행함을 부모의 자녀에 대한 신앙 양육의 책임과 연계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관심을 갖고 주시해 주실 것을 바랍니다. 신앙의 부모는 당연히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로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그 자녀들이 하나도 예외 없이 하나님의 택한 자녀로 선택되었고, 그래서 모두가 다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알겠습니까? 자녀들 모두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을 자인 사랑을 받는 자일 것을, 아니면 그들 중에 한 명이, 아니면 그들 모두가 다 구원에서 제외될지를.... 모릅니다. 허지만, 그들의 부모인 그리스도인은 교회 헌법의 예배모범에서 말하고 있는 바인 자녀들을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삼가 부모의 직분을 할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의 자녀를 가르치며, 신구약 성경에 가르친 거룩한 종교의 원리대로 가르칠 것이니, 이 원리의 요령은 우리 교회 신경과 대소요리 문답에 간단히 가르쳤은즉 이 모든 책임은 부모의 직분을 도와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며, 친히 그 자녀와 함께 기도하며, 그 아이 눈 앞에 충성함과 경건함의 본을 보이고, 하나님의 주시는 힘을 얻어 진력하여 주의 성품과 훈계 안에서 자라게 해야 한다"에 충실하는 것은 여기서 밝히고 있는 대로 당연히 부모로서 그 직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성장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진리를 가까이 대하고 인도를 받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한다고 하면, 그래서 그 열매를 자녀에게서 본다고 하면 그 부모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아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앙의 부모는 그렇게 자녀를 하나님의 언약 아래 두고서 신앙적으로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여야 하며, 교회는 그 일이 효과 있게 잘되어지도록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책임 있게 충실히 해 나가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신앙의 부모는 자녀들이 주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항상 염려하여 자녀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이요 자세여야 합니다. 이는 말이죠.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아내가 믿는 남편으로 말미암아서 거룩하게 된다면서,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자녀도 거룩하게 될는지 어찌 알겠느냐?”(고전 7:14) 라고 말하였으며, 바울이 빌립보에서의 사역 중에 갇혀 있던 감옥의 간수가 바울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영접하였을 때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으니 간수와 그의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한 것에서(행 16:16-34)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말을 맺을까 합니다. 유아세례를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교회의 회의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유아세례를 할 것의 결에 있으면 이를 잘 시행하여 나가면 됩니다. 혹 교회가 가진 회의에서 여러 가지를 고려한 결과 유아세례를 하지 말 것을 결의하였으면 시행하지 않으면 됩니다. 이 중 어떤 것에 교회의 형편이 있든지 각각 처한 그 형편에서 신앙의 부모들의 자녀들에게 교회가 해 나가야 할 일을 맞게 해 나가며 신앙의 부모는 자신의 자녀들을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언약에 두고서 양육하여 나가면 됩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유아세례를 시행함으로 얻는 유익은 유아세례의 시행에 있지 않는 것에 비해 얻는 유익이 적지 않다 할 것입니다. 우선 신앙의 부모가 유아세례를 받음을 통해 자녀들에 대해 갖는 의식은 부모의 일생에서 자녀들에 대한 양육에 많은 마음 씀이 있으며 여기에 필요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함에 있으면서 적절한 처신을 해 나갈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유아세례의 시행 여부를 직접적으로는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유아세례는 성경적으로 옳은 전통인가?를 직접적으로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유아세례는 옳은가? 과연 성경적인가? 하면서 유아세례를 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말이죠. 유아들이 받는 세례[물세례]를 구원 얻는 믿음의 지식과 분별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도 없고 진리를 분별 할 수도 없는 유아들이 성인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속에서 구원론적인 의미에서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는지요. 그러기에 유아세례를 하지 않음에 있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서 정당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유아세례를 행하는 교회는 잘못하고 있는 것인지요. 그 교회들이 지금 유아세례를 구원의 효력이 미치는 것으로 베푸는 일을 하고 있는가요? 그래서 그 유아에게 세례를 받는 오늘 '구원이 임하였다'고 가르치는지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부모로서 신실히 하여야 할 일을 확인시키고 하나님의 은혜 언약에서 바라보는 약속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칠 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는 간접적이긴 하지만 성경에서 몇 몇 제시되고 있는 예에 의하여 성경적으로 옳은 일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서 있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얻었을 때 그에게 유아세례를 받게 하고 그 자녀를 신앙교육 하여 나가는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무리 하여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말이죠. 유아세례를 시행하는 것은 구원설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성의 본질을 결코 훼손하거나 벗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유아세례를 반대하거나 거부하며 부정할 일이 아닙니다. 교회가 마땅히 시행할 세례 속에서 유아세례의 시행 또한 올바르게 잘 시행하여 나가면 참으로 좋은 일이며 잘하는 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