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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1)
- 흔들릴 수 없는‘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 -
대담 프로 : ‘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
유튜브에 올려져 있는 기독교 동영상에서‘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이 논쟁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것을 한번 보시도록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주일예배에서 누가복음 17장 22-27절 부분을 설교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예수께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가지면서 알고 있어야 할 예수님 자신이 당하실 고난에 대하여 이야기 해 주시고 있는 내용과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드리고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 얻는 믿음을‘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에서는 달리 말하고 있어 논쟁의 여지를 안고 있기에 여기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먼저 알고서 문제되는 내용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가져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얼마간의 시간을 갖고‘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란 제목으로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관’이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다루고 있는 내용이 도발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구원관이 잘못이 있어 왔다는 것을 말해주면서,‘리얼 크리스챤 – 올바른 구원관’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지금까지 구원관을 어떻게 알고서 또한 믿어왔으며 이를 말해 왔기에‘잘못 알고 있는 구원관’이라고 하는지요. 교회에서 설교자는‘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해옵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관’에서는‘행함 없는 구원?’에 대해 의문의 표시를 달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하는 것에서 이며, 행함이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행함이 없는 자는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 또는 행함이 없는 자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깔고 있습니다.‘믿음 없는 구원?’에 대해 의문의 표시를 달고서 믿음이 없는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 하며 믿음이 없이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믿음이 없는 자는 구원 또한 없다고 하면 이해가 되며 알아 듣겠는데,‘행함 없는 구원?’하면서 행함이 없는 구원이 있을 수 있는가? , 행함이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 행함이 없는 자는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 행함이 없는 자는 자신은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 그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띠고 있으니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듯이 보입니다.
‘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 ‘행함 없는 구원?’이 등장하게 된 요인
그런데도 왜‘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에서는‘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며 이에 대해 굳건한 자들을 향하여 도발적인 용어 사용의 제시를 하는지요. 그것은 그렇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자들의 그 구원 얻은 믿음에 의문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구원파적인 구원론’에 의한 믿음에서 한 번 구원을 받았으면 영원히 구원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어서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행함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곧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의식이 팽배해서 과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행위가 없이 자신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내세우며 그런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알고 있는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에서입니다.
만일에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구원파에서 말하는‘구원파적인 구원론’의 사고를 갖는 믿음에 있다면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구원파적인 구원론’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이미 그 문제점을 잘 알고 있기에) 개혁주의신앙을 말하며 개혁교회를 내세우는 개신교의 교회들인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구원파적인 구원론’이라는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그 믿음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죠.
과연 그런지요.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을 받으며 개혁주의 신앙에 서 있는 개혁교회는‘구원파적인 구원론’을 신학의 구원론에서 가르치는 바가 없으며 따라서 개혁주의 신앙에 서 있는 개혁교회의 신자들은‘구원파적인 구원론’에 의한 믿음을 말하며 그 믿음에 있지 않습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순전한 전파에 있는 참된 교회와 그렇지 않은 거짓된 교회를 구분하고 있으며, 참된 교회를 이룸에 있는 참된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서는 그 누구에게서도‘구원파적인 구원론’에 의한 믿음에 있지를 않습니다. 만일에 누군가에게서 그러한 믿음에 있는 것을 본다면 그는 참된 교회가 아닌 거짓된 교회에서일 것입니다.
그러한데 말입니다.‘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이 문제 삼고 있는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보는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왜 인지요.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구원파적인 구원론’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왜 인지요. 그것은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함은 없다는 것에서입니다. 그리고 그 행함이 없는 것의 주된 요인은‘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에 대해 잘못 알고 있어서‘행함이 있는 구원/ 행함이 있는 믿음’을 도외시한 때문이라고 보고 있는 것에서입니다. 그 까닭에 행함이 없이 구원을 받았으며, 이렇게 받은 구원은 단 한 번에 된 것으로 영원히 구원을 받은 것이기에 이 구원은 잃어버리지 않으므로 행함하고 상관없이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잘못 알고 있어서 잘못된 믿음에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문제의식을 갖고서‘리얼 크리스챤 – 올바른 구원관’을 제시하여 한국교회가‘리얼 크리스챤 – 올바른 신앙관’에 있게 하자는 운동을 펼쳐나가고자 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 ‘행함 없는 구원?’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
그런데 이를 말해 나가는 분들의 말 곳곳에서 이들의 문제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이들이 문제 제기하는 시작으로 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이 무엇인가? 하는 것인데, 권연경(동영상에서 그의 이름이 밝혀져 있으므로 여기에서도 이름을 밝힙니다)은 자신이‘행위 없는 구원?’이란 책을 쓰게 된 이유, 그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행위가 없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행위가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결국은 우리로 하여금 그 구원의 길을 가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가‘행위 없는’에 너무 꽂히니까 하나님의 능력으로라는 긍정적인 측면을 놓치고 있으므로‘행위 없는 구원?’을 통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은‘행위로 얻지 못하는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행위가 없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잘못되었습니다. 더욱이‘행위 없는 구원?’이란 책의 제목 자체가 잘못되었습니다. 아주 모호한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구원 얻음에서의 행위를 다루는 것인지, 구원 얻음으로의 행위를 다루는 것인지를 알 수 없는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경우에서 행위와 구원을 다루는 것이라면“‘행위 없는 구원? ’, 그렇다! 선한 행실이란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를 말하는 것이 되어야 하며, 후자의 경우에서 행위와 구원을 다루는 것이라면“‘행위 없는 구원? ’, 아니다! 구원 받음에서 그의 안에 내재해 계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발휘되는 의의 속성에 따라 맺어지는 열매, 곧 성령의 열매가 나타남이 있으니 성령의 소욕을 좇는 행위(선한 행실)는 그가 받은 구원을 누리는 삶을 가져나가는 것이다.”를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권연경은‘행위 없는 구원?’에서 이 중 어느 하나를 가지고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 글을 써 나간 것이 아니라, 둘 모두를 포함하고서 글을 써 나간 것이기에‘믿음으로 얻는 구원은 행위 없는 구원이 아닌 행위 있는 구원’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져온 행위 없는 구원에 있는 믿음에서 벗어나 행위 있는 구원에 있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이란 견해를 가지고서 이를 주장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 ‘행함 없는 구원?’에 대해 반론함
1.“성경은 행함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을 선포하고 있지 않다”:“구원 얻는데 행위가 필요하다/행위로 구원 얻는다”에 대해 반론함
그가 이러한 견해를 통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이 한국교회적 상태와 관련하여서 이해는 하지만, 이로 인해 잘못된 주장을 말하는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행위가 없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 행위가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이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순종을 요구하는데,…”라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도 여실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과는 달리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말이죠.‘행위로 얻지 못하는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의 행위로 얻지 못함은 예수님과 사도 시대 당시에서 보게 되는 유대교의 전통적인 구원관인 율법을 지킴에 있는 행위에 의한 구원에 대하여 그들의 잘못된 구원관을 교정시켜 주시는 것으로 할례, 절기, 정결 규례 등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에서 구원 얻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영접)으로 구원 얻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라는 것을 말함에서 입니다. 따라서 행위로 얻지 못하는 구원에서의 행위는‘행위 없는 구원?’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에서부터 행위가 있었다는 것으로 말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반에 행위 있는 믿음으로 삶으로써 구원의 최종 완성에 이를 것을 말하는 행위와는 다른 것입니다.
권연경 자신도 바울이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을 말함에 있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믿음에 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알고 있는 개종한 유대인들에게서 여전히 고정되어 있는 잘못된 유대주의적 구원관에 대항하는 것에서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권연경은‘행위 없는 구원?’이란 책명의 주제를 통해서 행위 없는 구원이란 없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행위로 얻는 구원임을 말하며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위가 없는 것의 문제점을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부정함에 있는 것으로 말하며 또는 믿음과 함께 행함으로 얻는 구원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행위가 없이 단지 오직 믿음으로라는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신데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종하는 행위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기에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는 행위에 있었다고 보아 순종을 행위의 개념으로 보는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행위가 필요하다. 설사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표현까지는 안 갈지라도 구원 얻는데 행위가 필요하다”고 말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바가 구원 얻는데 요구되고 있는 것이 행위(순종)라고 하는 것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이 순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이‘행함으로 얻는’을 말하는 행위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하나님의 구원에 굴복케 하여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에서‘믿음으로 얻는’을 말하는 은혜/선물의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0-28)
만일 행위 없는 구원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행위로냐? 믿음으로냐? 하는 문제이면, 행위로 얻지 못하는 구원이니 의당‘행위 없는/행위로 얻지 못하는 구원이다’라고 답변함이 옳습니다. 만일 권연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에 있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말하게 되는 행위를 다루는 것에서‘행위 없는 구원은 없다’라고 한다면 그 말은 문제 삼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을 받음에 있는 사람에게서 그가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의의 빛의 반영으로 나타남에 있는 의로움의 행위가 당연히 있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관련된 몇 몇 구절에서 봅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엡 5:8-9, 13)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5)
그런데‘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관’에서의 내용의 전개를 보면, 권연경이 말하는 것은 그 의로움의 행위가 당연히 있기 마련인데, 그 행위가 없으면 그에겐 구원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의로움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최후 심판 때에 드러날 것이며, 이때 각각 그 행한 대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에서입니다. 그가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원 얻는 믿음에서부터 믿음으로 구원 얻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에 있은 행위가 있었다고 보아 그 믿음의 행위로 구원이 시작되고 여기에 합당한 의로운 삶을 살아 마침내 구원의 완성에 이른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의의 행위는 한국교회 신자들이 구원관을 잘못 알고 있으며 그래서 잘못된 믿음생활을 해 나가는 것에서가 제대로 된 올바른 믿음생활을 해 나가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으로 행하여 나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아냥거리며 조롱하여 멸시하는 소리를 듣는 행위에 있는 한에는 잘못된 믿음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후 심판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굳게 믿고 있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에서 그러한 잘못된 행위에 있지 않는, 그래서 이러한 소리를 듣지 않는 의로운 행위에 있어 나가는 것에 기독교가 있어야 할 것을 말하며 기독교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들으며 존경받는 행함을 가져나가야 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한 때 유행했던 구원 받은 자가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를 거룩하게 만들자며 모든 도시를‘성시화’할 것을 운동으로 펼쳐나간다든지, 남은 삶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서 온 땅에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여 뭇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게 하자는 것에서‘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오게 하자’니 하는 따위의 구호와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아니면 말입니다. 각 지역의 교회 또는 종교에 속한 기관들이 행하여 나가는 구호, 자선, 식사 제공 등에서 펼쳐 나가는 선행의 행위에서 구원 얻는 기독교의 행위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이 모두에서는 공히 사회(세상)에서 죄를 짓는 악을 행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야 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성도를 위하여,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의롭게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에서 구원 얻는 믿음을 보며 이를 말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중세교회에서 보는‘공적 신앙에 의한 구원관’이 스며들어 있는 것으로 이것의 모습이‘행위 있는 구원’이란 현재의 모습으로 포장만 새것으로 달리하여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는 그 행위가 구원 얻는 필요 요구 조건으로 등장하는 것이니 만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에 반하여 충돌이 됩니다.
그러므로 권연경이‘행함 없는 구원?’이란 책을 통하여, 그리고‘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에서의 대담을 통해“바울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행위가 없이 믿음으로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시고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라고 하면서“구원은 행위로 얻는다/행위로 구원 얻는다”라고 말하며 이보다 완곡하게 표현하는 것에서는“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행위가 필요하다”라고 말하여‘행위 있는 구원’을 말하는 것에, 개혁교회를 지향하며 참된 교회를 이루어나감에 있는 교회는 반박하며‘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해야 합니다.
2.“법정적 칭의를 받은 자는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관계적 칭의에 있어 나가야 한다”:“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에서의‘행위에 의한 구원의 완성’에 대해 반론함
한편,‘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에서의 대담에는 김세윤(이분 또한 대담에서 이름이 밝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그대로 밝힙니다)도 등장하는데, 그는 법정적 칭의와 함께 관계적 칭의를 칭의란 한 저울의 양쪽에 달린 균등한 추의 개념에서 동일한 중요성으로 다루면서 법정적 칭의에만 머물러 있는 한국교회적 상황1)에 문제를 제기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칭의는 법정적 의미만을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의 회복이라는 관계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칭의론을 법정적인 의미인 하나님으로부터 무죄선언을 받은 신분의 의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세례 받을 때에 심판 때 받을 의를 미리 받아 이미 의인으로 칭함 받았다고 여기고서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나가는 윤리적 의무는 져버림으로써 윤리 없는 구원의 확신이 들어왔다. 그러나 칭의는 법정적 의미와 함께 관계적 의미도 있다. 칭의는 법정에서 무죄선언, 의인이라는 신분을 얻음과 함께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을 해주신다. 우리는 순종하는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관계 속에서 머물음이 포함 되었다. 즉, 윤리가 그 속에 내포된 것이다. 하나님 은혜에 의지하고 신뢰하며 은혜로 살고자 한다. 순종한다. 그런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 칭의다. 이렇게 칭의를 법정적 관계론적 양쪽으로 다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칭의를 받아들이고 그렇게 의롭다함을 받는 사람은 당연히 윤리적인 삶, 거룩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을 한국교회가 가르치지 않는 것은 큰 문제이다. 그럼에도 윤리나 행함이나 또는 거룩함을 이야기하면 행위구원론자라고 비판한다. 이는 아주 큰 과오다. 우리가 칭의가 세례 때부터 현재 최후 심판 때까지 은혜에 의한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이다. 성령으로 구원의 첫 열매를 이미 받았지만 완성은 아직 아니다. 그 구원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자는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가져나가는 순종에 있다. 그러므로 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김세윤은 말하자면 예컨대,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나무에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믿음으로 접붙임을 받아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의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함과 거룩하다 함의 꽃을 피웠으므로 그 열매의 무르익음에 있어 마침내 탐스런 좋은 열매가 수확되어 하나님의 나라에로 저장됨에 있는 전 과정에서 구원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한국교회가 법정적 칭의의 의미와 그 중요성에만 강조할 뿐 하나님과의 관계적 칭의에는 힘쓰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관계적 칭의의 중요성도 강조하여 부각시키는 것에서 구원 얻은 자에게서 순종 없는 믿음은 없다는 것에서 또한 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순종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즉 순종 없이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에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음으로 의롭다 함에 있는 자에게서는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믿음의 관계를 가져나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소원으로 품고 따름에서 의로운 삶을 사는 순종을 성령의 소욕을 좇음에 의하여 가져나가기 마련인데, 이러한 순종이 없는 구원이 있겠느냐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를‘칭의와 성화’의 강의에서‘하나님의 자녀(백성)된 자의 삶을 살기’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나 글을 대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그에게 동의를 하며 지지를 보내는가 하면,‘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를‘순종 없이는 구원은 없다’로, 그래서‘순종 있는 구원’, 곧‘(순종하는)행함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는 것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칭의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그에게 반론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과연 그야말로 이러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적 칭의에 있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론적 칭의를 가져나가는 것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어 비로소 구원을 얻는 것이라면 법정적 칭의에서 말해지고 있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거나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1) 최종 판단을 받는 최후 심판에 이를 때까지는 온전한 칭의, 온전한 구원이 아닐 뿐만 아니라 (2) 또한 최후 심판 때인 미래에는 의롭다 함을 받았고, 그래서 구원 얻었다고 알고 있는 칭의, 구원이 실효(상실)될 수 있다는 것을 포함하며 (3) 법정적 칭의(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었는데, 관계적 칭의는 윤리가 내포된 순종의 행위에 의해서 무르익어가 온전한 칭의인 칭의의 완성에 이르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순종 없이는 이미 법정적인 칭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칭의가 온전한 칭의, 완성된 칭의에 이를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설사 (1)과 (2)의 뜻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적 칭의에 있는 삶에 의해서 비로소 온전한 칭의, 완성된 칭의에 이르는 것인가 할 때 그렇지가 않습니다.
칭의는 구원 얻은 자에게서 법정적 칭의와 관계적 칭의로 구분하여 칭의의 개념과 그 성격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의 서정으로 말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따른 구원의 예정에서 시작되어 (1)소명 – (2)중생 – (3)회심 – (4)신앙 – (5)칭의 – (6)양자 –(7)성화 - (8)견인 - (9)영화2)가 하나님의 구원이란 하나님이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한 사건에서 다루어진 동시적인 것이란 구조의 틀에서 다루어집니다. 이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인 발생에 의한 순차적인 사건의 발생인 순서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한 사건을 아홉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 논리적인 순서의 나열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구원 얻은 믿음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견인은 성도에게서 현재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요 마지막 단계로 다루어지는 영화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있을 미래적인 것인데도 그 앞의 순서들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것에서 동시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서정에서 말해지고 있는 순서의 모든 것을 창세전에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실 것을 정하신 데 따라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의 안에서 이루실 것이 십자가에서 행하신 구속 사역으로 이미 완료됨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가 이 십자가의 도 안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구속하신 공효에 의해 죄 없다 하심을 선언하심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효력을 미쳐 모든 죄로부터 깨끗함에 있게 하시니,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해 주심에 있게 됩니다(롬 5:9-10). 그러니 말이죠. 구원이란 법정적인 선언을 받은 때부터 최후의 심판 때까지 점차 구원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 없이 함을 받으므로 장차 올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죄인들에게 추상같이 임할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을 받음에 있어 임하지 않을 것이므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 최후의 심판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칭의가 완성되고 구원이 완성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에서 흘리신 피에 의한 단 한 번의 구속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의 의가 되실 것이 약속으로 주어졌을 때 약속하심 그대로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완전한 의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의 효력이 예수 안에 있는 자를 정죄 받음에 있지 않도록 그들의 모든 죄를 사하여 깨끗함에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칭의가 최후의 심판 때에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도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칭의를 법정적인 선언에 의한 것은 신분적인 칭의이며 관계적인 칭의를 가져나감으로써 수준적(상태적) 칭의에 도달한다는 것으로, 그리고 이것을 성화로 가르쳐오는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의로운 자는 더욱 의롭게 하실 것이며, 불의한 자는 더욱 불의하게 하실 것임
그러나 말입니다. 칭의를 법정적인 의와 관계적인 칭의로 구분하여서 말할지라도 그 모두에서 미치고 있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효인 구속을 통해 오는 하나님의 의는 성도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두고서 그를 의롭다 하심에 또한 거룩하다 하심에 있게 하십니다(계 22:11b). 이를 모든 불의한 자들 앞에서 당당히 드러내시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최후의 심판 때입니다. 불의한 모든 자들은 그들의 불의함으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음에 따라 형벌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의 처소인 지옥에 내던짐을 받을 것입니다만,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의 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의 보혈로 그들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셨음으로 다시는 송사를 받지 않으며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에서 자유한 성도들은 더 이상 율법을 범함에서의 죄에 따르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저주스런 삶에 있지 않습니다. 이제는 율법에 나타내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는 하나하나가 다‘그리스도의 법’을 실현하는 삶을 살아감에 있습니다. 그러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는 것으로서가 아닌 희락과 화평의 공동체를 실현합니다. 교회가 그것입니다. 이렇게 함이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는 것에서의 생명이 발휘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인하여 그분의 사람으로 또는 그분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에서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로 살아갈 것이며, 여기에 고난 받음이 뒤따른다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며 사는 것에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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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 조직신학의 구원론에서는 칭의를 “롬 3:20, 24, 28의 ‘의롭다 하심’(디카이오)은 그 뜻이 죄인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의 신분을 가지게 하는 칭의의 법적 행위를 언급함이다. 롬 4:25, 5:18의 의롭다 하심은‘디카이오시스’인데 그 뜻은 죄인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을 때 그리스도의 의가 법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 결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란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포하는 것을 말함이다.”라고 다루고 있다. 최영교, 「평신도를 위한 조직신학」(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부, 2000), 176-177. 칭의를 법정적 의미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의롭게 하다’(to justify)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용어는‘히체띠크’인데,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신분이 율법의 요구와 조화가 된다고 법정적으로 선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의롭게 하다’에 쓰인 단어들이 의미하고 있는 바는 엄밀히 법정적 또는 법적이다.”에서처럼 루이스 뻘콥의 견해에서도 확인된다. L. Berkhof, 「뻘콥 조직신학 : 제5권 구원론」, 고영민역(서울: 기독교문사, 1981), 202. 칭의에 대해 갖는 이러한 개념은 개혁주의 신학에서 보게 되는‘칭의론’이다. 바울은“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할 수 있겠느냐? 누가 이 하나님의 택하심에 있는 자를 송사할 수 있겠느냐?”(롬 8:33, 34)라고 말하여 칭의의 은혜를 입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확고함을 흔들며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을 말한다.
(2) 김세윤은 한국교회가 칭의론을‘법정적 칭의’에만 머물러 있고 관계론적 칭의에는 관심을 갖지 않으며 이를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기독교의 조직신학(교의신학)에서는 구원론에서 칭의론을 법정적 칭의의 의미에서 가르치고 있다. 이는‘의롭게 하다’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부터 법정적인 선언의 의미를 지닌 것을 통해 칭의의 개념을 설명해 나가는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관계론적 칭의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계론적 칭의로 말하고 있는 것을 분리하여서 성화론으로 가져나가는 때문에 김세윤에 의해서 표현되고 있는 관계론적 칭의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한국교회는 성화론을 무척이나 강조하며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화론은 대체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반면에 김세윤은 칭의와 성화를 하나의 구원에 대한 두 가지 그림 언어로 설명하여 동일한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옳게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칭의론을 법정적인 칭의와 관계론적 칭의로 구분하고, 관계론적 칭의를 성도의 윤리적인 삶의 실행의 성격으로 말함으로써 사실상 한국교회가 말하는 성화론을 말하고 있는 것이 되고 있다. 그는 관계론적 칭의의 삶을‘하나님의 자녀(백성)로 살기’로 표현하는데, 그것을 무엇을 하기와 안 하기의 계명으로 스스로 만들어 세워놓고는 거기에 맞춰 사는 기독교적인 종교 생활을 뜻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가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에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에서 말한다. 이는 성도의 삶 전반에서 행해지는 것이니, 기독교가 조롱과 멸시조로 불리고 있는 개독교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며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존중되는 선한 행실을 가져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는 한국교회가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성화론의 또 다른 용어적 표현에 다름 아니다.
2) 구원의 서정에서의 나열은 견해에 따라 그 수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양자를 순서에 넣기도 하는가 하면 순서에 넣지 않기도 한다. 회심과 신앙을 하나로 보기도 하고, 칭의와 양자됨을 하나로 보기도 하며,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보기도 한다. 성경에서의 구원의 서정이 직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은 로마서이며, 이곳에서의 구원의 서정은 단 네 가지이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에서 보게 되는 (1)구원의 예정 (2)구원의 소명 (3)의롭다 하심 (4)영화롭게 하심 이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이 네 가지 외에도 성경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구원론적인 교리적 용어를 사용하여 네 가지 사이에 구원의 논리적인 이해에 의해 순서 있게 집어넣음으로써 오늘날에서는 대체적으로 구원의 서정을 아홉 가지 순서에 의해서 이해하고 있다.
* 본 글을 씀에 있어서 혹 '리얼 크리스챤 - 잘못 알고 있는 구원론'에서 대담하시고 있는 분의 취지를 오해하여 본 뜻과는 다르게 쓴 부분이나 그 내용이 있으면 그것은 대담의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서 필자의 짧은 이해의 소견에 따른 것임을 밝힙니다.
첫댓글 깨우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천우 목사님~ 평안하시죠?!! (이메일 잘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