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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2)
- 로마서의 믿음, 야고보서의 행함 -
로마서 1장 16-17절 /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1)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2)가 나타나서3)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4)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야고보서 2장 1-24절 / 1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 16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에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의‘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 의해서 그 유명한‘이신득의’, 또는‘이신칭의’란 용어에 의한 칭의의 은혜 사상이 말해졌습니다. 바울이 이러한 말을 한 것은 선지자 하박국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외친 바인“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를 인용하는 것에서입니다. 하박국은 남왕국 유다 왕 여호야김(B.C. 609-598)이 통치하고 있을 당시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를 바벨론이 멸망시키고(B.C. 612년),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이집트 전역을 차지하며 제국을 이루고 있으면서 또한 남왕국 유다를 침공함으로써 유다가 멸망당할 풍전등화의 화를 입기 직전의 기간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예언의 말씀을 받아 하박국서를 기록하였습니다.5) 이 동안에 보인 남왕국 유다 왕 여호야김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친외세 성향을 갖고 있으면서 외세의 힘을 의지하는 정책을 쓰는 때문에 조공을 바치는 것을 비롯하여 사치한 궁중 생활로 백성들에게서 과도한 세금을 걷고 노동력을 착취함으로 여호야김은 백성들에게 포악한 왕으로 남습니다. 그러한 유다를 향하여 하박국은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합 1:13)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외세의 힘으로 나라를 지탱하려 들 뿐만 아니라 안의 권력은 악하고 부패한 정치가 계속되어 무죄한 백성들을 억압함에 있을 뿐인 것에 대하여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것에 정결하신 하나님께서는 제 힘을 믿으며 제 멋대로 사는 악인을 심판하여 아무도 살아남에 있지 못하게 할 것임으로 그들의 압제로부터 의인을 건지실 것이니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실 것”(합 2:4)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음에 유다가 있음을 알게 해줍니다. 여기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동격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그 ‘믿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실 것인 ‘하나님의 약속’을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이죠. 의인으로 살게 하는 것인 믿음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선지자 하박국의 하나님의 약속의 선포를 인용하여 그것의 실현(성취)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인 죽음과 부활의 복음에 의해서 있는 것으로서“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고,“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라고 전파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에 나타내신 구원 얻는 복음으로 주신 것을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지요.‘오직 의인은 믿음으로’입니다. 그리고 믿음은‘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짐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은 이의 실현(실행/행함)을 독생하신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해 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믿음으로’에서 말해지는‘행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여 나가시는 것에 계시는 것에서이니,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을 보며 그 은혜를 입는,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에 있는 것에서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사도 야고보가 실예를 들어‘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약 2:23)인데, 아브라함이 한 분 하나님을 믿으니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해 나가실 일인 하나님의 약속을 주심에 따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계획)을 깨달아 알아가며 그 믿음에 있게 해 나가시는 것에서“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약 2:21)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니, 이는“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바인, 이삭을 제물로 바치게 한 때에 이르러서 그동안“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에 있어온 아브라함의 믿음을 세상에 드러내셨다는 것에서 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바인“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21-22)는 것에서 보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것에서의 행함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위해서 이런저런 일을 행함에 있었다는‘행위의/행위에 의한 믿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에 있게 해 나가시는 것에 아브라함이 따름에 있게 하시는 것이죠. 그러니 이것은‘하나님의 역사’, 또는‘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해지는‘하나님의 행하심’이죠.
가령 말입니다. 연로하신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것으로 예를 들어보죠, TV를 사드려서 부모님이 사시는 동네 너머의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해 드렸습니다. 일출 또는 일몰이 있는 바다와 그 해변의 아름다움을 보시며 그 세계의 신비함에 매료되어 한 번도 바다를 구경 못했는데 한 번 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졌습니다. 아들과 딸이 그 이야기를 듣고서는 보고 싶은 바다의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해변을 거닐 수 있게 반드시 해 드리겠다고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 부모님께 말씀드렸습니다.“아버지, 어머니, 오늘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바다에 가시죠”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부모님을 승용차에 태워 모시고서는 동해 바다로 향하였습니다. 한참을 달려 정동진에 도착하였습니다. 해가 저물어 시뻘건 불이 타는 듯한 해가 서서히 바다 속을 향하여 지는 광경을 보여드렸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동안 그 광경을 보시며 매우 흐뭇해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얘야, 고맙다! 오늘 네 덕분에 아름다운 바다와 함께 해 지는 모습을 잘 보았구나!”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말이죠.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몰의 바다를 봄에 있었던 것은 아버지, 어머니가 행하신 행위인가요? 아니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몰의 바다를 볼 수 있게 해 드린 아들과 딸이 행하신 행위인가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몰의 바다를 보았는데, 그래서 일몰의 바다를 마침내 본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인데 이렇게 그 부모님이 일몰의 바다를 볼 수 있게 한 행함에 있은 분이 누구시냐는 것입니다. 두 자녀인 아들과 딸이죠. 부모님은요. 그의 아들과 딸이 행하는 것을 따름에 있었을 뿐입니다. 부모님이 일몰의 바다를 보게끔 하는 일은 아들과 딸이 다 행한 것입니다. 부모님은 아들과 딸이 행하는 것을 신뢰를 갖고 바라보고 마침내 눈으로 보며 그 보는 것에 있는 즐거움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에 있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아브라함의 행함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루어 가실 약속의 행하심을 아브라함이 보며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것에서 이죠. 이를“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떠나게 하여 그에게 주실 땅에서 그와 그의 후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며 천하 모든 민족이 그의 믿음과 함께 하는 것에서 복을 받게 하실 장차 메시야로 그 모습을 나타낼 약속의 씨(자손/아들)를 통해서 해 나가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에 있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지시대로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사건을 겪는 것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알려주셨던 자신에게 약속하신 씨(자손/아들)에 의해서 행하실 장차 되어질 일을 깨달음에 하실 것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에 따라 앞으로 실현해 가실 하나님의 계획된 일에 있게 하실 것에 대해서 알려 주십니다.“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창 22:16-18).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장차 하실 일에 믿음을 갖고 따를 것에서 자기 종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와서 함께 브엘세바로 돌아가 브엘세바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야고보가 말한 아브라함의 믿음에 설명하고 있는 그의 행함인“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가 아브라함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서 무슨 행동을 가졌다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인지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실 일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믿음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 곧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아브라함이 따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으로 이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말씀해 주심을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을 오직 믿음으로 얻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자를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며,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 또한 이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며,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한다며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산 믿음이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서는 구원을 얻지 못할 수 있다거나 또는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서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며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면 이는 로마서에서의 바울이 한 말과 야고보서에서의 야고보가 한 말의 진의(본의/원의)를 알지 못하고 곡해하여 왜곡시키거나, 애써 이를 부인하는 것에서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 그리고 이것에서 설명하여 말하고 있는 그의 행함을 실예로 들게 된 것은 당시에 처한 교회가 어지럽혀지고 있는 상황에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한 믿음에 있으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하나 된 몸에 힘써야 할 성도들인데, 사람을 외모로 보고 존대하여 존중히 여기는가 하면 천대하여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짐으로써 사람을 차별하여 가르는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죄에 있는 것을 보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율법에서 가르쳐주시고 있는 정신을 일깨우는 것에서입니다. 율법 앞에서 사람은 율법 전부를 범함에 있는 죄에 있습니다. 율법에서 어떤 하나라도 범하면 율법 전부를 범한 죄에 있으며, 이는 율법에 주의하며 조심있게 행동할지라도 언제 어느 때이고 간에 율법에 반한 행동을 하면 그동안 지켜온 율법 준수는 다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율법의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을 자유케 한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의 피에 의한 대속의 공효에 있는 자비로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이 자유를 주는 그리스도의 법에 의하여 판단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이면 그가 입은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자비의 부요함에 있습니다. 그는 이것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받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있는 복에 있는 것이며, 또한 그가 받은 이것으로 그와 함께 하는 모든 사람을 아브라함이 받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에 있는 복에 있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따름에 있는 성도의 믿음은‘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법을 실현해 감에 있습니다.6) 유대인과 이방인이 외모로 다루어지지 않으며 차별을 갖지 않듯이 부자와 가난한 자는 그 겉모습으로 차별을 갖지 않으며, 사람의 겉모양으로 이 사람과 저 사람으로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표면적 유대인이 참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참유대인인 까닭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요 하나님의 영이 거한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름에 있는 한 분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한 성령을 받아 하나 됨에 있어 믿음이 하나이요 그 믿음으로 섬기는 주도 한 분이심에 있는 성도는 서로 갈라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에 있는‘한 몸’의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께서 십자가의 피의 공효를 가지고서 행하시는 일이 이것입니다. 성도의 믿음은 이 자비에 부요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가 생명력 있게 발휘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시고 또한“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22, 24) 라고 말씀하신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자비에 부요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나라를 훼방함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을 건실하게 세워나가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육체로 상대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며 갈라놓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을 찢는 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성령의 사역을 훼방하는 명백한 죄인 성령훼방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은 악한 영의 사주를 받아 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신자요 적그리스도이지,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하고서야 그의 믿음을 참되다고,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지요. 아닙니다. 그 믿음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그리스도의 법의 실현(성취)이 없는 거짓된 믿음이므로 믿음에 있는 생명력이 전혀 없으니 죽은 믿음일 뿐입니다. 성도 중에서 참된 믿음이 있고 거짓된 믿음이 있으며, 성도 중에서 산 믿음이 있고 죽은 믿음이 있는 구별이 아닙니다. 성도에게서는 그에게 임하신 성령의 사역에 의해 그리스도의 법이 실현되는 믿음이 있습니다만, 성령의 함께 하심이 없어 그리스도의 법이 실현될 수 없는 자에게서는 성도에게서 말해지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의 구별을 하는 것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 참된 믿음과 거짓 믿음,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이 말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에 있을 때 성경은 행위 없는 믿음, 또는 행위 없는 구원을 말하지 않으며, 성경은 행위 있는 믿음, 행위 있는 구원을 말한다거나 행위 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진리(원리)에서 벗어나 있는 참으로 잘못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이는 야고보서에서 언급되고 있는‘행함’(행위)에 대한 이해를 올바르게 가져나감으로써 여기에서의‘행함’이 기독교적인 도덕과 윤리에 의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때 분명히 그러합니다. 야고보서에서의‘행함’은‘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해 가시는 것에서의 교회의 하나 됨에 성도의 믿음이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다루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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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원이 왜 행함과 관계가 없는 ‘오직 믿음으로만’인지를 잘 설명하여 주고 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구원이다. 사람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2) ‘의’는 일반적 개념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법률적 공의를 의미한다. 이 용어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성에서 쓰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본성과 표준에 일치하는 것을 나타내어서 하나님의 뜻의 실현에서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영접’ 함에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칭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로 오셨으며, 그 하나님의 의를 입음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에 있는 자를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하시니, 이를 ‘칭의’라 한다. 한글성경의 번역 일부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를 사람을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게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의 나타남’으로 봄이 내용에 부합하다. 즉,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이시다.
3)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죄인이 얻게 되는 은혜로서의 의가 제시 됨이다.
4) 개역성경 및 개역개정성경이 취하고 있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에 대해서는 번역이 다양하다. 우리말성경도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고, 바른성경, 한글킹제임스도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니” 라고 번역하였으며, 킹제임스흠정역은 “믿음에서 믿음까지”, 카톨릭성경은 “믿음에서 믿음으로”라고 번역했습니다. 새번역성경은 “이 일은 오로지 믿음에 근거하여 일어납니다.” 또는 “이것은 믿음에서 출발하며 믿음을 목표로 합니다.” 라고 번역하고 있으며, 공동번역은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현대어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쉬운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성경은 “오직 믿음으로만”이라는 번역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 모두에서 보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의 믿음은 별개의 성격을 띤 믿음이 아니라 동일한 하나의 믿음이다. 학자들은 이 구절에 대해서 해석의 어려움을 말하나, 선지자 하박국이 선언한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합 2:4)에 의해서 말해지고 있는 것인 만큼 동격의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입음에 의해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함에 있는 믿음으로 사는 것에 있을 것임을 뜻한다.
5) 하나님께서 다윗을 유다와 함께 온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움에 의해서 시작된 다윗 왕조는 르호보암 왕 때인 B.C.931/930년에 분열되어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인 한 이스라엘의 두 국가 체제를 갖는다. 이스라엘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B.C.722년에 망하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B.C. 586년에 망할 때까지 B.C.1010부터 425년간 지속되어 왔으나,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정복당한 B.C. 586년을 기점으로 국가로서의 체제는 제국에 종속된 모습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세계를 지배한 강국 앗수르 – 바벨론 – 바사(페르시아) - 그리스 – 로마에 의해 멸망당한 나라의 모습으로 있으며, 1918년 이후 영국이 차지하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의 독립 국가를 선포하기까지 이스라엘은 주권적 영토의 나라 없이 존재해 왔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 왕과 맺은 언약에서 약속해 주시고 있는 다윗 왕국은 없어지지 않고 존재하고 있었으니, 다윗과 맺은 언약의 씨(자손)으로 오시는 메시야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원한 나라이다. 이 언약을 받음에 있는 유다의 왕이지만 여호야김은 하나님을 의존함에 있지를 않고 외세를 의지하여 바벨론과의 전쟁으로부터 유다의 존속을 가져나가고자 하였다. 하박국서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유다가 있음을 선포하는 기록을 해 주시고 있다.
6) 야고보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약 2:17, 18, 22, 24)에서의 ‘행함’은 온 율법에서의 정신에 나타내 주시고 있는 자비인 ‘그리스도의 법의 실현(실행/성취)’에 있는 것에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실현에 있는 것은 이를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의 사역에 성도의 믿음이 있다는 초점과 그 강조점이 말해지고 있는 것이지, 성도의 믿음에 하나님을 위한 어떤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도하고자 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