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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3)
-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의‘행위’에 대해 생각함 -
바울은 선지자 하박국이 전한 말인“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를 인용하여 하나님의 의로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것을 말함에서‘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말하였습니다. 행위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음에 아무런 조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에게서 있게 되는 행위를 가지고 구원 얻는 행위에 있는 믿음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하며, 행위 여부로 구원 얻는 믿음인 것과 구원 얻지 못하는 믿음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을 봅니다.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을 얻은 자에게서 행위는 성도들 간에 말하는 것에서 보통 듣게 되는 믿음(신앙)생활이란 말로 쓰게 되는데, 믿음으로 사는 삶,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이는 바울이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한 것에서 보게 되는 하늘(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에서 하늘에 계신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에게서의 행위는 믿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 얻는 필요 요구 충족 조건으로서가 아닙니다. 만일 그럴 경우에는 신자는 그에게 있는 행위 여부로 믿음의 진위 및 정도를 판단 받게 될 것입니다. 참된 믿음인지 거짓 믿음인지 말입니다.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좋은 믿음인지 좋지 않은 믿음인지, 큰 믿음인지 작은 믿음인지, 강한 믿음인지, 약한 믿음인지…. 그럴 경우 주께로부터 온 믿음을 놓고 이것의 진실 여부를 말하는 것이 되며, 그 진실 여부로 구원의 천당과 멸망의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이 있는 것조차도 상급을 결정하는 등급의 판단이 되어서 그리스도인을 최고의 공신으로부터 최하의 공신으로 줄 세우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해서 말입니다. 행위를 보고서 참되고 진짜이고 좋고 크고 강한 믿음이라고 판단되는 것을 보는 때에는“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거야”라고 하며“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스릴 성(고을)을 수고한 만큼 차지할 것이니 많이 수고한 자는 많이 차지할 것이요 적게 수고한 자는 적게 차지할 것이다”라고 하거나, 거짓되고 가짜이고 좋지 않고 작고 약한 믿음이며 믿음이 없다거나 믿음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것을 볼 때에는“믿음이 저러고서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나 있겠는가?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 갈거야!”라고 하며“있는 것도 빼앗기고 슬피 울며 이를 갊에 있을 것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에게서 있게 되는 행위는 일반인들이 사는 것에서 갖는 행위와 다른지요. 먹고 마시며 공부하며 일하며 놀며 쉬며 자며…이 모두에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에서, 벗이나 동료를 만나서 가져나가기도 하고, 학교나 직장 또는 사회단체에 의한 공동체 활동에서 가져나가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지키고 따르며 또한 고려하고 배려하는 질서와 규범이 있습니다. 그것을 도덕과 윤리에 의해서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선한 행실에 있어 착하게 살아야 할 것을 어렸을 적부터 교육 받으며 따르지 못할 때 훈계 받으면서 자랍니다. 옛부터 어른들이 말해오는 군자(君子)에 이름은 여기에 충족될 경우입니다.
성도에게서 요구되는 행위란 것이 이런 것인지요. 예수 믿기 전에는 군자에 이름을생각하고 마음먹기는커녕 자기중심적으로 자기를 위하여 살고 제 멋대로 살아 도덕성이 결여되어 있었고 윤리적이지 못하여 사람다운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면서 살았기에 이렇다 할 행함이 없이 살았으니깐, 그래서 사람답게 못 살았으니깐 예수 믿는 이제는 제대로 살라는 것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라고 말입니다.
성도에게서 행위를 요구한다고 하면 그 정도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그 이상의 것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죠.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인 성도에게서 행위란 그 행함은 땅엣 것을 가지고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돌아갈 본향인 하늘에 근거하고서 가져나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자는 앞서 언급한 바울이 빌립보서 3장 20절에서“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한 것에서 보게 되는 하늘(하나님 나라)의 시민 된 자의 삶을 살아가니 곧, 하늘에 계신 구세주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며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를 가리켜‘성도’라고 부릅니다. 성도는 이렇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주께로부터 나왔으며 주로 말미암다가 주께로 돌아가는 자인 것에서 입니다.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3)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고전 3:21)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
그러니 말입니다. 성도는“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는 바울의 가르침을 따름에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성도에게서 그가 살아가는 삶은‘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사는 목적을 띱니다. 단지 자신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무엇을 먹음에 있고 무엇을 마심에 있고 무엇을 일함에 있는 것이 하나님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것하고는 성격이 다르니, 근본적 개념 자체가 다릅니다.
성도는‘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삽니다. 이는 온 율법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강령, 곧 율법의 정신인‘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에 있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전에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었더니,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이룸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율법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된 길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되어 구속의 피를 흘리심으로 성령의 임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러한 성도에게 또한‘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함께 동일하게 율법이 말씀해 주시고 있는 강령, 곧 율법의 정신인‘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에 있어, 전에는 다툼, 압제의 미움의 대상이었더니 이제는 이웃을 사랑함에 있습니다. 이렇게‘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함께‘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이룸에 있을 수 있게 해 주신 분이 율법에서 알게 해 주시고 있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 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네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함께‘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율법을 이룸에 있을 수 있도록 아버지와 함께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하신 성령께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을 은사로 베푸셔서 이 사랑을 행함에 있게 하십니다. 그런 까닭에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사랑을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사랑을 행함에 있는 은사가 어떤 것인지를 다음의 두 곳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하나는 세례 요한이 말한 것입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38-48).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눅 3:7-14)
만일에 말입니다. 행함에 있는다면, 그래서 선행을 한다면 이 정도는 해야 할 것이며,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겠는지요. 해서, 행함에 있는다면, 그래서 선행을 한다면 이 정도는 할 수는 있겠으며, 이렇게 할 수 있겠는지요. 만일 그러한 사람이 있으면 그는 군자보다 더 나은 사람입니다. 그를 성인, 또는 성자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프란체스코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곧 문자 그대로 살고자 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이나 세례 요한은 그렇게 성인, 성자가 되게 하는 것을 의도하는 것에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서도, 세례 요한에게서도 알게 해 주시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함이 없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름에 있지 않는 유대인의 죄의 악함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없으니 악함이 자리하고 있는 그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악한 죄의 성향입니다. 그 죄성에 의해서 행동화 되고 있는 것이 그들의 행위인 삶입니다. 억압, 강탈은 그 특징이며, 여기에 임할 것은 장차 올 진노입니다. 예수께서, 그리고 세례 요한이 그 죄에 있는 자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할 것을 여러 가지를 들어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것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각각 말씀한 것은 구원 얻음에 그러한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믿음의 요구 조건이요 구원의 필요 충족 조건으로 말씀하시는 것에서가 아닙니다. 돌들을 가지고서도 아브라함이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이 임한 자에게서 그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것이죠. 그것은 그들이 그들의 주께로부터 받은 자비(긍휼/사랑)입니다. 자비에 부요하신 하나님, 자비에 부요한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공급되고 있는 것을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하며 힘없는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며 하나님의 돌보심에 있는 그들의 재산을, 그것도 입에 겨우 풀칠하는 참으로 작고 적은 재산을 강탈함에 있는 것은 그들의 주이신 하나님을 대적함에 있는 악한 죄에 있으며, 그 죄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장차 올 진노를 당함에 있을 것임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성도에게 늘 확인케 하는 것은 그의 정체성입니다.“하나님의 아들(자녀)이면~살리라”라는 것이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한 그가 행하는 행위는요. 새로운 피조물의 행위입니다. 그가 한 행위가 의로운지의 여부는 어느 것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냐는 문제입니다. 온갖 행함을 통해서 선함을 보일지라도 그리스도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면 거기에는 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 밖에 있는 비그리스도인, 곧 불신자에게서는 의가 말해지지 않으며, 따라서 의인이 없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스도인, 곧 성도는 최후심판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의에 두시고서 자신을 따름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음에 있습니다. 이것의 실현이 있는 것이 그리스도 그분의 교회입니다. 그에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몸인 교회를 이룸에 있는 그리스도인, 곧 성도는 최후심판 때까지 자신을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품은 마음에서 갖게 되는 생각을 따라 사는 것에 힘씀에 있게 됩니다.
회개와 기도에 있으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인 성도가 그리스도의 자비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행하며 불법을 저지르는데, 그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이를 용납하는지요. 결코 그러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롬 1:28-32)
하나님이 없는 자에게서 나타나지고 행해지는 것이 이러한 데, 하나님이 있는 자에게서 용납이 될 수 있는가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인 성도에게서는 불의하지 않으며 불법을 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속사람/새사람의 원함과 불의하며 불법을 행하려고 하는 겉사람/옛사람의 원함으로 말미암아 언제나 충돌이 일어나는 갈등 구조에 있게 됩니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내가 이로써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5-25)
참으로 회개 없이도 살 수 있는지요. 아닙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하는 탄식 속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시는지를 알기에 죄에 연약한 자신의 존재를 고하며 자비에 부요하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용서를 구함에 있게 됩니다. 그리구요, 그러한 자신이 복음에 담대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함에 있을 수 있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에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서 세월은 이 날의 셈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