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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 : 오직 믿음으로 얻는 구원(4)
- 기독교의 구원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 : 행위구원, 성화구원은 올바른 것인가? -
1. 기독교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는 교회와 그 교단들을 기독교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한문으로 표현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는 자인 성도를 기독교 신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모교단에 속한 모교회를 다니며, 자신을 기독교 신앙을 가진 기독교 신자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대체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의 신앙인지요! 신앙은 신을 숭배하는 종교에 해당됩니다. 어느 인간을 숭배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가 신이어서가 아니라 신격화해서 입니다. 한편, 신을 숭배하는 것에도 그 신이 신이기에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신격화해서 숭배하기도 합니다. 이 경우에는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참되고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며 경외함에 있는 것에는 우상숭배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바다에 있는 피조물을 형상화하거나 또는 가상의 것을 형상화하며 숭배하는 것으로, 그 숭배에 있는 신앙을 거짓된 신앙, 헛된 신앙이라고 말합니다. 이 신앙은 여호와이신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우상숭배에 있는 이방종교에서 보게 됩니다. 이방종교의 신앙은 사람들이 자신을 위하여 우상을 이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고자 구하는 특징을 띱니다. 가령, 지금의 우리나라 시기는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하여 합격을 기원하는 기도를 갖가지 신비한 효험을 지니고 있다는 곳을 찾는 것에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러한 일을 기독교에서도 보게 됩니다. 이는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자식의 대학교 합격을 위하여 100일 특별기도회를 교회가 갖는다거나 하는 따위입니다. 직장 취업과 인생의 성공된 삶, 사업의 잘됨과 번영, 병의 치유와 건강, 가정의 부요와 안정....이 모두는 이방종교의 신앙에 있는 사람들이 구하는 것입니다만, 기독교 신앙에 있다고 하는 신자들에게서도 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자들이 이 신앙에 있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참된 기독교 신앙이 아닌 거짓된 기독교 신앙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요.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에 있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아닌 이방종교의 신앙에 있거나, 무종교에 있는 일반사람이 자식의 대학교 합격을 위하여 100일 특별기도회를 교회가 갖는다거나 하는 따위입니다. 직장 취업과 인생의 성공된 삶, 사업의 잘됨과 번영, 병의 치유와 건강, 가정의 부요와 안정을 기원하는 마음을 갖고 그 기도에 있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에 따라 본능적으로 가져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를 그들의 종교적 마음으로 가져나가는 것이어서 그런 그들에게서는 그러한 자신들의 행동을 결코 잘못되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마다 그러한 모습을 가져나갑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는 신자들에게는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말이죠. 사람의 육의 본능적 욕구에 충실한 마음에 가득한, 그래서 추구하는 욕망의 대상 그 너머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바라봄에 있는 그것을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구한다고 하는 것은 자신들이 바라봄에 있는 것을 구함에 있는 기도를 하는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직장 취업과 인생의 성공된 삶, 사업의 잘됨과 번영, 병의 치유와 건강, 가정의 부요와 안정을 기원하는 마음이 없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이 모두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사는 날 동안 필요하며, 원하는 바대로 되어지는 것이 자신들을 편안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혹 간에는 그럼에도 그러한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가져나가는 분들도 계시죠. 그래서 세상을 가진 자로 사는 것에 마음을 두지 않고 마음은 부요하는 것에 평온을 느끼며 자연과 하나 되어 사는 것으로 만족하며, 가난하고 궁핍해도 마음은 세상을 쥔 자로 지긋이 부요한자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앙하는 대상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에게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 신자들이 자연이 주는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 하며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합니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으며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에게서 세상에서 잘되는 것은 그들에게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축복이 아니며 그들의 결국은 세상에서 잘되든 그렇지 못하든지 간에 졸지에 황폐케 하여 폐망케 하는 하나님의 저주 속에 그냥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사는 축복이 됩니다. 세상에서 부요한 자로 살든 아니면 참으로 세상에서 가난한 자로 살든 그들이 주 안에서 먹고 마시며 누리는 삶이, 나아가서는 주 안에서 호흡하고 있음이 참으로 행복한 축복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기독교 신자는 열심히 노력하며 수고하여서 사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사는데 과연 노력하고 수고하여 일한대로 잘된 사람으로 살기도 하며, 그렇게 함에도 그냥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사람의 마음과 힘대로 되지 않고 사는 사람도 있고, 실패를 거듭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 안에서 사는 것에 기쁨을 가지며, 주님이 주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보며 이를 바라봄을 행복해 합니다. 이 사람이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에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니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곧 기독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곧 기독교 신앙이 갖는 의미와 그 가치를 이 세상에 관점을 두고 기준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에서 말해지는 것이 아닌,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말이죠. 땅에 속한 이 세상적인 것이 아닌 하늘에 속한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2. 구원의 성경적 의미
하나님이 창세전으로 말해지는 영원 전에 가지신 계획, 그러니까 영원한 계획이 있습니다. 이를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즉 신적작정이란 용어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자로 만드실 것에 뜻을 품으셨으며 이를 실행하여 나가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한 구속과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셨으며 또한 우리의 구원을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선택과 구원의 예정입니다. 선택과 구원의 예정에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의 은총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구속)의 계획에 따라 있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렀을 때 그리스도께서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으로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구주의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와 살아 있는 자 모두를, 곧 주 안에서 하늘에 있는 자와 땅에 있는 자 모두를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백성)가 되게 하여서 그리스도를 통해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자들이 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입으며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신앙은 이를 알고 그 믿음에 의해서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자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에서 구원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하는 생명을 얻게 된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이 행하신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의 예정에 따른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신자는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구원을 신앙하는 자입니다.
이 구원은 말이죠. 하나님이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셔서 주어지는 것으로 사람의 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는, 사람의 행위가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구원입니다. 그러니 말이죠. 기독교 신자가 자신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면서, 이 구원을 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되어지고 자신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구원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동정녀 마리아에 의해 성육신을 입게 하는 것을 통해 보내시면서 그 이름을‘예수’라 부르게 하면서, 이름이 지닌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구원의 진의(본의)인 성경적 의미입니다.
3.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 - 하나님의 언약적 구속사
마태에 의하면,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께서 나시는데, 이 분은 하나님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일을 하시기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것으로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탄생하십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해 주시고 있는 것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입니다. 마태복음 1장 1-17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다룬 것에 이어서 이제 마태복음 1장 18-25절과 누가복음 2장 1-7절에는 두 계보의 대조를 통해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는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주신‘여자의 후손에 의한 구원을 약속하시고 있는 메시야 언약’의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탄생하셨다는 것을 다룹니다. 여기서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하여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것이 하나님의 구속사(구원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루실 구원을 약속을 주시는 것을 통해서 행하여 가심으로 성취하시는데, 이를 선지자에 의해 예언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시고, 그 예언에 따라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 사역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마태와 누가는 그 구속주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어떤 언약의 과정을 통해서 마침내 세상에 오시게 되었는지를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이며, 또한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시고 탄생하신 예수라고 불리는 그리스도는 그 언약의 주이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의 계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그 이름인‘예수’에서 죄에 대한 문제와 생명<영생>에 대한 문제의 해결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있게 하실 것에서 있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인‘임마누엘’사건입니다. 즉, 죄로부터의 구원이요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에게 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구원의 성격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구원은 예수란 이름이 지닌 뜻인“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저희의 죄에서 구원하신다.”에서 알 수 있듯이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죄로부터의 구원은 두 가지의 성격을 띱니다. 하나는,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는 죄책의 면제를 뜻하는 것으로, 칭의로 다룹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죄의 부패(오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는 구속을 뜻하는 것으로 성화로 다룹니다. 그런데 이 성화에 대해서 기독교 신자가 갖는 오해가 큽니다. 성화는 교리적이며 또한 신학적인 용어로서 다른 말로서는‘거룩’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여기서‘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사람 안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더러우며, 이를 죄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사람을 대신하는 용어가‘육’-‘육체’-‘육신’-‘몸’ 입니다. 사도 바울은‘사람’과‘육체’와‘죄인’을 같은 개념으로 다루며, 육체인 사람에게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하여 없다고 말합니다. 육체에서 나오는 마음과 마음에서 가져지는 생각과 그 생각을 좇아서 움직이는 행동은 선한 것이 없으며 항상 악할 뿐입니다.
사람을 왜 이처럼 규정하고 다루는지요. 이는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없는 것에서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까닭에 하나님의 의로우심,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들의 마음에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불의함에서, 사람의 악함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이신 하나님이 없는 자의 마음에 가득한 것은 거짓된 사람 그대로인 거짓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항상 악할 뿐이라는 것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육체인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 의가 없는 사람은 불의한 사람으로 말해지며, 하나님과 그 선이 없는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말해집니다. 사람이 행하는 것에는 의 또는 선이 없으며, 사람이 행하는 것은 모두 불의하며 악하다고 말해집니다. 이에 대한 규정, 곧 정의가“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 곧 육체뿐인 사람, 죄인인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근거해서 우리를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고 죄 없다 하십니다. 우리의 속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항상 깨끗하게 하심으로 죄 없다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단번에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속죄의 효력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과 그분의 의가 없이 살았던 사람에서 보이는 모든 죄에 속죄의 효력이 미쳐 그 효력을 발휘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분의 의를 힘입는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하시며 의인으로 규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인인 우리가 의인으로 있는 것에서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의로움에 거룩함에 온전<완전>하다는 것이 비로소 말해집니다.
이를 기독교 교리에서는 넓은 의미에서는 죄 사함을 뜻하는‘속죄’(贖罪, Atonement)로 다루는데, 이는 (1)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죄책의 면제 또는 칭의, (2) 죄의 부패(오염)로부터의 구원/구속(죄 값을 지불함으로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하게 함, 곧 죄 사함) 또는 성화(거룩)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의 당할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죄의 형벌로부터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우리를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깨끗<거룩>하게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므로, 그 누가 우리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속죄의 피입니다. 이 피에는 칭의의 개념도, 그리고 성화의 개념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죠. 칭의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행하신 영단번(永單番)의 성격이면, 성화 또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행하신 영단번(永單番)의 성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이 단번에 영원히 우리를 의롭다 하시며 영원히 우리를 거룩하다 하시도록 영원히 효력을 미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해서 말이죠. 죄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단번에 효력있게 작용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거룩을 영원히 무효화시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의‘구원’으로서,‘구원’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이 구원은 즉각적<법정적>이며 점진적으로 진행되어서 완성의 단계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죄에서 항상‘완전(온전)한 구원’인 것입니다. 즉, 완전한 칭의요, 완전한 성화<거룩>입니다. 완성의 단계로 점차적으로 나아가는,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가는 칭의요 성화가 아닙니다. 그 누구도‘칭의’를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어서는 옳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이죠.‘성화’만큼은 즉각적 - 점진적 - 완성적 단계의 과정으로 보는 모순된 경향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화는 현세에서는 완성되지 않으며 궁극적인 완성은 영화 구원의 상태에 이른 것에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칭의와 성화를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죄로부터의 구원에 있는 것은 항상 완전한 구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서정<순서>에서‘소명-중생-회심-신앙-칭의-양자됨-성화-견인-영화’는 문제점이 적지 않다 하겠습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구원의 서정을‘오직 은혜와 믿음’이란 단순한 범주에서 이해하려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점차‘구원의 서정’은 논리적인 이해로 발전하여서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풍성한 구원의 부요함에 대한 관심보다는 그러한 구원의 주관적인 적용의 과정 속에 서있는 인간에 초점을 맞춤으로서‘구원의 순서’ 문제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서정에 대해 벌카우버(Berkouwer)는‘구원의 서정’이라는 용어 대신‘구원의 길(way)’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길들은 매우 부요하고 다양한데 구원의 서정이란 그 자체로서의 중요성은 없으며, 단지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풍성함을 드러내줄 때에만 의미 있는 도구가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벌카우버는‘구원의 서정’을“그리스도의 은혜가 얻어지는 방식이며,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열매들과 그 뒤를 따르는 사역들”이라고 설명한 칼빈의 글을 인용하면서, 칼빈은 결코 그의 시선을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믿는 인간’ 쪽으로 옮기지 않았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벌카우버의 핵심적인 주장들 중의 하나는“성경의 단어들과 순서들로부터 하나의 고정된 순서를 추출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지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구원의 서정’을 잘못된 이해에 가져왔으며, 무조건적인 수용에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으로 단 네 가지만 언급합니다.
“또 (1)미리 정하신 그들을 (2)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3)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4)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구원의 예정-소명-칭의-영화, 이 네 가지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이고 질서적인 순서일 뿐이며, 선후 관계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의 서정은 시간적 간격에 의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기인한 동시적인 사건으로서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죄에서 구원받을 것일 뿐만 아니라 죄에서의 구원에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의한 부활에 의해서 완성될 것이면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언제나 완성에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구원은 항상 완성에 있어 왔으며 온전한(완전한) 구원으로 있어 왔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에서 구원 받으므로, 죄가 가져올 형벌, 곧 죄값으로 치를 형벌인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것은 영생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시는 것을 통해서 해 나가셨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부르신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은 그들에게 날마다 필요한 생명의 떡을 공급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라고 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실 생명의 약속을 따름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일으키고 그들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는다 하여도 다시 살 것이요 또한 살아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약속하여 주시고 있는 것이며, 이것을 믿는 믿음에 마르다를 두시고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게 하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마르다는 예수님은 자신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고 대답하였습니다(요 11:27).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와 부활에 의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은 창세 전에 작정하신 일로 이 믿음에 두신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반드시 성취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실행에 사람의 행위는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1-9)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구원임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십니다.
5. 행위구원, 성화구원 관념의 잘못된 인식
그런데 말입니다. 기독교에서 혹자들 간에는 행위구원, 또는 성화구원을 주장하는 말이 오고갑니다. 그들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크게 몇 가지 경향에서입니다. 하나는, 구원은 믿음으로만 아니라 행위도 있어야 한다는 것에서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갖는 것은 구원은 기본적으로는 믿음으로 받는 법적인 것이지만 구원 받은 자는 그 구원 받음에 걸맞게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도 같이 지고 있는 것으로, 열매 없는 나무는 죽은 나무이듯이 행위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에 이 믿음으로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가령, 천국과 지옥을 갔다 오는 경험을 했다는 사람들의 간증에서 보게 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타락한 자들, 선한 열매의 행실이 없이 형식적으로만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 천국에 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갔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외식된 믿음으로 교회를 다니는 자들, 예수 믿었어도 회개하지 않은 자들, 거듭나지 못한 자들, 이렇게 행함이 없는 거짓된 믿음에 있는 신자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간증이 아니더라도 구원을 오해하며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는 것에서 이렇게 알고 설교하며 또한 그렇게 설교한 대로 알고 믿는 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그에 따른 영향은 기독교에 매우 크게 미치고 있는 형편입니다. 이들은 그에 대한 성경적 근거의 하나로 야고보서를 듭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 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 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맏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맏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 바 이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14-26)
사도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이 내용에서만도 세 번이나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합니다. 17-18절의“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면서“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라고 말하고, 22절에“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 24절에“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라며, 26절에서“영혼 없는 몸이 족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행함이 없는 믿음, 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에, 이 구절을 성경적 근거로 내세우면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하며, 이 믿음이어야 천국에 들어가지 이 믿음이 없으면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사도 야고보는 과연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인지요. 야고보가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은 앞서의 1-13절의 내용 때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생명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은 자들에 의해서 온 땅에 세워집니다. 이 교회로 서나감에는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받으신 주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 아니시며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그 은혜의 실체의 그림자 안에 이방인 또한 있게 하셨습니다. 그에 따라서 이스라엘 속에는 항상 이방인도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동서 온 땅으로부터 모든 택한 백성을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 부르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입은 자가 함께 그리스도의 한몸을 이루고 있는 믿음의 형제를 괄시하고 외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들에 대한 대우에서 가난한 자들의 차별이 갖는 상대적인 외면 때문이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면 좋은 자리의 상석으로 안내하고 가난한 자가 들어오면 서 있게 하거나 말석에 앉게 하는 차별이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 구별하여 악한 행동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가지 면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세상)에 대하여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시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를 괄시하며 외면하는 것입니다. 둘째, 부자 - 여기서의 부자는 재물로 힘을 발휘하는 자들인 세상의 불의한 자들에 대한 대표적인 지칭이다 - 는 그리스도인을 억압하는 압제를 행하며 부당하게 법정으로 끌고 가는 악행을 하는데,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믿는 아름다운 이름과 함께 하는 자인데도 불구하고 성경에 기록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따르지 않는 악한 죄에 있는 것에 대해 야고보는 그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은 행함과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고보는, 첫째,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이는 자신이 지금 누구에게 속해 있으면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의 일을 맡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발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덕성(품성)들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있는 주께서 발휘하는 덕성의 능력에 만개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서 긍휼의 주께서는 긍휼로 심판을 이기게 합니다. 부패한 우리 심성 안에 심어진 주의 영은 언제든지 건드려지면 툭 터지는 꽃망울의 상태에 있습니다. 가령, 믿음의 시련이 오면 인내의 꽃망울이 터져 피어나는 것입니다. 죄의 법에 이끌려 "오호라,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끄집어 낼 수 있겠는가?"하는 우리에게서 말입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여 부요하게 하신 주의 능력, 곧 성령의 열매의 능력이 언제든지 발휘될 수 있는 만개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의 꽃이 피며, 희락, 화평, 온유, 겸손, 양선, 자비, 충성 등 이런 것이 맺히게 되는 현실을 만나면 톡톡 아름답게 피어나는 주의 덕성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이 꽃망울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는 것에서 주의 사랑, 주의 희락……의 온갖 덕성이 우리들과 함께 한 몸인 지체에게 행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야고보는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로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의 의는 이삭이 주어지기 전까지는 그가 아직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그 바람에 있지 못했던 가운데서 마침내 약속하신 씨(아들/지손)의 실현으로 있은 이삭을 받음으로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실 언약의 구체적 실행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게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모리아의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칠 것을 명하셨으며, 아브라함은 약속의 씨로 주어진 이삭을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제물로 바치는 것을 통하여 독자인 이삭의 죽음을 가져올지라도 그 독자 이삭의 죽음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비롯하여 대대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에 믿음을 굳건히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는 행함이 나타났습니다. 이처럼 말이죠.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땅에 있는 한 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행함을 가진 것은 아들을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약속의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또한 죽은 아들에게서 산 아들, 곧 생명의 씨(아들/자손)가 하나님께 있음을 바라보며 약속하신 씨(언약의 시)를 주심으로 자신과 자신의 후손 대대로 맺은 언약을 이루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믿음에 있어온 모든 행함이 있게 되는 과정에서 또한 앞으로 그에게 이루실 하나님의 약속을 따름에 있게 하실 것에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따름에 있게 하실 것에서 입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에 있도록 아브라함의 인생의 여정을 함께 하시면서 그의 삶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에게서 행함이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으로서 였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약속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있게 하시고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바라보는 바인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다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있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한편, 기생 라합은 여리고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듣고 그 믿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으로 주신 땅의 성취에 있게 하기 위해서 가나안에 입성하게 하는 것에서 이방여인으로 기생인 라합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라합은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광야에서 어떻게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시면서 그들의 구원을 이끌어 가셨는지를 듣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바라봄으로 정탐꾼을 받아들이는 행동을 취했으며,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게 될 때 자신과 자신의 가족의 구원을 하나님에게 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을 구원함으로써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게 하시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게 하시고, 오벳은 이새를 낳게 함으로, 이새는 다윗왕을 낳음으로 다윗왕국에서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께서 나시는 구원의 계보를 이루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마 1:5-6, 16).
구약에서 이렇게 행함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믿음에 있게 하는 것으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요 그 능력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행함은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증거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은 성령이 하시는 일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이 없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성령이 하시는 일을 우리 육이 거스릴 수 없습니다. 만일 거스린다면 그것은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데, 신자가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인 교회 안에서 차별하는 일을 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자신 안에 받으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품성을 거스리는 일을 하는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뚜렷이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거부하고 훼방하는 것으로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는 그분의 능력을 힘입고 있는 자로서 자신 안에 있는 분으로부터 그의 긍휼을 제공받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를 향하여 품으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기의 택한 백성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의 택하신 백성을 모두 다 찾으십니다. 이 사랑이 교회 안에 어떻게 나타나 행하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성령의 열매입니다. 육체에 현저한 죄 밖에 나타낼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서 말입니다. 교회는 믿음의 지체를 섬김으로써 다같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으로 있는 것인데, 이 섬김에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이 같은 법을 금지할 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자를 환대하고 가난한 자는 박대하는 것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나오는 품성을 거스려 훼방한다면 이것은 믿는 자들의 생명의 주이신 그리스도의 영의 소욕, 곧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는 육에게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함께 하는 모임을 이룬 교회에서 그러한 행동이 있으므로 야고보는 그렇다면 그 믿음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는 생명을 볼 수 있겠느냐, 그 믿음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생명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않느냐는 것에서 그 믿음을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하여 말하였습니다. 영혼(생명) 없는 몸은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야고보는 말합니다. 행함으로 자신에게 있는 믿음을 저희들에게 보이겠다고 말입니다. 이는 죽은 믿음,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믿음으로 오셔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증언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야고보가 말한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며, 그 믿음은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든지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간다든지 하는 따위를 주장하는 것에서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어떤 것인지를 책망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구원을 행위구원, 또는 이것의 또 다른 용어인 성화구원을 주장하는 것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화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가 거룩한 자로의 변화된 삶을 점진적으로 가져나가는 것으로 마침내 영화의 상태에 이르는 구원의 완성에 이를 때까지 계속해 나가야 할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신자는 마땅히 성화되어 가야 할 것으로, 그렇지 못하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 아닌 거짓된 믿음이라고 여기는 오류에 빠집니다. 앞서 설명한 바에서,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서 구원의 서정엔 성화의 단계가 없습니다. 그러한 성화가 기독교 교리에서의 구원론에 포함되는데, 이 경우에서도 성화는 영화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견인(성도의 견인 교리) 속에 있어 하나님이 그의 구원을 이끌어 가심 속에서 믿음의 인내를 통해 안전히 보호되고 있는 것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화의 이해를 그렇게 가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성화를 구원을 구원의 완성인 영화의 상태에 이를 때까지 힘써 이루어가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성화구원을 이루어가지 않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믿음으로 살지 않고 있는 것으로 그의 믿음이 살아 있는 참된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닌 죽은 거짓된 가짜 믿음에 있는 것이라고 보며, 이렇게 믿음의 행함이 없이는, 곧 행함이 없는 믿음으로서는 그가 바라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이상한 논리의 괴변을 말합니다.
행위구원, 성화구원을 말하는 사람들의 또 하나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천국에서의 상급은 행위로 받는다는 것에서입니다. 이는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천국에서의 상급은 구원 받은 자가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어떻게 선한 삶을 살았느냐는 행위에 따라 차등 있게 받는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OO선교회 시한부종말론 사건을 비롯하여서 시한부종말론자들의 잘못된 주장으로 기독교가 큰 혼란을 겪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OO선교회의 OOO 등이 1992년 10월 28일에 재림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면서 이때 세계는 종말을 맞이하고 성도는 휴거(携擧)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흰옷을 입고 재림주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에 있다는 소동을 일으켰었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와 함께 천국과 지옥을 갔다 왔다는 괴이한 간증 또한 판쳤는데, 간증자들 중에는 기독교에서 내노라하는 이름을 떨치는 존경 받는 유명한 목사님들이 천국에서 영광의 금면류관을 쓰고 있을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막상 천국에서 가서 보니 금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개털모자를 쓰고 있었다며 이들의 행위가 사실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상급을 받을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었던, 곧 행위 없는 믿음에 있었음을 비판하며 살아 있는 행위가 있는 믿음에 있어야 할 것을 말하면서 천국에서 높은 상, 큰 상인 금면류관이요 영광스러운 면류관을 쓰지 못하고 낮고 천한 자들이 쓰는 개털로 된 모자를 써서야 되겠느냐는 식의 말들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천국에는 상급에 따라 아파트에 평수가 차등이 있으며, 집도 차등이 있어 믿는 자들의 행위에 따라 선한 행위가 적고 성화되지 못한 만큼 집의 수준은 낮아져 아파트, 빌라, 양옥, 판자집에서 각각 산다는 참으로 허황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릇된 사고(思考)가 지금도 여전히 적지 않은 기독교 신자들의 머리 속에 각인 되어 있듯이 인식되어 있는 형편입니다.
6. 기독교의 구원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제대로 알아야 할 교회
기독교의 구원론에 대한 신앙을 행위구원, 성화구원으로 가져나가면서 끼치는 폐해는 신자들의 신앙관을 복음의 진리에서 벗어나 기복신앙으로 가져나가는 문제점을 야기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인생을 성공적으로 잘 살 수 있다거나 성화된 삶을 사는 믿음에 있어야 하나님의 자녀다운 변화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기복신앙의 범주에 있는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자가 자신이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이며, 이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사는 좋은 믿음에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래서 말입니다. 자신을 성화가 잘 된 사람으로 보며, 그러한 자신을 예수 믿는데 성공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적인 신앙이 그런 것인지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구원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구원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피의 십자가에 의한 죄사함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은 곧 기독론이며 또한 십자가의 피에 의한 칭의와 성화가 내용인 속죄론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신앙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런 것이지 구원의 중심에 신자 자신이 있고 신자의 성공적인 인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해서 말입니다. 기독교 신자의 신앙에는 행위론, 그리고 이 행위론이 바탕이 되고 있는 성화론이 없습니다. 교회는 말이죠. 기독교의 구원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구원론을 올바르게 이해하여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이 교회로 올곧게 잘 서나가는 믿음에 있는 자로 우리가 보호를 받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이니 참으로 그리해야 하지 않겠는지요. 아멘. (*)
* 이상으로 4회에 걸친 특강의 글을 마칩니다.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