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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겨울사경회 /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부천개혁교회에서 2019년 12월 15일(주일)부터 22일(주일), 25일(수요일)까지 3일간에 실시하는 겨울사경회에서 5회에 걸쳐 강론(설교)하는 것입니다. ( 1) 첫째 날 : 15일(주일) 1 강 :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책 마태복음 2강 :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2) 둘째 날 : 22일(주일) 3강 :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4강 :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지닌 구속론적인 의미 (3) 셋째 날 : 25일(수요일) 5강 :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동방박사들 순차적으로 올려질 겨울사경회의 글을 통해서 마태복음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이해를 올바르게 갖는데 도움이 되는 유익을 얻을 수 있으시기를 바라며, 여기서는 그 다섯 번째인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을 올립니다. ...................................................................................................................................................................................... 부천개혁교회 2019년 겨울 사경회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5강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동방박사들
마태복음 2장 1-12절 / 1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5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그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마지막 내용으로‘하나님 나라의 주이신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동방박사들’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그들이 아기 예수께 경배를 무엇을 가지고서 얼마나 잘했는지, 어떻게 행동하여 귀감이 되었는지를 보고 그 모습과 행동을 똑같이 따라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들의 경배를 통해서 경배 받으심에 있는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 주시면서 그 믿음에 있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1)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아브라함과 다윗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다룬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이 있은 후, 주의 사자는 이 사실을 베들레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동방의 박사들과 탄생한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부터 가까운 들녘에서 양떼를 치던 목자들에게 알려주십니다. 주의 사자가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이들에게 알려 주신 것은 아기 예수를 찾아뵙고 경배 드리게 하는 것을 통해서 이 일이 그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선지자의 예언에 의한 메시야 탄생으로 그들을 위하여 구주가 나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줌으로 메시야를 맞아들임에 있는 경배에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한 기사는 마태복음에서도,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도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에 대해서, 누가복음에서는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의 경배에 대해서 각각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누가복음에서 알려주시고 있는 기록을 병행하여 마태복음에 기록해 주시고 있는 동방 박사들이 주의 사자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경배한 것에 대해서 보도록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신 역사적 배경
(2-1) 가이사 아구스도의 칙령(호적령)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에 의하면,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예고한 예수님의 탄생은(눅 1:26-37) 아구스도가 가이사-로마의 황제-로 있은 때에 있게 됩니다. 아구스도〈아우구스투스〉의 원래 이름은 옥타비안<옥타비아누스>이었으나 후에 아구스도로 호칭했습니다. 아구스도는 B.C. 27년 1월 6일에 로마의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는 정기적으로 호적령을 내려 로마 제국 통치하에 있는 모든 땅의 인구 조사를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에서 행하는 정기 인구 조사는 세금 부과와 강제 병역에 동원한 자들을 파악하기 위한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행해졌는데, 유대인들은 병역이 면제되어 있어 군대에 동원되지 않았으므로 팔레스틴에서의 인구 조사는 주로 과세가 목적이었습니다. 유대는 수리아의 한 지방으로서 로마 제국에 속해 있었으며 당시 수리아의 총독은 구레뇨였습니다. 그는 B.C. 12년에 로마의 집정관이 되었으며 그 후 수리아의 총독이 되었습니다. 그는 총독의 자리에 오르자 아구스도의 호적령에 따라 온 유대에도 인구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 첫 번째 한 것입니다. 이 호적령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자기 고향, 곧 본적지에 가서 등록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2-2)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성취
이에 따라 모든 유대인은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서 제각기 선조의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다윗의 후손-이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다윗왕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야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거리가 대략 120-150km 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 해 주신 예언의 성취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미가를 통하여서 한 예언을 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베들레헴이라는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유대 땅으로 나아올 것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미 5:2)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 그 예언이 성취되기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자 되시는 예수께서 출생하실 때가 가까울 즈음에 하나님께서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가이사 아구스도로 하여금 호적령을 내리도록 하는 섭리를 베푸셨습니다. 이 호적령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후손인 요셉도 자신의 고향이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연스럽게 선지자 미가에게 주신 구약 예언을 성취하게 되어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출산하게 됩니다.
(2-3)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
가이사 아구스도가 내린 호적령에 의해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유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데 그때는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에 머물고 있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로마 황제의 영을 받아 총독이 실시한 호적하기 위하여 각처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온 많은 사람으로 마을은 이미 방을 다 차지가 되어 빈방이 없어 있을 곳이 없으므로 임시방편으로 집에 딸린 마굿간 한쪽을 빌려 머물고 있는 중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음으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이었습니다.
(2-4) 유대 땅 작은 고을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서 아기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 지닌 기독론적 관점의 의미 : 그리스도의 비하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에 의한 섭리의 손길이 기독론적 관점에서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마 3:17)로서 하나님의 본체(빌 2:6)이십니다. 그 예수께서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임하신 모습을 무엇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가 하면 종의 형체, 사람의 모양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고 하고 있으며(빌 2:6-7), 베들레헴 마굿간<또는 외양간>이요 구유 안에 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신 모습이 너무나도 비천하게 나타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천함은 하나님의 아들이 어찌 강보에 싸여 마굿간의 구유에 누워 있었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아기가 탄생할 요건이 갖추어진 따뜻한 방에서 탄생하지 않고 마굿간에 놓여 있는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은 이것이 상징하고 있는 계시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에서 보는 비천함은 그가 장차 한 마리의 어린 양으로서 희생 제물이 되실 자신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모양을 입으시고 구유에서 출생하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원하심에 의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이 베들레헴에 있는 한 마굿간의 구유에서 있은 것은 당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는 상태에서 우연히, 또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있어져 나간 것에서가 아니라, 이 일도 정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있는 일인 것에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는 비천함은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것에서 보는 비하의 성격 그대로 입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의 성육신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전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여기에서 보는 대로 예수님의 탄생은 본래 하나님이시나, 가장 고귀하신 분으로 그리스도의 신분을 수행하는 가장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음을 의미하는 상징이기도 합니다. 곧, 그리스도의 비하의 신분과 상태에 처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는 그리스도의 이 비하의 성격은 예수님의 구속사의 절정을 이루는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장차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인데 그들을 위하여 대신 희생되시는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에 의해서입니다.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스스로 증거 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사람들은 알아보지를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받았으며 싫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예언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3)
이렇게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는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이 죽음의 고난은 죄인들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와 그에 따른 형벌을 다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렇게 비하되신 것은 율법의 정죄 아래 놓여 있는 사람 그들 안에 오셔서 그들과 함께 하심으로 그들이 받을 율법의 요구-하나님의 진노-를 자신이 대신 담당하여 다 받으시는 자격으로서 입니다. 이에 대해 루이스 벌콥은 그의 조직신학 기독론 제2편 그리스도의 신분에서‘비하의 신분’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빌립보서에 있는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비하의 신분에서의 본질적이고 중심적인 요소는 모든 지상의 주님, 즉 최고의 율법 수여자이셨던 분이 그의 백성을 위해 그 언약적이고 형벌적인 의무들을 면제하기 위하여 자신을 율법 아래에 두셨다는 사실에서 발견된다.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는 법적으로 우리의 죄들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셨으며 또한 율법의 저주 아래에 놓이게 되셨다!”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의 구속사적인 의미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이 주는 구속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탄생하신 때와 어떤 상황에서 예수님의 탄생이 있었는지에 대하여 알려줍니다. 2장 1절에서‘그 때에’는 앞서에서의 사가랴의 예언이 있었는데, 그 예언이 성취한 때의 시점을 알려줍니다. 즉, 사가랴를 통해서 예언하신 대로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추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마침내 임하는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통치가 미치는 영역에 있는 사람은 모두다 호적 등록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수리아<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 이 영에 따라 모든 사람은 호적을 등록하기 위해 각각 자기 고향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요셉도 갈릴리 나사렛 마을을 떠나 다윗의 마을인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올라갔습니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자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을 등록하러 그곳에 갔는데, 이 때 마리아의 복중에는 아이가 잉태된 중이었고, 베들레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해산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마리아는 낳은 아기를 천으로 싸서 구유에 눕혔습니다. 마리아가 이처럼 아기를 구유에 뉘인 것은 온 천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로 베들레헴에는 여행객으로 만원을 이뤄 이미 여관마다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어서 들어갈 빈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할 수 없이 요셉은 임시방편으로 가축들이 지내는 처소인 마굿간을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아들을 낳았으며, 가축들의 먹이통으로 사용하는 구유를 이용하여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뉘여 놓았습니다.
상식적인 이해에서는 마리아가 아기를 낳는 장소는 산모와 아기를 보호할 수 있는 따뜻한 방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기를 낳는 장소가 사람이 들어갈 방이 아닌 가축이 머무르는 마굿간이며, 강보에 싸인 아기가 뉘일 곳으로서의 방이 아닌 가축들이 먹이통으로 사용하는 구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린 호적 등록 시기에 예수님의 나심이 있게 하시는데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빈 방을 얻지 못하여 짐승의 마굿간에서 예수님의 나심이 있게 하고 구유에 뉘여 있게 한 것은,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0-12절)
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라고 하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드러내시는‘표적’을 행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아기를 낳고, 그 낳은 아기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인 것은 이 아기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이를 통하여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아 볼 수 있게 해주시는 것에서 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근방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목자들은 이 표적을 보고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경배 할 수가 있었습니다(눅 2:15-20). 그런가 하면, 하늘의 별을 연구하는 것을 통해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질 징조를 기다림에 있던 동방의 박사들은 그들이 연구하는 별을 아기 예수께로 인도하는 표적으로 주심에 따라 별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 별이 안내해 준 아기 예수님이 뉘인 곳에 찾아 들어가 아기에게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마 2:2, 9-11).
아기 예수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은 단지 예수님이 가축들이 있는 마굿간에 머물고 그곳의 가축들이 사용하는 먹이통에 누여 있는 비참함을 겪으셨다는 것에서 예수님이 겪으신 비하의 본질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하여 비천한 사람의 몸을 입으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에서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누가는 이 사실을 기록하면서,“이것이 너희(목자들)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12절)라고 말해 주고 있는 것에서 그 의미가 말해집니다. 강보에 싸인 예수님을 구유에 뉜 것을 하나님께서는 구주이신 그리스도가 나신 분이심을 목자들이 알아보는 표적으로 주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강보에 싸인 아기 예수님이 구유에 뉜 것은 이 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낳은 아기 예수님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뉜 것은 이 아기가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알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찾아와 그 표적을 보고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기쁨으로 맞이하여 경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면서 마굿간의 구유에 뉘이는 방식을 통해서 그분을 알아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함으로 경배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동방의 박사들에게는 그들이 연구하는 하늘의 별의 인도를 받는 것을 표적으로 주셨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자신들이 연구하는 하늘의 별을 통해 구주이신 아기 예수께로 인도를 받는 표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인도하는 표적으로 주신 별을 따라 베들레헴을 찾아왔으며, 그 별이 지시한 한 집의 마굿간의 구유에 강보에 싸여서 누인 아기 예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언해 주신 메시야이심을 알아보고는 큰 기쁨으로 메시야를 위해 준비해 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며 경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아기 예수께 대한 동방박사들의 경배
동방박사들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을 보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며 경배한 것이 어떤 것으로 있는 것인지에 대하여 마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은 선지자 미가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메시야(그리스도)가 나실 것임을 전하는 하나님의 예언을 통해 약속으로 받고 있었으며, 그 약속의 실현으로 유다 족속의 작은 베들레헴에서 나신 아기 예수는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될 하나님이 보내신 왕 메시야이시며 그분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돌보는 목자가 되실 것임을 알고 그에 대한 믿음에 있는 영접으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바치며 경배에 있은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나심에 대해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의 경배, 그리고 동방박사들의 경배는 이들의 믿음으로 있는 예수에 대한 기독론적인 구속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의 경배는 오늘날의 우리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께 한 경배에 우리들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신 예수님이 구주이신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여 아기 예수께 경배에 있은 목자들로부터, 그리고 동방 박사들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세상 끝 날이 이를 때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경배에 있는 믿음에 있는 사람들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 믿음에 있는 복 있는 자입니다.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이분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믿음으로 순종하여 경배에 있었던 자들은 그를 낳은 요셉과 마리아, 이들의 친족인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리고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표적을 받은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 등 소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그늘에 있는 자들이 세상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며 배척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에 의해서 증거 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요 1:5-11)
라고 말합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음과 같이 말해 줍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구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죄와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서는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시라는 소식을 들어도 그러하며,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시는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표적을 받아도 그렇습니다.
주님이시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에 있는 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우리를 위하여 오신 구주이신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는, 사람의 힘으로서는 전혀 가능하지 않으므로 있을 수 없는, 그 일이 우리에게서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큰 자비를 입음에 따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믿음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는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아들여 그분을 경배할 수 있게 해 주신 믿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입어서 이 믿음에 날마다 있습니다. 우리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함에 있는 이 믿음이 지닌 하나님의 능력,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발휘하시는 능력이 얼마나 큰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보게 해주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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