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양, 혹은 한성이라 불리는 유적은 장수산성과 그 아래에 있는 신원군 아양리, 월당리 도시 유적(해주 북쪽)입니다. 이곳에는 무려 10만 이상이 거주한 도시유적이 발굴된 바가 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이와 관련된 논문만 하더라도
고고민속편집부, 「답사기:신원군 장수산성을 찾아서」, 『고고민속』 1966-1.
최창빈, 「학계소식:신원에서 고구려시기의 큰 도시유적 발견」, 『력사과학』 1985-4.
리승혁, 「장수산성의 축조형식과 년대」, 『력사과학』 1985-4.
안병찬, 「장수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유물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0-2.
최승택, 「장수산성의 축조년대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3.
최승택, 「장수산성 1호건물터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4.
등이 있습니다.
먼저 장수산성에 대해 설명하면 내성은 둘레 4700미터, 외성 7050미터, 내성과 외성 사이벽은 약 1070미터나 되는 매우 큰 성입니다. 성벽은 절벽구간을 이용해 성벽을 쌓은 구간은 약 6000미터나 되는데, 성 안에는 백운동 분지와 남문터, 서문터, 북문터 부분 등에서 약 80여채의 건물터가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장수산성에 대해서 최승택은 대개 1-3세기에 해당되는 물품이 출토되어 고구려가 지배하기 이전시기에 이곳에 사람이 살았고, 벽돌에서 영가 7년이란 글자가 새긴 돌이 나온 것으로 볼 때 313년에 해당된다고 보아서, 대략 4세기 초에 장수산성이 축조된 것으로 본다고 했습니다. 또 산성 안에서 발굴된 1호 건물터에서 왕궁터나 수도의 중요 건물에서만 볼 수 있는 기와 각새가 나오는 것을 볼 때 1호 건물터는 왕과 관련있는 행궁터 정도로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장수산성 일대를 수도급에 맞먹는 정치, 경제, 군사적 거점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를 고구려의 남평양과 결부시켜보면 서로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행궁터는 구체적으로 고국원왕이 임시로 거쳐하던 곳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최창빈은 신원군 아양리와 월당리에 남북 4.5키로미터, 동서 4키로미터 범위에 거대한 도시유적이 발굴된 것을 보고했습니다. 장수산성 남족에 위치한 도시유적에는 대략 1천기 이상의 고구려 무덤(돌각무덤, 봉석무덤, 돌칸흙무덤 등)이 있고, 리방구획이 남아있으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토성이 두곳이나 있고, 도시 안에 8각형 옛우물돌, 붉은 색, 회색 깋와를 구워내던 가마터 등이 발견되었다고 했습니다. 4세기경부터 고구려 후기의 부수도인 한성의 유적으로 고구려 남방의 큰 지방 중심지라고 인정된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