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추론을 소설이라고 한다면,
현재 중국학자들의 고구려사 관련 글들은 저보다 훨씬 심한 판타지 소설이 될 것입니다.
또한 기존 학자들의 주장들 역시 90% 이상이 소설이 될 것입니다.
기존에 남아있는 사료만이 신뢰성이 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역사 연구의 기본은 사료가 어떻게 쓰여졌는지에 대한 문헌 비판입니다.
단적인 예로, 현재 중국측 사료가 전부 사라지고, 우리나라 기존의 문헌도 전부 사라지고,
오직 환단고기류의 문헌들 만이 남아있다면, 아마도 과거사에 대한 이해가 180도 달라졌겠지요.
기록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중국측에게는 행운이고, 우리에게는 불행입니다.
어차피 서술된 역사란 개념이 그리스와 중국 등에서나 발전했고, 나머지 나라에서는 그 것을 본받는 정도였으니
우리가 사료가 부족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야스페르츠 님은 한국사가 처음부터 중국과의 관게에서 늘 약소국이라고 보는 군요. 벼랑끝 전술이라고요.
후후후. 이런 말은 여지껏 토론하면서 처음 듣습니다.
저의 이야기의 핵심은 국제관계의 핵심은 '당시의 국력'이란 것입니다.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왜 조공하느냐. 힘이 없기 때문에,
왜 조공을 거절하고, 적을 치느냐. 저들이 만만하니까. 그것입니다.
사료에 나와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료는 왜곡될 소지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풍홍이 고구려에서 했던 말은 누가 기록했을까요. 풍홍 옆에 있는 놈이 직접 기록한 것이 남았을까요.
그랬다고 하더라도, 이를 다시 역사서에 남긴 것은 중화사관에 물든 중국인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저들의 자존심이 어린 말로
기록되었다고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소설이 아니라, 당시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렇게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는 것이 당시 상황을 보다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냐를 따지는 것이 역사 연구입니다.
님의 주장이 저의 주장보다 보다 타당성이 있다면, 님의 주장이 옳은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님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겠지요. 님의 주장은 토대는 사료에 나온 것을 우선 신뢰하고 보자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의 주장은 사료를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당시 상황이 어떠했으므로, 실제 사실은 이럴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북위와 고구려의 관계에서 국휘문제도 그렇습니다. 국휘 관련 자료는 사료상으로 오직 그때 하나 뿐입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논자들은 고구려가 북위 황실의 글자를 피하기 위해 국휘를 알려달라고 한 것이니, 고구려가 조공하려고 한 것이라고 보지만, 그렇다면 왜 고구려가 북위와 무려 30여년간 국교를 단절했는지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국제관계는 힘이 바탕입니다. 후금이 청나라를 공격한 것도 벼랑끝 전술인가요. 그들도 중국의 권위를 두려워했었나요. 거란과 여진이 중국의 권위를 두려워했었나요. 그들의 권위가 없느니까, 쳐들어가서 영토를 빼앗고 그들을 지배한 것입니다.
야스페르츠님은 오호망양 시리즈를 연제할만큼 공부를 많이 하셨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역사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사실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해보시고, 무엇이 더 올바른 이해인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중국은 수많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아 많은 패전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역사서의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이를 바탕으로, 역사서를 더 왜곡해 과거의 패전을 승리의 기록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님과 같은 해석을 우리가 한다면, 중국인들은 너무나 신나할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조선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는 말은 대체 뭐지요.
조선만큼 명나라의 속국개념에 충실한 나라도 없습니다. 조선은 유교를 신봉하여, 명나라 천자에 숭배를 종교적 관념으로 까지 받아들였는데 말입니다. 님은 속국에 대한 개념을 정말 이해가 안되는 군요.
이미 말했듯이, 속국에 대한 종주국의 통제력은 상황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속국이란 개념에 대해 님이 뭔가 착각하는 것인지, 이 개념에 대한 님과 저의 통일된 이해가 없음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추론 과정에 대해 생략이란 말을 했는데, 이 문제는 저의 책에서 자세하게 언급해었습니다.
곧 나올 것이니까, 그때 보다 깊은 토론이 이어질 수가 있겠지요.
왜 영락 17년 기록이 후연관계 기록인지, 후연과 고구려의 관계,
영락 17년조가 백제 관련 기록이 될 수 없음도 여러 이유를 들어 설명해두었습니다.
첫댓글 국휘에 관하여 말씀하셔서...국휘라는 것도 일정한 형식이고 법칙인데, 이것이 갖는 의미가 진정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냐도 문제입니다. 즉 중국에서 국휘는 의미가 있겠지요. 조선에서 국휘도 당연히 의미가 있겠지요. 그런데 고구려는 국휘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요. 고구려왕과 신하간에 휘가 겹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히려 선조의 휘를 붙이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듯 보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럼 고구려에서 피휘라는 형식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반대로 선조의 휘를 물려받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풍토가 있었을 것이라고도 보일정도입니다.
그렇다면 가사 고구려가 정말로 북위에 국휘를 청했다 하더라도 외교적 수단으로서 활용한 형식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고구려에겐 피휘가 아무런 의미도 없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는 것이니 가능했던 일이겠지요.
제 말을 왜곡하지 마세요. 저는 추론을 한 것을 두고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그 추론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쓰신 선생님의 글쓰기를 비판한 겁니다.
선생님은 "~것이다." 라고 서술하셔야 할 것을 "~이다."라고 서술하셨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건 소설입니다. 역사가 아니라...
저의 주장 부분에 대해서 하신 말씀은 제가 인정하지는 못할지언정 납득할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서술 태도에 대한 부분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역사를 이런 태도로 쓰는 것에 대해 진심으로 분노하기까지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논문을 이렇게 쓰십니까? 이런 글에 엄정한 문체를 요구하는 제가 오바하는 건가요?
납득할 수 있다면 다행이구요. 것이다와 이다의 차이라고 했다면, 인정하겠습니다. 저의 책에서는 분명히 이렇게 추론하는 과정이 자세히 나오니까, 님이 오해할 정도는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태도는 문제가 있습니다. 고대사 연구가 남아있는 자료를 그대로 해석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했는지를 끝없이 묻는 문제가 더 중요한 것이니까요.
네. 왜라고 끊임없이 물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왜 라고 물은 결과물이 주장을 놓고 근거를 끼워 맞추는 것이라면, 행간을 읽기 위해서 뻔히 있는 기록을 부정하고 기록에 없는 것까지 창조해내야 하는 것이라면 저는 그것을 역사가 아니라 소설이라 평가할 겁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돌려드릴 수밖에 없겠습니다.
선생님은 고구려가 제국이라는 전제를 깔아 놓고 모든 사료를 재단하시는군요.
고구려가 제국이라는 전제를 깔아놓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광개토태왕 시기에 비로서 고구려는 제국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실제 상황이 어떻했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료를 상대주의적 입장에서 서서, 고구려의 입장도 고려하면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지, 제국이란 전제를 깔아놓고 해석한 적이 한반도 없습니다. 그건 역사가 아니지요. 님이 기록만을 그대로 인정하고 해석하는 것은 역사 연구가 아니라, 사료 번역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것은 역사연구자가 가야할 길이 아닌 것입니다. 사료에 매몰되지 말기를 다시 한번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