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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용만 선생님도 비슷한 얘기를 하신 듯 한데 신농님도 같은 이야기를 하시는 걸보니 야스페르츠님의 글을 오해하신 측면이 다분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특히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실증주의에 대한 민감한 반응이 여기서도 보이시니 말입니다. 제가 읽었던 20세기 사학사나 이상신 선생의 서양사학사에서는 실증주의의 몰락이 말씀하신 양상대로 된 것은 아니지만 크게 보면 상대주의 역사관으로 가게 된 것은 그리 틀린 말도 아니고 사학사는 저도 그리 아는 바는 아니니 그만두겠습니다. 다만 상대주의 역사관을 말씀하고 계신데 야스페르츠님 글을 주의깊게 읽어보지 않으시고 선입견이 잡힌 상태에서 반론을 쓰시다보니 이런 일이 생긴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야스페르츠님의 글에서 [역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특히 인물의 발언과 같은 부분은 대체로 기록자의 주관이 개입되기 쉬운 부분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에서 보면 사관의 주관성을 몰라 말씀하시는게 아니라 분명히 감안하고 계시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굳이 이 말을 덧붙이는 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야스페르츠님도 오해가 갈만하게 분명히 쓰신 것은 아닌 듯 해서 이런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즉, [그러나 제 생각에 이때 개입되는 주관이라는 것은 "이 인물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라는 것이지, "우리 중국/중화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라고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라는 부분은 말 자체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분명히 언급하지 않은 탓이 있겠죠. 아마도 칭제라는 부분에 대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 부분은 그저 제 개인적인 느낌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김용만 선생님이 처음에 야스페르츠님의 '적어도 북연 황제인 풍홍 자신의 주관에서는 고구려 속국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라는 문제인식을 좀 오인해서 나온 답변에 대한 야스페르츠님의 피드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번째 문단의 제 생각은 맞는지는 모르겠군요. 읽으면서 두분이 말씀하시는 포인트가 분명치가 않아 몇번이나 헷갈리니...생각이 저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 모호하게 말을 하는 면이 없지 않네요.
2. 조공책봉체제에서도 신농님이 지적하신 부분의 문제는 전제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되는데 야스페르츠님이 말씀하시는 조공 책봉체제의 편입이라는 것은 일방적인 복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화전양면으로 상징되는 '필요에 의해서 받아들이기만 하고 책봉받은 와중에도 적대적으로 돌아서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때문에 조공책봉의 연속성 문제를 이상의 문단에서 이 얘기를 하시는 것은 어떻게 보면 불필요한 지적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신농님께서 조공책봉=복속이란 전제가 무의식적으로 깔려있어 책봉체제에 편입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곧 연속적인 복속으로 생각하시고 그래서 야스페르츠님 글에 대한 선입견으로 나타난게 아닌가 싶군요. 제 생각이 지나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조공의 성격에는 정치적 복속의 의미에서 세금을 바치는 의미와 마르셀 모스가 언급한 공동체 간 유대 및 친선유지를 바라는 '선물 교환' 적 양상 두가지가 있을텐데 보통 우리가 인식하는 조공의 이미지는 전자의 경우가 강하지요. 물론 후자의 경우도 상대적 강자에게 '나는 너와 싸울 생각이 없다' 란 의사 표시의 선물 증정을 강자가 복속의 이미지로 해석하는 경우 때문에 그런 이미지가 고착된 것도 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김용만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고구려의 조공 관련 기록들은 대부분 후자의 경우나 단순한 사신 방문 기록이 이렇게 와전된 것인 것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공책봉을 했다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해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말로 치욕적인 조공책봉이 된 것은 주씨 왕후가 연에 사로잡힌 그때 뿐이겠지만 정치적 필요에 의해 '난 너하고 싸울 생각이 없다' 란 의지 표명으로 조공을 하고 책봉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고(조공책봉을 한다고 해도 하는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복속되었다는 인식자체가 없으니까요) 이것이 일종의 화전 양면책의 일환으로 상대방을 속이는 형태, 즉 조공 보낸 뒤에 뒤통수 치는 행위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을 굳이 이분법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제 생각에는 야스페르츠님이 조공책봉에 대해 생각하시는 양상은 이렇다고 생각되고 신농님이 좀 과민하게 받아들이신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큰 틀에서 김용만 선생님의 인식이나 야스페르츠님의 인식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단지 주안점을 어디에 두었느냐의 문제인 듯 한데 두분 다 자신의 생각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올 수 있는 오해의 문제인데 그정도 차이는 용인될 수 있는 범위가 아닐지요?
3. 여기서부터는 이 북연 논쟁에 대한 제 개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말을 한마디 덧붙여 보겠습니다. 처음에 시작은 돌부처님과 야스페르츠님간에 '칭제' 문제에 대한 해석 논쟁인 듯 하더군요. 그런데 돌부처님과 명치호태왕님 댓글을 보다보니 좀 의아했던 것은 풍홍이 화를 낸 주체가 장수왕이 보낸 사신이고 장수왕 자체는 아니라는 얘기를 하셨던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신을 보낸 주체는 어찌되었든 장수왕이고 사신의 발언이 문제였음을 문제삼는다고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풍홍이 화를 낼 때는 장수왕의 말을 전하러 온 사신의 발언이므로 장수왕이 의도적으로 시킨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결국은 장수왕을 향한 분노일 수 밖에 없습니다.(만약 사신에게 화를 낸 양상이라면 굳이 칭제라는 얘기가 올 이유가 없습니다.) 풍홍의 입장에서는 비록 자신이 망명을 와 있다고 해도 엄연히 황제인데 망명을 와 있다고 왕 취급을 하니 자신을 능멸한다고 생각을 했겠죠. 물론 장수왕도 풍홍이 황제라고 해서 상전이라는 생각을 망명 전이라고 할 리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계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양자간 이해관계와 같은 것으로 조선은 일본을 하등한 오랑캐로 생각했지만 일본은 조선을 옛날의 조공국으로 생각한 것이죠.(물론 일본의 고대 인식이 그렇다는 것으로 실제로 그랬다는 것과는 거리가 있긴 하지요) 하지만 실질적으로 양자가 복속관계에 있는 것도 아니요, 양자가 서로 '너는 내 아래다'라고 생각을 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풍홍 망명 뒤에는 실질적 관계로 전환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풍홍의 관념에서 자신이 고구려 속국인양 생각되는 것을 용인했다고 볼 순 없는 노릇입니다. 이것은 풍홍이 고구려 내에서 그가 이끌고 온 세력을 믿고 고구려 경내에서 안하무인으로 행동했던 것에서 어느 정도 추론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야스페르츠님이 지적하고 싶었던 바 중에 하나는 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족의 예를 취한다는 대목이나 용성왕 풍군이라는 표현을 두고 대체로 북연을 고구려가 제후국으로 삼은 근거로 보고 있긴 합니다만 종족의 예는 주례식의 대종, 소종식의 관점이 아닐 가능성도 있고 그래서 단지 친교 의사를 표시하기 위한 외교적 수사에 지나지 않을 뿐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용성왕 풍군은 북연이 본거지를 잃고 고구려에 망명왔을 때의 일로써 어떤 지도에 북연 영토를 고구려 제후국으로 보는 입장이 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관념이 그러할 뿐으로 신라 사례와 같은 번국 이미지로 보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는 맞지 않는 일이겠죠.
국휘 문제는 좀 복잡해지는 듯 한데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김용만 선생님이나 돌부처님 말씀대로 피휘 개념이 없고 조상의 이름을 이어받는 것이 도리어 영광인 고구려 입장에서는 예제 상의 리스크가 전혀 없으므로(도리어 자국과 연관도 없는 타국 군주의 휘를 받아들이는 것이 꺼릴 판인데) 받아들이든 말든 상관없는 부분이니 자기들의 대내외적 정치 이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부분이겠죠. 때문에 피휘를 받아들이고 북위의 조공책봉체제에 들어간 점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외교적 복속을 의미하느냐면 그것은 아니고 위에서 언급했듯 북위와 '일단은' 충돌하지 않으려 한 화전 양면책(모스의 표현처럼 '친선교류 내지는 공동체간 유대 강화의 선물교환'...을 한 다음에 뒤통수 후려치기?)이란 면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첫댓글 시간 상 논쟁이 된 글들을 통독하지는 못했습니다만(어제 현장에서 일하다가 점심시간에 현장 연구원 분의 노트북으로 잠시 훑어본 정도), 대강 논쟁이 흘러가는 양상 정도는 파악이 가능합니다. 예컨대 김선생님과 야스페르츠님 간에 초반에 오간 이야기 가운데 야스페르츠님은 "고구려는 전연이나 후연의 책봉을 받았으며, 조공을 한 기록도 분명하게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저나 김선생님은 고구려가 전연-후연과 맺은 외교관계가 조공-책봉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공-책봉에 대한 문제는 더 많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분이 용어 사용상의 불일치로 빚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조공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실질적인 이야기의 맥락은 두분 다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잘 모르는 제가 주제도 모르고 글을 써본 것입니다. 아무튼 당사자 두분이 말을 아끼시니 제 3자인 제가 계속 이러는 것은 실례가 되겠지요. 저도 이만 접겠습니다.
아뇨.. 저는 이글루스에서 활동하면서 야스페르츠님의 글들을 간간히 봐왔습니다. 그런 제 판단으로는 야스페르츠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저나 김선생님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지금 논쟁이 흘러가는 양상을 대략적으로나마 살펴보세요.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두번째로 제가 실증주의에 대해 거론한 것도, 야스페르츠님이 김선생님의 해석을 '소설'이라 폄하하는 것에 대한 지적입니다. 물론 김선생님께서 개인의 해석을 '~일 것이다'라는 가정이 아니라 단정으로 쓰시기는 했습니다만, 지금 야스페르츠님께서 반론을 펴는 것은 단순 이 문제가 아니라 김선생님의 해석 자체를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으로써)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야기거든요.
뭔 이렇게 해석이 많은 지. 이런 해석이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야스페르츠에게 반박을 하게된 원인은 이런 것이 아니니까, 괜한 확대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진 않겠습니다. 얘기가 자꾸 커지는 걸 저도 바라진 않습니다.
애초에 장수왕이 풍홍에게 사신을 보낸 목적은 그를 위로하려고 보낸 것으로 어떻게 위로하느냐는 순전히 사신의 재량입니다. 용성왕 풍군은 장수왕이 의도적으로 시켰다기 보다는 당시 북연에 대한 고구려의 일반적인 인식으로 보여집니다. 기실 이 용성왕 풍군이라는 표현은 남송의 풍홍 책봉명인 황룡국 연왕보다도 격이 낮지요. 일개 사신이 왕 취급을 하니, 풍홍으로서는 화나고 부끄러워서 충분히 칭제 운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고구려가 북연을 아래로 본 것과 달리 풍홍은 고구려보다 아래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