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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장 장수산성의 성격
장수산성은 4세기 중엽에 축조된 고구려의 부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성곽유적으로서 그것은 당시의 력사, 특히 국토통일을 위한 고구려 인민들의 창조와 투쟁이 력사를 연구 해명하는데서 중요한 물질적 자료로 된다.
**********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 가운데서 삼국을 통일하려는 지향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줄기찬 투쟁을 벌려온 나라는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오래전부터 삼국의 통일을 중요한 정책으로 내세웠으며 삼국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주변나라들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과 밀접히 결부하여 힘 있게 밀고 나갔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임무에 대하여≫1권, 176페지)
고구려는 4세기 중엽 이후 우리나라 사회 력사 발전의 성숙된 요구로 부터국토의 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주동적으로 벌려온 나라였다.
이러한 투쟁은 고구려 사람들이 자체의 힘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열렬한 지향과 강한 군사력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여기에서 산성은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자연 지리적 조건과 상대방의 전술을 옳게 타산한데 기초하여 창안해내고 그에 의거하여 수많은 전쟁을 진행해온 군사시설물로서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황해남북도 일대에 수많이 분포되여 있는 고구려 산성들은 고구려의 국토통일정책의 성과적 추진을 실물로 보여주고 있다. 황해도일대에 분포된 수 많은 고구려산성들이 모두 다 그러하였겠지만, 고구려의 남진과정에서 장수산성이 차지한 지위와 그가 논 역할은 매우 컸으리라고 본다. 그것은 장수산성의 구조형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련의 특징과 산성부근에 분포되여 있는 고구려 시기의 대도시 유적을 비롯한 여러 유적들과의 밀접한 관계, 그리고 력사 기록에 보이는 자료들에 비추어 보다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수산성이 고구려 력사 발전과 국토통일을 위한 고구려의 남진정책 수행에서 차지하는 력사적 지위, 즉 장수산성의 성격을 올바로 해명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로 제기된다. 이를 위해서는 장수산성의 구조형식과 성 안의 유적유물을 통하여 이 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며 장수산성과 그 부근의 고구려 유적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하는 문제를 론할 필요가 있다.
제 1 절 장수산성의 특징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장수산성은 그 형식과 내용의 여러 측면에 고구려 산성의 일반적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장수산성에는 다른 고구려 산성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장수산성이 고구려의 력대, 수도방위성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특징은 우선 위치선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장수산성은 재령강을 끼고 있는 비옥한 평양지대에 풍부한 철광석 매장지대에 멸악산 줄기, 구월산 줄기, 수양산줄기 등 높고 험한 산줄기들과 련결 되여 있는 군사, 경제, 교통조건이 매우 유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장수산 일대가 가지고 있는 유리한 경제적조건, 교통조건의 편리성, 군사적조건의 유리성은 고구려 사람들이 수도를 정할 때 중요하게 고려한 위치선정조건이다.
고구려의 수도를 정할 때 반드시 정치, 경제, 군사적 조건을 충분히 타산한데 기초하여 그 위치를 정하였는데 고구려의 수도성 들이었던 환인지방의 오녀산성이나 집안의 산성자산성, 평양의 대성산성들이 모두 그러하다.
고구려 건국초기의 수도였던 오녀산성은 환인현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8km 거리에 있는 오녀산(820m)의 남쪽등성이 두 봉우리를 포괄하여 쌓은 성으로서 (총길이 2440m) 북쪽에는 혼강, 서남쪽으로는 환인평야를 끼고 있다. 환인지방은 서북쪽으로는 신빈과 통하며 동북으로는 혼강을 거쳐 혼하와 통하며 서남쪽으로는 관전, 동남으로는 집안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환인지방의 동쪽과 북쪽은 혼강이 굽이돌아 천연의 해자를 이루고 있으며 험준한 지세는 천연요해지로 되고 있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방위성이였던 집안의 산성자산성은 장백산줄기의 한 갈래가 압록강의 북쪽 연안에 이르러 끝나는 해발 676m 고지를 중심으로 하여 구축 되였는데 남쪽의 압록강연안에는 통구평야가 펼쳐져 있다.
산성자산성이 있는 집안지방은 압록강의 물줄기를 통하여 서쪽 의주지방으로 통하며 여기에서 다시 남북으로 길이 틔어 우리나라 서북지방과 중국의 료동지방으로 통할 수 있다. 또한 압록강 상류로 올라가면서 자성, 림강으로, 동으로는 장지강을 통하여 강계와 장진을 거쳐 랑림산맥을 넘어 함흥지방으로 통할 수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만포를 거쳐 강계, 희천을 통한 평양지방과의 교통이 편리하며, 북으로는 계곡을 거쳐 환인에 이르러 심양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또한 집안일대는 북으로 험준한 산줄기가 련이 있으며, 남으로는 압록강이 천연 방위선을 이루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구려의 수도성이였던 대성산성, 역시 경제적 조건, 교통조건, 군사적 조건이 유리한 평양지방에 있다. 평양은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비옥한 평야지대로서 예로부터 농업이 발전하고 대동강의 물줄기를 리용하여 평안남도 일대의 평야지대와 남쪽의 재령강 류역과도 쉽게 왕래할 수 있는 곳이다. 륙로를 통하여서는 남쪽으로 한강류역과 북쪽으로는 압록강 중류 및 하류지방으로 통할 수 있는 우리나라 서북지방의 교통의 요충지이다. 또한 대성산성의 북쪽은 묘향산줄기에서 뻗은 험준한 산줄기와 련결되여 있고, 남쪽은 대동강에 의해 사방이 둘러 막혀있어 방어에 유리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고구려의 수도성들은 이처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가장 유리한 곳에 자리잡았다. 고구려가 수도성의 위치를 선정할 때 이상의 경제적 조건, 교통조건, 방어조건들을 타산하였다는 것은 문헌기록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잇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가 졸본(환인지방)에 도읍을 정한데 대하여 ≪…그 지방의 토지가 비옥하고 산천이 험준함을 보고 드디어 도읍을 정하였다≫라고 하였고, 그 후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길 때의 기록에는 국내위나암이 산이 험하고, 물이 깊으며, 토양이 오곡을 재배하기 적합하고 산짐승과 물고기 등 산물이 많아서 도읍을 그곳으로 옮기면 나라가 무궁하고 전쟁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기록들은 고구려 사람들이 도읍을 정할 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리적 조건들을 고려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수산 일대가 가지고 있는 자연지리적 조건들은 고구려의 력대수도였던 환인지방이나 집안, 평양지방과 공통하다.
장수산성은 바로 수도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연지리적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곳에 자리 잡았다. 장수산성의 수도급 방위성으로서의 특징은 규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장수산성은 그 둘레가 10.5km이다. 여기에 내성의 남쪽과 외성의 동문아래에 쌓아진 겹성벽까지 합친 성의 총 연장길이는 약 12km에 달한다. 지금까지 조사된 고구려 산성들을 보면 그 규모가 장수산성만한 크기를 가진 성은 찾아보기 드물다.
고구려성으로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있는 산성으로서는 수도방위성들이였던 산성자산성과 대성산성을 들 수 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산성자산성의 둘레는 6,951m이고, 대성산성은 7,218m이다.
그런데 장수산성은 이 성들보다도 약 3km나 더 크다. 이것만 보아도 장수산성은 대단히 큰 성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산성의 크기는 산성이 자리잡은 지형조건과 해당시기의 생산력 발전수준에 많이 관계된다고 볼 수 잇다.
례를 들어 하나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그 중복에 쌓아진 산봉식 산성인 경우에는 지형상 관계로 하여 자연히 소규모의 성으로 밖에 될 수 없을 것이며, 이에 비하면 산봉우리를 한쪽 구석에 포함시키고 그 완만한 경사면을 성벽으로 둘러싼 사모봉식 산성은 성벽이 포괄하는 면적이 산봉식 산성보다 더 넓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개의 골짜기와 산봉우리를 포괄한 산릉선으로 둘러막힌 고로봉형 지형에 쌓아진 산성인 경우에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큰 성으로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로봉형지형에 많이 쌓아진 고구려 산성들의 규모는 비교적 크다. 이것은 고구려가 건국초기부터 강력한 외적과의 전쟁을 자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에서 독창적으로 창조한 산성축조의 우수한 점의 하나이다. 때문에 고구려 산성들은 거의나 대군과 장기적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규모와 구조를 가진 성으로 되였다. 성의 규모는 생산력발전수준과도 일정한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생산력이 발전하여 더 많은 로동력을 투입하게 되면 큰 규모의 산성을 쌓게 될 것이고, 생산력 발전수준이 그보다 낮으면 큰 규모의 성을 쌓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의 조선에서 성 쌓는 일이 품이 가장 많이 드는 힘든 일로 되여있는 것과 관련시켜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당시 높은 산성축조술과 생산력 발전수준에 토대하여 백제나 신라 산성들에 비할 바 없이 우월한 고로봉식 산성 축조의 모범을 창조하였다. 고구려가 우수한 축성술과 높은 생산력 발전수준에 토대하여 비교적 규모가 크고 방위력이 강한 산성을 많이 쌓았지만, 모든 성들에 대하여 무작정 크게 쌓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큰 성이 필요 없는 지방고을의 성인 경우나 방어체계상의 비중으로 보아 그 성의 규모가 그다지 클 필요가 없었다면 소규모의 성을 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산성의 크기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 중에서도 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그 산성이 가지는 정치, 경제, 군사적 의의였다고 본다.
다시 말하여 산성의 크기는 산성을 쌓던 시기, 그 지방 혹은 그 지역이 가지고 있는 정치, 경제적 및 방어상 중요성과 많이 관련하여 정하여 진다는 것이다. 성의 축조는 당시의 조건에서 막대한 로동력과 물자를 소비하는 대공사였던 것 만큼 그 크기를 결정하는 문제는 매우 신중히 고려 되였을 것이다. 반계 류형원은 ≪무릇 성의 대소를 결정하는 것은 마땅히 그 목적에 따라 할 것이다. 생각건대 성이 너무 넓으면 지키기 어렵고, 좁으면 군대가 움직이기 어려우니 제식에 마즌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반계수록≫ 권22, 병제후록 성지조.
이것은 옛날부터 성의 크기를 결정하는데 일정한 규준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성의 크기는 방위대상물의 성격, 방위력량의 준비정도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에 맞게 정하여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구려의 축성자들도 바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성의 규모를 결정하였을 것이며, 장수산성 축조에서도 이것은 례외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장수산성의 크기가 수도성들이였던 산성자산성이나 대성산성들 이상의 큰 성으로 건설되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고구려의 산성으로 널리 알려진 성들의 크기를 보면, 태백산성은 그 둘레가 2425m, 후류산성은 2.6km, 롱오리산성은 1300m, 치약산성은 3600km, 봉세산성은 2260m, 구월산성은 5230m로서 그 규모가 7km 이상 되는 성은 극히 드물다. 그것은 이 성들이 당시 한 지방고을의 성에 지나지 않았던 사실에 기인된다고 본다. 여기세 비추어볼 때 수도 방위성 들이었던 산성자산성이나 대성산성은 그 크기가 모두 7km 정도 되는 성들로서 대단히 큰 성이다.
이것을 통하여 산성자산성이나 대성산성과 같은 크기의 성은 당시 수도의 방어를 위하여 필요한 크기의 성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장수산성의 크기가 고구려 수도성 들이었던 산성자산성이나 대성산성의 크기와 대등한 사실은 4세기초 중엽, 장수산성이 고구려의 수도방위성들과 거의 맞먹는 정치, 경제, 군사적 의의를 가지고 건설된 성이였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고구려의 강대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수산성의 수도급방위성으로서의 특징은 그 방위력 형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수산성은 그 지리적 위치와 지형으로 보아 산성으로서는 가장 유리한 조건들과 성 방위에 필요한 모든 시설물들이 잘 갖추어진 당시로서는 가장 완비된 방위시설물이다.
장수산성의 위력한 방위력 형성에서 우선 볼 수 있는 것은 자연지세와 지형이 군사전략적 요구에 맞게 가장 효과적으로 리용된 것이다. 장수산성의 자연지세는 대체로 높이 수십 미터의 수직절벽이나 가파로운 경사지로 되여 있다. 장수산성은 바로 이러한 자연지형적특성에 맞게 거의 절반은 자연절벽을 그대로 리용하면서 여기에 인공적인 방위시설물을 결합한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자연지세와 지형이 충분히 리용된 것은 약 6,000m의 성벽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 구간은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삼은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산성 축조에서 지형지물 리용에 큰 주의를 돌린 것은 성의 방위력을 최대한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수산성의 방위력 형성에서 우수한 점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 되여 있고, 여기에 겹성, 철성 등 성의 방위력을 높이기 위한 모든 시설물이 다 갖추어진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수산성이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여 있는 것은 성의 방어력을 더욱 높이게 한 중요한 조건으로 되였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장수산성의 내성은 사방이 가파로운 지세를 이룬 것으로 하여 방어에 매우 유리한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다. 반면에 성안이 협소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생활하면서 성방어전투를 하는 데는 불리한 점이 있다. 이런 약점은 내성의 동부에 외성을 쌓음으로써 서로의 약점을 보충하여 훌륭한 방어시설물을 구축하였다.
외성은 성안에 여러 개의 골짜기 대지들이 있어 많은 인원이 들어가 오래동안 생활하면서 성 방어전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고 있다.
겹성이나 철성은 고구려 사람들이 성의 방위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처음으로 창안한 성 방어시설물이다. 이러한 시설물은 고구려의 모든 성들이 갖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겹성은 성의 전투적, 방어적 효과성을 높이기 위하여 기본성벽 밖의 자연지세를 리용하여 일부 구간의 성벽 밖을 겹으로 쌓아 기본성벽을 보강한 것이다. 고구려 성으로써 겹성은 대성산성의 남문 밖에 쌓아진 것을 들 수 있다. 이 겹성벽은 대성산성의 남문 앞 약 100m 거리에 있으며 그 길이는 약 550m이다. 이것은 성문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하여 쌓은 겹성벽으로서 옹성의 역할도 하였다.
* 고구려 력사연구(고구려 건국과 삼국통일을 위한 투쟁, 성곽),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년판, 173페지.
장수산성에서 이러한 겹성은 내성의 남문 밖과 외성의 동문밖에 각각 쌓아졌다.
철성은 성밖에서 성안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고지나 방어상 유리한 등성이를 확보하기 위하여 그러한 지형을 성안에 휘여 놓고 쌓은 성벽이다. 고구려 성으로서 철성은 평양성의 북성의 방위력을 더욱 높이기 위하여 그 북쪽 봉우리에 쌓아진 것과 롱오리산성의 서쪽 봉우리를 확보하기 위하여 길게 성벽이 쌓아진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철성이 장수산성에서는 내성, 남문 부근의 산등성이와 외성 동북쪽 봉우리에 각각 쌓아졌다. 또한 장수산성의 방위시설물에서 특이한 점은 성문의 방위력을 높이기 위하여 2중 3중의 시설물들이 구축된 것이다.
장수산성에서 내성남문의 방위력을 높이기 위하여 성문 안쪽으로는 ≪ㄱ≫자형의 옹성시설을 갖추고 성문 밖으로는 겹성벽을 쌓아 옹성의 역할을 하게 한 것과 외성남문에서 문안으로 반원형의 옹성을 쌓은 데다가 성문 앞 공지에 문 방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토성으로 둘러막은 것. 외성 동문밖 겹성벽이 옹성벽의 역할을 놀게 한 것 등이 그 대표적 실례로 된다. 이것은 보면 장수산성이 방위력과 전투력을 높이기 위하여 최대의 노력이 기울여진 성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장수산성의 방위력 형성에서 특징적인 것은 또한 성안에 쇠부리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성 안에는 모두 6개의 쇠부리 시설이 있다. 성안의 쇠부리터는 장수산성이 성 방위에 필요한 일체 무기를 현지에서 생산 보장하는 무기무장 생산 시설물까지 갖추어진 방위력이 강한 성이였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데서 무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놀게 된다.
성안에서 발견된 쇠부리터는 성안의 중요시설물의 하나로서 그것은 성의 전투적 기능과 역할을 높이는데 실로 큰 몫을 담당하였을 것은 당시 군사기술, 무기발전 정도로 보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고구려 산성 안에 쇠부리 시설이 갖추어진 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성안의 쇠부리 시설들에는 고구려의 붉은 기와들과 함께 나타나는 회색벽돌이 씌여진 것으로 보면 고구려 시기부터 만들어져 리용되여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장수산성은 고구려 사람들이 성 건설에 도입한 우수한 것을 다 갖춘 요새로 되였다. 장수산성에서 수도 방위성의 특징은 성안의 건물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장수산성 안에는 건물터가 대단히 많다. 성 안 건물터의 수는 80여 채 분에 달한다. 이것은 성안에 성 방어와 관리에 필요한 관청이나 병영, 창고 등 각이한 용도의 건물들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성안에 들어가 생활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방위대상물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해준다.
성 방어와 관리에 필요한 관청터나 병영터 창고터들이 있는 것은 다른 고구려 산성들에서도 볼 수 있는 일반적 특징이다. 그러나 장수산성 안네는 다른 고구려 산성들의 건물터들과 다르게 볼 수 있는 건물터가 있다. 바로 1호 건물터는 성 안 전체 건물터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터이다.
이미 앞에서 본 1호 건물터의 위치나 주변시설물의 배치상태, 건물터의 구조형식과 유물은 1호 건물터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우선 건물터의 위치를 보면 산성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있다. 이 건물터는 성안에서 해가 제일 잘 들고 아늑한 곳에 사철 마를 줄 모르는 산골짜기의 물줄기를 가까이 하고 있어 생활하기 가장 편리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또한 외성 안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어 성안의 그 어디에나 오고 가기에도 편리하며 성 남쪽의 중앙장대와도 직접 련계를 가질 수 있으므로 성 안팎의 모든 정황을 언제가 환히 꿰뚫을 수 있다. 고구려의 이름난 건축물들은 모두 이와 같이 생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유리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건물터 주변에 배치된 시설물인 파수터와 우물을 보아도 이것을 알 수 있다. 건물터의 북쪽으로 1.5m 떨어진 산 경사면에 있는 파수터에서는 1호 건물터과 그 주변을 손금 보듯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이 파수터는 1호 건물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건물터의 서남쪽 10m 지점에 있는 우물도 건물터를 위하여 특별히 마련된 것이다. 이렇게 1호 건물터의 위치와 주변에 배치된 시설물들을 보면 모두 생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선의 조건을 갖추려는 시도가 많은 면에서 엿보이고 있다.
건물터는 구조형식에서도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규모가 매우 큰 것이다. 성 안에서는 비교적 크다고 볼 수 있는 동서 길이 17m, 남북너비 3.2m의 크기를 가진 2호 건물터와 남북길이 21m, 동서너비 8m의 크기를 가진 3호 건물터의 축대, 높이는 0.5-0.6m 정도인데 1호 건물터의 돌축대 높이는 무려 3.2m에 달한다. 건물터의 규모가 크다는 것은 건물터의 면적과 기초시설, 건물의 면적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건물터는 그 면적이 455㎡이고, 건물의 면적은 240㎡이다.
주추자리돌의 크기는 직경 1.2-1.6m 깊이 0.6m이다. 이러한 건물터와 건물의 크기, 주추자리들의 크기는 안학궁의 북궁 제 6호, 7호 궁전과 매우 비슷하다. 안학궁의 북궁 제 6호, 7호 궁전은 그 규모가 거의 같은데 집터 면적이 480㎡이고 건물면적은 245㎡이다. 집터의 앞면길이는 35m, 옆면길이는 원채가 9m, 곁채가 5m이다. 기초는 원형인데, 직경은 평균 1.6m이고, 깊이는 0.6m 안팎이다.
* ≪고구려 력사연구≫(안학궁유적과 일본에 있는 고구려 유적유물)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85년판, 25페지.
1호 건물터는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건물의 평면구성에서도 특수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건물의 평면구성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우선 건물의 가운데에 기둥을 세우지 않은 것이다. 건물의 가운데 기둥을 세우지 않는 내부공간은 길이 12.6m 너비 7m이다. 이러한 형식은 건물의 내부공간을 넓게 하기 위하여 취한 것으로써 안학궁*을 비롯한 궁전 건축에 많이 작용하는 건축수법이다.
* 우와 같은 책 20-30페지.
건물의 평면구성에서 특이한 것은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회랑시설을 갖춘 것이다. 고구려 건축물의 평면구성에서 회랑은 중요한 구성요소의 하나로 되고 있다. 회랑은 당시 왕궁이나 절간, 신분이 높은 지배계급들의 살림집들에서만 볼 수 있는 건물 구조의 한 형식이다. 고구려 건축물로서 회랑시설이 있는 유적은 안학궁과 정릉사를 들 수 있다. 왕의 무덤인 안악 3호 무덤에도 회랑시설이 있다.
이와 같이 1호 건물터에서는 왕과 관련이 있는 건물터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적지 않다. 그것은 또한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건물터와 그 부근에서 드러난 유물 가운데는 고구려시기 왕궁터나 수도의 중요한 건물터들에서만 볼 수 있는 암키와 막새와 수키와막새가 있다.
그 가운데서 주목되는 것은 암키와 막새이다. 현재까지 고구려의 암키와막새가 발견된 유적은 안학궁터 밖에 없다. 이것은 고구려 시기에 왕궁건축에만 암키와 막새가 사용된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암키와 막새가 드러난 2호 건물터가 왕과 관련이 있는 건물터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이상의 사실로 미루어보아 1호 건물터는 왕이 유사시에 거처하던 행궁터로 볼 수 있다. 행궁은 수도의 산성이나 또는 어떤 성으로 왕이 일시 거처를 옮길 때 쓰는 별궁으로서 고구려에서는 수도의 산성이였던 산성자산성과 대성산에 건설된 것이 있다. 이 두성은 모두 고구려의 수도를 방어하는 산성으로 쓴 것이기 때문에 전시에 왕이 들어갈 행궁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대성산성의 행궁터는 장수봉 서남쪽 골짜기 아늑한 곳에 있다. 이곳에는 후세에 건물을 지었던 관계로 유적이 심히 파괴되였으나 원래의 모습을 대략 찾아볼 수 있게 흔적이 남아있다. 이웃에는 장수봉의 장대건물을 둘러막은 돌성벽 동쪽에서부터 돌성벽을 쌓아 그 남쪽에 동서로 길게 막은 구역이 있다. 이 돌성벽의 서쪽 부분은 흔적이 똑똑치 않으나 다시 북쪽으로 올라가 장수봉 장대 성벽과 련결되였을 것으로 인정되는데 이 행궁성안에는 평평한 대지가 있으며 주춧돌로 쓰인 큰 돌도 더러 남아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고구려 기와 쪼각이 수많이 깔려있으며 돌무지 속에서 금으로 쓴 불경도 나왔다.*
*≪대성산의 고구려유적≫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73년판, 68-72페지.
이 부근은 대성산성안에서도 가장 아늑한 곳이며 주변에 못과 병영자리도 많다. 이런 것들은 여기에 행궁이 있었던 사실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로 된다.
산성자산성의 행궁터는 남문부근에서 알려졌다. 남문에서 500m 되는 곳인 점장대우의 평평한 곳에 궁전터가 있고, 그 뒤에 병영터가 있다.
궁전터는 남북 92m, 동서 62m이며, 높이는 약 1m인데, 제 1단과 제 3단은 좁고 제 2단이 가장 넓다. 매단마다 주춧돌이 있는데 크고 작은 것 수십개가 남아있다. 주춧돌은 남북방향으로 배렬되여 있으며 제 2단에는 50여개나 되는 주춧돌이 있다.*
*≪문물≫(중문) 1982년 제 6기 82-85페지.
그러면 어떻게 되여 장수산성안에 고구려시기 수도의 산성들에만 건설된 행궁유적이 있는가. 이것은 장수산성의 성격을 론하는 서 중요한 자료의 하나로 되며 바로 장수산성이 수도급이 해당되는 성이였던 사실을 확증해주는 것이다.
행궁터 바닥에서는 고구려의 전형적인 붉은기와편이 수많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아 장수산성의 축조와 함께 건설되였다고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