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시기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 상황도 /출처:http://xakyntos.egloos.com/2482068
(406년) 겨울 12월에 연나라 왕 [모용]희가 거란을 습격하여 형북에 이르렀다가, 거란의 무리가 많은 것이 두려워 돌아가려고 하여, 마침내 군대의 무거운 짐을 버리고 가볍게 무장한 채 우리를 습격하였다. 연나라의 군대는 3천여 리를 행군하였으므로 병사와 말이 피로하고 얼어 죽은 자가 길에 이어졌고, 우리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17년(407년) 정미(丁未)에 왕의 명령으로 보군과 마군 도합 5만 명을 파견하여 … 합전(合戰)하여 모조리 살상하여 분쇄하였다. 노획한 (적병의) 갑옷이 만여 벌이며, 그 밖에 군수물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또 돌아오며 사구성(沙溝城) 루성(婁城) ▨주성(▨住城) ▨城▨▨▨▨▨▨城을 파하였다. -광개토왕비문
이거 왠지 냄새가 나지 않나요?
406년 12월에 후연이 고구려의 목저성을 공격했다가 퇴각하고, 407년에는 곧바로 고구려가 어떤 세력을 대규모로 공격하여 승리하고 큰 성과를 남깁니다. 407년 고구려가 어떤 세력을 공격했는지는 광개토왕비문의 마모로 알 수 없습니다.
광개토왕 즉위 이후 고구려와 후연의 전쟁을 살펴보면, 400년에 후연이 고구려의 신성,남소성 등을 점령하고 700여리의 땅을 개척하고 돌아갑니다. 402년과 404년에는 고구려가 후연 요서지방의 숙군성과 연군을 공격하여 승리하고, 405년과 406년에 후연이 고구려에 반격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런데 후연이 406년 목저성을 공격할때 신성과 남소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곧바로 목저성을 공격합니다. 이는 후연이 400년에 고구려로부터 신성과 남소성을 빼앗은 이후 신성과 남소성이 후연의 영역이 되어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공교롭게도 고구려가 400년에 후연으로부터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습니다. 광개토왕비문의 수묘인 편제에 신성과 남소성이 있는것으로 보아 광개토왕대 고구려가 신성과 남소성을 수복했을 가능성은 높습니다.(신성과 남소성을 후연에게 빼앗기기 전에 수묘인 편제를 한게 아니라면)
406년에 후연으로부터 공격받은 점과, 407년에 전투를 치루고 '돌아오며' 성 몇개를 점령하는 것으로 보아, 광개토왕비문 영락17년조 기사는 406년 고구려에서 퇴각하는 후연군을 추격 섬멸하고 돌아오며 후연으로부터 400년에 빼앗긴 신성,남소성 등을 수복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첫댓글 추정이 옳은 것 같습니다.
(지명 비정은 논외입니다.)
병사와 말들이 피로하고 동사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도 순순히 물러가게만 하였다?
호태왕과 고구려 장수들이 성인이 아닌 바에야 그냥 둘 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진희의 주장과 같이 석회도부된 비문을 과학적인 정밀 조사를 하기 전까지는 어떠한 추정도 삼가야겠지만,
비문에 기록된 407 년의 거병 기록이 누락된 것은 김부식의 실수 외에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또한 공격 대상이 누락된 비문도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로,
아마도 왜인들의 작란이 있었으리라고 추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