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회원 알림

 
  • 방문
    1. 금강야챠
    2. 고국원왕
    3. 붙박이별
    4. 달새
    5. 至今
  • 가입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최선
    2. 그짱
    3. 유니20
    4. bmcoor
    5. 한능검1급
    1. History love..
    2. G밸리산업박물관
    3. 프레쉬
    4. 모두루
    5. 볼랑
 
 
카페 게시글
동아시아 역사 토론장 오호망양(五胡望洋) 24 - 요동 전쟁
야스페르츠 추천 0 조회 654 09.11.25 00:46 댓글 37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09.11.25 09:45

    첫댓글 일부 오류가 있어서 수정하였습니다.

  • 09.11.25 10:16

    광개토태왕비문에 의하면 407년에 고구려가 보기 5만을 동원하여 적을 궤멸시키고 1만 벌의 개갑을 노획했다고 하는데, 이 때 고구려가 궤멸시킨 적은 후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 작성자 09.11.25 15:30

    407년 기록은 공격 대상이 누구인지 마멸되어 있어서 좀 애매하죠. 저도 앞에서 언급만 하고 뒤에서는 깜빡했네요. ^^

  • 09.11.25 22:14

    흠. 그 대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학들의 연구가 있으니 제가 부연설명할 필요는 없겠으나...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광개토태왕비의 전체적인 내용상 후연에 대한 정벌 기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오히려 이는『삼국사기』에 다 나오죠) 왜 딱 407년 기사만 후연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볼때 오히려 문헌과 금석문은 거짓말처럼 서로 같은 얘기를 안 하니깐요. 이는 분명히 양자의 집필의도와 목적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암튼...이 부분은 저도 공부가 부족하니깐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 그럼 이만~

  • 09.11.25 12:07

    근데 이전부터 저도 느끼고 있고 다른 분도 이미 언급하셨지만 야스페르츠님의 이 시리즈는 정말 역사문에서만 썩히기엔 아까운 것 같습니다. 잘 정리되어 있고 재미도 있고...진짜 출판하실 계획이 없는 겁니까? 오호십육국 시대를 이렇게 대중적으로 잘 정리한 글은 일찌기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 작성자 09.11.25 15:30

    과찬이십니다. ^^

  • 09.11.25 16:53

    저도 오호십육국사 이렇게 재밌게 본 적 처음입니다.^^

  • 09.11.25 17:36

    과찬이 아닙니다. 야스페르츠님은 정말 심각하게 출판을 고려해보시는게...

  • 09.12.04 21:25

    야스페르츠님의 5호16국사 애독자인 제가 보기에도 저희 역사문 까페 회원분들이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다듬으셔서 출판을 고려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정말 아까운 대작입니다.

  • 09.11.25 12:41

    잘 읽었습니다.

  • 09.11.25 14:29

    <404년 왜군이 대방으로 쳐들어온 사건> - 이 부분은 비문 조작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는 부분이죠. 사실 정황상으로도 많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 문장입니다. 1. 고구려에 굴복한지 얼마 되지 않은 점, 2. 백제 내부적으로 고구려 공격에 부작용이 생겼던 점, 3. 공격 주체가 백제도 아닌 왜라는 점, 4. 403년과 405년 경 백제와 왜는 신라와 전투를 치르던 중, 5. 장해현지에 의하면 404년 고구려군은 요동남단에서 전쟁중이었으며 수군이 활동한 점, 6. 404년 비문의 석성이 요동에 존재하는 점...여하튼 404년 비문을 근거로 백제와의 전선에서 수세라고 보는건 좀 더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요?

  • 09.11.25 14:31

    오히려 수차례 격파로 전선이 안정된 결과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연군이 이동하였다는 뚜렷한 근거가 있나요?

  • 작성자 09.11.25 15:36

    흠. 저도 그 부분은 잘 알지 못하는지라... 그냥 오호십육국의 입장에서 고구려 문제는 가볍게(?) 다루고 넘어간 것으로 봐 주세요. 그리고 연군 문제는, 제가 놓쳤던 부분이기도 한데 399년에 연군 태수가 군민을 통째로 들어 북위에 항복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와 전쟁을 벌일 당시에 연군 일대는 북위의 영역이었다는 것이죠. 국편위의 "한국사"에서도 연군을 대릉하 유역 어딘가에 교치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 09.11.25 16:55

    참고로 노태돈 교수도 고구려사 연구에서 연군을 요서 일대로 보더군요.

  • 09.11.25 19:39

    야스페르츠님, 헌데 이글루스에서 말씀드리지 못했던 부분 한 가지만 적자면 '대고구려 전선에서 보자면 후방에 해당하는 지역이 털린 셈이다' 부분을 굳이 버리실 필요가 있나 싶습니다. 어쨌거나 연군이 용성 뒤쪽에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후방은 후방 아닐까요?^^;

    그리고 이건 저도 정말 진담으로 드리는 말씀인데, 좀 더 다듬으셔서 출간을 고려하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오호십육국사만을 이렇게 재밌게 다룬 시리즈물은 흔치 않을 듯 해서요ㅎㅎ

  • 작성자 09.11.25 21:18

    연군이 대릉하 인근으로 이치되었다고 하니 후방이라고 하긴 좀 어려울 듯 합니다. 용성 앞쪽이거든요. 과분한 칭찬은 감사드립니다. ^^

  • 09.11.25 22:08

    광개토왕 당시 백제는 그야말로 '개안습'의 상황이였을 겁니다. 백제의 지도층 궁월군이 120현의 주민을 이끌고 일본으로 투항한 사건이나,아신왕의 징병에 못이겨 백성들이 대규모로 신라로 도망가는 등 직접적인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습니다. 백제 자체의 군사력도 고갈 상태라 왜군을 움직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구려가 한번더 밀고갔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련지는... 여하튼 백제의 안습적인 상황을 볼때 광개토대왕비 407년의 전투 대상은 적어도 백제나 그와 유관한 세력이기기는 힘들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 407년의 백제는 내분에 휩싸여 고구려 따위(?)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거든요...-_-;;

  • 09.11.26 09:13

    야스페르츠님은 너무 겸양만 하지 마시고 정말 출판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이런 좋은 글은 대중이 함께 나눠야하는게 글쓴이의 일종의 의무(?)가 아닐까도 하네요...이게 다 야스페르츠님이 좋은 글을 쓰신 업보입니다. ㅋ

  • 작성자 09.11.26 18:51

    커헉. 의무까지... ㅎㄷㄷ

  • 09.11.26 20:30

    저도 출판을 진심으로 권합니다. 5호 16국에 관한 역사는 한국에 제대로 번역된 것조차 없는게 현실이며, 학자들도 원서로 보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절실한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본 것만도 기껏해야 3-4권 정도인데 야스페르츠 님과 여소제님의 글은 한 번 출판되면 사고 싶습니다.

  • 작성자 09.11.26 18:52

    사실 저도 자치통감을 정리하는 수준일 뿐입니다. 권중달 선생님의 자치통감 번역본을 보시는 것이 훨씬 더 자세하고 낫습니다. ^^

  • 09.11.26 23:06

    자치통감은 님의 시리즈처럼 오호십육국시대를 일목요연하게 적어놓지는 않았죠. ㅎㅎ

  • 09.11.26 20:53

    5호16국 역사는 보고 싶어도 교보문고에서 한두권 겨우있는것 같은데(그것도 남북조 시대가 거의 대부분)출판하시면 좋으실듯 합니다.
    5호16국 역사는 정말 개인적으로 보고싶은데 이렇게 정리를 잘하셨으니 출판하시면 대박날듯 합니다^^

  • 09.12.07 14:41

    그동안 유익한 글 잘 보고 있었습니다. 헌데 정정한 부분은 그대로 놔두는 것이 두루뭉실하게 넘어가 좋을 듯합니다.
    진서 지리지에는 燕郡이 없고 燕國이 계현을 포함한 10 현을 통령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서 지형지에는 연군이 유주 소속이며 `故燕 漢高帝爲燕國 昭帝改爲廣陽郡 宣帝更爲國 後光武倂上穀 和帝永元6年復爲廣陽郡 晉改爲國 後改`라 하여 북위에서 연군이라고 한 연유를 밝혔고 진 연국과 북위 연군의 속현으로 모두 계현이 있습니다. 계현이 어딘지는 님께서 더 잘 아실테고, 근거로 제시한 국편위의 한국사에 연군이 이치되었다는 말은 아마 오류인 것 같습니다. 고구려의 공격을 기록 그대로 적극적으로 해석하셔도

  • 09.12.07 14:42

    님의 글에는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지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작성자 09.12.07 15:05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북위의 입장에서 연군은 후연에서 탈취한 지역이니 그대로 연군이라 명명하고 건치연혁을 적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연군은 윗 댓글에서 말했다시피 399년에 북위에게 내줬던 상황이므로, 400년에서야 고구려와 후연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것을 생각하면 당시 후연의 연군은 본래 연군과 다른 곳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402년 무렵에는 연군이라는 지명을 가진 곳이 2개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저 건치연혁은 전혀 신경쓸 문제가 아닙니다. 후연의 연군은 후연/북연 멸망 후에 폐지된 것으로 보면 되니까요.

  • 10.01.25 22:15

    북위가 차지하였다고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의 위치를 요서로 비정하는건 지나친 비약 아닐까요 연군이 요서로 옮겼다는 사료적 근거는 없지요 그리고 북위가 차지했다 쳐도 후연이 다시 탈환하여 고구려의 공략대까지 차지할 가능성은 있고요

  • 09.12.08 17:44

    그렇다면 후연은 무슨 이익이 있다고 연군을 재설치할까요? 북연이 멸망한 후 재설치한 연군이 자동 폐지된 것으로 보면 된다는 님의 해석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어차피 연군을 이치했거나 폐지되었을 것으로 볼 바에야 고구려가 후연의 후방을 공격했다고 하면 무슨 문제라도 생기는지 궁금합니다. 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고구려는 영역을 광개했다는 시기입니다. 혹 실제로 후연 보다야 고구려의 영역이 작았다 하더라도 기록에도 없는 이치.폐지를 상정할 것이 아니라 연군을 숙군성 공격을 평한 것처럼 이해하기 어렵다는, 그렇지만 아마도 후연의 후방을 공격하였을 것 같다는 원래의 글이 낫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 작성자 09.12.08 18:48

    그렇다면 고구려가 공격하기 몇 년 전에 연군이 북위에게 넘어간 기록은 어떻게 해석하실 것입니까? 이미 북위에게 연군을 빼앗겼는데도 연군을 공격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면 교치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단순히 연군이 후방에 있어서 고구려의 공격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이 아니라, 이미 후연의 영토가 아니었던 연군을 공격한 기록이기 때문에 교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 09.12.09 13:08

    어쩌면 광개토태왕이 북위의 연군을 공격했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렇게 보자면 몇 가지 검토해야할 것들이 있다고 봅니다. 1. 고구려의 북위 공격 이유 2. 404년 당시 북위의 대내외적 상황 3. 고구려가 연군을 공격했음에도 북위측 기록이나 대응이 없는 이유 4. 고구려의 연군 공격 기록이 진서 모용희 재기에 있는 이유 등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09.12.09 14:21

    연군이 분할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또 고구려의 공격이 후연을 우회할 가능성도 있을테고...전연,후연 시대의 지리지가 없어서 이런 상상을 하지만 진서 지리지 평주 기록을 보면 후연의 지리적 상황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유주에서 노박진 이남이 위에 함몰되였다고 하였고, 이어서 모용희는 유주의 치소를 영지로,청주를 신성,병주를 범성,영주를 숙군,기주를 비여로 소위 행정개편합니다. 즉 지명은 옯기지 않고 광역 행정명을 좁은 지역에 집합시킨 것입니다. 진서 기록에서는 연군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위서 지형지에는 연군이 유주 소속으로 옛 영역 그대로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후연은 영역이 쪼그라 든 것을

  • 09.12.09 14:22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당시 위세로 보아 쪼그라진 후연을 우회하여 쪼개졌을 연군을 충분히 공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 작성자 09.12.09 14:46

    백랑수 님// 연군 분할이나 교치나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연군의 위치에 대한 <한국사>의 추측은 저도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고 좀 억지스러운 감이 없지않아 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만, 어쨌든 당시 "진짜" 연군은 후연의 영토가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하잖아요.
    이번에 언급하신 주의 교치만 놓고 보아도 연군이 어디론가 교치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봅니다만. 그리고 사료 상에 북위를 공격했다는 내용이 없고, 기록된 곳도 후연 관계 사료가 분명하므로 북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억지스럽습니다. 위치 문제는 저도 확신은 못하지만, 어쨌든 고구려가 후연의 영토 어딘가의 연군을 친 것은 분명하지 않을까요

  • 10.01.25 22:29

    진서 지리지 평주조의 모용희의 여러 지역 자사들의 이동은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을
    치루었던 모용희 당시 배경을 고려하면 고구려전쟁용의 성격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용희가 고구려와의 전쟁에 각 지역의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이들 자사들을 이 지역으로 이동시킨 것이지요 행정구역 개편이 아닌 병력동원용 성격이 강하지요

  • 09.12.18 14:19

    제 말은 고구려가 후연과의 경계지역이나 후연의 중심부를 우회하여 후연의 서쪽에 있었을 즉 후연의 후방에 있는 연군을 공격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입니다. 그리고 후연의 연군은 온전한 연군이 아니라 북위의 공격으로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당연히 교치라고도 추측할 수 있겠지만 교치라는 언급이 없으며, 군대의 공격이 항상 접경지역에서 직선으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10.01.25 22:24

    북위는 402년 후진과의 시벽전투로 국력이 소모되면서 대외원정을 자제하고 내정에 힘쓰게 되지요 후진과의 전쟁으로 동쪽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약화되어 연군내 후연추종세력들이 봉기를 일으켜 고구려 공략대까지 자체적으로 연군을 통치할 가능성도 있지요 아직 사료부족으로 구체적으로 알수 없지만 그러나 북위는 후연을 멸망시킬 정도로 국력이 절대적으로 강한 편도 아니고요 북위가 유주를 차지했다 쳐도 전략적으로 산동에 위치한 모용덕의 남연과 북쪽의 후연중앙정부 이 양쪽으로부터 협공될 위치에 놓여 장기적으로 유주를 지배했는지 의문이 들지요

  • 10.01.25 22:23

    진서 지리지에 모용희가 유주자사를 영지에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주자사의 이동이 고구려와의 전쟁을 우한 전략적 일환으로 단행되었을 가능성이 높지요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