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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吐蕃) 장안성 함락은 약탈전인가?』
7c 초인 643년부터 계속되왔던 토번제국(吐蕃帝國)과 당 제국(唐 帝國)의 전쟁은 8c에도 역시 이어졌고 서로 밀고 밀리는 전투였다. 당 현종의 치세를 맞이한 당나라는 최전성기를 맞이하여 그야말로 세계에서 당시 가장 강한 국력을 자랑하였고 이에 따라 토번은 우마이야와 함께 대항해보기도 했으나 서역의 영토를 대부분 잃는등 당나라에게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755년 안록산의 난을 시작으로 절도사 난이 시작되자 당은 날로 쇠퇴하였고 이에 비해 토번은 제2의 전륜성왕이자 불교의 수호자라 불리우는 치송데첸(赤松德贊,Khri-srong lDe-btsan)의 등장으로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토번이 당을 압도하는 군사력을 장악했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763년 토번의 장안성(長安城) 함락 사건이다.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을 함락한 이 사건이야 말로 토번이 당의 국력을 압도적으로 능가했다는 증거일것이다. 오늘 본인은 이 사건에 대해 다루어보고자 한다. 분명 이 사건은 토당전쟁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일뿐만 아니라 당시 토번이 당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또 토번은 이에 대해 어떤 행동을 보였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일단 중국측 기록인『구당서(舊唐書)』에는 다음과 같이 나온다. 『구당서 권196 토번전(舊唐書 卷196 吐蕃傳)』의 763년 내용을 간략히 요약한것이다.(전투 내용이나 세세한 내용들은 모두 생략한다.)
『구당서 권196 토번전(舊唐書 卷196 吐蕃傳)』
황제가 섬주로 옮겨 경사가 함락되자 항장 고휘가 토번을 이끌고 상도성으로 들어가 토번대장 마중화(馬重華)등과 함께 고빈왕 아들 광무왕 승굉을 황제로 세우며 대사면을 베풀고 관리를 임명하였다...(생략)...토번은 성에서 15일간 머무른뒤 퇴각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그러면 어떻게 나올까? 『자치통감(資治通鑑)』의 중요부분만 요약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자치통감(資治通鑑)』
토번이 쳐들어와 노략질 하면서...(생략)... 겨울 10월 토번이 노략질하자 자사 고휘가 성을 들어 가지고 그들에게 항복하고...(생략)...신사일(2일) 에 봉천과 무공을 노략질 하니 경사에서는 떨면서 놀랐다....(생략)...무인일(9일) 토번이 장안에 들어가니 고휘와 토번대장 마중영 등이 옛날 빈왕인 이수례의 손자 이승굉을 세워서 황제로 삼고 연호를 고치고 백관을 두면서...(생략)...토번이 이미 광무왕 이승굉을 세우고 나자 성안에 있는 사인(士人),부녀자 백공(百工)을 악취하여 무리를 정돈하여 귀국하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은 토번의 장안성 함락에 대해 노략질 즉 약탈이라고 표기하였다. 이외에 신당서등 여러 사서가 있지만 내용은 위것들과 비슷하므로 이하 중국 사서들은 생략하고 이제 토번의 기록을 보도록 하자
『티베트 사료(吐蕃 史料)』
겨울에 하로(下路)의 당주(唐主,당나라 황제를 의미하며 당숙종-唐肅宗-을 말한다.)가 죽고 새 당주(唐主,당 대종-唐代宗-을 말한다.)가 즉위 한뒤 약속을 어기고 공견(貢絹)을 바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땅도 헌납하지 않아 마침내 적국이 되었다. 이에 상걔씨(尙野)와 상동첸(尙東贊)등이...(생략)...여러 성보를 공격하여 이기고 상걔씨는 번(蕃)으로 돌아갔다. 상계씨와 뢴다자루콩(論悉詻),샹동첸,샹첸파(尙贊磨)등이 군사로서 경사(장안성)을 포위하여 경사성(京師城)이 함락되고 당주가 탈출하여 도망치니 따로 새 당주를 세우고 개선하였다.
『뢴다자루콩 비문(論悉詻 碑文)』
첸포 치송데첸은...(생략)...당토의 당나라땅의 성과 보루 여러곳을 공격하여 이기니 당주 효감황제(孝感皇帝) 군신(君臣)이 매년 채증 5만단을 보내게 해달라고 빌어 당실의 조공을 폈다.(당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말) 당주의 부왕 효감황제가 죽고 태자인 당주 광평왕(廣平王)이 즉위하자 토번에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첸포가 진노하여...(생략)... 두 장수에게 명하여 경사로 진격하게 하여...(생략)...싸워 당군을 대패시킨 당주 광평왕은 경사를 버리고 나와 섬주로 도망하여 마침내 경사(장안성)를 함락시켰다.
토번이 당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킨 이 사건을 중국사서만 놓고 본다면 단순한 약탈로 이해 될 수도 있지만 과연 그럴까? 일단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말하길 당시 토번이 이끌고 온 군대가 20만이라고 한다. 20만 대군을 이끌고 약탈전이나 벌이려 오는 국가는 없을것이다. 더욱이 티벳,중국사서의 공통된 점은 토번이 당나라 황족 이승굉(李承宏)을 황제로 세웠다는 점이다. 괴뢰정권 이라 할 수 있는 이 이승굉의 당나라는 비록 15일밖에 가지 못하였지만 관료들을 다 정할 정도였다. 이것을 볼대 이 사건을 단순히 약탈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토번이 장안성을 점거한지 얼마 안되서 장안성의 장인,유생등을 데리고 라싸로 개선한건 사실이다. 또한 이러햇기에 자치통감의 저자 사마광등 중국 역사가들은 이를 약탈전으로 본듯하다.
그러나 토번(吐蕃) 사료를 보면 토번은 단순히 약탈전을 벌이기 위해 진군한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번째로 토번은 당으로부터 약속받은 조공품을 당이 주지 않자 이를 이유로 당을 침공했음을 볼 수 있다. 2번째로 군대의 규모가 20만 대군으로서 단순히 약탈 행위가 아닌 한 국가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 3번째로 괴뢰정권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 3가지 경우를 볼때 이것은 결코 약탈전으로 보기가 어렵다. 또한 토번군은 완벽히 철수한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었다. 당시 당나라 총사령관 곽자의가 이끈 군대가 5만 이하라는 점을 볼때 토번 입장에서 20만이라는 대군을 주둔시킬 이유가 전혀 없었던 셈이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약탈전으로 보기가 어려우며 토번이 당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일단 또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당과 토번의 입장 차이다. 당은 토번에게 난을 진압해주거나 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단을 주었다고 말하는 반면 토번은 이를 조공으로 간주하였다. 『뢴다자루콩 비문(論悉詻 碑文)』내용이 대표적이다. 어쩌면 중국측에서 숨기기 위해 이렇게 기록했을 수도 있겠고 아니면 중국으로서는 정말로 이를 조공이 아닌 단순한 예물이나 그런 정도로 이해 하는 것일수도 있다. 토번에 장암성 함락 사태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흐름에서 토번이 당을 능가함을 증명하는 사태였으며 이에 따라 동아시아의 상황은 재편성 되었다.
글쓴이:여소제(ssyeo)-네이버-
첫댓글 여소제님의 글을 보면서 중화주의로 채색된 역사가 생각보다 깊이 뿌리 박혀 있음을 엿볼 수 있군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들리셨네요~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스크랩해 갈터이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