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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Re:낙랑군 떡밥에서 주의해야할 전제들
한단인 추천 0 조회 568 09.11.23 15:17 댓글 4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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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1.23 19:27

    첫댓글 성 안에 인구를 수용하는 까닭은 유사시 결코 손실되면 안되는 핵심 인원(고위 관료, 귀족, 기술자, 상인 등등)을 방어시설 내에 수용하여 보호할 목적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원의 수용이 전제되진 않는다. 중국 내지에는 세금과 노역을 징수해야할 군현민 보호에도 역점을 두지만 변군은 사정이 다르다>내군과 변군이라는 식의 개념을 현대에 와서 언급하는 이유를 아는가요? 이 말의 전제 자체가 이미 평양 일대의 강한 재지 토착 세력의 발굴 성과와 이에 따른 시각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번 목간에서는 수십만명의 인구를 조사할 수 있는 행정력과 더불어 4만명의 한족들과 이에 따른 동화 되지 않는 지배 피지배 관계의

  • 09.11.23 19:47

    개념흐름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4만명이라는 한족 인구가 북한 일대에 분산 마구잡히 흩어져 있다는 것은 낮은 시각입니다. 곧 평양일대의 낙랑군을 중심으로 대부분 집중되어 있다면 그에 따른 그들의 보호를 위한 어느 정도는 수긍가능한 규모의 한나라식 중심 토성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변두리 변군개념만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한계성이 분명 있습니다. <정 외부 위협이 닥친다면 거점방어하고 있는 군의 병력을 동원하면 그 뿐이고 > 과연 이게 말처럼 낙랑군의 위치상 가능한 논리일까요?? 낙랑군 평양설의 위치는 요동 일때나 혹은 산둥에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쉽게 갈수 있는 지리적 위치가 아닙니다. 당장에 이미 기원후로

  • 09.11.23 20:50

    백제와 고구려의 성장이 더욱 두드려지고 실제 정치 동원력의 성곽 규모나 군사력에서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의 현의 재지세력에게 맡긴다라는 표현 자체도 말이 되지 않지요.그걸 관리하는 군의 역량과 그것을 도울수 있는 주변 한나라 실체적 군사력의 근거리 위치도 아닌 평양입장에서 과연 재지세력들의 영토를 낙랑군에게 현등이 도울 동원 세력이라는 개념이니 표현이니도 합당할까요?? 그리고 < 정확히 짚어서 추정 낙랑토성은 수천명이 아니라 고작 1천 오백명정도가 거의 최대치입니다.>한나라식 토성도 아닙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중 하나입니다. 이번 낙랑군 목간 기록을 통해서 더욱.

  • 작성자 09.11.23 21:57

    신라 촌락문서에서는 촌의 행정 제반을 촌주에게 일임하여 모든 것을 통제하곤 했지요. 간접지배라고 해서 행정체계가 대강대강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님의 댓글에서는 한족 인구가 마구잡이로 흩어져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한 근거는 말하지 않은 채 '닥치고 모여서 산다'는 전제만을 깔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개 현 치소가 존재하고 이들을 관리해야할 최소 인원은 존재해야한다면 그 인원은 빼야겠지요. 그리고 글 좀 제대로 읽으세요. 성 내부 면적이 행정 기구 규모를 담보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을 했는데도 1500명밖에 거주 못하는 건 왜 들먹이나요?

  • 작성자 09.11.23 22:02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성장이 두드러짐을 얘기했습니다만 고구려는 낙랑군과 직접적인 교전을 벌인 바가 얼마 없습니다. 대개는 현도군을 상대했었고 백제의 경우도 산발적인 충돌을 벌인 것이 다입니다. 전면전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언급한 한족계 인구 4만명 중 상당수가 군대라고 가정하고 현성 1개당 1천명씩 주둔했다고 본다면 낙랑군 전체에 상주하는 한족 군대가 2만5천명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백제가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게 된것은 한참 후의 일이지요. 따라서 산발적인 충돌이 잦았다는 이유로 거대 성곽을 건설했다는 식의 얘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 작성자 09.11.23 22:18

    간접지배일 경우 지배영향력이 공고하지 않을거라고 애초에 가정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글 본문에 이탈을 방지할 목적의 군대가 거점에서 견제를 한다는 얘기는 못보신 건가요? 가장 큰 전제 오류는 고구려나 백제군이 쳐들어간다고 해서 재지세력들이 반드시 한족 세력에게 저항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인데 이분법적으로 사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씨족을 해체해서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할 경우에 나타날 저항이 직접지배 때의 이득으로 인한 동기유인을 상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재지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이들을 구슬려 통제하는 편이 훤씬 더 합리적이었다고 생각은 못하시나요?

  • 09.11.23 22:48

    신라 촌락문서에서는 촌의 행정 제반을 촌주에게 일임하여 모든 것을 통제하곤 했지요. 간접지배라고 해서 행정체계가 대강대강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가깝습니다>???? 님 이게 전혀 다른 문화권에 왜적인 한족세력이 우리내에서 같은 방식의 효율성이나 지배원리로 부합된다고 올리시는건 아니겠지요. 만약 님처럼 그 당시 그렇게 편하고 그래서 효율적인 방식이 있는데 왜 고구려는 그 험한 산을 따라 수킬로에서 수십킬로의 성곽을 만들고 백제는 왜 초기부터 거대한 토성및 기타 토성들을 만드는 생고생을 했을까요???

  • 작성자 09.11.23 22:51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란 우스개 소리는 알고 계신지요?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례가 많으니 하는 소립니다. 그리고 '외적'이지 '왜적'이 아닙니다. OTL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가 그러한 성곽을 만들어 냈다고 해서 낙랑군 또한 그렇게 해야한다는 이유는 없지요. 그건 양측의 도시성장 맥락이 역사적으로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한 차이에 주목을 해야하겠지 얘네가 그랬으니 쟤네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할 게제는 아니지요.

  • 09.11.23 22:51

    그리고 님은<인구=토성에 수용 가능한 인구' 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기본 상식을 모르고 글을 적는 사람이 있는가요.. 그런식이며 전 인구가 도시화 100퍼센트라는 가히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야지요.. 지금 말하는 낙랑군 치소로 여겨지는 토성동 토성의 형태나 크기에 대해 어느 수준의 규모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까?

  • 작성자 09.11.23 22:54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하는 소립니다.

  • 09.11.23 22:57

    신라 촌락문서 즉 민정문서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당시의 남북국 시대의 신라의 행정력이나 지리적 지배력 그리고 군사력과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 있는 왜소한 실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화되지도 않는 형태에서 서북한지역에서 과연 그런 역량의 비교가 될까요??님의 낙랑군 관련 평양의 추론이나 해석을 보면 정말 다른 어느것에 비해 너무도 관대하군요.

  • 작성자 09.11.23 23:01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니까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발해 내에 피복속민인 말갈인 수령 정체성 문제라던가, (그에 수반하여 벌어지는 간접지배 양상까지도..) 혹은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피지배민으로 로마 속주인들을 간접지배하는 건 어떻게 설명하시려고 이러시나요? 에효... 참.. 저는 이만 쓸랍니다. 풀어서 쓴답시고 썼는데 이렇게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글을 못쓴다는 증거겠지요. 더 떠벌인다고 해서 될거 같지도 않고..

  • 09.11.23 23:02

    발해내에서의 말갈인 문제를 여기에 대비한다???? 고구려 시대의 말갈 동화와 세력화는 어디로 간건가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이후 수백년의 동화와 중요 종족의 등용에도 발해 초기 세력화와 대결구도를 만들었는데 저 당시 전혀 다른 문명권의 외세에 님은 얼마만큼의 기대를 가지는지요?

  • 09.11.23 23:33

    그리고 발해의 5경 대도시 체계와 도시문명의 거주를 보면 발해 당시에도 고구려인들이 상당수 살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 그래서 유취국사는 초기 연해주 일대의 모습으로 피지배 대다수를 말갈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으로 보고있는 주장에서 발해속의 상당수의 고구려와 그만한 확실한 군사력과 행정력 성곽의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발해의 역량수준에서 말갈의 복속이나 지배방식이 과연 왜소한 토성의 실체에 자기 방식의 한나라토성 하나 만들지 못하는-이런 평지장방형은 워낙 희귀해서 있다면 금방 발견-수준에 동화되지도 못한 외세에 지리적 큰 핸디갭에서 민정문서같은 개념의 지배원리라????

  • 작성자 09.11.23 23:14

    지금 얘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건 알고 계십니까? 좋아요. 더 이상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한 마당에 이 이상 얘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으니 발해는 그렇다 칩시다.(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사실로서 확정짓고 자기 입론의 근거로 삼는 논리 오류는 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유럽쪽 양상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또한 밑에서 동명성제님에게 한 얘기와 같이 저는 님처럼 애초에 전제를 '확정'시켜놓고 변수를 고려하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지 시시콜콜 따져서 님을 까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 09.11.23 23:27

    저는 님처럼 애초에 전제를 '확정'시켜놓고 변수를 고려하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지 시시콜콜 따져서 님을 까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 ??님이 말씀 하신 전제가 조금전 언급한 수십만명의 인구니 수십만명 크기의 도성이 존재해야 하고 신라나 발해같은 분명한 지배력과 역량,규모를 보여주는 나라를 들어 간접지배의 형태를 말하는건가요? 저는 이런 극단적 대비로 설명을 풀지 않았습니다. 이해가능한 수준의 형태나 규모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 09.11.23 23:48

    유럽의 로마 제국역사와 문명수준는 동북아에서는 고대 역사의 발전양상이나 시각에서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유럽의 문명자체가 로마제국시대 그리스연장의 로마라는 문명이외에는 다른 선진문명을 말하기 매우 곤란한 수준의 단계였습니다. 그러니 게르만민족이라는 개념도 이후 여러국으로 분화되는 시기 이전의 미개용어로 사용했구요.-물론 로마적 입장이 어느정도 반영- 그러나 동북아는 화한족 문명과 요하 고조선문명권으로 일찍히 발전했고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왔습니다. 실제 위만 조선시기의 한나라와의 싸움양상을 봐도 초기 수천명을 격퇴하고 주변지역을 아우를만큼의 정치력과 상당한 철기문명의 소유을 알수 있습니다

  • 09.11.23 23:55

    이때문에 현재 왕검성의 경우는 현 평양 일대가 아닐 가능성을 높게 보며.. 그러나 일찍히 평양 일대도 팽이형토기시대에 작은 토성들이 있을 만큼 소국의 문명 수준과 정체성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의 고도문명의 혜택을 주면서도 다원적 세계관을 추구했지만 중공에서의 한나라적 팽창자체가 그런 다원적 시각이 아닌 패권적 일원주의적 세계관의 나라였습니다.

  • 09.11.23 23:57

    로마가 '다원적 천하관'을 추구했다? 처음 듣는 말인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수 있을까요?

  • 09.11.24 18:20

    유럽이 당시 다원적이라 할만큼 로마문명에 대응하는 숙성된 문명이 없는것이 사실이니 겉모양에서 다원적 세계관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을수 있겠군요. 내용적 측면에서의 다양성, 다원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간접지배방식에 능숙한 로마는 영국 섬나라등 매우 변방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로마식성곽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간접지배방식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중심축과 행정력이 뒤받침되는 실질적 힘이 있는 가운데 가능한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 09.11.23 21:07

    중국인과 토착인들이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이상 다수의 토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민족 지배집단이 과연 토성 밖에서 평상시에도 거주할 수 있는 것인지는 좀 의아스럽네요. 이질적인 분위기도 그렇지만 '지배계급'으로서 권위의 상징이 단연 '토성 내'의 거주가 아니었을까요? 이는 비단 낙랑군의 사례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래서 오영찬 선생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합쳐져 '낙랑인'이 되었다고 주장했죠.

  • 작성자 09.11.23 22:11

    저는 기본적으로 토착인과 중국인들이 '항상' 대결양상이 되어야하는 전제가 옳은 것인지부터 따지고 싶군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다른 집단이라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고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동질집단이라도 틀어져서 갈라지기 마련입니다. 민족적 대결을 전제로 모든 것을 가름하지 않았으면 싶네요.

  • 09.11.23 22:24

    굳이 대결양상이 아니더라도 토착인들과 다른 중국인들이...그것도 지배계급이 아무런 차별의식이 없이 토착인과 어울려 성 밖에서 살았다고 보기에는 힘들것 같습니다만...'점차로 胡漢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라는 사료도 있고 말이죠...이걸 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토착인과 한인들간에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인데...그런 측면에서 님의 말은 수긍하기 어렵군요. 그리고 저는 '항상 대결양상이 되어야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뭘 따지시겠다는건지?

  • 작성자 09.11.23 22:35

    제가 성 근교에서 거주하는 식이라고 본문에서 말씀드린거 같은데요. 성의 면적이 작은 것이라면 성 밖 근교에서 거주했다가 유사시에 성 안으로 대피한다는 식의 설명이었지 호한잡거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한성의 인구 규모 성장을 보면 초기에는 성 내부에 10만이 안되는 인구가 살다가 인구가 증가하면서 성 외곽에도 마을을 형성하게 되지요. 한성부 인구는 그거까지 포함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그걸 언급하고 싶었던 것이고 성규모가 작아서 낙랑군치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론 제기로서 얘기한 것이니 오해가 있으셨다면 글을 미숙하게 쓴 제 탓이지요.

  • 09.11.23 21:55

    저도 삼국사기에서만 그랬다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후한서에서도 건무 20년(기원후 44년)한국인(韓國人)이 스스로 내부해와 그땅을 차지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건 낙랑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 작성자 09.11.23 22:13

    글을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낙랑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낙랑군의 영역 내에서 낙랑 태수의 통제나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낙랑 소국 왕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 09.11.23 22:22

    그러니까 제 말은(낙랑군의 영역 내에서 낙랑 태수의 통제나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낙랑 소국 왕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라는 말이 모순인듯 싶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백제의 수도와 신라의 수도까지 공격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겠습니까? 소국이었다면 불가능 합니다. 분명히 낙랑군이 뒤에 있는데 그런짓 까지 했겠습니까? 그리고 고구려와 전쟁기사를 보면 대부분 요동지방이지 한반도는 행인국,구다국,개마국 정도 밖에 없습니다.또한 삼국사기 에서는 백제와 낙랑군,신라와 낙랑군,백제와 대방군의 충돌기록이 없습니다. 대방관련 기록이라면 책계왕과 대방국왕의 딸 보과와 혼인기록만 있을뿐입니다.

  • 작성자 09.11.23 22:39

    한가지 묻지요. 백제와 신라가 처음부터 거대 영토를 가진 강국이었나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은 '낙랑국'이 아니라 낙랑 군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낙랑국'이 나오는 대목은 호동왕자 기록 말고는 안나오는 걸로 아는데요.

  • 09.11.23 22:47

    그 낙랑군이 신라와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사가 후한서에는 없는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그리고 백제는 그렇다쳐도 신라까지는 장거리 원정에다가 건국된지 40여년 되서 어느정도 기틀은 마련한 나라라 모순이라 생각합니다.

  • 작성자 09.11.23 22:56

    .....삼국사기에서 기록 출전이 꼭 후한서에서만 비롯되라는 법은 있는지요?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라와 백제를 공격한 주체는 '낙랑국' 아니라 낙랑군이라니까요...

  • 09.11.23 23:03

    확실히 낙랑국이나 낙랑군이라 나와있지 않고 낙랑이라고만 나와있는데 확답하실수 있나요? 그리고 사기에서 반란자들을(진승,오광)을 열전에 집어넣을 정도로 세심한인간들입니다. 고구려와 전쟁기사를 그렇게 빠짐없이 집어 넣었는데 신라,백제 침공기사는 안엏었을까요? 만약 낙랑군이 백제와,신라를 침공했다면 고구려가 치고 내려왔을텐데 가능 할까요?

  • 작성자 09.11.23 23:15

    그 말을 거꾸로 돌려서 생각해 보세요. 낙랑국인지, 낙랑군인지 알수 없는 상황인데 그 기록을 모두 '낙랑국'으로 치환시키는 것은 논리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글을 쓴 목적은 전제를 처음부터 '확정' 짓는 것이 변수 고려를 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일 분입니다. 확대해석을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어쨌든 이 이상은 코멘트 하지 않습니다.

  • 09.11.23 23:15

    그렇다고 낙랑국이 소국이 아닐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현도군을 치는데 낙랑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또한 관구검 침공때도 낙랑태수와 같이 왔다고 했지 낙랑태수가 협공했다는 기사는 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있었다면 분명히 협공도 가능했겠지요.

  • 09.11.24 00:12

    동명성제 님// 낙랑국이라는 것을 "먼저 가정"한 상태에서 추론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정상, 비합리인 겁니다. 애초에 낙랑이라는 기록으로 되어 있다면, 그 정체를 먼저 파악하고 나서 말해야 할 터인데 아직 증명조차 되지 않은 낙랑국을 모든 낙랑에 대입하는 것은 논리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지요. 제가 요 근래에 항상 하는 말입니다만, 낙랑을 낙랑국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증명하지 않는 한, 그와 관련된 모든 해석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틀렸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낙랑을 낙랑국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 해석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어요.

  • 09.11.24 20:17

    그러면 후한사람들이 자신나라 사람들이 귀부했다고 할까요?
    그리고 낙랑군이었다면 낙랑군이라 했을텐데 왜 그냥 낙랑이라 했을까요?

  • 09.11.24 21:12

    ....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서들에서 현이나 군을 붙이지 않은 채 이름만 말하는 군현명을 수만 개는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서울을 말할 때 풀네임으로 서울특별시라고 "항상" 말하나요? 그냥 서울이라고 부르면 서울국인가요? 이건 진짜 기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또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만, 낙랑이라 쓰인 것을 낙랑군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이를 낙랑국이라 해석해야 하는 확고불변한 증명을 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 09.11.25 20:28

    그럼 한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번 반복한것 이지만 후한서에서도 건무 20년(기원후 44년)한국인(韓國人)이 스스로 내부해와 그땅을 차지했다고 나와있습니다.낙랑군이 존재 했으면 그냥 반란을 진압했다고 하면 될것을 왜 '내부'라고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고구려의 급성장에 두려운 한나라가 낙랑지역을 이를 명분으로 차지한듯 싶습니다.
    아니면 과거에 낙랑군이 존재했다가 낙랑국이 등장하여 유명무실했다가 이때 다시 재정복을 했던것으로 봅니다만...

  • 09.11.25 21:16

    솔직히 말해서 저는 해동성국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후한서 광무제기 건무20년의 기록을 말씀하시는 것인 것 같습니다만, 그 기록을 해동성국님처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요원한 일일 것 같습니다만... "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동이의 한국 사람들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도착하여 내부하여왔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땅을 차지했다는 내용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우리 모두가 알듯이 삼한은 후한의 영토가 아니었으니 삼한에서 낙랑군으로 무리를 이끌고 찾아오는 것을 內附라고 서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09.11.25 22:13

    제가 기록을 잘못봤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 작성자 09.11.23 22:59

    에효... 참.. 저는 이만 쓸랍니다. 풀어서 쓴답시고 썼는데 이렇게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글을 못쓴다는 증거겠지요. 더 떠벌인다고 해서 될거 같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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