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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진부한 주제라 다시 꺼내기도 민망한 한사군 위치 떡밥이지만 계속 언급이 되는 것이니 그래서 떡밥일 것이다. 떡밥인 고로 사람들이 낚이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당시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하는데 있어 '자신의 상식'에 근거한 전제나 가정 들 중 자주 오해하기 쉬운 부분에 대한 지적을 하고 넘어갈까 한다. 물론 개인적 경험(본햏이 아주 미숙했을 때 항상 벌인 실수들)에 의거한 것이고 아주 일부분이기 때문에 단편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전제 1. 한나라 식민지 낙랑군과 독립국가 낙랑국은 동시대 동일 지역에 공존할 수 없다.
=>고로 두 지역은 멀리 떨어져있고 낙랑국은 현 평안도 지역에, 낙랑군은 만주, 혹은 중국 대륙에 있다.
위의 전제는 '지배 주체'와 '체제'가 다르면 이는 동시대 동일 공간에서 공존할 수 없이 따로 존재해야한다는 발상에서 비롯된다. 고로 한 지역에서 A 계통의 문화유물이 등장한다면 B 계통의 지배가 관철되지 않은 근거로 활용한다. 때문에 서북한 지역에서 한사군 시기에 고조선계 유물의 출토가 대다수를 점하고 한계 유물유적이 적게 나온다면 한 공간에 이원적인 체제가 중첩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는 단순히 문화전파의 흔적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 이 지역을 낙랑국으로 보고 이를 한사군 대륙설의 주요 입론으로 삼는 경향이 많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관점은 근대 영토국가의 관념을 국가관의 당연한 상식이라고 한 것에 근거한 오류로서 어느 한쪽이 누군가를 정복하면 반드시 그 체제와 문화가 고스란히 복제되고 이전의 고유 문화는 사멸하게 된다는 식의 논리로 발전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문화전파 양상이 이렇게 단순하게 진행되는 식이라면 고고학의 도움없이 역사학자들이 발굴해서 대충 해석하고 때우면 그만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학문이든 그렇겠지만 고고학자들의 치열한 학설 싸움은 비전공자들이 대충 눈 대중으로 덤비기에는 변수가 많이 개입함을 간과해선 안된다. 이미 그것은 학자들의 머리에서 변수의 계산이 끝났기 때문에 '아마추어같이 굴지 않고' 몇개의 단어와 정황을 언급하는 것으로도 상대방이 무슨 추론을 하는 것인지를 대략 다 알아채기 마련이고 따라서 굳이 세세한 것을 아마추어처럼 언급하지 않을 뿐이다. 관전하는 비전공자들이나 아마추어들은 자신이 보기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보이는 것이지만 말이다. 학자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바보가 아니다.
잠깐 삼천포로 빠졌는데 문화전파같은 인류학 얘기나 고고학 얘기는 어차피 본햏도 비전공자인고로 자세한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근본 전제인 국가관에 관한 얘기로 돌아가서 논의를 전개해보자. 근대 국가관에서는 대체로 1국가 1체제가 당연한 상식인 것으로 생각된다. 한 국가 안에 이중적인 체제가 공존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근대의 주류 국가관에 불과하다. 그것도 우리는 중앙집권형 국가에 익숙한 나머지 다른 시간, 공간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무의식중에 사고한다. 따라서 그에 파생되는 사고들 역시도 그 기준은 중앙집권형 1국가 1체제에 고정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과거에 현재의 틀을 그대로 끼워맞추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 즉, 현재의 국가관을 전근대의 '변군'체제에서 동일하게 다룰 수 없음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이 '변군'은 중국 내지에 설치된 군현처럼 일일히 관료를 통해 민을 통제하진 않는다.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변군은 중국 내지의 제민지배를 겪어보지 않은 (부족, 씨족적 질서)이민족을 정복해 군현을 설치한 것이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라 중앙의 지원도 힘겹고 비록 지금은 정복당했다지만 생활방식, 사고방식이 다른 이민족이 언제 반발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강고한 부족적, 씨족적 질서를 깨트려가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는 없다. 따라서 씨족, 부족의 장이나 현지 유력자들을 포섭하여 구슬리는 식의 간접지배가 바로 변군의 지배방식이다. 씨족, 부족을 몇개 묶어 특정 현이나 군에서 그 부족장들을 '관할', '통제'하는 형식이라는 점을 주지해야한다. 때문에 지배체제나 지배 주체는 1원적이 아닌 2원적 형태를 띈다. 지배 주체가 군 태수나 왕 1명(혹은 부족장)이 아니라 동시에 양자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는다면 다음의 기사를 참조하기 바란다.
간호조무사로 일하다 '왕' 된 미국인
서구의 식민지배를 거치고 독립 후 공화국의 형태를 띄었다고는 하지만 부족적 질서가 완전히 일소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정치 권력은 2원적으로 구성된다. 1국가 1체제 상에서 입헌군주가 형식적으로 내각을 임명하는 형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화국 내에서 '중앙정부'의 내각과 '지방'의 왕정은 엄연히 별개의 권력 준거에서 비롯되는 독립적 정치 구조를 가진다..(물론 이 기사에서 언급된 경우는 왕이 실질적인 행정권력을 행사할 수는 없게 되어있다. 초기 고구려에서 5부의 고추가들이 별도의 제사권와 관료 임용권을 갖고 있지만 교전권과 외교권을 별도로 가지지 않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즉, 현대에도 지역과 상황에 따라 다른 지배 주체와 체제가 병존할 수 있다는 충분한 예가 된다. 하물며 전근대 변군 체제 내에서는? 고로 낙랑군의 영역 내에서 낙랑 태수의 통제나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낙랑 소국 왕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즉, 양자는 반대항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그렇다라고 보는 이분법적 사고 때문에 벌어지는 오해인 것이다.
정치체제에서도 이렇듯 이원적 구성이 얼마든지 드러난다면 첫번째 전제에서 파생된 문화전파의 논리 역시도 허구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지배 주체로 등장한 한 계통의 문화유적이 굉장히 적은 것은 정복 이후에도 아직 문화적 침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이런 논리 전개는 학자들에게 이미 계산이 끝난 부분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하지 않는 것이다.(이걸 일일히 쓰자니 쓰는 본햏도 참 답답하다) 고로 서북한 지역에서 다수의 고조선계 유적 발견을 낙랑군 한반도설을 부정할 근거로 삼는 것은 대단히 설득력이 낮은 얘기가 된다.
전제 2. 현재 낙랑군 치소라고 알려진 토성은 그 규모가 '수천 명'을 수용할 규모 밖에 되지 않아 '수십만'이 거주한 낙랑군 치소라고 볼 수 없다.
=>고로 한반도 낙랑군설을 입증하진 못한다. ->고로 대륙설이 맞다.(어째서?)
꼬투리를 잡아야할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까야할 지 참 난감한 전제라고 할 수 있다. 낙랑 토성이 정말로 낙랑군치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반도 낙랑설을 부정한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은 여기서는 중요한 게 아니니 일단 넘어가자. 이 전제는 말 그대로 사료를 읽을 때 어느 수준으로 정신줄을 놓고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여러 형태로 갈라지는데 가장 어처구니 없는 인식은 낙랑군 치소 '내부'에 수십 만의 인구 수용이 가능한 거대 규모의 성을 가정하는 형태다. 직접적으로 이 전제를 깐다면 '군의 인구=토성에 수용 가능한 인구' 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오해를 하는 까닭에는 아래에서 설명하겠지만 대강 어렴풋이 생각하여 나타나는 논리오류거나 아니면 사료를 읽으면서 낙랑군 전체 인구가 수십만이 아니라 낙랑군 치소의 인구로 오독한 까닭도 있겠다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둘다 OTL 이라고 생각한다.)
군에는 군 치소만이 아니라 그에 딸린 현이 몇개 있고, 고로 군의 인구수를 논했다면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그 현에 딸린 인구까지를 포함될 것이다. 물론 이 현은 현성 내부의 인구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 또 아주 당연한 얘기이지만 성 외각에도 사람은 산다. 오히려 제한된 공간인 성 내부보다야 성 외곽에서 더 많이 살 것이다. 우리가 가끔씩 언급하는 '통일신라 금성 인구 90만' 드립이라던가 '고려 개경 인구 50만' 드립, '조선 한양 인구 20만' 드립은 성곽 내부 인구만 추산한 것이 아닌 해당 '행정구역'에 속한 인구수라는 점을 명심해야한다. 따라서 낙랑토성의 면적이 수천명 밖에 수용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인구 수십만의 낙랑군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OTL 이다. .('그러고보면 본햏도 소싯적에는 저렇게 어렴풋이 생각을 했으니 누워서 침뱉는 꼴이지만...)
뭐, 이건 아주 당연한 얘기지만 세심하게(이걸 세심이라고 까지 해야할지는 의문이지만) 고려하지 않고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은 일단 제외하자. 단지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나마 고등적으로 사고하지만 그래도 낚이는 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하는 점이다. 뭐,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자기만의 상식'이 만들어낸 논리 상의 오류다. 특정 집단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도 '당연히' 클 것이라는 믿음에 불과하다. 수반되는 모든 것이 왜 커야하는지에 대한 고찰은 찾아볼 수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가장 큰 논리 오류는 토성 내부 공간 면적이 군의 규모를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전제 1에서 제기된 중앙집권형 국가의 틀에 묶여 국가 규모가 크면 중앙으로 집산되는 물류와 인구 역시 많을 것이고 따라서 도시나 성곽 규모도 '당연히' 클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기 때문인데 이건 어디까지나 중앙집권적 정치 집단에게나 통용될 얘기고 그 조차도 예외는 많다는 점은 알지 못한다. 예외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변수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가 있을텐데 변수에 대해서 이들은 너무도 무감각하다.
성 안에 인구를 수용하는 까닭은 유사시 결코 손실되면 안되는 핵심 인원(고위 관료, 귀족, 기술자, 상인 등등)을 방어시설 내에 수용하여 보호할 목적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원의 수용이 전제되진 않는다. 중국 내지에는 세금과 노역을 징수해야할 군현민 보호에도 역점을 두지만 변군은 사정이 다르다. '전제 1' 까기에서 언급했다시피 낙랑군은 변군 체제에 근간해 있다. 중국 내지의 제민지배처럼 일일히 관료의 통제에 의해 민이 관리되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층의 재지 유력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제하는 형태다. 때문에 세금과 노역 징수에 있어 직접적인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은 대규모 성곽을 설치하는 등의 적극적인 보호를 할 절실한 이유는 없다.(새롭게 짓는답시고 이민족 피지배민들을 닥달하다가 반란이라도 일어나면 태수는 모가지 신세가 된다.) 정 외부 위협이 닥친다면 거점방어하고 있는 군의 병력을 동원하면 그 뿐이고 그 외에는 부족장들에게 방어와 치안 책임이 전가되는 것이다. 쉽게 얘기해서 기업 경영으로 친다면 직접 생산에 개입하고 결과물에 책임을 지는가, 아니면 하도급 업체에 맡긴 후 책임은 그들에게 전가하고 결과물만 챙기면 그만인가, 라고 한다면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다.
씨족장들만 적절히 관리하고 삥땅치지 않나 감시할 수준이면 족하기 때문에 필요한 관료의 숫자는 적어도 상관없고 물리적 통제 역시 거점 방어와 견제에 필요한 최소한의 병력이면 가능한 고로 군대 규모는 그렇게 많을 필요는 없다. 부가적으로 이들에게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는 수공업자와 상인 또한 그렇게 많은 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들을 수용할 방어 시설 역시 대규모일 필요는 없는 것이다. 현도군 같이 전투 다발지역의 변군이었다면 '혹시나' 상황이 좀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낙랑군은 현도군만큼 군 내부 전투가 벌어지진 않았다.
또한 방어거점으로 군 치소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성이라던가 다른 소규모 군사거점으로 군대와 호구가 '분산배치'된다는 점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낙랑군에 있는 한족계 인구가 낙랑 목간의 통계대로 4만 명이라면 낙랑군에 딸린 25현의 현성에 분산배치한다고 가정했을 때 한 성 1개당 평균 2천 명 이하의 수용인원으로도 이들 전원의 수용이 가능하다.
만약 '그래도 군 치소인데 일개 현성과 동급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라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들이 반드시 성곽 내부에만 거주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없다는 점을 떠올렸면 한다. 성의 면적은 유사시를 대비한 것이기 때문에 핵심인원이라도 평시에는 성 외각 근교에 거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제민지배체제가 아닌 간접지배형태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중앙권력(군 치소)이 힘을 쓴다기 보다 중간기구(현성)들의 역할이 커질 수 밖에 없음을 상기한다면 군 치소와 현성의 규모 차이가 그렇게 크게 난다고 보기도 어렵다. 고로 낙랑군치가 필요 이상으로 커야할 이유는 없다. 되려 돈낭비다. 그렇게 본다면 인구 수천명 수용이 가능한 현 낙랑토성의 규모가 작기는 커녕 도리어 적절하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첫댓글 성 안에 인구를 수용하는 까닭은 유사시 결코 손실되면 안되는 핵심 인원(고위 관료, 귀족, 기술자, 상인 등등)을 방어시설 내에 수용하여 보호할 목적에 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인원의 수용이 전제되진 않는다. 중국 내지에는 세금과 노역을 징수해야할 군현민 보호에도 역점을 두지만 변군은 사정이 다르다>내군과 변군이라는 식의 개념을 현대에 와서 언급하는 이유를 아는가요? 이 말의 전제 자체가 이미 평양 일대의 강한 재지 토착 세력의 발굴 성과와 이에 따른 시각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이번 목간에서는 수십만명의 인구를 조사할 수 있는 행정력과 더불어 4만명의 한족들과 이에 따른 동화 되지 않는 지배 피지배 관계의
개념흐름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4만명이라는 한족 인구가 북한 일대에 분산 마구잡히 흩어져 있다는 것은 낮은 시각입니다. 곧 평양일대의 낙랑군을 중심으로 대부분 집중되어 있다면 그에 따른 그들의 보호를 위한 어느 정도는 수긍가능한 규모의 한나라식 중심 토성은 필수적입니다. 이것을 단순히 변두리 변군개념만으로는 통용되지 않는 한계성이 분명 있습니다. <정 외부 위협이 닥친다면 거점방어하고 있는 군의 병력을 동원하면 그 뿐이고 > 과연 이게 말처럼 낙랑군의 위치상 가능한 논리일까요?? 낙랑군 평양설의 위치는 요동 일때나 혹은 산둥에서 그렇게 마구잡이로 쉽게 갈수 있는 지리적 위치가 아닙니다. 당장에 이미 기원후로
백제와 고구려의 성장이 더욱 두드려지고 실제 정치 동원력의 성곽 규모나 군사력에서 성장하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의 현의 재지세력에게 맡긴다라는 표현 자체도 말이 되지 않지요.그걸 관리하는 군의 역량과 그것을 도울수 있는 주변 한나라 실체적 군사력의 근거리 위치도 아닌 평양입장에서 과연 재지세력들의 영토를 낙랑군에게 현등이 도울 동원 세력이라는 개념이니 표현이니도 합당할까요?? 그리고 < 정확히 짚어서 추정 낙랑토성은 수천명이 아니라 고작 1천 오백명정도가 거의 최대치입니다.>한나라식 토성도 아닙니다. 이건 상당히 중요한 문제중 하나입니다. 이번 낙랑군 목간 기록을 통해서 더욱.
신라 촌락문서에서는 촌의 행정 제반을 촌주에게 일임하여 모든 것을 통제하곤 했지요. 간접지배라고 해서 행정체계가 대강대강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님의 댓글에서는 한족 인구가 마구잡이로 흩어져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시고는 왜 그런 것인지에 대한 근거는 말하지 않은 채 '닥치고 모여서 산다'는 전제만을 깔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25개 현 치소가 존재하고 이들을 관리해야할 최소 인원은 존재해야한다면 그 인원은 빼야겠지요. 그리고 글 좀 제대로 읽으세요. 성 내부 면적이 행정 기구 규모를 담보하지 않는다고 이미 말을 했는데도 1500명밖에 거주 못하는 건 왜 들먹이나요?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성장이 두드러짐을 얘기했습니다만 고구려는 낙랑군과 직접적인 교전을 벌인 바가 얼마 없습니다. 대개는 현도군을 상대했었고 백제의 경우도 산발적인 충돌을 벌인 것이 다입니다. 전면전은 존재하지 않았지요. 그리고 언급한 한족계 인구 4만명 중 상당수가 군대라고 가정하고 현성 1개당 1천명씩 주둔했다고 본다면 낙랑군 전체에 상주하는 한족 군대가 2만5천명이라는 얘기가 됩니다. 백제가 이 정도 규모의 군대를 동원할 수 있게 된것은 한참 후의 일이지요. 따라서 산발적인 충돌이 잦았다는 이유로 거대 성곽을 건설했다는 식의 얘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간접지배일 경우 지배영향력이 공고하지 않을거라고 애초에 가정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글 본문에 이탈을 방지할 목적의 군대가 거점에서 견제를 한다는 얘기는 못보신 건가요? 가장 큰 전제 오류는 고구려나 백제군이 쳐들어간다고 해서 재지세력들이 반드시 한족 세력에게 저항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인데 이분법적으로 사고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신지요? 씨족을 해체해서 직접적인 지배를 행사할 경우에 나타날 저항이 직접지배 때의 이득으로 인한 동기유인을 상회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재지세력의 기득권을 인정하고 이들을 구슬려 통제하는 편이 훤씬 더 합리적이었다고 생각은 못하시나요?
신라 촌락문서에서는 촌의 행정 제반을 촌주에게 일임하여 모든 것을 통제하곤 했지요. 간접지배라고 해서 행정체계가 대강대강 이뤄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일종의 고정관념에 가깝습니다>???? 님 이게 전혀 다른 문화권에 왜적인 한족세력이 우리내에서 같은 방식의 효율성이나 지배원리로 부합된다고 올리시는건 아니겠지요. 만약 님처럼 그 당시 그렇게 편하고 그래서 효율적인 방식이 있는데 왜 고구려는 그 험한 산을 따라 수킬로에서 수십킬로의 성곽을 만들고 백제는 왜 초기부터 거대한 토성및 기타 토성들을 만드는 생고생을 했을까요???
'그런데 그게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란 우스개 소리는 알고 계신지요? 실제로 그렇게 되는 사례가 많으니 하는 소립니다. 그리고 '외적'이지 '왜적'이 아닙니다. OTL 그리고 백제와 고구려가 그러한 성곽을 만들어 냈다고 해서 낙랑군 또한 그렇게 해야한다는 이유는 없지요. 그건 양측의 도시성장 맥락이 역사적으로 달랐기 때문이겠지요. 그러한 차이에 주목을 해야하겠지 얘네가 그랬으니 쟤네도 그러할 것이다라고 할 게제는 아니지요.
그리고 님은<인구=토성에 수용 가능한 인구' 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런 기본 상식을 모르고 글을 적는 사람이 있는가요.. 그런식이며 전 인구가 도시화 100퍼센트라는 가히 초자연적인 현상이 나타나야지요.. 지금 말하는 낙랑군 치소로 여겨지는 토성동 토성의 형태나 크기에 대해 어느 수준의 규모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하는 소립니다.
신라 촌락문서 즉 민정문서를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당시의 남북국 시대의 신라의 행정력이나 지리적 지배력 그리고 군사력과 고구려와 백제 사이에 끼어 있는 왜소한 실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동화되지도 않는 형태에서 서북한지역에서 과연 그런 역량의 비교가 될까요??님의 낙랑군 관련 평양의 추론이나 해석을 보면 정말 다른 어느것에 비해 너무도 관대하군요.
'그런데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라니까요... 그런 식으로 말하면 발해 내에 피복속민인 말갈인 수령 정체성 문제라던가, (그에 수반하여 벌어지는 간접지배 양상까지도..) 혹은 게르만족 대이동 이후 피지배민으로 로마 속주인들을 간접지배하는 건 어떻게 설명하시려고 이러시나요? 에효... 참.. 저는 이만 쓸랍니다. 풀어서 쓴답시고 썼는데 이렇게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글을 못쓴다는 증거겠지요. 더 떠벌인다고 해서 될거 같지도 않고..
발해내에서의 말갈인 문제를 여기에 대비한다???? 고구려 시대의 말갈 동화와 세력화는 어디로 간건가요????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이후 수백년의 동화와 중요 종족의 등용에도 발해 초기 세력화와 대결구도를 만들었는데 저 당시 전혀 다른 문명권의 외세에 님은 얼마만큼의 기대를 가지는지요?
그리고 발해의 5경 대도시 체계와 도시문명의 거주를 보면 발해 당시에도 고구려인들이 상당수 살았음을 알수 있습니다. 현재 그래서 유취국사는 초기 연해주 일대의 모습으로 피지배 대다수를 말갈로 보는 것은 잘못된 시각으로 보고있는 주장에서 발해속의 상당수의 고구려와 그만한 확실한 군사력과 행정력 성곽의 거대한 규모를 보여주는 발해의 역량수준에서 말갈의 복속이나 지배방식이 과연 왜소한 토성의 실체에 자기 방식의 한나라토성 하나 만들지 못하는-이런 평지장방형은 워낙 희귀해서 있다면 금방 발견-수준에 동화되지도 못한 외세에 지리적 큰 핸디갭에서 민정문서같은 개념의 지배원리라????
지금 얘기가 점점 산으로 가는 건 알고 계십니까? 좋아요. 더 이상 얘기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한 마당에 이 이상 얘기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겠으니 발해는 그렇다 칩시다.(논쟁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사실로서 확정짓고 자기 입론의 근거로 삼는 논리 오류는 님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유럽쪽 양상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또한 밑에서 동명성제님에게 한 얘기와 같이 저는 님처럼 애초에 전제를 '확정'시켜놓고 변수를 고려하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지 시시콜콜 따져서 님을 까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저는 님처럼 애초에 전제를 '확정'시켜놓고 변수를 고려하지 않음을 지적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지 시시콜콜 따져서 님을 까겠다는 의도가 아닙니다. > ??님이 말씀 하신 전제가 조금전 언급한 수십만명의 인구니 수십만명 크기의 도성이 존재해야 하고 신라나 발해같은 분명한 지배력과 역량,규모를 보여주는 나라를 들어 간접지배의 형태를 말하는건가요? 저는 이런 극단적 대비로 설명을 풀지 않았습니다. 이해가능한 수준의 형태나 규모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유럽의 로마 제국역사와 문명수준는 동북아에서는 고대 역사의 발전양상이나 시각에서 구분해서 봐야 한다고 봅니다. 유럽의 문명자체가 로마제국시대 그리스연장의 로마라는 문명이외에는 다른 선진문명을 말하기 매우 곤란한 수준의 단계였습니다. 그러니 게르만민족이라는 개념도 이후 여러국으로 분화되는 시기 이전의 미개용어로 사용했구요.-물론 로마적 입장이 어느정도 반영- 그러나 동북아는 화한족 문명과 요하 고조선문명권으로 일찍히 발전했고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왔습니다. 실제 위만 조선시기의 한나라와의 싸움양상을 봐도 초기 수천명을 격퇴하고 주변지역을 아우를만큼의 정치력과 상당한 철기문명의 소유을 알수 있습니다
이때문에 현재 왕검성의 경우는 현 평양 일대가 아닐 가능성을 높게 보며.. 그러나 일찍히 평양 일대도 팽이형토기시대에 작은 토성들이 있을 만큼 소국의 문명 수준과 정체성을 가진 지역입니다. 그리고 로마는 그들의 고도문명의 혜택을 주면서도 다원적 세계관을 추구했지만 중공에서의 한나라적 팽창자체가 그런 다원적 시각이 아닌 패권적 일원주의적 세계관의 나라였습니다.
로마가 '다원적 천하관'을 추구했다? 처음 듣는 말인데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수 있을까요?
유럽이 당시 다원적이라 할만큼 로마문명에 대응하는 숙성된 문명이 없는것이 사실이니 겉모양에서 다원적 세계관이라는 말에 오해가 있을수 있겠군요. 내용적 측면에서의 다양성, 다원성을 말합니다. 그리고 <간접지배방식에 능숙한 로마는 영국 섬나라등 매우 변방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로마식성곽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간접지배방식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 중심축과 행정력이 뒤받침되는 실질적 힘이 있는 가운데 가능한 방식이라는 의미입니다.>
중국인과 토착인들이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이상 다수의 토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민족 지배집단이 과연 토성 밖에서 평상시에도 거주할 수 있는 것인지는 좀 의아스럽네요. 이질적인 분위기도 그렇지만 '지배계급'으로서 권위의 상징이 단연 '토성 내'의 거주가 아니었을까요? 이는 비단 낙랑군의 사례뿐만 아니라 동서고금의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알고 있습니다만...그래서 오영찬 선생은 '중국인'과 '조선인'이 합쳐져 '낙랑인'이 되었다고 주장했죠.
저는 기본적으로 토착인과 중국인들이 '항상' 대결양상이 되어야하는 전제가 옳은 것인지부터 따지고 싶군요.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다른 집단이라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이고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면 동질집단이라도 틀어져서 갈라지기 마련입니다. 민족적 대결을 전제로 모든 것을 가름하지 않았으면 싶네요.
굳이 대결양상이 아니더라도 토착인들과 다른 중국인들이...그것도 지배계급이 아무런 차별의식이 없이 토착인과 어울려 성 밖에서 살았다고 보기에는 힘들것 같습니다만...'점차로 胡漢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라는 사료도 있고 말이죠...이걸 보면 세월이 흐를수록 오히려 토착인과 한인들간에 구별이 생기게 되었다는 말인데...그런 측면에서 님의 말은 수긍하기 어렵군요. 그리고 저는 '항상 대결양상이 되어야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뭘 따지시겠다는건지?
제가 성 근교에서 거주하는 식이라고 본문에서 말씀드린거 같은데요. 성의 면적이 작은 것이라면 성 밖 근교에서 거주했다가 유사시에 성 안으로 대피한다는 식의 설명이었지 호한잡거를 말한 것은 아닙니다. 한성의 인구 규모 성장을 보면 초기에는 성 내부에 10만이 안되는 인구가 살다가 인구가 증가하면서 성 외곽에도 마을을 형성하게 되지요. 한성부 인구는 그거까지 포함하는 경우입니다. 저는 그걸 언급하고 싶었던 것이고 성규모가 작아서 낙랑군치가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반론 제기로서 얘기한 것이니 오해가 있으셨다면 글을 미숙하게 쓴 제 탓이지요.
저도 삼국사기에서만 그랬다면 그냥 넘어가려 했지만 후한서에서도 건무 20년(기원후 44년)한국인(韓國人)이 스스로 내부해와 그땅을 차지했다고 나와있습니다. 그건 낙랑국이 있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글을 다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낙랑국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낙랑군의 영역 내에서 낙랑 태수의 통제나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낙랑 소국 왕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낙랑군의 영역 내에서 낙랑 태수의 통제나 간섭을 받으면서도 독립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낙랑 소국 왕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라는 말이 모순인듯 싶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백제의 수도와 신라의 수도까지 공격하는 그런 나라가 되었겠습니까? 소국이었다면 불가능 합니다. 분명히 낙랑군이 뒤에 있는데 그런짓 까지 했겠습니까? 그리고 고구려와 전쟁기사를 보면 대부분 요동지방이지 한반도는 행인국,구다국,개마국 정도 밖에 없습니다.또한 삼국사기 에서는 백제와 낙랑군,신라와 낙랑군,백제와 대방군의 충돌기록이 없습니다. 대방관련 기록이라면 책계왕과 대방국왕의 딸 보과와 혼인기록만 있을뿐입니다.
한가지 묻지요. 백제와 신라가 처음부터 거대 영토를 가진 강국이었나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은 '낙랑국'이 아니라 낙랑 군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낙랑국'이 나오는 대목은 호동왕자 기록 말고는 안나오는 걸로 아는데요.
그 낙랑군이 신라와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사가 후한서에는 없는것으로 알고있는데요. 그리고 백제는 그렇다쳐도 신라까지는 장거리 원정에다가 건국된지 40여년 되서 어느정도 기틀은 마련한 나라라 모순이라 생각합니다.
.....삼국사기에서 기록 출전이 꼭 후한서에서만 비롯되라는 법은 있는지요?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신라와 백제를 공격한 주체는 '낙랑국' 아니라 낙랑군이라니까요...
확실히 낙랑국이나 낙랑군이라 나와있지 않고 낙랑이라고만 나와있는데 확답하실수 있나요? 그리고 사기에서 반란자들을(진승,오광)을 열전에 집어넣을 정도로 세심한인간들입니다. 고구려와 전쟁기사를 그렇게 빠짐없이 집어 넣었는데 신라,백제 침공기사는 안엏었을까요? 만약 낙랑군이 백제와,신라를 침공했다면 고구려가 치고 내려왔을텐데 가능 할까요?
그 말을 거꾸로 돌려서 생각해 보세요. 낙랑국인지, 낙랑군인지 알수 없는 상황인데 그 기록을 모두 '낙랑국'으로 치환시키는 것은 논리 오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글을 쓴 목적은 전제를 처음부터 '확정' 짓는 것이 변수 고려를 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일 분입니다. 확대해석을 하지 않으셨으면 하는군요. 어쨌든 이 이상은 코멘트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낙랑국이 소국이 아닐수도 있지 않습니까? 만약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있었다면 고구려가 현도군을 치는데 낙랑군이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또한 관구검 침공때도 낙랑태수와 같이 왔다고 했지 낙랑태수가 협공했다는 기사는 본적이 없습니다, 만약 낙랑군이 대동강유역에 있었다면 분명히 협공도 가능했겠지요.
동명성제 님// 낙랑국이라는 것을 "먼저 가정"한 상태에서 추론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비정상, 비합리인 겁니다. 애초에 낙랑이라는 기록으로 되어 있다면, 그 정체를 먼저 파악하고 나서 말해야 할 터인데 아직 증명조차 되지 않은 낙랑국을 모든 낙랑에 대입하는 것은 논리 자체가 틀려먹은 것이지요. 제가 요 근래에 항상 하는 말입니다만, 낙랑을 낙랑국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증명하지 않는 한, 그와 관련된 모든 해석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틀렸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낙랑을 낙랑국으로 해석해야 하는 이유를 "먼저"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 해석은 아무런 생명력이 없어요.
그러면 후한사람들이 자신나라 사람들이 귀부했다고 할까요?
그리고 낙랑군이었다면 낙랑군이라 했을텐데 왜 그냥 낙랑이라 했을까요?
.... 삼국사기는 물론이고 수많은 사서들에서 현이나 군을 붙이지 않은 채 이름만 말하는 군현명을 수만 개는 찾아드릴 수 있습니다만....... 지금 우리가 서울을 말할 때 풀네임으로 서울특별시라고 "항상" 말하나요? 그냥 서울이라고 부르면 서울국인가요? 이건 진짜 기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또 다시 반복하게 됩니다만, 낙랑이라 쓰인 것을 낙랑군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입니다. 이를 낙랑국이라 해석해야 하는 확고불변한 증명을 하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그럼 한가지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여러번 반복한것 이지만 후한서에서도 건무 20년(기원후 44년)한국인(韓國人)이 스스로 내부해와 그땅을 차지했다고 나와있습니다.낙랑군이 존재 했으면 그냥 반란을 진압했다고 하면 될것을 왜 '내부'라고 했을까요?
제가 보기에는 고구려의 급성장에 두려운 한나라가 낙랑지역을 이를 명분으로 차지한듯 싶습니다.
아니면 과거에 낙랑군이 존재했다가 낙랑국이 등장하여 유명무실했다가 이때 다시 재정복을 했던것으로 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해동성국님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후한서 광무제기 건무20년의 기록을 말씀하시는 것인 것 같습니다만, 그 기록을 해동성국님처럼 이해하는 것은 아주 요원한 일일 것 같습니다만... "東夷韓國人率衆詣樂浪內附 동이의 한국 사람들이 무리를 이끌고 낙랑에 도착하여 내부하여왔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땅을 차지했다는 내용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고, 우리 모두가 알듯이 삼한은 후한의 영토가 아니었으니 삼한에서 낙랑군으로 무리를 이끌고 찾아오는 것을 內附라고 서술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기록을 잘못봤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에효... 참.. 저는 이만 쓸랍니다. 풀어서 쓴답시고 썼는데 이렇게 의사가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글을 못쓴다는 증거겠지요. 더 떠벌인다고 해서 될거 같지도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