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목간과 정백동 고분>
http://www.hani.co.kr/section-021015000/2007/04/021015000200704260657014.html -낙랑군 목간 기사
목간은 전체 인구의 14%인 4만 명을 한족(중국인), 86%는 토착민으로 분류해 꽤 많은 중국 사람들이 흘러들어온 사실도 보여준다. >
목간 통계에서 낙랑군 직할 지역이 가장 인구 밀집도가 높은 것으로 나온 만큼 평양이 통치의 중심이라는 사실도 명확히 입증됐다는 것이다. 한족과 토착민을 갈라 인구통계를 냈다는 점에서, 당시 낙랑 사회는 한족이 토착 사회 속에 융화하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
목간에서의 남부도위의 중심지로 설정된 부분의 매우 적은 인구 조사치와 실제 황해도 남부의중심지 간의 지리적 인구 차이 외에도
내용적으로 들어가서
나오는 4만명의 한나라 인구와 지배층과 피지배층(고조선 주민들)간의 동화가 없었다는 내용은 현재 평양 일대에서 유물 유적에 대한 실제 발굴 성과와 나오는 연구 분석과는 상당히 대치되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4만명 정도의 한나라인 거주 수준이면 이것은 상당한 인구 유입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피지배층과 동화되지 않았다면 평양 일대에는 기원전 1세기시기부터 고분과 유물에서 한나라적 색채가 농후한 일련의 셋트형이 상당수 발견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마치 열도의 <후지노키 고분처럼> 무덤 양식부터 수많은 부장품까지 삼국시대의 우리 전형적 유적,유물처럼 일련의 셋트형이 상당수 나와야 설득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서도 말했지만 4만명 정도의 한나라 세력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당연한 한나라식 행정치소와 규모가 평양 일대에 더더욱 분명히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 서북한은 낙랑군 행정치소로 추정하는 토성동 토성-많아야 천오백명 정도 수용 크기-등 역시 한나라식 장방형의 평지성도 아니며 규모도 고구려 백제의 초기 성곽이나 청동기 유적보다 왜소합니다.-이건 더욱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죠
평양 일대의 대표적 고분 유적이 정백동 고분(平壤 貞柏洞 古墳)입니다.
인용하면
<평양시 중심부의 서남쪽 대동강 좌안의 낙랑구역 정백동에 위치한 초기철기시대의 고분군으로 나무덧널무덤이 가장 윗쪽(능선 정상부~서남사면 단부)에, 벽돌무덤이 가장 아랫쪽(능선 서남사면 단부의 좌우 완만처)에, 그리고 귀틀무덤이 일부 나무덧널무덤과 섞여 있으면서 중간쪽(능선 서남사면 단부 중복부와 그 좌우의 완만처)에, 독널무덤이 나무덧널무덤과 귀틀무덤과 섞여 있으면서 다소 중간쪽(정상부 직하~능선 서남사면 단부의 우측 완만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http://www.sorori.com/html/dic/12970.htm => 정백동 고분 구체적 내용 링크
<토기류·무기류·생산도구류·거마구류·장식류·목기류로 크게 나누어진다. 일반적으로 토기류로는 화분형단지·배부른단지·한식(漢式) 회백색토기가, 무기류로는 철제의 둥근고리가 달린 칼·나무손잡이가 있는 긴 칼·손칼·창·가지창 등이, 생산도구류로는 철제의 도끼·낫·끌 등이, 거마구류로는 청동제와 철제의 수레굴대끝, 청동제의 일산대꼭지, 철제의 말재갈 등이, 장식류로는 청동제의 한경(漢鏡), 은반지, 구슬 등이, 목기류로는 옻칠을 한 베개·귀잔·밥상·책상·숟가락·상자·나막신 등이 있다. 이 중 옻칠을 한 목기류를 포함한 고급의 유물이 다량 부장되어 있는 것이 일명 “주고(周古)무덤”이라 불리우는 정백동 10호이다. >
위만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 즉 기원전 1세기경 평양 일대의 무덤 양식은 목곽묘 형태입니다.
정백동등 평양 일대에서의 이 목곽묘 형태는 현재 한나라식 양식과는 또다른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장품의 경우에도 교역 가능한 위세품인 칠기나 한경등 이외에 고조선 후기의 청동 양식인 세형 동검에서부터 평양 일대에만 나타나는 독특한 거마구와 특히 토기에서 화분형 토기의 경우는 서북지역의 움무덤(土壙墓)에서 주로 출토되는 철기시대 토기로, 북한에서는 단순히 화분과 비슷한 모양이라고 해서 화분형토기 혹은 화분형단지라고도 불리는데 움무덤이 대동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발견되고 있어 고조선문화의 토기입니다.
이 토기는 B.C. 2세기 후반기에 출현하여 일시적으로 유행하다가 2세기경까지 존속된 부장용 토기로 독널무덤,, 움무덤, 나무곽무덤-목곽묘- 부터 기원후 1세기에 본격화되는 귀틀무덤, 벽돌무덤(塼築墳) 에도 계속해서 출토되는 토기입니다.
http://roks821.egloos.com/8004721 => <화분형 토기 사진>
배부른 단지 역시 화분형 토기와 함께 고조선 문화의 토착 재지형 토기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3&aid=0002937988=> 배부른 토기 사진
토기에 대해서 잘 알겠지만 한국 학계만큼 토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곳도 없습니다. 기본 연대 분류부터 가장 일상적 생활 용기이기에
가장 최측면에서의 문화적 정체성이나 문화권, 특징을 가장 잘 알수 있는 것이죠
이처럼 실제 평양 일대등 서북한에서 나오는 기원전 1세기의 목곽묘에서는 고조선문화인 세형동검류의 색채가 강하며 이후 기원후 1세기 귀틀묘 단계에서도 고조선계 토기는 계속해서 출토되고 있는게 실제 발굴과 연구 내용들입니다.
이 때문에 고조선 재지 토착세력이 서북한 일대에 강하게 남아 있다라는 설명으로 현재 주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낙랑군의 목간 내용은 위치의 인구수뿐 아니라 내용적 측면에서도 서북한의 실제 유물, 유적 발굴과는 이해되지 않는 상반된 내용의 기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댓글 제시한 사진상의 단전리에서 나온 단경호가 고조선계의 토착 재지형토기라고요?. 발굴자가 뭐라 했는지 알고 사진까지 올린것인가요? 고조선의 토착 세력들이 왜 목곽분을 썻을까요? 이전 고조선의 주류를 이루는 묘제에 목곽분이 있나요? 목관분은 고조선의 토착세력이 발명한것인가요?
후지노키고분의 경우 부장품은 한반도계가 다수 보이나 유구, 특히 매장주체부는 倭라 합니다.
화분형토기나 배부른 토기나 여러 연대 여러형의 무덤에서 계속해서 나오는 부장품 토기중 하나이고 배부른 단지가 언제부터 나온지는 알고 말하는가요? 평양 일대의 목곽묘의 특징은 알고 하는가요??? 지금 현재 목관을 사용하니 우리가 단순히 중공의 지배지역입니까?? 영향이나 인적 교류등이 지배거점으로 바로 연결될 이유는 없군요.전후 전체적 그림속에서 봐야지요. 이런 질문을 하는 구체적 견해를 듣고 싶군요.후지노키고분의 매장 주체가 왜인이라??? 그 당시 그 유적에서 말하는 왜인의 정의가 뭔가요??
사진에 있는 가평 단전리 단경호( 보도문에서는 배부른 단지라 한것)이 토착재지형토기라고 역사님은 글로 올렸습니다. 이에 대한 질문을 드렸어요. 발굴자가 뭐라 했는지 아냐고요. ? 단전리 의 단경호가 왜 국박에 주목되어 전시되고 있는 이유를 모르고 있군요. 무엇이 낙랑토기인지 뭔지 모르니, 유물을 봐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토착재지형을 주장하는 것은 사진과 보도문만으로 보는 역사님의 한계인듯 합니다.알려줘도 모르쇠하면 더 애기 할 이유가 없을 듯합니다.
??? 저건 칼라로 사진이 잘나와서 올린 것이고..배부른단지가 왜 토착 재지형토기라고요??? 이런 말을 왜 했는지 이야기 하면 쉬울걸 매번 왜 말을 계속해서 돌리는지요???
지나가다님. 저같이 역사를 전공한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유물의 분류(맞나?)가 가장 어렵습니다. 즉, 학자들이 고구려성과 백제성을 구분하는 근거, 토기나 기타 유물에 따른 시대의 분류 등 너무 어렵거든요? 그런 문외한들은 위해 일단, 낙랑토기와 토착재지형 토기의 분류법을 좀 쉽게 알려주실 수는 없는지요? 부탁드립니다. (논문은 읽어도 이해가 안가서...)
토착재지형토기란 것은 역사님이 말씀한거이고 실제로 이를 용어로 설명하라니 난처하군요. 연구자중에 말입니다. 낙랑토기는 이미 언급한 정인성선생이나 오영찬 선생의 논고를 찾아보시면 도움이 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