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현(黃玹, 1855~1910) 또한 1908년에 쓴 [매천야록]에서 “당나라 이적(李勛)이 평양을 점령한 후 고구려의 장문고(藏文庫)를 보고, ‘고구려가 문헌을 이렇게 많이 구비하고 있을까? 이 서적을 그대로 놔두면 후세 사람들에게 지혜를 발전하게 하여 변방의 우환만 가중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서적을 모두 소각하였다. ”는 글을 남겼다.
이규경(李圭景 , 1788〜1856)이 편찬한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전적잡설(典籍雜說)”에도 우리나라 서적의 수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이규경은 중국 진시황의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런 일이 어찌 중국에만 있었겠느냐면서, 책이란 고금의 큰 보배이지만 때로는 조물주의 시기를 받아 항상 재난이 있었다고 했다. 우리에게도 책의 수난이 있었는데, 대강만 헤아려도 열 가지가 된다고 하면서 다음의 것들을 꼽았다. 당나라 이적이 고구려의 책을 평양에서 모아 놓은 다음 고구려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모두 불태운 것, 견훤이 망할 때 삼국시대 책을 옮겨놓았던 것이 불타 없어진 것, 고려 시대 전쟁에서 불탄 것, 명종 때의 경복궁 화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괄의 난, 백성들이 책을 뜯어 다시 종이를 만들거나 벽지로 사용한 것, 책을 지나치게 감추어 둔 것 등이 책이 사라진 원인이라고 하였다.
도서관 파괴는 흔한 일
책이 불타고, 도서관이 파괴된 사례가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때 장서 수 70만권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여러 차례 불태워졌다. 그 가운데 642년 칼리프 우마르 1세에 의해 불태워졌다는 설이 있다. 이슬람을 신봉하던 사라센이 이집트의 카이로를 점령하게 되자, 사라센의 장군은 도서관을 어찌할 지를 놓고 칼리프인 우마르 1세(634∼644)에게 물었다.
우마르 1세는 “만일 이 도서관의 장서 가운데 이슬람의 성전인 코란에 반대되는 내용이 있다면 이는 해로운 것이다. 만일 코란과 같은 내용들이라면 이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그 책은 없애버려도 상관없겠다.”고 했다. 이는 분서(焚書)를 둘러싼 유명한 일화로 전해진다.
책이 불탔다고 해서, 고대의 서적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분서갱유 사건이 있었고 전쟁의 피해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기록이 풍부한 나라로 유명하다. 따라서 우리에게 삼국시대의 기록이 부족한 것은 다른 원인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도서관은 고구려의 경당?
앞서 언급한 황현의 말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장문고’라는 도서관에 많은 책들을 보관되어 있었으나 고구려의 발전을 염려한 당나라의 만행 때문에 귀중한 기록들이 사라진 것이 된다. 하지만 장문고는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도서관으로는 고구려 경당이 유력하다.
[구당서(舊唐書)]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여, 가난해서 천한 일에 종사하는 집에서까지 각기 네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고 부르며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밤낮으로 그 곳에서 독서를 하거나 또는 활쏘기를 배운다. 책은 유교경전인 [오경(五經)] 및 [사기] · [삼국지], 어학서인 [옥편], 문학서인 [문선(文選)]등이 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고구려의 경당은 교육기관인 동시에 도서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시대에도 사람들은 문서를 기록하고, 책을 만들었다. 서기 251년 신라의 12대 왕 첨해이사금은 부도(夫道)란 자가 가난하지만 아첨함이 없고, 글(書)과 계산(算)을 잘하여 이름이 난 지라, 그를 불러 아찬을 삼고 물장고(物藏庫-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던 창고)의 사무를 맡긴 바 있다. 357년에 만들어진 고구려 안악3호분 고분벽화에는 주인공 곁에서 기록을 하는 관리의 모습이 보인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삼국시대 초기에 문서로 기록을 남기는 행정이 이루어졌고, 그 기록을 관리하는 자들이 존재했음을 추정하게 해준다. 하지만 삼국시대의 기록은 그 양이나 체계성의 측면에서 조선시대와 비교했을 때 걸음마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학자가 대접받지 못했던 시대의 한계
고구려는 372년 학문을 가르쳐 전문적인 문서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태학(太學)을 세웠다. 그런데 당시 학문을 교육받아 문서를 작성한 사람들의 신분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전쟁이 많았던 당시의 특성 상 관리를 선발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활쏘기 솜씨였기 때문이었다. 신라의 경우에도 금석문에 글을 쓰는 사람들인 ‘작서인(作書人)’의 등급이 겨우 17관등 가운데 12위 이하에 그친다. 앞서 본 부도가 예외적으로 6위에 달했고, 신라가 삼국 통일 전쟁을 수행할 때 외교문서를 잘 써서 큰 공을 세운 강수(强首)의 경우는 5두품 출신으로 8위인 사찬의 직위에 올랐다. 최초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설총의 경우도 5두품 또는 6두품 출신으로 진골 귀족은 아니었다. 682년에 건립한 신라의 교육기관인 국학(國學)의 학생은 12위 대사 이하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9년을 공부하고 졸업해도 10위 관등인 대나마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렇듯 글을 쓰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높은 대우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책이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삼국시대 최고 귀족들은 무예를 연마하는 것에 치중했다. 병서(兵書)는 최고 귀족들의 관심 대상이었지만, 개인의 문집 등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은 시대였다. 따라서 조선시대와 같이 많은 책들이 만들어질 수가 없었다.
책의 수요가 늘어난 시기는 불교가 대중에 널리 퍼지면서 불경의 수요가 늘어났으며 목판인쇄술까지 등장한 7〜8세기 이후부터였다. 따라서 태학박사 이문진이 정리한 고구려의 역사서 [신집(新集)] 5권을 비롯한 삼국시대의 책들이 전쟁으로 인해 불타 사라진 후, 다시 복원되기란 쉽지 않은 시대였다.
고려의 도서관
고려는 958년 과거제도를 처음 실시하여, 학문을 닦은 자들을 관리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삼국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책이 필요해졌다. 고려는 중국의 서적도 열심히 모아, 중국에서 이미 사라진 귀한 책도 보존하기도 했다. 1089년 송나라는 자국을 방문한 고려 사신에게 128종 수천 권의 책을 구하고 싶다고 요청할 정도였다.
1463년 조선 초기 경륜가로 유명한 양성지는 서책의 관리에 대해 세조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역대의 서적을 보건대, 혹 명산에 간직하고 혹 비각(秘閣)에 간직한 것은 유실을 대비하여 영구히 전하는 이유입니다. 고려의 숙종(1096∼1105)이 경서와 사적을 보관하기 시작했습니다. 홍문관(弘文館)의 장서에는 ‘고려국 14엽(葉:대) 신사세(辛巳歲:1101년)의 어장서(御藏書), 고려국 어장서라.’ 하였습니다. 숙종 시기부터 이제까지 363년인데도 책의 글자가 마치 어제 인쇄한 한 것과 같이 문헌을 상고(詳考)할 만하고, 이제 내각(內閣)에 소장된 만권의 서책은 그 때부터 소장되어 전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의 증언처럼 고려시대에는 왕실에서 직접 책을 보관하고 철저히 관리했다. 고려의 도서관은 숙종 시기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990년 서경(평양)에 설치된 수서원(修書院)은 서적의 수집, 정리, 보존을 담당한 기록상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초기에도 상당수의 고려시대 책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몽골의 침입, 왜구의 노략질 탓에 많은 책들이 사라지기도 했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