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의 역할은 선천성(innateness, 타고남) 또는 선천론(nativism)과 연결된다. 선천성 또는 선천론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맥락에서 쓰인다.
첫째, 개인차(개인들 사이의
차이)와 관련된 선천성은 주로 행동 유전학자들이 연구한다. 행동
유전학은 개인차 중 어느 정도가 유전자의 차이로 설명되고 어느 정도가 환경이나 경험의 차이로 설명되는지를 해명하려고 한다. 만약 어떤 형질의 유전율(heritability)이 70%라면, 거칠게 이야기해서 개인차 중 70%가 유전자의 차이로 설명되고 30%가 환경의 차이로 설명된다는
이야기다.
둘째, 인간 본성과 관련된 선천성은 주로 진화 심리학자들이 연구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적인 것들 중 어느 부분이 선천적인지를 가리려고 하며 그 선천적인 것이 왜 생겼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
수학에서 실수를 양수, 0, 음수로 나눈다. 양수는 0보다 큰 수를 말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모든 양수가 0보다 크다. “0보다 크다”라는
조건이 성립하지 않으면 양수로 인정 받을 수 없다. 수학의 개념은 지독하게도 엄밀하다. 인간 본성이라는 개념을 이렇게 수학적으로 엄밀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우선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애매하다. 특히 인간이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밝혀진 후에 인간 개념이 본질적으로 애매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이유가 생겼다. 1억 년 전의 우리
직계 조상을 인간이라고 부를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인가?
100만 년 전부터? 50만 년 전부터? 20만
년 전부터? 10만 년 전부터? 11만 년 전부터? 9만 년 전부터? 5만 년 전부터?
12만 3528 년 전부터?
설사 현대인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 이야기해도 애매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어야 인간 본성인가? 99.9% 정도의 인간에게 있어야 인간 본성인가? 99% 정도의 인간에게 있으면 인간 본성인가?
진화 심리학자들이 이런 애매하기 짝이 없는 인간 본성 개념을 쓴다고 시비를 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생리학자나 해부학자도 사실상 이런 애매한 인간 본성 개념을 쓰고 있다.
인간 생리학 교과서나 인간 해부학 교과서에서 제시하는 것들이 바로 인간 본성의 생리적, 해부학적
특성들이다. 해부학 교과서에 “인간의 손가락은 열 개다”라고
나왔다고 해서 모든 인간의 손가락이 열 개라는 뜻도 아니고,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닌 사람은 인간으로
인정 받을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사람도 있고,
유전자 이상으로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닌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임신 중에 엄마가
술, 담배, 마약에 쩔어 살아서 손가락이 열 개가 아닌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다. 그들도 다 인간이다. 해부학자는 다만
통상적인(normal, 정상적인) 유전자와 통상적인 환경이
결합될 때 인간은 대체로 손가락이 열 개가 되도록 발생(development, 발달)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 본성을 묘사한 해부학
교과서는 의미가 있다. 해부학에서 애매한 인간 본성 개념을 사용할 수 있다면 심리학에서 사용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인간 본성론은 결정론이다. 하지만 인간 개념도 본성 개념도 애매하기
때문에 상당히 느슨한 결정론이다. 이런 느슨함 때문에 여러 가지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긴다. 어쨌든 생리학이나 해부학의 애매한 인간 본성 개념과 느슨한 결정론을 쓰는 것을 인정해 주는 만큼만 진화 심리학의
인간 본성 개념과 느슨한 결정론을 인정해 주면 된다.
선천적 인간 본성이라고 하면 태어날 때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발생은 자궁 안에서도 일어나고 자궁 밖에서도 일어난다. 젖니가 빠지고
영구치가 나는 것이나 사춘기에 겨드랑이 털이 나는 것처럼 자궁 밖에서 일어나는 발달의 경우에도 정해진 시간표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 여자의 폐경처럼 태어난 지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다음에 일어나는 경우도 선천적 인간 본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유전자가 인간 본성을 만들고 인간 본성과 환경이 결합하여 인간의 행동이 만들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어떻게 들어 보면 인간 본성은 유전자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인간 본성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정보가 유전자에서만 나온다고 믿는 진화 심리학자는 없어 보인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경우에도 프로그램만 있으면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먼저
프로그램을 컴파일러를 이용해서 기계어로 바꾸어야 하며 CPU를 비롯한 온갖 기계가 있어야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다. 컴파일러나 CPU에도 엄청난 정보가 들어
있다.
어쨌든 진화 심리학을 옹호하기 위해 인간 본성에 대한 정보가 (거의) 모두 유전자에서 유래한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또한 자연 선택에서
유전자 수준의 선택만 중요하다고 믿을 필요도 없다. 유전자가 자연 선택과 발생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믿기만
하면 친족 선택 이론과 같은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 별로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21세기에 유전자가 자연 선택과 발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학자는 없어 보인다.
자연 선택과 발생에서 유전자가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든 인간 본성은 진화 역사를 거쳐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런 인간 본성을 파헤치려고 한다. 인간 본성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인간의 생각과 행동까지 몽땅 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이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 프로그램이 항상 똑 같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보다 훨씬
단순한 컴퓨터 프로그램도 마우스, 키보드, 센서 등에서 온갖
종류의 입력 값들을 받아들이며 그 입력 값에 따라 같은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결과를 산출한다. 심지어
입력 값에 따라 프로그램 자체가 스스로 변하는 프로그램도 만들 수 있다.
이덕하
2011-08-13
첫댓글 12만 3528 년 전부터?에서 1만 3528년 전부터?가 아닐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