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칭 물리학자가 나서서 “아인슈타인의 중력
이론이 틀렸고 뉴턴의 중력 이론이 옳다”고 주장하는 일이 생겼다고 하자. 저명한 물리학자들에게 물어보니
한결 같이 “그 자칭 물리학자의 말은 엉터리다”라고 답했다고 하자. 그럴 경우 나는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말을 믿는다. 내가 몇 년 또는 몇 십 년을 투자해서 일반 상대성 이론을 제대로 배우지 않는 한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권위에 의존하거나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이럴 경우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단체로 틀렸을 가능성도 아주 조금은 열어 두어야 할 것이다.
진화 생물학이나 진화 심리학을 깊이 배우지
않은 사람들 중에 진화 심리학이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과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같은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들이 진화 심리학(또는 사회생물학)에 대해 한 말들이 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위에서 언급한 자칭 물리학자의 이야기가
사실은 사이비물리학에 불과하다고 저명한 물리학자들이 한결 같이 이야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말을 (적어도 잠정적으로는) 받아들여야 한다면 진화 심리학이 사이비심리학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하는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들의 말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르원틴과 굴드가 어떤 학술지에 어떤 논문을
발표했는지 보자. 그들은 권위 있는 학술지들에 수 많은 논문들을 발표한 대단히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들이다. 그들이 그렇게 확신에 차서 진화 심리학을 조롱하는데 그들의 말을 무시할 수 있겠는가?
http://authors.library.caltech.edu/5456/1/hrst.mit.edu/hrs/evolution/public/profiles/lewontin.html
http://www.stephenjaygould.org/bibliography.html
진화 심리학을 조롱하는 편에도 대단히 저명한
학자들이 있지만 진화 심리학을 옹호하는 편에도 대단히 저명한 학자들이 있다.
윌리엄 해밀턴(William D. Hamilton),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존 메이너드 스미스(John Maynard Smith), 조지 윌리엄스(George Williams), 리더 코스미디스(Leda Cosmides), 존
투비(John Tooby),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 데이비드 버스(David M. Buss), 에드워드 윌슨(Edward O. Wilson) 같은
학자들이 어떤 학술지에 어떤 논문을 발표했는지 한 번 살펴보시라. 그들도 권위 있는 학술지들에 수 많은
논문들을 발표한 점에서는 같다.
http://www.psych.ucsb.edu/research/cep/publist.htm
http://stevenpinker.com/publications
http://homepage.psy.utexas.edu/homepage/Group/BussLAB/pdffiles/davidbussCV.pdf
아인슈타인보다 뉴턴이 옳다고 주장하거나
영구 기관(Perpetual-motion machine) 설계도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편을 들어주는
저명한 물리학자는 사실상 없다. 반면 여러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들이 진화 심리학자들의 편을 들어주고
있다. 또한 진화 심리학자들 자신이 권위 있는 학술지들에 수 많은 논문들을 발표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는 권위에 의존해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르원틴과
굴드의 권위에만 의존해서 진화 심리학이 엉터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권위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이런 식으로 편리하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진화 심리학을 둘러싸고 세계적인 권위자들의
의견이 몇 십 년 동안 극단적으로 갈리고 있다. 이런 일은 과학계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상당히 희한한 일이다. 나처럼 진화 심리학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르원틴이나 굴드처럼 진화 생물학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진화 심리학 이야기만 나오면 그렇게 바보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투비와 코스미디스는 굴드가 뻔뻔스럽게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인용문 중에 “conscious”라는
단어가 있음에 주목하라.
엄청나게 인기 있는 작가로서 굴드는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 중 극히 소수만이 원래 출처를
실제로 들추어 볼 것이며 나머지 모두는 따뜻한 인정으로 넘치고 믿을 만해 보이는 그의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신뢰할 것이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그가 무슨 주장을 하든 폭로될 가능성이 없이 안전하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는 이런 절연(insulation)을 파괴적인 효과가 나타나도록
이용한다. (As a immensely popular writer, Gould is conscious that
he is paradoxically safe from exposure in whatever he asserts because only
minuscule number of his readers will actually consult the original sources,
with all the rest trusting his warmly benevolent and credible persona. He uses
this insulation to devastating effect.) (「Letter to the
Editor of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on Stephen Jay Gould's "Darwinian
Fundamentalism"(June 12, 1997) and "Evolution: The Pleasures of Pluralism"(June
26, 1997)」, John Tooby and Leda Cosmides, July 7, 1997,
http://cogweb.ucla.edu/Debate/CEP_Gould.html, http://cafe.daum.net/Psychoanalyse의 <번역> 게시판에서 이 글 전체의 번역문을 볼 수 있다)
진화 생물학에 대한 굴드의 지식과 진화
심리학에 대한 굴드의 헛소리 사이에 불일치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굴드가 의식적으로 진화 심리학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결론 내린 듯하다.
하지만 인간이 일관성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도록
진화했을 것 같지는 않다. 많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자기 기만이 우리 조상의 번식에 꽤 도움이 되었을
것이며 따라서 인간에게 자기 기만 기제가 진화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자기 기만 기제가 진화했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 사람마다 자기 기만 기제의 작동에 편차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더 큰 자기 기만에 빠질 것이다. 또한 상황에 따라 자기 기만 기제가 상당히 인상적인
결과 즉 커다란 불일치로 이어질 것이다.
르원틴과 굴드의 일관성 부재가 상당히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그것만 보아서는 과연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 자기 기만의 결과인지 알 수 없다. 매우
똑똑한 사람들도 때로는 자기 기만이나 다른 이유들 때문에 아주 바보 같은 생각을 하기도 한다.
뉴턴은 미적분학, 중력 이론 등 엄청난 업적을 남긴 엄청난 천재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
성경책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성경을 문학으로 또는 도덕적 교훈을 얻기 위해 읽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성경에서 과학적 발견을 이끌어내려고 했으며 세계 멸망 시기에 대한 결론까지 이끌어냈다고 한다.
http://en.wikipedia.org/wiki/Isaac_Newton%27s_occult_studies
어떻게 뉴턴 같은 천재가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을까? 어떤 측면에서 보면 참으로 희한한 일이지만 기독교가 영국에 사는 모든 이들의 상식으로
통했던 당시 사회상을 고려해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다윈과 함께 자연 선택을 발견한 월리스는
말년에 신비주의에 빠져서 죽은 사람과 소통하려고 했다고 한다.
http://en.wikipedia.org/wiki/Alfred_Russel_Wallace#Spiritualism
셜록 홈즈의 작가 코난 도일은 10대 아이들이 찍었다는 조작된 요정 사진을 믿었다고 한다.
http://en.wikipedia.org/wiki/Cottingley_Fairies
20세기 중반 미국 학계에서는 백지론적 경향이 대유행했다.
이런 환경에서 학계에 입문한 르원틴과 굴드가 백지론적 경향의 영향 때문에 진화 심리학에 대해 헛소리를 해댄 것은 기독교의 영향 속에서
자란 뉴턴이 신비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것 이상으로 이상한 일은 아닌 것 같다.
물론 르원틴이나 굴드가 의식적으로 행동
유전학이나 진화 심리학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하겠지만 일종의 자기 기만이 작동했다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다.
“르원틴과 굴드가 행동 유전학과 진화 심리학에
대해 한 이야기가 헛소리인가?”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다룰 것이다.
이덕하
2012-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