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 전에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를 번역했다.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칼
마르크스)」
http://cafe.daum.net/Psychoanalyse/Glrk/48
기존 번역보다는 적어도 읽기에는 쉬운 번역이다. 왜냐하면 좀 더 공격적으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영역본과
국역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의역을 더 많이 했다. 그리고 “Sinnlichkeit”를
“감성”이 아닌 “감각”으로 번역했으며 그와 관련하여 나 나름대로 어느 정도 해석을 해서 각주를 달기도 했다.
마르크스의 글을 정확히 번역하기 위해서는
독일어를 잘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 같다. 마르크스의 글을 독일어로 아주 많이 읽어서 그의 사상과
어법에 대해 정통해야 하며 19세기 유럽 사상사를 깊이 알아야 할 것 같다. 나는 독일어도 잘 못하고, 마르크스의 글도 한국어로 어느 정도 읽었을
뿐이며, 19세기 유럽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따라서 내가
이 번역에 대해 권위를 내세울 처지가 전혀 아니다. 다만 기존의 번역과는 약간 다른 해석을 조심스럽게
제시했을 뿐이다.
어쨌든 2004년에
『끝낼 수 있는 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 - 정신분석 치료기법에 대한 논문들』을 번역 출간한 이후로
독일어로는 사실상 아무 것도 읽은 적이 없는데 내 머리 속에 있는 독일어가 완전히 사망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지금부터라도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그리고 “마르크스 읽기”가 나의 독일어 공부의 한 수단이 될 것이다. 조만간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고 <청소년을 위한 공산당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읽기 쉬운
번역본(오히려 “번안본”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을 창작(?)하는 새로운 시도도
해 볼 생각이다.
내가 마르크스를 읽으려고 하는 것은 단지
독일어 공부만을 위해서는 아니다. 나는 한 일은 거의 없지만 거의
15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며 지금도 마르크스를 어느 정도는 좋아하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 중 절반 이상을(어떤 면에서 보면, 대부분을) 거부한다는 면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는 아니다. 어쨌든 나는 적어도
마르크스가 비판할 가치가 있는 사상가라고 생각하며 마르크스(또는 마르크스주의)와 진화 심리학이 만나는 지점(만나서 싸움을 하든 사랑을 나누든)을 살펴보고 싶다.
마르크스가 1845년에 출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쓴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는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하며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아주 짧은 글이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철학자들이 지금까지는 세상을 해석하기만 해왔는데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11번째 테제가 가장 유명한 것 같다.
나는 이 테제를 다시 뒤집고 싶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우선 세상을 정확히 해석해야 한다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화 심리학에 대해 지독하게 무지하면서도 지독하게 적대적이다.
그들이 왜 그렇게 비합리적으로 생각하는지는 몇 가지 짐작이 가기는 하지만 나도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이 한 몫 한 것 같다.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뛰어난 지능,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해당 분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 끈질긴
탐구 등이 필요하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이 아무리 크다 해도 그 자체로는 과학적 이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열정이 때로는 이해가 방해 받기도 하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세상을 바꾸려는 열정만 강조한 것이 아니다. 그는 생시몽(Henri de Saint-Simon), 오웬(Robert Owen), 푸리에(Charles Fourier)와 같은 사람들의 유토피아 사회주의(utopian
socialism, 공상적 사회주의)가 열정만 앞서서 세상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마르크스는 이 글에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 글만 봐서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실천을 해야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라면 너무 뻔한 진리다. 과학자가 하는 실험을 실천이라고 불렀다면 이 역시 너무 뻔한 진리다. 실험을
하면 과학적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누가 부정한단 말인가?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혁명 운동이라는 실천에 뛰어들면 무언가 신비로운 과정에 의해 과학적 이해에 그냥 도달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이 글을 암묵적으로 해석하는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 있게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는 데에는 그런 식의 암묵적 해석이 한 몫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진화 심리학에서 다루는 내용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위에서
말한 내용을 반복하자면) 뛰어난 지능, 과학적 방법론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진화 심리학 분야에 대한 깊고 넓은 지식, 끈질긴
탐구 등이 필요하다. 혁명 운동 한다는 이유 만으로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한 지식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혁명 운동을 한다는 이유 만으로 진화 심리학에 대한 지식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를 알고 싶으면 진화 심리학을 깊이 공부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실상 “나는 진화 심리학을 거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것만큼은 확신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어쩌면 “나는 실천가니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가 역사를 초월한 인간의 보편성만 따진다고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진화 심리학을 이런 식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진화 심리학이 인간의 보편적 본성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진화한 선천적 속성들로 이루어진 인간 본성은 지난 1만 년 동안의
인류 역사 동안 별로 변하지 않았다. 즉 역사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인간 본성에 대한 연구는 어떤 측면에서는 역사를 무시한다.
만약 “개인에 내재하는 추상(Abstraktum)”인
인간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사회적 관계들의 협주(das Ensemble der
gesellschaftlichen Verhaltnisse)”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방법론적 개인론을 무시한 구조론은 엉터리 기능론과 같은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다. 인간의 경우 행동의 단위는 계급이나 사회가 아니라 개인이다. 행동을
결정하는 정보 처리는 뇌에서 벌어지며 뇌는 개인마다 하나씩 있다. 계급이나 사회에는 뇌가 없기 때문에
뇌처럼 정보를 처리할 수 없다.
개인의 뇌가 환경의 입력 값들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 알아내기 위해서는 뇌가 어떻게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즉 어떤 입력 값에 토끼의 뇌와 인간의 뇌가 어떻게 다른 식으로 반응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런 지식이 없이 환경만 따지면 모래 위에 쌓은 탑이 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는 종교의 기원을 계급 사회의 소외와 갈등에서 찾는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원시 공산주의라고 부른 사냥-채집 사회에도 종교는 있다.
극심한 불평등이 종교에 모종의 영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기 전에 왜 사냥-채집 사회를 포함한 사실상 모든 문화권에 종교가 있는지부터 따져야 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우선 보편적 인간 본성에서 종교의 기원을 찾으려고 한다. 예컨대
인간이 과도하게 행위자를 탐지하도록 “설계”되었다는 식의 설명이 있다.
2011-0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