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내가 라캉의 이론이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이유」라는 싱거운 글에 포함될 것이다. 그 글이 싱거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내가 라캉을 잘 알지 못하면서 쓰는 글이기 때문이다. 나는 “미분기하학을 모르는 넘은 감히 일반 상대성 이론에 대해 떠들지 말라”라는 말은 백 번 옳다고 생각하지만 “동의보감도 안 읽은 넘는 감히 한의학에 대해 떠들지 말라”라는 말은 택도 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라캉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넘은 감히 라캉에 대해 떠들지 말라”라는 말은 한의학에 대한 말보다는 0.1cm라도 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편의상 기쁨조(entertainer)를 표방하는 사람을 마술사라고 부르고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처럼 진짜로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을 마법사라고 부르겠다. 마술사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피나는 훈련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인다. 하지만 그들은 사기꾼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기쁨조다”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법의 교권이 아니라 기쁨의 교권에서 활동하는 것이다.
유리 겔라는 사기꾼이다. 왜냐하면 사실은 기쁨조이면서 마법사를 사칭했기 때문이다. 만약 진짜로 마법의 교권에서 놀고 싶었다면 제임스 랜디 같은 노련한 마술사 앞에서 자신의 마법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자크 라캉은 어떤 교권에서 놀았나? 그는 기쁨의 교권에서 놀았나? 아니면 과학의 교권에서 놀았나? 만약 그가 “나는 기쁨조다”라고 천명했다면 그는 사기꾼이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칸트, 헤겔, 니체, 마르크스 그리고 특히 프로이트의 저작들을 이리저리 짬뽕해서 지식인들에게 기쁨을 주었을 뿐이다. 나 자신이 이전에 프로이트를 읽으면서 상당한 기쁨을 얻었고 주변에서 들은 바로는 많은 지식인들이 라캉학파 문헌을 읽으면서 상당한 기쁨을 얻고 있다고 한다.
나는 라캉이 사기꾼이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기쁨조이면서 과학자를 사칭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이론의 진리성을 주창했기 때문이다. 기쁨조는 진리를 외치지 않는다. 소설가는 자신의 소설이 허구임을 기꺼이 인정하며, 마술사는 자신의 마술이 눈속임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감동과 기쁨을 주느냐로 승부한다.
반면 마법사는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마법을 진짜로 부릴 수 있느냐로 승부한다. 과학자는 자신의 이론이 얼마나 잘 검증되느냐 즉 진리에 얼마나 근접하느냐로 승부한다. 여기에는 진리가 걸려 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작업이 과학이라고 분명히 밝힌 것과는 달리 라캉과 그의 제자들은 자신의 이론이 과학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들은 그냥 해석일 뿐이라는 식으로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은 진리를 참칭했다. 진리라는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그는 기쁨의 교권이 아니라 과학의 교권에 들어선 것이다. 과학의 교권에 들어서면서 자신이 과학자임을 부정한다면 “나는 진짜로 마법을 부릴 수는 있지만 마법사는 아니다”라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라캉이 스스로 기쁨조일 뿐이라고 인정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의 해석과 남의 해석을 비교했으며 자신의 해석이 더 낫다고 우겼다. 물론 자신의 해석이 더 기쁨을 주기 때문에 낫다고 우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이 진리에 더 근접했기 때문에 낫다고 우겼다.
마법의 교권에서 놀고 싶으면 제임스 랜디 같은 전문가 앞에서 마법을 뽐내야 한다. 과학의 교권에서 놀고 싶으면 전문 과학자들 앞에서 자신의 이론을 뽐내야 한다. 라캉은 이 문제를 회피했다. 그는 아주 속 편한 전략을 썼다. 진리를 참칭하면서 사실상 과학의 교권에서 놀았으면서도 다른 과학자가 쌍심지를 켜고 자신의 이론을 검증하는 것은 거부한 것이다.
이런 골 때리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라캉 혼자만은 아니다. 여러 학파의 정신분석가들이 그런 식으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들은 해석의 옳고 그름에 대해 따졌지만 정신분석은 과학이 아니라고 우겼다. 일부 한의사들도 이런 태도를 취한다. 그들은 자신의 치료법이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 효과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것은 거부한다. 장난하나? 바둑을 두려면 바둑의 규칙을 지켜야 한다. 바둑을 두다가 알까기를 하는 것은 반칙이다. 알까기를 하고 싶으면 “우리 알까기 한 판 합시다”라고 먼저 외쳐야 한다.
2010-02-24
첫댓글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무의식이론)와 라캉의 이론(욕망이론)이 후대사람들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정작 자신들은 자신을 칸트에 버금하는 철학자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프로이트는 자신이 인류역사상 가장 뛰어난 학자라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고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이론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진 현대에도 그의 이론의 영향이 일반인들에게 남아 있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말실수에 관한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이 현대 과학에 의해 명백한 오류임이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말실수를 하는 원인을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찾고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에 빠져사는 것 같습니다. 피히테는 칸트가 자기자신도 이해하지 못할것이라고 말했고 헤켈은 임종 떄 나를 이해한 사람이 딱 한사람있다고 있었다고 말했으나 곧 덧붙여 그 역시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한의학은 경험적으로 얼마든지 반증 가능하지만 철학은 논리적으로 구성된 사유이므로 그 사유자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비판하기가 힘들겠지요.
개인적으로 과학자들이 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별로 좋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과학에서 젖꼭지의 출현을 논하는 거랑 비슷하군요. 라캉과 프로이트가 과학이라? 세미나를 읽어보셨다면 알겠지만 정신분석에 과학의 지위는 프로이트때에도 라캉의 시절에도 부여되지 않습니다. '예술'에 가깝다고 하지요. 진리처럼 쓰여졌으나 글쓴것자체는 오류입니다. 라캉과 프로이트를 과학이라는 잣대에 대는 것 자체가 오류겠죠. 프로이트도 정신분석에 대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합니다. '정신분석에 아직 과학의 지위를 부여할 수는 없다.' 즉 근거자체가 오류라는 셈이네요.
프로이트가 언제 어디에서 그런 말을 했나요?
한번 찾아보세여. 본지 오래되어서 그 텍스트가 안보이는군요. 그리고 라캉이 세미나에서 정신분석에 과학의 지위를 내리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면 이전에도 과학으로 판명된 학문은 아니라는 셈이지요. 그리고 프로이트라면 인문쪽으로 받아들이지 과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라캉역시 과학자 '처럼' 했지. 과학자는 아니었듯이요. 과학계는 그의 지위를 끌어내려버렸지 않습니까? 그런 연관속에서 정신분석에 과학의 잣대를 들이대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러니라는 말입니다.
츠라이/ 과학이냐 아니냐는 수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주장하는 경험적 명제, 임상적 방법이 다른 대안적 경험적 명제나 임상적 추천보다 낫다는 것을 주장할 수 있느냐 아니냐입니다. 따라서 '과학처럼'이든, '과학으로서'이든, 자신이 주장하는 명제와 임상 방법이 다른 것보다 더 낫다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면 여전히 그것은 기쁨조의 교권을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