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시간에 어떤 기사가 나올지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대충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보의 유용성, 지배
계급에 의한 통제, 시청률이 그것들이다.
뉴스 시간에 일기 예보가 나오는 이유는 유용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뉴스 시간에 미군의 잔학상이 잘 안 나오는 이유는 미국의 방송사가 미국 지배계급의 통제하에 있으며 미국
지배 계급은 미군의 잔학상이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 이유로 미국의 뉴스 시간에는
미국의 적성 국가인 중국, 북조선, 후세인 치하의 이라크
정부에 의한 잔학상이 자주 보도된다.
뉴스 시간에도 역시 예쁜 여자나 노출된 여자의 몸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남자 시청자들이 그것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시청률 경쟁에 목숨을 거는 자본주의 사회의 방송사가 이 요인을 무시할 수는 없다.
뉴스 시간에 살인 사건이 꼭 나오는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유용한 정보인가?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수 백 킬로 미터 떨어진 또는 외국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에 대한 정보가 유용할 리가 없다.
그런 뉴스가 나오길 지배 계급이 바라는가? 그런 뉴스가 전쟁 없는
사회 또는 사회주의가 성공하기에는 인간 본성이 원래 너무 잔인하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쓰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인 사건은 자본주의의 악효과로 보여질 수도 있다. 또한
뉴스의 사건, 사고 코너에는 살인 사건 뿐 아니라 사고
기사도 나온다. 특히 자본주의의 이윤 압력 때문에 발생하는 사고들(이윤율을
높이기 위해 불량 건축 자체를 써서 발생한 건물 붕괴 사고 등)과 자본주의 하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자살들을 자본가들이 떠벌리고 싶어할까?
그렇다면 남는 설명은 시청자들이 살인 사건 뉴스를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왜 시청자들은 살인 사건 뉴스를 보고 싶어할까? 위에서 말했듯이 그런
뉴스가 실제 생활에서 유용하기 때문은 아니다.
(적어도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이 현상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예컨대 시청자들이 살인자와 동일시함으로써 쌔디즘(sadism) 만족을
얻거나 살인당한 사람과 동일시함으로써 매저키즘(masochism)적 만족을 얻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진화심라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은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에 진화했다. 따라서 만약 우리의 조상이 살인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면 그 소식은
엄청나게 중요한 정보다. 왜냐하면 교통, 통신 시설이 사실상
없었던 그 시절에는 그 살인자가 자신과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살았을 가능성이 크며 앞으로도 계속 그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것은 남자들이 텔레비전에서 예쁜 연예인들을 열심히 보는 것과 유사하다. 현대의
남자가 텔레비전 속의 연예인과 데이트하거나 섹스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없던 원시
시대에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보았다면 그것은 그 여자와 앞으로도 마주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조상이 진화했던 시기의 환경에 의해 형성된 대로 행동한다. 따라서
코카콜라와 맥도날드가 판치는 현대에는 지방, 설탕, 소금에
대한 집착이 생존에 방해가 됨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에 집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