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 모듈성(massive modularity) 테제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수백, 수천 개의 모듈(module)들 또는 기제(mechanism)들로 이루어져 있다(하위 모듈들까지 몽땅 포함한다면
모듈의 개수가 수 만 개 또는 그 이상일 가능성도 열어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모듈은 부품과 비슷한
개념이다. 자동차나 컴퓨터와 같이 복잡한 기계는 많은 수의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인간의 신체 역시 많은 수의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뇌도 수 많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이 선천적 모듈과 후천적 모듈을 명시적으로 구분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선천적 모듈이란 진화 역사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인간 본성에 속한다. 후천적 모듈이란 개인의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인간 본성에
속하지 않는다. 피아노를 오랜 기간 동안 열심히 배우면 악보를 보고 거의 자동적으로 칠 수 있게 된다. 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ㄱ”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냥 친다. 또한 매우 빠르게 칠 수 있다. 인간에게는 오랜 학습을 통해 모듈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피아노
연주 모듈은 피아노가 있는 문화권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후천적 모듈이다. 대량 모듈성 테제는 그냥 모듈이
아니라 선천적 모듈에 대한 테제이다. 즉 대량 모듈성 테제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수백, 수천 개의 선천적 모듈들 또는 선천적 기제들로 이루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량 모듈성 테제를 명시적으로 공격한다. 얼핏 보면
대량 모듈성 테제가 진화 심리학을 둘러싼 진짜 논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진화 심리학자들(적어도 그 중 일부)은 다수의 선천적 모듈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반면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은 선천적 모듈은 소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 그렇게 주장하기도 한다.
양쪽 모두 진화 역사에 의해 결정된 선천적 모듈들이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극단적인 백지론자는 아니다. 또한 양쪽 모두 모듈들이 입력 값에 따라 다른 결과를 산출한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면에서 극단적인 유전자 결정론자
또는 극단적인 생물학 결정론자도 아니다. 하지만 한 쪽에서는 모듈의 수가 수백, 수천 개라고 주장하며 다른 쪽에서는 기껏해야 수십 개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진정한 차이점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실제로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이 대량 모듈성 테제를 명시적으로 반박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들이 정말로 일관되게
대량 모듈성 테제에 반대하는지는 의문이다. 이 글에서는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도 인정할 것 같은 선천적
모듈들을 나열해 보겠다. 물론 여기에서는 내가 생각해낸 것들 중 일부만 나열했다. 따라서 전문가들이 총동원된다면 목록이 훨씬 길어질 것이 뻔하다.
1.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과
같은 감각을 처리하는 심리 기제들이 선천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시각처럼
매우 복잡한 모듈은 수 많은 하위 모듈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 뻔하다.
2. 배고픔, 목마름, 체온 조절, 성욕 등과 같은 기본적인 생리적 욕구를 처리하는 심리
기제들이 선천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체온 조절만 하더라도 하나의 기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더위와 추위를 느낀다. 또한 더위를
느끼면 땀을 흘린다. 그리고 추위를 느끼면 몸을 떤다. 이런
일들이 가능한 이유는 뇌 속 어디인가에서 체온과 관련된 정보를 받아서 땀 흘리기와 몸 떨기가 일어나도록 몸을 통제하는 심리 기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더우면 땀을 흘린다” 기제와
“추우면 몸을 떤다” 기제가 따로 있다.
3. 몸의 온갖 근육을 통제하는 심리 기제들이 선천적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몸에는 근육의 수가 엄청나게 많이 있다.
눈을 깜빡이는 데 필요한 근육, 수정체의 두께를 바꾸어서 초점을 맞추는 데 필요한 근육, 음경이 발기하도록 하는 데 필요한 근육, 심장이 펌프질 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근육,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필요한 근육, 입술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근육, 엄지 발가락을 움직이는 데 필요한 근육, 항문을
열어서 똥이 나오게 하는 데 필요한 근육, 오줌을 누는 데 필요한 근육, 혀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근육. 기본적인 근육 통제와 관련된 선천적
모듈들만 해도 백 개가 넘을 것 같다.
4. 인간은 자신의 눈으로 무언가가 날아오면 본능적으로 눈을 감는다. 뇌에서 무언가 정보를 처리해서 눈꺼풀 근육에게 명령을 내리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이 기제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이것이 눈을
보호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모듈이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5.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군침을 흘리는 경우가 많다. 시각 정보에서 시작하여 입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뇌의 정보 처리를 거쳤음이 분명하다. 이것이 음식을 먹도록 준비시키는 선천적 기제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6. 큰 소리를 들으면 깜짝 놀라는데 청각에서 시작해서 온몸의 여러
근육으로 끝나는 것으로 보아 뇌에 있는 어떤 기제가 작동한 결과라는 것이 명백하다. 놀람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도록 하는 심리 기제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7. 온갖 종류의 통증들이 있다.
8. 인간은 대체로 단맛을 좋아하고,
쓰거나 떫은 맛을 싫어한다. 이런 선호가 잘 익은 과일처럼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도록 하고, 독이 있는 부분을 먹지 않도록 하는 선천적 모듈 때문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9. 공포 기제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공포 기제는 비명, 마비, 심장
박동 수 증가 등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있다. 비명 기제가 다른 이들에게 위험 상황을 알리도록 진화한
적응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특히 어린이들이 공포에 질리면 마비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포식자에게 들킬 가능성을 줄이기 위한 적응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심장 박동 수 증가가
재빠른 행동을 위한 준비 기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분노 기제 자체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분노 기제가
발현되면 공격적으로 변하는데 이것이 적응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10. 하품 기제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11. 재채기 기제가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12. 남자든 여자든 성적으로 흥분하면 성기에서 분비물이 흐른다. 성적 흥분은 심리적 현상이다. 이것이 성교 준비를 위한 기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13. 갓난아기의 빨기 능력이 선천적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빨기를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입의 여러 근육들을 나름대로 섬세하게 통제해야 하는데 뇌에서 일어나는 정보
처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만약 위에서 나열한 것들이 선천적 모듈임을 인정하고, 또한 각 방면의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것들 역시 선천적 모듈임을 인정한다면 그 사람은 이미 대량 모듈성 테제를 지지하는 것이다.
대량 모듈성 테제에 반대하는 사람에게 이론적으로 반박하는 것보다는 위에서 제시한 목록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일 것 같다. 인간의 몸은 엄청나게 다양한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엄청나게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런 기능들 중 일부를 뇌에서 통제한다. 따라서 뇌에는 수
많은 부품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대량 모듈성 테제를 이론적인 수준에서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하지만 위에서 제시한 목록들 대부분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런
면에서 대량 모듈성 테제를 둘러싼 논란은 진짜 논란이 아니다. 진화 심리학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백지론자도 아니며 대량 모듈성 테제 자체를 일관되게 거부하지도 않는다. 진짜 논점은 다른 곳에 있다.
진화 심리학 비판자들은 진화 심리학자들이 제시하는 선천적 모듈들(또는
그에 대한 가설들) 중에 대체로 정치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도덕적으로 민감한 것들에만 반대하는 것 같다. 예컨대, 근친상간, 질투, 친족애, 강간, 외모 선호, 도덕
판단, 우정, 사랑(연애
감정), 지위, 복수, 공격성, 정의감 등과 관련된 선천적 기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대량 모듈성 테제가 재채기, 하품, 눈 깜빡이기와
같이 이데올로기와 별로 상관이 없을 때에는 보통 순순히 인정한다. 그들은 대량 모듈성 테제 자체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으로 민감한 주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대량 모듈성 자체에 반대한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덕하
2011-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