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 거리를 확보하면서 운전하면 더 안전하다는
것을 모르는 운전자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 관찰에 따르면 한국에서 안전 거리를 제대로 지키면서
운전하는 사람이 10%나 될지 의문이다. 한국 운전자들은
앞에 외제차나 화물차가 있을 때만 안전 거리를 지킨다는 이야기가 있다.
안전 거리에 대한 의견은 약간씩 다르지만, 눈비 등이 오지 않아서 도로 사정이 좋을 때에도 시속 100km로
달릴 때에는 앞 차와의 거리를 100m 정도 확보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시속 100km 이상으로 달릴 때에도 30m 정도만 떨어져서 달리는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10m 정도로 바짝 붙어서 달리기도 한다.
왜 대부분의 운전자들이 안전 거리를 무시하고
운전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운전 면허를 따서 운전을 배우고 있는 나는 이것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진화 심리학이 이런 현상을 해명하는 데 어떤 도움이 될지도 궁금하다.
안전 거리를 무시하려는 사람들의 경향을
과학적으로 밝히는 것은 호기심 해결의 문제만은 아니다. 원인을 정확히 밝히면 훌륭한 해결책이 떠오르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안전 거리의 심리학”과 관련된 기존 문헌을
아직 뒤져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떤 연구가 있었는지 모른다. 이 글은 그냥 여기저기서 본 내용들과
내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한 것일 뿐이다.
우선 운전자들이 안전 거리를 잘 지키지
않는 이유의 후보들을 나열해 보겠다. 사람마다 이유가 다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째, 안전
거리 미확보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르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위험하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안전 거리 미확보 때문에 추돌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모르는 운전자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느 정도 운전 경험이 쌓이면서 “나는
바로 앞 차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앞의 여러 대까지 다 살피고 운전하기 때문에 안전 거리를 확보하지 않아도 안전하다”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또한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과 위험을 느끼는
것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 예컨대 비행기 여행이 자동차 여행에 비해 통계적으로 훨씬 안전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는 사람도 자동차를 탈 때에 비해 비행기를 탈 때에 훨씬 더 불안해 하는 경우가 있다.
둘째, 안전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한국의 교통 상황에서는 오히려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외국의 경우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서는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운전하면 앞으로 계속 차가 끼어든다. 빈번한 차선 바꾸기는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어떤 운전자는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달리는 차 뒤에 바짝 달라 붙어서 위협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도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셋째, 안전
거리를 확보하면서 운전하면 목적지에 더 늦게 도착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한국에서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달리면 앞으로
계속 차가 끼어든다. 그 끼어든 차와 자신의 차 사이의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다. 다른 차가 끼어들 때마다 속도를 줄여야 하기 때문에 다른 차보다 느리게 갈 수밖에 없다.
넷째, 다른
차가 자기 앞에 끼어드는 것 자체가 화가 나기 때문인지 모른다.
다섯째,
초보나 운전 미숙으로 오해 받기 싫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섯째,
남들도 안전 거리를 무시하고 달리니까 자신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일곱째,
남들이 안전 거리를 무시하고 달리니까 자신도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안전 거리 미확보 자체가 이미 비공식적
규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규범을 지켜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한국의 공식 규범에 따르면 에스컬레이터에서는
걷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오른쪽에는 쭉 서 있고, 왼쪽에는
쭉 걸어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비공식적 규범이다. 공식적
규범을 지키기 위해 이 비공식적 규범을 어기면서 왼쪽에서 가만히 서서 다른 사람의 통행을 방해하려면 상당한 배짱이 필요하다.
여덟째,
큰 차의 뒤에 바짝 붙어서 달려서 공기의 저항을 덜 받음으로써 연료를 절약하기 위해서인지 모른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긴 하지만
무시해도 될 정도인 것 같다.
아홉째,
안전 거리 미확보와 관련된 단속과 처벌이 없기 때문인지 모른다.
안전 거리 미확보의 원인을 살피기 전에
이런 현상이 얼마나 보편적인지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조사 방법은 단순하다. 각 나라의 고속도로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달리는지 알아보면 된다.
어떤 것이 원인인지 밝히기 위해서는, 그리고 어떤 원인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 연구해야 할까?
일단 설문 조사를 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규모 설문 조사를 통해 운전자들 자신이 “나는 왜 안전 거리를 확보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는지 알아본다면 연구에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물론 운전자들이 100% 솔직하게 답변하지는 않을 것이며, 운전자들 자신도 그 원인을 정확히 모를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나라마다 안전 거리 확보 정도에 차이가
꽤 있을 수 있다. 또한 나라마다 안전 거리 미확보의 원인이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연령과 성별이 인간 심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안전 거리 확보와 관련된 운전 행태 조사와 설문 조사를 연령과 성별을
고려하여 해 보면 진화 심리학자들의 예측과 얼마나 부합하는지 알아볼 수 있다.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대체로 남자가 여자에 비해 지위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런 성차를 그럴 듯하게 설명한다.
인간의 경우 여자가 남자에 비해 자식에
더 많이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여자가 임신을 하고 수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가 한꺼번에 여러 명의 여자를 임신시킬 수 있으며 그 결과 여자에 비해 남자의 번식 편차가 더 심하다.
남자는 위험한 일을 함으로써 여자에 비해 번식과 관련하여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게다가 여자에 비해 남자는 신체 손상이나
죽음으로 번식 손해를 덜 본다. 어떤 남자가 다른 여자를 임신시킨 후에 곧바로 죽는다고 해도 그 임신으로
생긴 자식이 어른이 될 가능성이 있다. 반면 임신한 여자가 죽으면 그 임신으로 생긴 자식은 끝장이다.
선택압의 이런 차이 때문에 남자가 위험을
더 많이 감수하고 지위에도 더 집착하도록 진화했다는 것이 진화 심리학자들이 대체로 받아들이는 설명이다.
이런 성차는 안전 거리 미확보 현상에서도
드러날지 모른다.
만약 안전 거리 미확보가 위험한 일이라면
남자가 여자에 비해 안전 거리를 덜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만약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드는 행위를 자신의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이라면 남자가 여자에 비해 안전 거리를 덜 확보하려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안전 거리 미확보와 관련된 운전 행태에서
성차가 전혀 없다는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어쩌면 사람들이 안전 거리 미확보 상태를
위험 상태로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어쩌면 사람들이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드는
행위를 지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인지 모른다.
주요 원인들을 알아낸다면 해결책을 구상하는
데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안전 거리 미확보가 위험하다는 것을
모른다면 왜 안전 거리 미확보가 위험으로 이어지는지 알려주면 된다.
만약 안전 거리를 확보하지 않아도 앞에
있는 여러 대의 차들을 관찰하면서 달리면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운전해도 위험할 수 있는지 알려주면 된다.
만약 안전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런 생각이 틀렸는지 알려주면 된다.
만약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달리면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안전 거리를 확보하고 달리는 경우가 그렇지 않은 경우에 운행 시간 차이가 얼마나 나는지 알려주면 된다. 그 차이가 운전자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다면 운전 행태가 바뀔 가능성이 있다.
만약 앞에 다른 차가 자꾸 끼어드는 것
자체가 화가 난다면 해결책을 쉽게 찾아내기는 힘들 것 같다. 이럴 경우에는 화가 나는 이유까지 밝혀야
해결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만약 남들도 안전 거리를 확보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도 그래도 된다고 또는 자신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거나 느낀다면 해결책을 쉽게 찾아내기는 힘들 것 같다.
이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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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2011-12-28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운전자에게 원인을 알려주고 해법을 알려주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의학이 치료에 도움이 되는 이유는 의학 지식을 의술에 응용했기 때문이지 환자에게 병의 원인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안전 거리를 지키지 않는 원인에 대한 지식을 정책에 응용하면 됩니다. 그런 것들을 운전자가 아는지 여부는 어떤 면에서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입니다.
이덕하님 대신하여 오타수정 : [환자에게 병의 원인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환자에게 병의 원인에 대해 알려주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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