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허무주의(moral nihilism)”에는 온갖 정의가 있으며 여기에서는 그냥 일상적으로 쓰이는 의미로 쓰겠다. 내가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문맥을 보면 대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 철학에는 온갖 유파가 있다. 진화론은 그 중에 적어도 두 가지 절대주의 유파를 무너뜨린다. 하나는
창조론적 도덕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칸트의 도덕 철학이다.
창조론적 도덕 철학에 따르면 절대자인 신이
있으며, 그 신이 도덕 규범을 만들었으며, 인간은 그 도덕
규범에 따라야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진화론은 창조론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창조론이 타격을 입으면 당연히 창조론적 도덕 철학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물론 진화론은 추상적인 창조론 자체와는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예컨대, 신이 우주 법칙을 만들고
빅뱅을 일으킨 후 자살했다고 보는 식의 이신론은 진화론과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그런 이신론에 따르면
진화는 신이 만든 우주 법칙이 신이 만든 우주 물질에 작용하여 일어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이신론이나
범신론을 아인슈타인만큼이나 일관되게 믿었던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절대 다수의 창조론자들은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신과 같은 인격신을 믿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그런 인격신은 자살하지 않았으며 세상에 계속 개입한다. 예컨대, 인간이 기도를 하면 응답을 하기도 한다.
따라서 사실상 진화론이 창조론과 정면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을 버리는 데에 진화론이 기여했다고 한다. 또한 종교인이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창조론을 버리거나 창조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삶의 의미와 도덕 문제와
관련하여 혼란을 겪기도 한다. 이것은 도덕적 허무주의의 일반인 버전이다.
칸트는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수학적
진리나 물리학적 진리가 있는 것처럼 인간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도덕적 진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진화론은
이런 칸트의 생각과 정면 충돌한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이 받아들이는 규범은
수십 억 년에 걸친 우리 조상들의 진화 역사의 산물이다. 여기에는 온갖 우연적 요인들이 개입되어 있다.
만약 다른 행성에서 인간만큼 똑똑한 생물이
진화했다면, 또는 지구에서 수 억 년 후에 인간만큼 똑똑한 생물이 진화한다면 그들의 수학 또는 물리학은
결국 우리의 것과 수렴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도덕 심리학과 도덕 철학은 우리의 것과 상당히 다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이루어진 손이 두 개이며, 3차원(3원색: 빨강, 녹색, 파랑)으로 색상을
보는 두 개의 눈이 있으며, 그 눈에 맹점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만약 칸트의 도덕 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진화론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상당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허무주의의 지식인 버전이다.
요컨대,
진화론은 기존에 일반인과 지식인 사이에서 상당히 유행했던 도덕 철학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다. 그런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도덕적 허무주의에 빠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창조론자도 칸트주의자도
아니었던 사람은 진화론을 배운다고 해도 도덕 철학과 관련하여 별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창조론자나 칸트주의자가 진화론 때문에
받는 도덕 철학적 타격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Jonathan
Haidt가 「The
emotional dog and its rational tail: A social intuitionist approach to moral
judgment(2001)」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다.
The
emotional dog and its rational tail
The
emotional dog and its rational tail
Haidt는 사람들이 곰곰이 도덕 추론을 한 다음에 도덕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일단 아주 빠르고 자동적으로 도덕 판단을 내린 다음에 그 도덕 판단을 정당화할 추론을 곰곰이 구성해낸다고 주장했다. 무의식적 도덕 직관이 먼저고 의식적 도덕 추론은 그 나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Haidt의
주장이 창조론적 도덕 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과 칸트의 도덕 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공리주의적
도덕 철학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일반인이든 전문적인 도덕 철학자든 도덕 직관이 먼저다. 그리고 그 직관을 정당화할 만한 논리를 열심히 생각해 낸다. 가끔
자신의 도덕 직관과는 상당히 다른 도덕 판단을 주창하는 도덕 철학자도 있는 것 같지만 학술 토론회가 아닌 실생활에서 부닥치는 결정적 순간이 되면
그들도 자신의 직관에 따라 행동할 것 같다. 이것은 유아론자(唯我論者, solipsist)도 실생활에서는 유물론자처럼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창조론자와 칸트주의자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성경을 들이대는 평범한 기독교인에 비해 칸트주의자나 공리주의자가 좀 더 세련되어 보이는 논리를 궁리해낸다는 정도다. 내가 보기에는 셋(창조론의 도덕 철학, 칸트주의 도덕 철학, 공리주의 도덕 철학) 모두 황당하긴 마찬가지다.
창조론자도 칸트주의자도 지난 수십 억 년의
진화 역사가 만들어낸 인류 보편적 도덕 학습 기제들에 자신의 문화권에서 받은 입력 값들이 결합해서 발달(development)한
도덕 판단 회로의 작동 결과에 따라 도덕 판단을 자동적으로 내린다. 그리고 이 도덕 판단 회로는 진화론을
깊이 공부한다고 해서 별로 바뀌는 것이 없어 보인다. 이것은 착시 과학에 대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여전히 착시에 시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창조론자나 칸트주의자가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도덕적 혼란에 빠졌다고 느낄지라도 그의 도덕 철학은 직관 수준에서는 사실상 변하는 것이 없다. 단지
의식적 수준의 도덕 철학이 혼란에 빠지거나 바뀌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남들과 토론할 때에는
자신의 의식적 도덕 철학을 내세우지면 실제로 행동할 때에는 자신의 도덕 직관에 따르기 마련이다.
정리해 보자. 진화론은 창조론자와 칸트주의자의 도덕 철학에 태풍을 일으킬 수 있지만 그것은 찻잔 속의 태풍일 뿐이다. 또한 창조론자도 칸트주의자도 아니었던 사람에게는 찻잔 속의 태풍조차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다. “진화론이 도덕적 허무주의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상당한 과장이다.
이덕하
2012-04-08
첫댓글 물론 열린 마음으로 제대로 진화론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선행되어야겠지요. 그리고 지식에 의한 의식적 혼란을 과소평가하면 안 됩니다.
덕하님, 잘 읽었습니다. 아주 좋은 글입니다.
기독교를 맹신했고, 열렬하고 신실한 신자였었던 제가 리처드 도킨슨의 저서들을 읽고 정신적 방황을 겪었던 7년전이 생각나네요. 그땐 좀 괴로웠었죠. 그러나 이제는 그 전보다 더 행복하고 생명의 가치가 경이롭기까지 느껴집니다. 알고보면 진화론은 종교보다 더 큰 어떤 가치를 품고 있다고 종종 느낍니다. 물론 진화론 도서들이 이런 것을 직접적으로 어필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면을 깨닫는 사람들이 스스로 느낄 수 있다면 종교 따위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봅니다.
이 글 좀 퍼가도 될까요?^^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그리고 사생활과 관련이 없는 한 제 글은 항상 퍼가셔도 됩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위의 로제님 처럼 저도 기독교중에서 가톨릭신자였는데 리차드 도킨스저서부터 시작해서 이제는 무신론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종교생활할때보다 더 마음 편하고 좋아요. 처음엔 종교를 떠나서는 인권을 생각할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지난한 과정을 거쳐온 생명체의 존엄함을 더 느끼게 됩니다. 종교생활할때는 나름 행복(?)했지만 그것은 마약과 같은 행복이었나 봅니다.
제가 칸트주의자도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관해 깊이 있게 알지 못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덕하님의 글만 봐서는 진화심리학이 칸트주의에 타격을 입힌다는 주장에 관한 논증이 부족해 보이는군요. 칸트주의든 무슨 주의든 그것이 순전히 당위에 관한 주장이라면, 인간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가에 관한 설명도 다른 사실에 관한 설명들과 마찬가지로 당위에 관한 주장에 어떤 타격을 입힐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요.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 명제입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명제입니다. 하지만 만약 신이 없다면 신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당위 명제가 타격을 입습니다.
진화론은 “인류를 초월한 절대적 선악이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타격을 입혔습니다. “인류를 초월한 절대적 선악이 존재한다”는 어떤 면에서 보면 사실 명제입니다. 어쨌든 만약 절대적 선악이 없다면 “절대적 선악의 기준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당위 명제가 타격을 입습니다.
<과학의 가치 중립성과 진화 심리학>
http://cafe.daum.net/Psychoanalyse/NSiD/299
위의 글 중 “셋째 논점 - 과학의 연구 결과가 가치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사실 명제에서 당위 명제를 이끌어내는 것이 항상 자연주의적 오류인 것은 아닙니다.
칸트는 철학자이지 신학자가 아닙니다. 아무리 단순하게 요약한다고 해도 칸트의 도덕철학이 단순히 신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인류를 초월한 절대적 선악이 존재한다는 것이 칸트주의인지도 의문입니다. 과연 칸트가 "인류 초월"이라거나 그 비슷한 말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칸트의 윤리철학에 있어서 인류초월(?) 따위는 논외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것 같군요.
그리고 사실 요즘 어떤 입장이든 간에 과연 정말로 덕하님이 말하듯이 인류를 초월한 선악이 존재한다고 믿는 철학적 입장이 있을까요? 제가 현대 철학사조에 정통한 것은 아니라 장담할 수는 없지만, 어떤 윤리학이나 철학책을 보든 윤리학이란 기본적으로 인간사회 내에서의 문제라는 건 누구나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in his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he described the moral law as divine and described it as an essential a priori law of every free will in itself.
http://en.wikipedia.org/wiki/Kantian_ethics
Those propositions are made true by objective features of the world, independent of subjective opinion.
http://en.wikipedia.org/wiki/Moral_realism
위키백과를 읽어봐도 역시 제가 아는 범위를 벗어나진 않는군요. 읽어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단순히 신의 명령을 따르라는 게 칸트의 윤리사상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굳이 요약까지 할 필요는 없겠죠. 그의 사상은 신의 명령이니까 따르라는 게 아니라 이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그에 대해 진화심리학이 무슨 의미 있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는 걸 덕하님은 아직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잘 읽어 보십시오. 신의 명령을 따르라고 이야기하는 쪽은 창조론적 도덕 철학이지 칸트의 도덕 철학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그 중에 적어도 두 가지 절대주의 유파를 무너뜨린다. 하나는 창조론적 도덕 철학이고 다른 하나는 칸트의 도덕 철학이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문장 중에 “a priori”가 무슨 뜻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에 대한 근거가 하나도 없잖아요. 덕하님의 글을 보면 본인이 칸트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의심스러울 뿐만 아니라, 도덕직관에 따라 판단을 내린다는 상식적인 사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어요. 최소한 길든 짧든 의미 있는 논증의 형식, 예를 들면 칸트 도덕철학의 내용은 이렇고 이 도덕철학은 어째서 반박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덕하님의 경우도 정말 그런지 면밀히 생각해 보지 않은 채 그런 것 같다는 인상만을 가지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 같군요.
루카님이 기초적인 한국어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다시 증명되네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