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한국 사회에서는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정도와 자신이 마음을 여는 정도 사이에 뚜렷한 상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즉 상대방이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할수록 자신도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사람들은 보통 상대방이 마음을 여는 만큼만 자신의 마음을
연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이름과 사는 곳 정도의 정보만 주고 “날씨가 좋군요”와 같은 피상적인
말만을 건네면 그 상대방도 그 사람에게는 이름과 사는 곳 정도의 제한된 정보만을 주게 된다.
...
이럴 때 둘 중 한 사람이 먼저 물꼬를 트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에 대해 조금씩 더 공개하면 상대방도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고 더 깊은 이야기들을 하게 된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34~35쪽)
사소한 지적을 하자면 “여는 만큼만”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상대방을 좋아하게 되면 상대방이 마음을 안 열어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돈을 주면 그런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이런
상관 관계는 특정 문화권에만 있으며 다른 문화권에서는 상황이 전혀 다를 수도 있다. 즉 어떤 문화권에서는
상대방이 날씨 이야기만 해도 자신은 누구를 사랑했고, 누구랑 잤고, 누구를
증오했고, 누구를 반쯤 죽여놨고, 누구의 물건을 훔쳤는지에
대해 주절주절 떠든다. 이것을 문화 가설이라고 부르자.
둘째, 이런
상관 관계는 정보 교환과 관련된 선천적 심리 기제 때문에 생긴다. “누구와 성교를 했나”와 같은 중대한
정보는 가치가 크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제공하지 않으면 함부로 발설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심리 기제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다. 이것을 적응 가설이라고 부르자.
셋째, 인간은
똑똑하기 때문에 중대한 정보가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또는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다. 이런 인식 때문에 인간은 상대방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제공하지 않으면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을 합리성 가설(그런 상관 관계가 인간의 합리적 이성의 부산물이라는 가설)이라고 부르자.
흔히 둘째 가설 같은 부류만 진화 심리학적
가설이라고 부르는데 잘못된 것이다.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셋 모두 진화 심리학적 가설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저명한 진화 심리학자 중에는 모든 것이 적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
예컨대 인간이 만든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적응 가설로 설명하는 진화 심리학자는 없을 것이다. “과거 사냥-채집
사회에서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더 잘 했던 조상이 그렇지 못했던 조상에 비해 더 잘 번식했기 때문에 인간이 프로그래밍을 잘 하도록 진화했다”라는
식의 가설은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검증할 필요도 없다. 당시에는 컴퓨터가 없었기 때문에 그런 식의
자연 선택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외계인이나 신이 수백만 년 또는 수십만 년 전에 인간에게 컴퓨터를
보급했다고 믿지 않는다면 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는 어떤 다른 심리 기제들의 부산물이다. 그리고 부산물 가설도 적응 가설만큼이나 진화 심리학적 가설이다.
세 가설 중 어느 쪽이 옳은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선 기존 심리학 문헌을 뒤져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뒤져보지 않았다. 여기에서는 그냥 어떤 식으로 검증할 수 있는지 간단히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다.
온갖 문화권을 조사해 보면 문화 가설이
옳은지 어느 정도 검증할 수 있다. 만약 그런 상관 관계가 없는 문화권이 발견된다면 문화 가설이 힘을
얻을 것이다. 반면 조사한 모든 문화권에서 그런 상관 관계가 뚜렷하다면 적응 가설이나 합리성 가설이
힘을 얻을 것이다.
적응 가설과 합리성 가설을 가릴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어린이 또는 아기를 관찰하는 방법이 있다. 더
어릴수록 “이 정보가 가치가 있으니까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발설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아주 어린 아이들에게서도 그런 상관 관계가 발견된다면 적응 가설이 더 힘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는 아주 거칠게 살펴보았지만 본격적으로
연구를 하다 보면 가설도 더 다듬을 수 있고 참신한 검증 방법도 생각날 수 있다. 얼핏 생각해 보기에는
여기에서 제시한 적응 가설이 꽤 가망성이 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