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이 주지는 않고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는
식으로 착취가 일어나면 관계가 틀어질 때가 있다. 이것은 굳이 연구해 볼 필요도 없을 정도로 뻔하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인물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장면에는 종종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라는 대사가 등장한다. 이 말에는 여러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 해줬는데’, ‘너도 내가 한 만큼 나한테 잘 해야 하는 거 아니니?’라는
마음이다. 즉 우리는 어떤 관계에 대해 노력한 만큼 상대방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일종의 보상을 받기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호성reciprocity 개념은
대인관계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않고 오래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밥도 돌아가면서 사고 연락도 비슷한 비율로 주고받아야
건강한 관계가 이어질 수 있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91쪽)
잠깐 보고 말 관계라면 사랑을 주기보다 상대방이 주는 사랑을 최대한 많이 받으면서 가능한
한 큰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중요한 목표가 된다. 어차피 잠깐 보고 말 사람인데 뭐하러 많은 투자를
하겠는가? 그냥 즐기기만 하면 되는데 말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상대방을 통해 물질적 또는 정서적인 만족을 최대한 많이 얻어내려고 하면서
정작 자신은 관계 유지를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것만을 주려는 모습들이 나타난다. 이처럼 아직 관계가
여물지 않은 단계에는 한쪽이 다른 한쪽에 비해 더 많은 걸 받아내는 일종의 ‘착취’가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관계가 진지해질수록 일방통행만으로는 그것을 잘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한두 번이면 모르지만 시간이 갈수록 둘 중 한 사람만 이득을 보는 불공평한 상태가 지속되면 주로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지쳐버리기 때문이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109쪽)
서로 주고받는 정도에 균형이 유지되어야 그 관계가 지속되는 현상을 ‘사회적 교환social exchange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는 비단 연인관계뿐 아니라 친구관계 및 기타 다양한
인간관계에 적용되는 중요한 법칙이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110쪽)
그렇다면 자신이 상대에게 많이 베풀었는데
상대가 자신에게 베풀지 않으면 화가 날 때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화 심리학계에서는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으로 설명한다. 서로 친구가 되어
상대가 궁할 때 도와주면 양쪽 모두 이득을 얻기 때문에 인간이 친구를 사귀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구 관계의 경우 착취가 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이 되도록 착취를 당하지 않도록 진화했다는 것이다. 배은망덕한 사람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그런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많은 진화 심리학자가 받아들이는 설명이다.
만약 이런 설명이 옳다면 친구 관계에서
손해를 볼 때 느끼는 도덕적 분노나 자신이 상대를 착취했을 때 느끼는 죄책감 등은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선천적인 감정이다. 이런 선천적 감정 기제들 때문에 한 쪽에서 너무 착취를 하면 절교로 이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은 머리가 좋기 때문에 “내가
이 싸가지 없는 친구와 계속 관계를 유지하면 손해를 보겠군”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응
가설에 따르면 배은망덕에 대한 도덕적 분노는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굶었을 때 배가
고픈 이유가 “내가 계속 먹지 않으면 에너지 부족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겠군”이라는 식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한
배고픔 기제 때문인 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 명시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진화 심리학계에서는 상호적 이타성뿐 아이라
친족 선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친족의 경우에는 친구와 다르다. 가까운
친족일수록 유전자를 더 많이 공유하기 때문에 친족이 잘 번식하면 그 자체로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유전자에게 “이득”이다. 따라서 친족에 대한 이타성은 무조건적일 수가 있다. 실제로 친구가
배신하면 절교하는 경우가 많지만 자식이 부모를 배신해도 부모는 자식을 계속 사랑하고 도와주려고 한다.
영화
<공공의 적>의 악당은 부모를 죽인다. 하지만
어머니는 증거로 쓰일 수 있는 자식의 손톱을 삼켜서 그런 배은망덕한 아들을 보호하려고 한다. 친구 사이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인간관계 일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진화 심리학자들은 친족 선택에 의해 진화한 기제로 맺어진 관계인지 상호적 이타성에 의해 진화한 기제로 맺어진 관계인지를 구분하려고 한다. 물론 두 사람의 관계에 두 요인이 섞여 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구분하려고 한다.
부부가 자식을 낳은 경우 자식의 생존과
번식이 둘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자신이 어느 정도 착취를 당하더라도 이혼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더 적응적일 수 있다. 사냥-채집 사회에서는 이혼이
자식의 생존율에 꽤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애 때문에 산다”라는 말이 있다.
이혼과 “자식의 존재 여부”의 상관 관계에
대한 연구를 본 기억은 없다. 어쨌든 이런 측면을 생각해 볼 때 자식이 있는 부부보다 자식이 없는 부부가
훨씬 더 쉽게 이혼할 것 같다. 그리고 자식들이 아직 어린 경우에 비해 자식들이 모두 어른이 되어서
이혼을 해도 자식의 생존과 번식에 별로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때 부부가 훨씬 더 쉽게 이혼할 것 같다. 황혼
이혼 현상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둘이 친족도 아니고 자식이 있는 부부도
아니라고 하자. 서로 깊은 관계일 때 한쪽이 착취를 당한다고 무조건 절교하는 것보다는 착취를 견디는
것이 더 적응적일 경우도 상상할 수 있다.
만약 친구가 자신보다 지위가 훨씬 높다면
착취를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것이 적응적일 것이다. 왜냐하면 착취를 당하면서 손해를 보기는 하지만 든든한
빽이 있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부부 관계의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을
수 있다. 만약 남편이 매우 잘생기고 지위도 매우 높다면 아내는 착취를 어느 정도 감수하는 것이 적응적일
수 있다. 그런 남편 덕분에 좋은 유전자(good gene, 자식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유전자)를 얻을 수 있으며 다른 여러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일부다처제는 어떤 면에서 보면 남편이 아내들을
착취하는 관계다. 남편은 아내를 성적으로 어느 정도 독점한다. 하지만
남편은 여러 아내들에게 자신의 자원을 배분한다. 일부일처제에 비해 이런 면에서 아내가 손해를 본다. 하지만 남편에게서 좋은 유전자 등을 얻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적응적이다.
이런 측면들을 생각해 볼 때 인간은 친구나
배우자의 지위 등을 고려하여 착취를 어느 정도 감수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인간이 이런
식으로 진화했다면 서로 동등한 경우에는 참을 수 없는 정도의 착취라고 느낄 상황에서도 상대가 매우 우월한 경우에는 착취에 대한 도덕적 분노를 덜
느낄 것이다.
첫댓글 와~~ 정말 그럴듯 하네요.. 새로운 접근 잘 보지는 못하지만 틀리다는 생각은 인 드네요 한편으로 씁쓸하고 잘 읽었습니다.
대표적인 진화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