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도와주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것은 상식이다. 과학자들은 fMRI를
동원하여 남을 도와줄 때 보상중추가 활성화되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다.
즉 여자친구는 평온할 때보다 남자친구가 어려울 때, 그리고
자신이 남자친구에게 힘이 되어줄 때 더 큰 기쁨을 느꼈다. 물론 남자친구가 고통받고 있으나 손을 잡아줄
수 없는 상황(자신이 도움이 못 되는 상황)에 비해서도 보상중추가
더 활발하게 반응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크게 놓고 보면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연인이나 가족, 친구와 같이 나 자신의 생존에
중요한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다는 것은 곧 나의 안녕도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서 그들의 생존을 수월하게 해야 나의 생존 또한 지킬 수 있다. 연구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도움 행동이 자신의 생존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은 누군가를 위해 베풀 때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눈치보는 나, 착각하는 너』,
111쪽)
그렇다면 남을 도와주면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남을 돕는 것은 나를 돕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연구자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위의 설명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적어도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남을
돕는 것이 나에게도 유리하기 때문에 인간은 남을 도울 때 기분이 좋아지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 이것을
적응 가설이라고 부르자.
둘째, 인간은
똑똑하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곧 자신을 돕는 것이라는 점을 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득이 될 때
기분이 좋아진다. 인간은 남을 도울 때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나에게도 이득이 되겠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분이 좋아진다.
이 책을 읽는 이들 중에 이 구절을 읽고
“이것은 적응 가설이군”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만약 글쓴이가 적응 가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좀 더 명시적으로 자연 선택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만약 글쓴이가 적응 가설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 구절을 쓰기 전에 이타성에 대한 진화 심리학 연구를 조금이라도 살펴보는 것이 좋았을 것이다.
이 구절에서 이야기했듯이 인간 같은 사회성
동물의 경우 가까운 사람들의 생존이 나의 생존에 중요하다. 그리고 나의 생존은 나의 유전자 복제에 도움이
된다. 즉 남을 돕는 행위가 적응적일 수 있다.
하지만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 경로로 유전자 복제에 도움이 된다.
첫째, 친족을
도와주면 나의 생존과 무관하게 나의 유전자 복제에 도움이 된다. 심지어 친족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나의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하더라도 적응적일 때가 있다.
둘째, 남을
도와주면 나의 평가에 영향을 끼친다. “저 인간은 이기적이군”이라는 평가를 덜 받게 된다. 그러면 짝짓기 시장이나 우정 시장에서 인기가 높아진다. 그뿐만 아니라
좋은 평판은 온갖 경우에 이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셋째, 친구를
도와주면 친구가 고마움을 느낀다. 그러면 나중에 친구가 나를 도와줄 가능성이 커진다.
넷째, 배우자를
도와주면 배우자와 배우자의 자식에게 이득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배우자의 자식은 나의 자식이기도 하다.
다섯째,
남자의 입장에서 볼 때 예쁘고 젊은 여자를 도와주면 그 여자가 나와 성교를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여섯째,
남을 도와줌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과시할 수 있다.
“남을 도와주면 나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점보다는 위에서 나열한 것들을 다 합친 것이 훨씬 더 큰 요인으로 보인다.
그리고 친족, 친구, 배우자, 예쁜
여자, 같은 부족 사람 등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이타성이 다르게 발현되도록 인간이 “설계”되었을 것
같다. 또한 친족이라면 얼마나 가까운 친족인지에 따라, 배우자라면
자식이 있는지 여부에 따라 이타성의 정도를 조절하도록 “설계”되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