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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족 선택에 대한 열 두 가지 오해
Richard Dawkins
이덕하 옮김
2010-12-08 (초벌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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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lve Misunderstandings of Kin Selection」, 『Zeitschrift für Tierpsychologie 51』, 184-200쪽, 1979.
오해 1: “친족 선택은 ‘개체 선택’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것이 드러날 때에만 끌어들여야 하는 특별하고 복잡한 종류의 자연 선택이다”. 2
오해 2: “친족 선택은 집단 선택의 한 형태다”. 6
오해 3: “친족 선택 이론은 동물에게 엄청난 인지적 추론 능력을 요구한다”. 7
Hamilton의 친족 선택 이론은 많이 오해된다. 이 논문은 예컨대 “친족 선택은 ‘개체 선택’과는 반대되는 특수하고 복잡한 종류의 자연 선택이다”, “친족 선택은 집단 선택의 한 형태다”, “모든 종의 구성원들이 유전자들 중 다수를 공유하기 때문에 선택(selection)[1]은 보편적 이타성을 선호할 것이다”, “친족 선택은 희귀한(rare) 유전자에게만 작동한다”, “동계교배(inbreeding)가 가까운 친족들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개체는 동계교배 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2]”와 같은 12 가지 가장 흔한 오해를 나열하고 반박한다. 이런 흔한 오류들을 드러내는 것은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적인 작업이다.
친족 선택(Hamilton 1963, 1964 a, 1964 b, 1970, 1971, 1972, 1975, 1979; Maynard Smith 1964)은 유행(bandwagon)이 되었으며 유행이 시작될 때에는 그에 대한 태도가 종종 양극화한다. 유행에 올라타려고 몰리면 건강한 반작용이 유발된다. 친족 선택이 바로 그런 상태여서, 땅에 귀를 대고 있는 민감한 행태학자(ethologist)는 의심에 차서 속삭이듯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감지하며, 이 이론의 초기의 대성공들 중 하나가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할 때에는 그것이 젠체하는 짖는 소리의 점점 세게(crescendo)로 가끔 끓어오르기도 한다. 이런 양극화는 불행한 일이다. 이 사례에서 친족 선택이라는 유행에 탄 사람들과 타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범하는 일련의 주목할 만한 오해들 때문에 양극화가 심해졌다. 이런 오해들 중 많은 것은 Hamilton의 원래 수학적 정식화로부터 유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을 설명하려는 이차적 시도들로부터 유래한다. 이전에 스스로 그런 오류들 중 일부를 범했으며 그런 오류들을 모두 자주 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친족 선택에 대한 12 가지 가장 흔한 오해를 수학적이지 않은 언어로 설명하는 어려운 작업을 시도해 보고 싶다. 12라는 숫자로 관련된 모든 오류를 결코 다 다룰 수는 없다. 예컨대, 좀 더 미묘한 두 가지 다른 오류를 잘 드러낸 Grafen 1979(in press)를 보라. 12 개의 절을 어떤 순서로 읽어도 상관 없다.
내가 언급했던 회의적인 반발의 많은 부분이 순전히 이 하나의 논리적 오류 탓이다(예컨대 Grant 1978, 그리고 Dawkins 1978에 인용된 다른 사례들). 이것은 역사적 우선성(precedence)과 이론적 검약성(parsimony)을 혼동해서 생긴다: “친족 선택은 우리의 이론적 무기고에 최근에 추가되었다. 여러 목적의 경우 우리는 오랜 기간 동안 그것 없이도 상당히 잘 해왔다. 따라서 훌륭한 구식 ‘개체 선택’이 우리를 저버릴 때에만 그것에 의지해야 한다.”
훌륭한 구식 개체 선택이 항상 자식 돌보기(parental care, 부모의 돌봄)를 개체의 적합도(individual fitness)를 위한 선택의 명백한 결과로서 포함해왔다는 것에 주목하자. 친족 선택 이론이 추가한 것은 자식 돌보기가 가까운 친족들 돌보기의 특별한 사례일 뿐이라는 것이다. 만약 자연 선택의 유전자적 기초에 대해 상세히 살펴보면 ‘개체 선택’이 조금도 검약적(parsimonious)이지 않은 반면 친족 선택은 유전자의 차등적 생존 – 근본적으로 보면 이것이 바로 자연 선택이다 – 의 단순하고 불가피한 결과라는 것이 보인다(Williams 1966, Dawkins 1976, 1978). 먼 친족들을 희생하여 가까운 친족들을 돌보는 것은 가까운 친족들이 그런 돌봄을 ‘위한(for)’ 유전자 또는 유전자들을 증식할 확률이 높다는 사실로부터 예측할 수 있다: 유전자가 자신의 복제들을 돌보는 것이다. 자신과 자신의 자식은 돌보지만 마찬가지로 가까운 방계(collateral) 친족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어떤 단순한 유전자 모델에서도 잘 예측되지 않는다. 우리는 자식이 방계 친족들보다 알아보기 쉽거나 돕기 쉽다는 가정과 같은 추가적 요소들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런 추가적 요소들이 아주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기본 이론에 추가되어야 하는 것들이다.
거의 모든 동물들이 동기들(siblings, 형제자매)보다 자식들을 더 돌본다는 것이 어쨌든 사실이며 진화 이론가들이 동기 돌보기를 이해하기 전에 자식 돌보기를 이해했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사실 중 어느 쪽도 친족 선택의 일반 이론이 검약적이지 않음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만약 모든 진지한 생물학자들이 현재 그러듯이 자연 선택의 일반 이론을 받아들인다면 친족 선택의 원리들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합리적 회의는, 자식이 아닌 친족들을 돌보는 것을 선호하는 선택압이 알아볼 만한 진화적 결과들로 실제로 이어질 것 같지 않다는 믿음(완전히 말이 되는 믿음)으로 한정된다.
오해 1의 세련된 개체군 유전학자들(population geneticists, 집단 유전학자들)의 버전이 있다. “아직 개체군 유전학자들이 친족 선택 이론의 완전한 수학적 모델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설사 이 논증의 전제가 사실이라 하더라도(Charnov 1977을 보라) 다음과 같은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예컨대 동기 돌보기에 대한 수학적 이론에서 어떤 단점이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식 돌보기의 경우에도 거의 확실히 마찬가지일 것이다. 개체군 유전학자들은 자식 돌보기를 오랜 기간 동안 기꺼이 받아들여왔으며, 자식 돌보기가 다른 덜 익숙한 것의 특수한 사례일 뿐임이 지적된 다음에야 그 이론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약 친족 선택 이론에 심각한 문제가 실제로 있다면(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식 돌보기에 대한 오래된 이론에 계속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한 문제에 주목할 수 있도록 한 것은 그 이론의 새로운 부분 덕분이다. 일부 회의적인 유전학자들이 자식 돌보기에 대한 자신의 오래된 이론이 같은 오점을 품고 있음에 분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새로운 이론에 의혹을 품는 것은 아이러니다.
Charlesworth는(Charlesworth 1978, 317-318쪽) 이것을 명시적으로 부정한다.[3] 그는 일부 사람들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가 완전 동기(full sibs)[4] 사이의 경우와 같기 때문에 동기 간 이타성이 자식 돌보기만큼이나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제기하고 싶어한다고 옳게 이야기한다. Charlesworth는 계속해서 “비용/이득 비율이 적합도로 표현되며 성공적으로 자란 자식의 수가 부모의 적합도의 구성 요소라는 점이 그런 논증에서 무시된다”라고 말한다. 나는 Charlesworth를 대단히 존경하며 그가 (자식을 적합도의 기준으로 삼는) 개체군 유전학자들의 표준 방법론을 적용하고 있지만 이런 방법론의 기반이 되는 근본적 원리(자식이 부모 유전자의 운반자(vehicles)이지만 그렇다면 동기 역시 그렇다)를 잊고 있다고 말하겠다.
Charlesworth의 언급은 정당하게도 영향력 있는(Parker 1978) 중요한 한 논문의 마지막에 나오며 그는 그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점을 이야기한다. 만약 동기 이타성을 위한 한 유전자가 완전한 삼투도(full penetrance)를 발휘한다면 그것을 가지고 있는 한 배(a clutch of litter)[5]의 구성원들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구성원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유전자는, 우리가 낮은 삼투도를 가정함으로써 그것을 개념적으로 구해주지 않는다면, 개체군에서 사라질 것이다. 이것은 훌륭한 지적이지만 원리적으로 볼 때 부모/자식 관계에도 적용된다.[6] 부모와 자식에 대해 생각할 때 그런 생각이 실제로 우리에게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부모/자식 관계가 강력한 실제적 비대치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자식이 더 작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부모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실제적 비대칭성이 동기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둥지의 보조자(helper at the nest)’(Brown 1975)로 활동하는 동기는 항상 자신이 먹이는 아기 새(nestling)보다 나이가 많다. ‘자신이 자란(fledged) 둥지에 있는 아기 새들(young nestlings)을 먹이는’ 비대칭 전략이(Maynard Smith and Parker 1976) 통상적인 자식 돌보기보다 Charlesworth가 제기한 문제에 더 많이 직면하는 것은 아니다. Charlesworth가 제기한 문제는 어떤 대칭적 관계에서도 떠오른다. 부모 자식 관계와 동기 관계 사이의 차이는 후자가 대칭적일 수 있는 반면 전자는 그럴 수 없다는 점이다.
친족 선택에 대한 영향력 있는 정의 – “같은 유전자들을 공동 조상 때문에(by common descent) 가지고 있는 (자식이 아닌) 친족들의 생존과 번식을 선호하거나 선호하지 않는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개체들 때문에 발생하는 유전자들의 선택[7]”(Wilson 1975, 587쪽) – 가 아마 오해 1을 의도치 않게 부추겨 왔던 것 같다. 나는 Wilson이 좀 더 최근의 정의에서 ‘자식이 아닌’이라는 구절을 빼 버리고 다음과 같은 것으로 대체한 것을 보게 되니 반가웠다: “자식을 포함하도록 친족(kin)을 정의하긴 하지만, 친족 선택이라는 용어는 보통 적어도 형제, 자매, 부모와 같은 어떤 다른 친족들 역시 영향을 받을 때에만 사용된다”(Wilson 1978, 219쪽).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이 옳지만 나는 여전히 이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왜 오랜 기간 동안 자식 돌보기가 친족 선택된 이타성 중 우리가 이해했던 유일한 종류였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특수하게 대접해야 하는가? 우리는 해왕성, 천왕성, 명왕성의 존재를 오랜 세월 동안 알지 못했단 이유만으로 그것들을 나머지 행성들로부터 분리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 모두가 같은 종류의 사물이기 때문에 그것들 모두를 가리켜 행성들이라고 부른다.
Wilson은 1975년 정의의 끝부분에서 친족 선택이 “집단 선택의 극단적인 형태들 중 하나”라고 추가했다. 이것 역시 1978년 정의에서는 다행히 삭제되었다. 이것은 12가지 오해들 중 두 번째 오해다.
집단 선택은 유기체들로 이루어진 집단 전체의 차등적 생존 또는 절멸이다(Maynard Smith 1976). 유기체들이 때로는 가족 집단을 형성하며 지내기 때문에 차등적 집단 절멸이 가족 선택 또는 ‘친족 집단 선택’과 사실상 동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Hamilton 1975). 그러나 이것은 Hamilton의 기본 이론의 핵심 – 개체가 같은 유전자들의 복제들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특히 높은 다른 개체들을 편들어 차별하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는 유전자들이 선택된다 – 과는 상관이 없다. 이것이 일어나기 위해 개체군이 가족 집단들로 나뉠 필요는 없으며 가족 전체가 하나의 단위로서 절멸하거나 생존할 필요는 분명히 없다.
물론 동물이 인지적 의미에서 누가 자신의 친족인지를 알고 있다고 기대할 수는 없으며(오해 3을 보라), 실제로 자연 선택이 선호하는 행동은 ‘자신이 앉아 있는 둥지에서 움직이는 어떤 것과도 음식을 공유하라’와 같은 거친 경험칙(rule of thumb)과 동등한 것이 될 것이다. 만약 가족이 집단을 형성하며 지내고 있다면 이런 사실이 친족 선택을 위한 유용한 경험칙 – ‘자주 보는 어떤 개체든 돌보라’ – 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집단 선택과 상관이 없다는 점에 다시 한번 주목하자: 집단 전체의 차등적 생존과 절멸이 추론에 삽입되지 않는다. 만약 개체군의 ‘점성(viscosity)’이 조금이라도 있어서 개체가 통계적으로 친족과 마주칠 가능성이 크다면 그런 경험칙이 통할 것이다. 가족이 이산(discrete) 집단을 형성하며 지낼 필요가 없다.
일부 오해가 ‘친족 선택’이라는 표현 자체 탓이라고 한 Hamilton이(Hamilton 1975) 아마 옳은 것 같은데, 집단 선택과 구분됨을 강조하려는 훌륭한 목적을 위해 만든(Maynard Smith 1964) 표현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아이러니다. Hamilton 자신은 그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며, 포괄 적합도(inclusive fitness)라는 자신의 중심 개념이, 친족 관계이든 아니든, 유전자적으로 무작위적이지 않은 이타성(genetically non-random altruism)의 어떤 종류와도 관련이 있음을 강조하려 한다. 예를 들어, 어떤 종 내에 서식처 선택과 관련하여 유전자 변이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런 변이에 기여하는 유전자들 중 하나가 다면발현적(pleiotropic) 효과를 발휘하여 개체가 마주치는 동종 개체들과 음식을 공유하도록 만든다는 가정을 추가해 보자. 서식지 선택에 대한 다면발현적 효과 때문에 이 이타성 유전자는 사실상 자신의 복제들을 편드는 방향으로 차별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개체들은 같은 서식지에 모여서 서로 만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까운 친족일 필요가 없다(Hamilton 1975; D. S. Wilson 1977; 그러나 Charlesworth 1979를 보라).
이타성 유전자가 다른 개체에서 자신의 복제를 ‘인지’할 수 있는 어떤 방식도 비슷한 모델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이 원리는 있을 법하지는 않지만 이해에는 도움이 되는 ‘녹색 수염 효과(green beard effect)’(Dawkins 1976) – 이론적으로 볼 때, 개체가 녹색 수염을 발생시키고(develop) 동시에 녹색 수염이 있는 개체에게 이타적 경향을 보이도록 만드는 유전자를 선택은 선호할 것이다 – 에서 그 적나라한 본질로 환원된다(is reduced to its bare essentials, 그 적나라한 본질을 보여준다).
D. S. Wilson은(D. S. Wilson 1975, 1977) 친족에 기반한 이타성 이외에도 유전자적으로 무작위적이지 않은 이타성의 다른 종류를 선택이 선호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Hamilton과 같이 하지만, 자신의 흥미로운 모델들에 ‘집단 선택’이라는 제목을 붙이기를 근거 없이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망친다. 집단 선택 개념에 대한 그의 충성은 한 모델에서(Wilson 1977, 160-161쪽) 지극히 무모한 지경에 이른다: 그는, 심지어 무작위적으로 구성된 집단에서도 개체가 “딤(deme)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보다 더 큰 빈도로 자신과 같은 유형(type)을 경험한다(experiences). 이것은 서로 다른 유형들이 상호 작용하는 것보다 서로 비슷한 유형들이 더 많이 상호 작용하도록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수학적 논증을 제시한다. 놀랍고 설레게 하는 결과이며 진짜로 집단-선택된 이타성의 유일하게 작동하는 일반적 모델의 기초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오호통재라, 수학적 연막이 걷힌 후 드러나는 것은 공허하다: 개체가 다른 유형들을 경험하는 것보다 더 많이 자신과 같은 유형을 경험하는 것은 단순히 그리고 오직 그 자신이 자신과 같은 유형이라는 이유 때문이며 그는 명백히 자신을 ‘경험한다’! 이것은 이타성을 위한 기초가 아니다. Wilson의 모든 모델들이 그렇게 뻔한(trivial) 것은 아니지만, 그것들이 집단 선택의 모델이 아니라는 Maynard Smith의(Maynard Smith 1976) 말이 옳다. Hamilton의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은 이타성 유전자들의 무작위적이지 않은 배치(assortment)의 모델일 뿐이다. 친족 관계가 그런 비무작위성(non-randomness)의 유일하게 가능한 기초가 아니라 하더라도 가장 있을 법한 것이라는 Maynard Smith의 말 또한 분명히 옳다.
[1] 그냥 “선택(selection)”이라고 쓸 때에도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을 뜻할 때가 많다. --- 옮긴이
[2] Individuals should tend to inbreed, simply because that brings close relatives into the
world --- 옮긴이
[3] Charlesworth (1978, PP. 317—318), explicitly contradicts this. --- 옮긴이
[4] 완전 동기(full sibling)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같은 사람인 경우를 말하고 절반 동기(half sibling)는 어머니와 아버지 중 한 명만 같은 사람인 경우를 말한다. 완전 동기 사이의 근친도는 0.5이며 절반 동기 사이의 근친도는 0.25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근친도는 0.5다. --- 옮긴이
[5] clutch는 한 번에 품은 알들 또는 그 알에서 나온 새끼들을, litter는 한 배에서 태어난 새끼들을 뜻한다. --- 옮긴이
[6] This is a good point, but in principle it applies to the parent/offspring relationship too.
왜 “훌륭한 지적(good point)”이라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훌륭한 지적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친족 선택에 대한 Zahavi의 비판」
[7] The selection of genes due to one or more individuals favoring or disfavoring the survival and reproduction of relatives (other than offspring) who possess the same genes by common descent --- 옮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