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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진화론적 접근
version 0.1
부산물 가설 – 민감한 행위자 탐지기(agent detector) 8
밈(meme, 모방자) 이론 – 정신적
바이러스.. 9
종교의 경우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여기서는 두 가설의 몇 가지 논리를 소개하고 내 의견을 밝힐 것이다. 나는 적응 가설이 가망성이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종교는 부산물일 수밖에 없다.
종교의 밈(meme, 모방자) 이론은 한편으로는 적응 가설이다. 하지만 유전자의 적응이 아니라 밈의 적응이다. 유전자의 수준에서 볼 때 종교의 밈 이론은 부산물 가설에 가깝다.
도덕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의 경우에도 집단 선택론이 득세하고 있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가망성이 없다고 생각한다.
글을 업데이트하면서 어떤 학자가 어떤 가설을 제시하는지 좀 더 상세하게 쓸 생각이다.
사람마다 종교라는 단어를 서로 상당히 다른 의미로 쓴다. 따라서 종교 개념을 미리 대충이라도 정의하지 않고 이야기를 한다면 온갖 오해가 발생할 수 있다. 여기서는 종교를 상당히 좁은 의미로 정의할 것이다.
첫째,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불교의 경우에는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종교가 아니다. 만약 수련을 쌓아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처라고 본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다. 반면 부처에게 기도를 해서 소원을 성취하려는 사람에게는 불교가 종교다. 이 때에는 사실상 부처가 신이기 때문이다.
둘째, 신에게 인간과 비슷한 욕망이 있어야 하며 인간사에 개입해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관된 범신론(pantheism)과 이신론(deism)은 종교가 아니다. 범신론 또는 이신론을 믿었던 아인슈타인의 경우에는 종교인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믿었지만 그 신이 인간사에 개입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표현형이 적응이라면 모든 문화권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에 따르면 (위에서 정의한 좁은 의미의) 종교가 아예 없는 문화권도 있다고 한다. “모든 문화권에 종교가 있다”라는 명제는 종교를 매우 폭넓게 정의해서 온갖 도덕적, 철학적 사유와 미신적 사고 방식을 포괄했을 때에만 성립한다.
그리고 어떤 표현형이 적응이라면 거의 모든 개체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종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예컨대 한국인의 경우 절반 정도가 비종교인이다. 적응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특수하게 비정상적인 유전자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인구의 절반이 앞을 볼 수 없다면 무언가 심각한 유전적 또는 환경적 이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한국인에게 특별한 유전적 이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고 특별한 환경적 이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요컨대, 종교가 적응이라고 보기에는 비종교인이 너무 많다.
종교의 적응 가설을 지지하는 학자들 중 일부는 종교가 주는 위안이 종교의 기능 중 하나라고 본다.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스트레스가 심할수록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 스트레스는 질병뿐 아니라 온갖 문제로 이어진다. 어떤 적응 가설에 따르면 종교는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그리하여 질병 등 온갖 문제가 줄어든다. 물론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은 명백히 적응적이다.
첫째, 이 가설의 문제점은 종교가 스트레스를 줄인다고 가정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실증적으로 검증해야 할 문제다. 종교에는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종교는 강력한 신이 자신의 편에 있다고 믿게 함으로써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 또한 육체가 죽어도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세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덜어주기도 한다. 어떤 종교는 환상적인 천국이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기도 하다. 많은 종교에서 악마가 등장한다. 또한 선한 신의 경우에도 불안감의 근원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선한 신은 보통 정의의 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의 행동을 감시하고 죄를 처벌하려고 한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영원히 고통 당하게 되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종교가 주는 불안과 공포는 종파, 지역, 시대에 따라 상당히 달랐다. 종교가 엄청나게 득세했던 유럽의 중세 시대에는 오히려 종교가 위안보다는 불안을 더 많이 주지 않았을까? 여러 원시 부족의 종교를 보면 그들의 신은 인간에게 별로 베풀지는 않고 온갖 금기로 인간을 불편하게 하기만 하는 것 같다.
둘째, 고통과 스트레스가 왜 존재하는지를 우선 따져야 한다. 통증, 쓴 맛, 역겨운 냄새, 불안, 죄책감 등 고통을 주는 온갖 메커니즘이 진화한 이유는 그것이 번식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적응 가설 지지자의 생각대로 종교가 정말로 고통을 줄여준다면 여러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다.
죽은 다음에도 천국에서 호강할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다면 위기에 빠졌을 때 살아남으려고 덜 발버둥칠 것이다. 그러면 죽을 가능성이 커진다. 물론 죽으면 더 이상 번식할 수 없다. 자식이 실종되었을 때 신을 철석같이 믿고 열심히 기도하면 자식이 무사히 돌아올 것이라고 진짜로 믿는다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엄청난 불안에 빠진 부모처럼 자식을 열심히 찾아 헤매지는 않을 것이다. 자식이 망하면 자신의 번식도 망하는 것이다.
온갖 고통 메커니즘이 존재하는 이유는 상황에 걸맞는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예컨대 불에 손을 넣었을 때 통증을 느끼는 이유는 빨리 손을 빼내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자식이 사라졌을 때 불안감을 느끼는 이유는 자식을 찾아 헤매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이것이 진화론적 기능(function)이다. 적응 가설 지지자들의 생각이 옳다면 종교는 이런 메커니즘들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다.
물론 스트레스가 없으면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줄어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들이 진화한 이유는 면역력 약화 등의 비용을 치르고도 남을 적응적 이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맹수가 근처에 있을 때에는 엄청난 불안감을 느끼며 엄청나게 긴장하게 된다. 온갖 감각을 최대한 가동하고 즉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을 긴장시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면역이나 소화에 투자할 자원을 줄이게 된다. 결국 질병에 걸릴 가능성이 커지고 소화 불량이 될 가능성도 커진다. 하지만 이런 비용은 맹수에 잡혀 먹혔을 때의 비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만약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면 굳이 종교가 따로 진화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아예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들이 퇴화하면 그만이다. 만약 스트레스 유발 메커니즘의 비용이 이득보다 더 컸다면 아예 그런 메커니즘이 진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종교의 주인공인 신은 선한 신이다. 선한 신과 악마가 모두 등장하는 종교에서도 첫째 주인공은 선한 신이다. 물론 선한 신은 착하게 살라고 가르치며 죄를 지으면 벌을 주겠다고 경고한다. 그리하여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더 착하게 산다는 것이 일부 적응 가설 지지자들의 생각이다. 사람들이 모두 착하게 산다면 세상이 살기 더 좋아지며 그래서 더 잘 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 그냥 사람들이 착하게 살도록 진화하면 될 것이지 왜 종교라는 우회로가 필요한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위의 스트레스의 문제와 비슷하다. 스트레스가 문제라면 스트레스 메커니즘이 퇴화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왜 스트레스 메커니즘과 종교가 둘 다 있어야 하는가? 더 착하게 사는 것이 적응적이라면 그냥 더 착하게 살도록 진화하면 될 것이다. 왜 쓰잘데 없이 매우 복잡하게 진화했단 말인가?
둘째, 종교가 사람들은 더 착하게 만든다고 단정할 수 없다. 종교 공동체가 그렇지 않은 공동체에 비해 더 협동을 잘 한다는 보고는 많이 있다. 하지만 그 반대의 사례들도 만만치 않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에는 더 종교적인 지역의 범죄율이 더 높다.
셋째, 이런 적응 가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보통 집단 선택론에 의존한다. 나는 집단 선택론이 거의 가망성이 없다고 본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집단 선택론(version 0.2)」을 참조하라.
종교는 보통 아주 어렸을 때 받아들이게 된다. 이슬람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이가 이슬람교 신자가 되며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거의 모든 어린이가 기독교 신자가 된다. 이것은 아랍어 문화권에서는 아랍어를 배우고 영어 문화권에서는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리처드 도킨스에 따르면 어린이는 어른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는다. 그에 따르면 그 이유는 그것이 적응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종교나 미신 같은 한심한 생각들도 믿게 된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좀 더 깊이 파고들 필요가 있다.
정말 어린이는 어른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을까? 그리고 무조건 믿는 것이 의심해 보는 것보다 항상 더 적응적일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어린이와 조금만 지내보면 어린이가 항상 모든 것을 믿지는 않는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 무조건 믿는 것이 항상 적응적이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첫째, 무조건 믿으면 이용당할 수 있다. 인간 세상은 온갖 이해 관계의 충돌로 가득 차 있으며 어떤 경우에는 속임수를 전략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것은 어린이를 둘러싼 사건들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가장 조화로운 관계인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상호 작용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심지어 태아와 어머니 사이에서도 치열한 투쟁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일란성 쌍둥이라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유전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경우에도 믿음이 잘 조율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의심이 별로 적응적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어린이가 언어를 배울 때에는 거의 의심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엄마가 “이것은 책상이야”라고 말할 때 어린이가 “과연 이것은 책상인가? 엄마가 뻥 치는 것이 아닐까?”라는 식으로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반면 먹을 것이나 장난감을 둘러싼 문제에서는 어린이도 어른의 말을 상당히 의심한다.
언어 습득의 경우에는 특별히 이해 관계의 충돌과 관련이 없다. 엄마나
책상을 의자라고 가르쳐서 별로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먹을 것의 경우에는 중대한 이해 관계의
충돌이 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다른 조건이 같다면 형제자매끼리 똑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자신의
번식에 유리하다. 반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언니, 오빠, 동생보다 조금 더 먹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다(자세한 것은 트리버스의 「Parent-offspring conflict(1974)」를 참조하라).
부모의 위험 경고 같은 경우에는 거의 무조건 믿는 것이 적응적일 것이다. 심지어 가끔 부모가 자신의 이해 관계를 위해 위험 경고를 남용하는 경우에도 확실하지 않으면 일단 믿는 것이 유리하다. 왜냐하면 위험 경고를 무시했다가는 인생이 끝장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무릅쓰느니 차라리 조금 손해를 보는 것이 낫다.
종교의 일반적인 교리는 이해 관계의 충돌과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인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믿음을 가르친다고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무언가를 뜯어낼 수 있어 보이지 않는다. 어린이가 종교 교리를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하다.
둘째, 무조건 믿으면 바보 같아 보인다. 지능이 낮다는 것이 드러나면 여러 가지 손해를 본다. 부모는 지능이 낮아서 번식 가망성이 작은 자식에게 덜 투자할 것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떨어질 것이며 서열도 낮아질 것이다.
종교는 상당히 바보 같은 생각이기 때문에 종교를 무조건 믿으면 바보 같아 보이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것은 어른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아주 어린 어린이도 “너 바보냐? 그것도 모르고”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리고 바보라고 놀리면 어린이들도 매우 싫어한다.
거의 절대 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리가 없다. 어린이가 만약 이런 문제를 잘 다루도록 설계되었다면 그런 문화권에서는 종교를 쉽게 믿을 것이다. 반면 한 동네에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팽팽히 맞서고 있는 지역에서는 종교를 믿는 것이 바보 같아 보일 수도 있다. 특히 만약 비종교인의 지위가 대체로 높고 지능이 높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실제로 한 종교가 (거의) 완전히 지배하는 사회에서 어린이는 쉽게 그 종교를 받아들인다. 나는 어린이가 종교와 무신론이 경합하는 곳에서 자랄 때 어떻게 되는지를 연구한 것을 접하지 못했다. 상당히 흥미로운 연구가 될 것 같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적응적인 것 같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과 가치관이나 세계관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이런 현상도 설명이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겠다).
왕따를 당하면 친구를 사귀기도 힘들고 결혼을 하기도 힘들다. 그러면 번식에 차질이 생긴다. 따라서 인간은 왕따를 당하지 않는 방향으로 믿음을 형성하도록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올바른 믿음을 위해 왕따를 당하는 것이 진리의 기준으로는 훌륭할지 모르지만 번식의 기준으로 보면 망한 것이다. 차라리 사고를 어느 정도 왜곡해서 남들이 믿는 바를 그대로 따라 믿는 것이 번식의 관점에서는 유리하다.
인간이 이런 문제를 잘 다루도록 정교하게 설계되었다면 믿음을 형성할 때 “어느 것이 진리에 가까운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어느 것이 다수파의 믿음인가?”도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종교가 한 문화권을 지배하게 되면 단지 지배적인 지위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믿게 될 것이다. 종교 자체에 관성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여러 믿음이 충돌하는 문화권에서 산다면 “어느 것이 지위가 높은 자의 믿음인가?”라는 요인도 고려하도록 설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지위가 높은 자가 믿는 것은 따라 믿는 것이 지위가 낮은 자가 믿는 것을 따라 믿는 것보다 더 적응적일 것이 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의 마음을 읽도록 진화했다. 텔레파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표정, 행동 등을 보고 상대의 마음 즉 욕망, 믿음 등을 추론하는 것에 전문화된 메커니즘 즉 마음 이론 모듈(Theory of Mind Module, ToMM)이 진화했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자세한 것은 배런코언의 『마음맹』을 참조하라.
신은 어떤 측면에서는 인간과 매우 다르다. 많은 신이 육체가 없다. 또한 인간이 할 수 없는 온갖 능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측면에서 신은 인간과 매우 비슷하다. 특히 욕망 체계가 그렇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처럼 질투를 하며 화를 낸다. 부도덕한 행위를 보았을 때 도덕적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인간처럼 도덕적 분노를 느끼면 처벌을 하려는 충동을 느낀다. 또한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사랑한다. 자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보답을 하기도 한다.
정교하게 설계된 ToMM이 오작동하여 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을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거짓 양성 오류(false positive error, 오탐 오류)라고 하며 실제로 있는 것을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거짓 음성 오류(false negative error, 미탐 오류)라고 한다.
위험과 관련된 경우에는 보통 거짓 양성 오류보다는 거짓 음성 오류의 대가가 더 크다. 있지도 않은 맹수가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약간의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지만 맹수가 실제로 있는데 없다고 착각하는 경우에는 생명이 날아갈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경우 인간이 거짓 양성 오류를 더 많이 범하도록 설계되었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인간의 얼굴이나 몸과 조금이라도 닮은 형상을 보면 즉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두울 때에는 더욱 그렇다. 이것은 진화론적으로 볼 때 그럴 듯하다. 왜냐하면 잘 보이지 않는 밤에는 기습 당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뱀 형상이나 고양이과 동물 형상을 보았을 때 과도해 볼일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이런 원리는 시각 현상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어떤 현상이 자연적 현상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음모 때문인지 헷갈리는 경우에는 우선 어떤 사람 또는 맹수의 행동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이 더 적응적일 것이다. 존재하는 음모를 알아채지 못했을 때의 대가가 있지도 않은 음모에 대해 신경 쓰는 대가보다 크기 때문이다. 이런 민감성이 있지도 않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도킨스는 종교를 바이러스라고 부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종교라는 바이러스의 퇴치에 앞장 서고 있다.
도킨스가 바이러스에 비유한 이유는 생물 바이러스나 컴퓨터 바이러스가 숙주에 기생하여 자신을 복제하는 것이 종교와 비슷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물 바이러스와 컴퓨터 바이러스는 그러면서 보통 숙주에는 해를 끼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약을 먹거나 백신 프로그램을 설치한다. 바이러스라는 단어에는 해로운 기생체라는 함의가 뒤따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종교를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고 해서 종교인이 기분 나빠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도킨스의 어법에 따른다면 상대성 이론이나 진화 심리학도 정신적 바이러스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뇌에 기생하면서 자기 복제를 하기 때문이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지능이 월등이 높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제대로 복제되는 반면 종교의 경우에는 천재들 사이에서는 잘 복제되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
도킨스의 아이디어는 종교의 한 가지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기독교의 경우 신이 “나 야훼를 믿으라”라고 가르치지 “저기 있는 바알 신을 믿으라”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남의 종교를 믿으라고 가르치는 종교는 사장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자신보다는 남을 돌보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도태될 수밖에 없는 것과 비슷하다. 또한 기독교의 신은 “나를 믿든 말든 나는 상관 하지 않겠다”라고 가르치지 않고 “나를 믿지 않으면 가만 두지 않겠다”라고 가르친다. 이것은 생존과 번식에 힘쓰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가 번식에 개의치 않고 태평하게 살아가도록 영향을 끼치는 유전자에 비해 더 잘 복제되는 것과 비슷하다.
첫댓글 도킨스가 오히려 바이러스같은데요 종교와 과학은 서로 영역이 다르지요
자주 보는 주장이군요. 종교와 과학은 영역이 다르다니... 혹시 의미를 아시고 사용하시는 건지.. '영역'은 말이 좋아서 그런거지 굳이 해석하자면 '역할' 정도가 됩니다. 사회적인 역할에 있어서는 그 둘이 다르게 보일지는 몰라도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뜻을 같이 합니다. 아니 같이해야하지요. 하지만 종교를 보시면 증명이나 증거제시는 회피하고 있지 않습니까? 날조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러한 '진리 추구'라는 점에서 보면 서로 완전히 상반된 두 주장은 충돌 할 수 밖에 없지요.
저 개인적인 체험은 제가 가톨릭 신자였을때는 항상 불안했습니다. 뭔가에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도 저를 불안하게 했고 한번이라도 주일미사를 안보면 뭔가 나쁜일이 일어날것 같았구요. 무신론자가 된 지금은 전과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더 타인에게 관대하고 행복합니다. 물론 저는 종교가진 사람은 구속된 행복도 인정하기에 적극적으로 무신론은 권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종교인을 무신론자로 만들기도 어렵구요.
궁극적으로 신이 존재여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확실한 점은 지금 종교인들이 말하는, 당신들만이 알고 있다는, 당신들에게만 얘기한다는 그 신은 아니다.
제가 가장 지지하는 가설은 오류 이론입니다.
종교의 역사를 잘 살펴보면, 현대의 체계화된 종교가 등장한 것은 축의 시대 이후로, 그 전까지 종교는 문화와 다름없는 규범을 가지고 있고, 주로 제사의식을 행했습니다.
고대 종교에서 신은 신이랑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도덕을 강조하지도 않고, 단지 희생제의를 통한 '재생'에만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걸 고려하면.
그럴 때는 망상과 통제욕구과 맞아떨어졌다고 보는 게 합당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