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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 진화론적 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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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응 가설 – 노인, 병자, 부상자 자살 가설.. 11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의 혼합 – 건강한 젊은 사람의 자살.. 15
진화 생물학자들이나 진화 심리학자들이 자살 문제를 지나가면서 언급하는 경우는 꽤 있다. 하지만 자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나 논문은 극히 드문 것 같다. 내가 찾아낸 것들은 아래에 나열한 것이 전부다.
Jon Tolaas, 『Evolution And Suicide(2005)』
Denys de Catanzaro, 『Suicide and self-damaging behavior: A sociobiological perspective(1981)』
Denys de Catanzaro, 「Reproductive Status, Family Interactions, and Suicidal Ideation: Surveys of the General Public and High-Risk Groups」, Ethology and Sociobiology, 16 1995: 393
Michael Benjamin Miller, 「Suicide and Evolution(2008)」, http://etd.lib.fsu.edu/theses/available/etd-04092008-150520/unrestricted/MillerMSpring2008.pdf
이 중에 밀러(Michael Benjamin Miller)의 논문을 읽어 보았는데 별로 권하고 싶은 글은 아니다. 나중에 톨라스(Jon Tolaas)와 드 카나차로(Denys de Canatzaro)의 책을 읽어보고 이 글을 수정할 생각이다.
http://en.wikipedia.org/wiki/Suicide_and_evolution 에 따르면 드 카나차로가 <적응 가설 – 친족을 위하여>와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의 혼합 – 건강한 젊은 사람의 자살>에 있는 내용과 비슷한 주장을 담은 글을 이미 발표한 것 같다.
어쨌든 아직 자살은 미지의 영역이며 밝혀진 것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여기에서는 자살 문제에 대해 진화론자들이 어떻게 대답해왔고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를 소개할 것이며 실증적 검증을 위한 약간의 힌트를 제시할 것이다.
개념은 정의하기 나름이며 자살 개념도 예외가 아니다. 실제로 학자들마다 자살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고 있다. 나도 나름대로 자살 개념을 정의할 것이다.
“동물에게도 도덕성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도덕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도 자살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자살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죽으려는 의식적 의도가 있어야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식으로 자살을 정의한다면 꿀벌은 자살을 할 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꿀벌이 의식적으로 자살에 대해 생각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동물도 자살을 한다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는 방법도 있다. 자신이 조종하는 비행기를 자폭하여 적의 함대를 공격하는 가미가제, 폭탄을 안고 미군에게 달려드는 아랍인, 자신을 ‘폭발’시켜서 침입자를 공격하는 흰개미, 침입자에게 침을 꽂아 넣으면서 복부가 파열하여 죽는 꿀벌의 경우 같은 ‘자살 공격’을 자살에 포함시키면 된다.
나는 한편으로 자살 개념을 넓혀서 ‘하등 동물’의 자살 가능성도 열어 놓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살 개념을 좁힐 것이다. 그리하여 “꿀벌도 자살을 한다”는 식의 결론에 쉽게 이를 수는 없도록 할 것이다.
우선 어떤 식으로 자살 개념을 좁힐 것인지를 살펴 보겠다. 자살로 인정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죽이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자기 희생은 자살에 포함되지 않는다. 자살 폭탄 공격이나 가미가제의 자폭의 직접적인 목적은 적을 공격하는 것이지 자살이 아니다. 참호 속의 전우를 구하기 위해서 수류탄 위에 몸을 던지는 행위의 직접적 목적은 전우를 구하는 것이지 자살이 아니다. 그러다가 죽지 않고 부상만 당한 경우에도 목적은 달성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꿀벌이 침을 쏘아 침입자를 공격할 때의 직접적인 목적은 침입자 공격이지 자살이 아니다.
이제 어떤 식으로 자살 개념을 넓힐 것인지를 살펴 보겠다. 자살로 인정 받기 위해서 의식적 의도가 있을 필요는 없다. 심지어 대뇌 속의 정보 처리 과정이 있을 필요조차 없다. 의도 개념을 매우 폭넓게 정의하면 “돌멩이가 다가올 때 눈을 감는 것의 의도는 눈을 보호하는 것이다”, “설사의 의도는 독성 물질을 몸에서 배출하는 것이다”라는 식의 표현도 가능하다. 이런 식으로 자살을 정의하면 심리적 과정(신경계의 정보 처리 과정)이 없고 생리적 과정에 의해서만 죽는 경우도 자살에 포함될 수 있다. 그러면 심지어 단세포 생물의 자살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체의 죽음만 자살로 인정된다. Apoptosis(programmed cell death)는 손가락, 뇌 등이 제대로 발달할 수 있도록 일부 세포들이 스스로 죽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개체의 죽음이 아니라 개체를 이루는 일부 세포들의 죽음이기 때문에 자살이 아니다. 물론 단세포 생물의 경우에는 세포의 죽음이 곧 개체의 죽음이기 때문에 상황이 다르다.
이런 식으로 자살을 정의하는 이유는 나의 주된 관심사가 자살을 진화론적으로 살펴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동물도 자살을 하는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어쩌면 그런 연구가 인간의 자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위의 정의로 내가 어떤 현상을 자살로 생각하고 어떤 현상을 자살에서 제외하는지가 어느 정도 분명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전히 애매함은 있다. 특히 의도 개념을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인간의 경우에도 자살인지 아닌지 가리기 힘들 때가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겨서 총알이 발사되어서 죽었다고 하자. 얼핏 보면 자살이 분명하다. 하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다. 자살 의도는 없었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고 공포탄을 넣고 자살 흉내를 내려고 했는데 실수로 공포탄 대신 실탄을 넣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 자살임이 (거의) 확실한 사례들이 수도 없이 많다.
반면 동물의 경우에는 자살인지 여부가 (거의) 항상 불명확하다. 밀러의 「Suicide and Evolution」에 나오는 몇 가지 사례들을 살펴보자.
어떤 돌고래가 인간이 만든 탱크의 벽에 계속 부딪혀서 결국 죽었다고 한다. 이것은 자살인가? 얼핏 보면 죽으려고 벽에 계속 부딪힌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다. 돌고래가 무슨 생각으로 벽에 부딪혔는지 알아내기는 매우 힘들다. 내가 보기에는 탈출하려고 그런 것 같다. 돌고래가 아무리 부딪혀도 탱크에는 전혀 구멍이 뚫리지 않을 정도로 탱크가 튼튼하다는 것을 인간은 안다. 그리고 돌고래가 탱크 속에 갇혀 있어도 인간이 꾸준히 먹이를 준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돌고래가 그것을 알 리가 없다. 돌고래가 진화한 환경에서는 무리로부터 떨어져서 좁은 곳에 갇히면 끝장이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돌고래가 끝없이 무모해 보이는 탈출을 시도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실험실의 문어가 자신의 몸을 뜯어먹어서 결국 죽는 사례가 관찰되었다. 이것은 자살인가? 문어는 먹을 것이 없을 때 자신의 몸을 먹으면서 버틴다고 한다. 어쩌면 실험실의 문어는 먹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자신의 몸을 계속 먹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사로잡힌 야생 동물이 계속 먹지 않아서 굶어 죽는 경우가 여럿 관찰되었다. 이것도 자살이라고 단정하기 힘들다. 사로잡힌 야생 동물은 교미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동물들은 대체 위험을 감지했을 때 먹거나 교미하는 것을 중단한다. 기껏 열심히 먹어도 포식자에게 잡아 먹히면 끝장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로잡힌 야생 동물의 경우 계속 그런 위기 상황이라고 판단하여 먹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야생에서 사는 야생 동물 중 아프거나 부상 당했을 때 먹지 않고 굶어 죽는 사례들이 관찰되었다. 내 생각에는 이 사례들이 자살에 가장 가까워 보인다. 앞에 먹을 것이 있음에도 먹지 않았다면 다른 식으로 설명하기 힘든 것 같다.
동물의 자살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자살인지 여부를 어떻게 가릴 것인가?”라는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얼핏 생각해 보면 자살만큼 진화 생물학과 모순되어 보이는 것도 없다. 자연 선택은 번식 경쟁이며 번식을 하려면 생존을 해야만 하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말도 안 되어 보인다. “그렇다면 자살은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는 진화 심리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흔히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노화, 생식 포기, 자식 죽이기, 남의 자식 기르기 등도 진화론과 모순되어 보이지만 상당히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진화론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공부해 보면 이런 현상들을 진화론과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길이 보인다.
자식을 죽이는 경우를 살펴보자. 자식을 기껏 낳아 놓고 죽이거나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적응적 측면에서 바보 같은 짓으로 보인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자식에 심한 결함이 있어서 아무리 정성 들여 키워도 번식에 성공할 가망이 거의 없다면 하루 빨리 죽이는 것이 번식 경쟁에는 유리하다. 왜냐하면 그 자식에 들일 노력이 헛수고일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원이 너무 부족하여 어차피 자식을 제대로 키울 가망성이 없다면 자식을 죽이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적응적일 때가 있다.
실제로 여러 종의 동물이 자식에게 결함이 있거나 자원이 매우 부족할 때에는 자식을 죽이거나 죽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 관찰되었다. 인간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것 같다. 살려고 하는 태아와 죽이려고 하는 어머니 사이에 투쟁이 일어난다는 것을 암시하는 데이터가 있다.
자살의 문제에서 진화론자에게는 적어도 두 가지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첫째, 모든 표현형이 적응(adaptation)은 아니다. 어떤 다른 표현형의 부산물(by-product)일 수도 있다. 둘째, 포괄 적응도(inclusive fitness) 또는 친족 선택이 알려진 이후로 일개미의 생식 포기 등을 설명할 길이 생겼다. 자살도 비슷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삶 욕동과 죽음 욕동(Todestrieb, death drive, death instinct, 죽음 충동, 죽음 본능)이 있다고 보았다. 나는 이 개념들이 동양 철학의 음양 개념만큼이나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다.
프로이트는 온갖 현상들을 죽음 욕동의 발현으로 ‘설명’한다. 공격성도, 노화도, 자살도, 자기 학대도, 죄책감도, 매저키즘(masochism)도 죽음 욕동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죽음 또는 파괴와 관련되어 있는 것들을 그냥 그럴 듯하게 연결시킨 다음에 설명이라고 우겼을 뿐이다.
프로이트의 설명은 말도 안 된다. 공격성의 경우 파괴되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남이다. 사자가 얼룩말을 잡아 먹기 위해 공격하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지 죽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리고 현대 진화 생물학자들은 노화를 프로이트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설명한다.
레밍은 떼거리로 절벽에서 뛰어내려서 집단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0세기 초반의 일부 생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다른 레밍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더 일반적으로는 노화 자체를 일종의 이타적 자살로 설명하려는 생물학자들도 있었다. 자손들이 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 늙어 죽는다는 것이다. 만약 아무도 늙지 않는다면 결국 살 공간이 부족해져서 모두에게 재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배신자 효과라는 치명적인 문제와 부딪친다. 남을 위해 집단 자살에 동참하는 레밍과 혼자 살겠다고 버티는 레밍이 있다고 치자. 누가 번식 경쟁에서 이길 것인가? 당연히 살겠다고 버티는 쪽이 번식 경쟁에서 유리하다. 그렇다면 결국 자살하지 않는 쪽으로 진화가 일어날 것이다. 노화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들이 다 늙어서 죽을 때 혼자서 늙지 않는 개체가 있다고 하자. 누가 번식 경쟁에서 승리할 것인가? 당연히 늙지 않는 개체가 자손을 더 많이 남길 것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형이 선택(자연 선택)될 것이다.
요즈음에는 집단 선택을 옹호하는 학자들도 레밍의 떼죽음과 노화를 집단 선택으로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레밍의 경우에는 개체 밀도가 높아질 때 다른 곳으로 이사 가기 위해 집단 이동하다가 사고로 죽는 것 같다. 노화의 경우에도 매우 다른 식의 가설들이 인기가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Evolution_of_aging 에서 메더워(Peter Medawar)와 윌리엄스(George Williams)가 제기한 가설들에 대한 짧은 설명을 볼 수 있다. 『인간은 왜 늙는가(스티븐 어스태드)』에서는 좀 더 길고 쉬운 설명을 볼 수 있다.
집단 선택론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으로는 윌리엄스의 『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과 훨씬 더 쉬운 책인 도킨스(Richard Dawkins)의 『이기적 유전자』를 참고하라.
진화 생물학자는 어떤 표현형을 보았을 때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그것은 적응인가? 아니면 부산물인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자살은 적응인가?”라는 질문보다는 “자살을 위한 어떤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했는가?”라는 질문이 좀 더 명확하다. 그런 메커니즘을 자살 메커니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이 글에서는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을 소개하겠다. 적응 가설과 부산물 가설이 어느 정도 서로 대립 관계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완전히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수 많은 종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종에서는 자살을 위한 적응 즉 자살 메커니즘이 진화했고 어떤 종에서는 그런 메커니즘이 진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단 하나의 종에서도 자살 메커니즘이 전혀 진화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살 메커니즘이 진화한 종의 경우에도 자살은 여러 가지 원인 때문일 수 있다. 자살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한 결과일 수도 있고, 자살 메커니즘이 오작동한 결과일 수도 있고, 어떤 다른 메커니즘이 오작동한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개체의 건강이 어느 정도 이상 악화되면 더 이상 번식할 가망성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 동물이 친족과 같이 산다면 자신이 계속 생존하는 것이 친족에게 폐만 끼치는 일이 될 수 있다. 일개미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어차피 번식에 참여하지 않는다. 어쨌든 부실한 일개미는 군체(colony)에 도움은 못 주고 식량만 축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죽는 것이 자신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도 포괄 적응도를 최대화하는 길일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자연 선택의 결과 자신의 번식 가망성(일개미의 경우에는 군체에 도움이 될 가망성)과 친족에게 끼치는 폐의 정도를 타진하여 포괄 적응도에 손실이 된다고 판단하면 자살을 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진화했을지도 모른다. 적응으로서의 자살 메커니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 가설로부터 여러 가지 검증 가능한 예측이 나온다.
첫째, 어떤 종에서 자살 메커니즘이 진화했다면 그 종의 동물은 대체로 자신의 번식 가망성이 전혀 또는 거의 없을 때 자살할 것이다. 따라서 번식 가망성이 작을수록 자살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인간의 경우 실제로 심하게 아프거나 매우 늙은 경우에 즉 번식 가망성이 거의 없을 때 자살률이 높다.
둘째, 친족끼리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종의 동물의 경우에 자살 메커니즘이 진화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혼자 사는 동물의 경우 번식 가망성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끝까지 생존하여 미세한 가망성을 노려보는 것이 더 유리하다. 왜냐하면 친족에게 폐를 전혀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고려해 보아야 할 동물은 역시 친족을 위한 희생으로 널리 알려진 벌목(Hymenoptera, 말벌, 벌, 개미 등)이다.
셋째, 자신을 돕는 친족이 얼마나 가깝느냐에 따라 자살 가능성이 다를 것이다. 가까운 친족이 돌볼수록 자살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가 높을수록 친족에게 의존하는 행위가 자신의 포괄 적응도에 더 큰 손실을 끼치기 때문이다. 다른 조건이 같다면 매우 가까운 친구가 자신을 돌볼 때보다 매우 가까운 친족이 자신을 돌볼 때 자살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와는 유전자를 많이 공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상식과 모순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사람들은 매우 가까운 친족이 바로 옆에서 돌봐 주면 힘을 주고 위안이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런 믿음에 따르면 자살할 가능성이 작을 것이다. 반면 적응 가설은 자신을 돌보는 친족과의 근친도가 높을수록 자살할 확률이 높다고 예측한다.
만약 태아가 건강하다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어머니의 유전자에게도 태아의 유전자에게도 유리하다. 왜냐하면 건강한 태아가 도중에 죽어버리면 그 동안 투자된 자원을 낭비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만약 태아가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면 어머니의 유전자와 태아의 유전자 사이에 이해 관계의 충돌이 일어난다. 어머니의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태아가 죽는 것이 이득인 반면, 태아의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태아가 사는 것이 이득이다. 이것은 태아와 어머니의 근친도가 0.5이기 때문에 생기는 이해 관계의 충돌이다. 둘의 이해 관계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만약 태아가 매우 허약하다면 태아가 죽는 것이 어머니의 유전자와 태아의 유전자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것 역시 둘 사이의 근친도가 0.5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이해 관계의 일치가 있다. 가망성 없는 태아가 계속 살아 있는 것은 어머니의 유전자뿐 아니라 태아의 유전자에게도 해를 끼친다. 부모와 자식 사이의 이해 관계의 충돌에 대한 자세한 이론적 고찰은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의 「Parent-offspring conflict(1974)」를 참조하라.
태아가 아주 건강한 경우에는 태아와 어머니 모두 태아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태아가 그리 건강하지 못한 경우에는 둘 사이에 투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태아는 살려고 발버둥칠 것이고, 어머니는 죽이려고 기를 쓸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태아가 매우 허약한 경우에는 태아와 어머니가 태아를 죽이기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자식 살해이며 태아의 입장에서는 자살이다. 자연 유산(이 글에서는 수정된 이후에 수정란 또는 태아가 ‘자연적으로’ 죽는 것을 모두 포괄한다)이 허약한 태아를 죽이는 메커니즘이라고 생각하는 진화론자들이 많이 있다. 문제는 이 메커니즘의 주체가 누구인가이다. 어머니 혼자 주체일 수도 있고, 태아 혼자 주체일 수도 있고, 어머니와 태아의 합작품일 수도 있다. 만약 자연 유산에 태아가 주체로서 개입되어 있다면 우리는 태아의 자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유산이 어머니에 의한 타살인지 태아의 자살인지 여부를 가리는 것이 쉽지는 않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느 쪽인지를 가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특히 태아의 건강 이상에 대한 정보를 태아는 ‘알’ 수 있는 반면 어머니는 ‘모를’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이 때에는 어머니는 정보의 부족 때문에 태아를 죽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태아는 자신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살을 택할 수 있는 것이다.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살려고 발버둥쳤음에도 죽었는지 여부를 가리는 것 역시 쉽지는 않다.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자신을 죽이는 생리적 메커니즘이 한 개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온갖 건강 이상의 경우에 모두 한 가지 방식으로 죽는 것이 관찰될 것이다.
연구가 진전되면 결국 태아의 자기 건강 평가 메커니즘과 어머니의 태아 건강 평가 메커니즘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태아의 심각한 건강 이상을 태아의 자기 건강 평가 메커니즘은 알아 낼 수 있지만 어머니의 태아 건강 평가 메커니즘은 알아내지 못하는 경우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태아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 ‘청부 살인’을 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태아 건강 평가 메커니즘이 알아 낼 수 없는 건강 이상에 대해 자발적으로 어머니에게 알려줌으로써 어머니가 태아를 죽이도록 하는 식으로 말이다.
어머니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 달게 받아들이는 방식일 수도 있다. 갈등이 발생하는 정도의 건강 상태일 때에는 어머니가 죽이려고 할 때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어느 정도 이상 건강이 나쁠 때에는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일부일처제에 가까운 종의 경우 태아와 미래의 태아 사이(현재 태아의 동생)의 근친도는 0.5에 가깝다. 반면 성적으로 매우 자유분방한 종의 경우 태아와 미래의 태아 사이의 근친도는 0.25에 가깝다. 따라서 일부일처제에 가까운 종의 태아의 자살률은 자유분방한 종의 태아의 자살률보다 높을 것이다.
심하게 늙었거나 병에 걸렸거나 부상 당해서 다시 건강해질 가망이 없어 보이는 경우가 있다. 친족과 같이 사는 동물의 경우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 보통 친족들이 돌본다. 그들은 친족에게 부담이 된다. 이런 경우 자살을 한다면 친족의 번식에 도움이 될 것이며 결국은 자신 속에 있는 이기적 유전자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노인’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이것은 인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친족들이 함께 사는 여러 동물들에 해당된다.
노인과 병자의 이런 이타적 자살은 일벌의 자살 공격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 없다. 두 경우 모두 자신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친족의 번식에 도움을 준다. 그런 도움이 적을 물리치는 것인지 아니면 식량을 축내지 않는 것인지 여부는 어떤 면에서는 본질적이지 않다.
노인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이런 류의 자살 메커니즘이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간들은 가망이 없어 보이는 상태에서도 삶에 지독하게 애착을 보이는 것 같다. 따라서 성급하게 인간에게 친족을 위한 자살 메커니즘이 있다고 속단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자살 메커니즘에 뇌 회로가 포함되어 있다면 뇌 회로를 직접 연구함으로써 자살 메커니즘의 존재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개미의 자살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가장 가망성이 있어 보인다. 개미는 친족에게 극단적인 이타성을 보이는 동물이기 때문에 자살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동물 중 거의 1순위에 속한다. 또한 개미의 뇌는 아주 작기 때문에 뇌 회로를 통째로 분석하는 것에 성공할 가망성이 크다. 개미의
생리학과 병리학의 발달로 어떤 병에 걸렸을 때 사망에 이르는 기간을 상당히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만약 어떤 생리적 자살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면 통상의 병세 악화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병세가 악화될 가능성이 있다. 비교 연구를 적용할 수도 있다. 매우 가까운 근친 종의 경우에 생리적으로 비슷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만약 같은 병에 걸렸을 때 친족과 같이 사는 하나의 종에서는 매우 빠르게 병이 악화되는 반면 단서성 종에서는 상대적으로 느리게 병이 악화된다면 자살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이미 걸린 병이나 부상과는 전혀 다른 생리적 이유 때문에 죽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 생리학과 병리학의 발달로 어떤 병이나 부상에서 생길 수 있는 합병증의 종류에 대해 상세히 알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만약 자살 메커니즘이 있다면 그런 합병증과는 전혀 상관 없는 종류의 생리적 과정으로 죽는 경우가 있을 지도 모른다.
위의 <적응 가설 – 태아 자살 가설>에서 썼듯이 자살을 위한 어떤 특정한 생리적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오랜 자연 선택을 거쳤다면 그런 자살 메커니즘이 매우 정교하게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설계의 논거(argument from design)가 증거가 될 수 있다. 즉 우연이나 다른 메커니즘의 부산물로 보기에는 자살이라는 목적을 위해 너무나도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면 적응 가설이 입증되는 것이다.
자살은 인간의 지능이 높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비슷한 부산물에는 피임이 있다.
먼저 피임을 살펴보자. 동물에게는 성충동 메커니즘과 자식-사랑 메커니즘이 있으며 이것은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된다. 또한 동물에게는 고통-회피 메커니즘이 있다. 이것 역시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된다. 자식을 키우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다. 하지만 동물은 그래도 자식을 낳아서 키운다. 왜냐하면 강력한 성충동 메커니즘에 의해 자식을 낳으며 일단 자식을 낳으면 자식-사랑 메커니즘이 고통-회피 메커니즘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교가 출산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식 키우기가 고난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인간은 콘돔을 사용하면 자식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하여 고통-회피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콘돔을 사용함으로써 자식을 키우는 데 따르는 고난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대체로 유전자에게는 재앙이지만 말이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기도 하지만 기쁨의 연속이기도 하다. 고난보다는 기쁨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럴지라도 일부 인간은 예상되는 고난 때문에 아기 낳기를 포기하는 것 같다. 인간이 미래의 고난과 기쁨을 몽땅 계산하여 어느 쪽이 큰지를 평가한 다음에 행동을 결정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제 자살에 대해 살펴 보자. 동물에게는 삶에의-집착 메커니즘이 있으며 이것은 이기적 유전자에 도움이 된다. 또한 동물에게는 고통-회피 메커니즘이 있다. 이것 역시 이기적 유전에 도움이 된다. 상황이 나빠지면 삶이 고통의 연속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죽으면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모르기 동물은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갈 것이다.
문제는 말기 암에 걸렸을 경우처럼 어떤 고통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인간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살을 하면 고통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그리하여 고통-회피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자살을 함으로써 계속 살아가는 데 따르는 고통을 회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때로는 유전자에게는 재앙이 될 수 있지만 말이다.
인간의 경우 살인 메커니즘이 진화했는지 여부를 두고 진화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 중이다. 버스(David Buss, 『이웃집 살인마』)는 인간의 경우 때로는 배우자, 연적, 의붓자식 등을 죽이도록 설계된 살인 메커니즘이 진화했다고 보는 입장인 반면 데일리와 윌슨(Martin Daly, Margo Wilson, 『Homicide』)은 계모나 계부가 의붓자식을 상대적으로 많이 죽이는 이유는 의붓자식을 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보며 의붓자식 살인을 위한 적응이 따로 진화하지 않았다고 보는 입장이다. 배우자 살해의 경우에도 살인 메커니즘의 작동이 아니라 공격성 메커니즘의 극단적인 발현이라고 보는 입장이 있다.
자살의 경우에도 비슷한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선택의 결과 우울 메커니즘이 진화했는데 상황에 따라 이 메커니즘이 극단적으로 작동하여 자살이라는 부산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살 메커니즘이 진화했다면 절망이야말로 그 자살 메커니즘의 일부일 가능성이 크다. 즉 자살 메커니즘의 일부로서 절망 메커니즘이 자연 선택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대체로 진화 심리학자들은 우울 메커니즘이 적응이라고 본다. 절망을 우울 메커니즘이 극단적으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울 메커니즘과는 별도의 메커니즘이라고 가정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직 우울 메커니즘과 절망 메커니즘을 구분한 진화 심리학 연구를 접한 적이 없다. 나중에 그런 연구를 찾아내면 이 글에 반영할 것이다.
두 메커니즘이 명백히 구분된다면 우울 메커니즘은 현 상황을 냉철하게 재평가하여 더 적응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메커니즘일 것이고, 절망 메커니즘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로 향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일 것이다. 그렇다면 두 메커니즘의 작동 방식에 명백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우울 메커니즘이 작동하면 계속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반추하여 더 나은 전략을 찾으려고 할 것이다. 반면 절망 메커니즘이 작동하면 더 이상 그런 식으로 반추하지 않고 죽을 방법을 궁리할 것이다.
젊고 육체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친족 선택을 끌어들이는 적응 가설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곧바로 적응 가설이 반박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동물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즉 모든 생리적, 심리적 메커니즘들은 때로는 오작동하기도 한다. 특히 그 메커니즘이 진화한 환경과 매우 다른 환경에서 살 때에는 오작동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리하여 현대의 남자들은 임신시킬 가망성이 전혀 없는 사진이나 모니터 속의 여자 나체를 보고도 발기하며, 현대 산업국에 사는 사람들은 음식이 넘쳐나고 운동을 별로 안 해도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비만으로 고생한다.
인간의 자살 메커니즘은 원래 매우 늙었거나 심각한 병에 걸려서 번식 가망성이 거의 없을 때 절망하여 자살하도록 진화했는데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오작동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의 환경이 비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듯이 현대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가 절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지나치게 큰지도 모르는 것이다. 현대의 남자들이 사진 속의 여자 나체를 진짜 나체로 착각하듯이 현대의 젊은이들은 어떤 상황을 “번식 가망성 없음”으로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현존하는 사냥-채집 사회에는 고도 비만이 거의 없다. 이것은 현대의 비만이 현대 사회의 새로운 환경 때문이라는 가설이 맞음을 암시한다. 만약 현존하는 사냥-채집 사회의 자살률이 산업국보다 훨씬 낮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자살 역시 현대 사회의 새로운 환경 때문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첫댓글 이것 역시 오랬동안 생각해왔던 문제인데...
참 잘 정리해주셨습니다.
저는 나름 결론을 내렸는데요..
그런 인간수의 포화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습니다. 인구가..너무 많아요.
인간만한 체격의 동물이 너무도 집중하여 살고있기에 서로 부딪히는 일이 크다보니, 스트레스가 큰것입니다.
벌이나 개미도 그정도 숫자가 뭉쳐살지 않느냐고 할지 모르나, 그들과 인간은 뇌의 차이가 큽니다.
한 예를 들어...
모든 동물들은 동물원에서 더 장수를 합니다. 위생과 먹이를 인간이 제공하기 때문이죠.
허나 코끼리 같은경우 동물원에서 단명한다고 합니다.
신기하죠??
그건 홀로 살아갈수 있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갖혀있는 것이 스트레스가 되는 것이란 소리죠.
코끼리는 사실상 육지에서 최강의 동물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지않죠.
인간역시 제대로 된 사회에서는 절대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습니다.
어느면에서 보면 지상 최강인 것이죠.
그러한 생명체들을 좁은 공간에 무리하게 집어넣어 놓으니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사회에서의 범죄. 학교내의 폭력등은 이런 대표적인 것의 사례입니다.
만일 캐나다나 호주처럼 혹은 미국의 촌동네 처럼...1마일에 한채씩 집이 있는 동네라면 ...
범죄발생율이 극단적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혹은 아마존의 조에족 같은 경우도 극단적으로 범죄가 적을 것입니다.
범죄란 남을 해하여 나에게 도움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는데...
극단적인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선 범죄가 곧 자기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질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옆에사람을 죽이면 ..내가 어려울때 도움을 받지못해 내 목숨역시 위험해 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동물이라고는 하지만 역시 사회적인 동물인것입니다.
그러나 고도화된 인간은 자기 영역이 반드시 필요한 동물입니다.
헌데 너무도 포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겨나는 것들이 범죄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그리고 자살은 그 포화된 상태에서 못견뎌 생겨난 사태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가령 인구 밀도가 지금의
천분의 1정도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있다면...자살율은 거의 0퍼센트 가깝게 떨어질것입니다.
물론 자살 이유에 대하여 보자면 정말 여러가지가 있지만...기본적인 자살의 메커니즘은
인간이 너무 많기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집니다.
물론 과거에도 인간의 자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당시를 돌아 보아도 역시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간이 한곳에 모여 인구밀도가 몹시 높아져
인간이 바글바글하게 모여사는 곳에서 일어났었습니다.
어쨌든 자살 이유가 자신에게 있던 남에게 있던 혹은 디엔에이에 가지고있는 유전인자건..
인간의 수가 극단적으로 적다면 자살하는 사람은 생겨나지 않을 것입니다.
과거 인간이
수렵생활을 하던때로 돌아가서 ...그당시 자살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생각해 본다면..어림없는 소리입니다.
굶어죽거나 상처입어 죽을지언정 자살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너무도 약한 존재인 인간이 종족보존을 위해서라도 자살이라는 선택을 할수는 없는 것이거든요.
하여간 저는 인간의 인구수가 만들어낸 사건들이 무척 많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아니 인구수 라기보다 인간의 포화상태가 만들어낸 것이 무척 문제라고 생각되어집니다.
그냥 우리주위에서 쉽게 볼수있는 남과의 비교조차도 인구의 집중화로 생겨난 문제이거든요.
아..답글로 무언가 짧게 쓰려다가 자꾸 하고싶은 말이 늘어나서...
길게 써버렸네요;;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