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욱은 목숨을 걸고 전혀 모르는 사람을 구하려는 행위는 진화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의 친족이 아닌데도 목숨을 바쳐 다른 사람을 구하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뉴스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사례가 이수현 씨의 희생이죠. 사회생물학자들은 이런 사례를 해석하기가 굉장히 어려울 거예요. 친족선택설이나 상호성 원리로는 설명이 안 되는 죽음이잖아요. 상호성 원리란 내가 당신을 도와주었듯이 언젠가 당신은 나를 도와주어야 해, 또는 내가 너를 구해주었듯이 너도 언젠가는 내 후손 또는 내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구해주면 된다는 무언의 규칙이죠.
(전방욱, 『찰스 다윈, 한국의 학자를 만나다』, 최종덕 지음, 휴머니스트, 2010, 129~130쪽, 오자 수정함)
이런 식의 비판은 수도 없이 제기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유전적으로는 남남인 아이를 입양해서 정성껏 키우는 것을 친족 선택으로 설명할 수 없다.
2. 콘돔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번식을 제한하는 것을 진화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3.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전혀 모르는 사람을 위해 헌혈을 하는 것을 친족 선택이나 상호적 이타성(reciprocal altruism, 호혜적 이타성)으로 설명할 수 없다.
4. 아프리카에서 굶주리는 사람을 위해 한국 사람이 익명으로 기부하는 것을 진화 심리학은 설명할 수 없다.
5. 아예 종이 다른 애완 동물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것을 진화 심리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진화 심리학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자연 선택이 완벽한 생물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컨대 친족 선택이 얼마나 가까운 친족인지를 100% 정확하게 알아내는 심리 기제를 만들어내고 자신과 어떤 사람 사이의 근친도(degree of relatedness)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100% 정확하게 적응적으로 조절하는 심리 기제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지만 자연 선택이 완벽한 기제를 만들어낸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경쟁하는 형질들 또는 경쟁하는 유전자들 중에서 번식에 더 도움이 되는 쪽이 선택될 뿐이다.
인간이 접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다. 유전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는 사정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인간이 다른 사람의 유전체를 직접 살펴볼 수 없었다. 따라서 누가 자신의 유전적 자식인지 100% 확실하게 알아내는 일이 특히 남자에게는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가끔 남자가 다른 남자의 유전적 자식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만약 자연 선택으로 만들어진 심리 기제들이 완벽하지 않다면 가끔은 인간이 부적응적으로(maladaptively) 즉 번식에 도움이 안 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인간은 아무 것이나 먹지 않는다. 아주 쓰거나 떫은 것들은 먹으려고 하지 않은데 이것은 식물이 만들어내는 독성 물질을 피하도록 하는 기제가 진화했기 때문인 듯하다. 하지만 때로는 독버섯을 먹고 죽기도 한다.
부적응적 행동들도 진화 심리학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온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 만약 인간이 가족과 사회 속에서 진화하면서 친족 선택이나 상호적 이타성에 의해 이타성이 진화하지 않았다면 헌혈, 입양, 기부, 애완 동물 돌보기와 같은 행동이 나타나기 매우 힘들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일부 종들처럼 알이나 새끼를 낳고 바로 떠나 버리는 종이라면 입양이나 애완 동물 돌보기와 같은 행동이 나타나기 매우 힘들 것이다. 만약 인간이 사회성 동물이 아니라 독거성 동물(solitary animal)로 진화했다면 남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행동이 나타나기가 매우 힘들 것이다.
어떤 행동이 학습이나 사회화 때문이라 하더라도 결국 진화 심리학적 해명이 필요하다. 어떤 심리 기제들이 학습이나 사회화를 가능하게 하는지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기제들은 자연 선택이 만들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