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퍼는 과학 명제의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On the first level, there is a
logical asymmetry: one singular statement—say about the perihelion of Mercury—can
formally falsify Kepler’s laws; but these cannot be formally verified by any
number of singular statements. ...... But the fact remains that, relative to
whatever basis the investigator accepts (at his peril), he can test his theory
only by trying to refute it.
(『Conjectures and Refutations』, 54~55쪽, 주 8)
첫 번째 수준에서는 논리적 비대칭성이 있다: 즉, 하나의 단칭 명제—예컨대 수성의 근일점에 관한—라도, 형식적으로는
케플러의 법칙을 반증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법칙은 단칭 명제를 아무리 모아도 형식적으로는 검증이
불가능하다. ...... 그러나 탐구자가 (자기 책임하에) 채택하는 기초가 어떠한 것이든, 각기 자기의 이론에 대한 논박을
시도함으로써만 이론을 시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추측과 논박 1』, 91쪽, 주 8)
과학 명제를 살펴보기 전에 수학에 대해
살펴보자.
수학의 증명 방식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에 따르면 수학 공리가 옳다는 보장이 없으며 수학에서 쓰이는 기본적인 추론 절차가 옳다는 보장도 없다.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은 「What the Tortoise Said to Achilles(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한 말)」라는 글에서 이런 의혹에 대해 재미 있게 썼다.
http://www.ditext.com/carroll/tortoise.html
http://fair-use.org/mind/1895/04/what-the-tortoise-said-to-achilles
그런 식의 의혹을 무시한다면 수학 정리(theorem)는 절대적 진리다. 왜냐하면 공리에서 출발하여 기본적인
추론 절차를 이용해서 완벽하게 증명하기 때문이다.
어떤 수학자가 그럴 듯해 보이는 수학 명제를
제시할 때 두 가지 방향에서 검증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공리에서
출발하여 추론 절차를 거쳐 그 명제를 증명하는 길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 명제가 틀렸음을 보여주는 길이 있다. 만약 그 명제에 대한 반례를
단 하나라도 댈 수 있다면 그 명제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다.
수학 정리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다. 수학 정리가 되고자 하는 후보가 단 하나의 반례만으로도 자격을 상실하는 이유는 수학 정리가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이다. 절대적 진리라는 엄청난 지위에는 “단
하나의 반례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혹한 조건이 따른다.
어떤 수학 정리에 부합하는 사례들을 아무리
많이 모아도 그 수학 정리가 증명되었다고 볼 수 없다. 반면 그 수학 정리와 모순되는 사례를 하나만
댈 수 있다면 그 수학 정리는 무너진다. 수학에서는 포퍼가 말한 비대칭성이 그대로 적용된다.
과학에서는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과학 이론은 수학 정리와는 다르게 절대적 진리를 자처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측력이 전혀 없다면 전혀 쓸모가 없기 때문에 이론으로 인정 받지 못한다. 하지만
완벽한 진리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 예측력이 있다면 때로는 훌륭한 이론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 과학
이론이 절대적 진리라는 엄청난 지위를 노리지 않기 때문에 “단 하나의 반례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혹한 조건도 따르지 않는다.
과학 이론의 반증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수학의
반증과 비슷한 반증이 있다. 어떤 과학 이론과 모순되는 현상이 있음을 확실히 보여줄 때 그 이론은 수학적
의미에서 반증된다. 즉 그 이론이 절대적 진리가 아님이 드러난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 이론의 예측력이 완벽하지 않음을 입증한 것이다.
둘째, 어떤
과학 이론의 예측력이 전혀 또는 거의 없음을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이 때 그 이론이 쓸모가 없다는
것이 입증된다.
수 많은 실험을 통해 뉴턴 물리학에 대단한
예측력이 있음이 입증되었다. 하지만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점,
1919년 일식 관찰 등을 통해 뉴턴 물리학과 모순되는 현상들이 관찰되었다. 뉴턴 물리학은
수학적인 의미에서 반증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뉴턴 물리학이 폐기되지는 않았다. 이것은 첫 번째 의미의 반증이다.
여전히 뉴턴 물리학은 훌륭한 이론으로 인정
받고 있다. 다만 더 예측력이 나은 아인슈타인 물리학에 왕좌를 내줬을 뿐이다.
혈액형 성격론 중에는 “A형은 소심하다”라는 명제가 있다.
대규모 설문 조사, 대규모 실험, 범죄자나 혁명가에
대한 광범위한 통계 조사 등을 벌였는데도 소심함과 A형 사이에 어떤 유의미한 상관 관계도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하자. 그러면 “A형은 소심하다”라는 명제의 예측력이 없음이 사실상 입증된 것이다. 이 때 이런 명제
또는 이론을 (적어도 잠정적으로) 폐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은 두 번째 의미의 반증이다.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은 포퍼의 과학
철학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은 수학 명제에나 제대로 적용될 수 있다. 만약 이런 비대칭성을 과학 명제에도 곧이곧대로 적용한다면 뉴턴의 물리학처럼 훌륭한 이론을 단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폐기하는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 설사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처럼 대체할 수 있는 이론이 아직 제시되지
않았더라도 포퍼의 입장에서는 뉴턴의 물리학을 폐기해야 할 것 같다.
내가 포퍼를 잘못 해석한 것일까? 만약 내가 포퍼를 잘못 해석했다면 즉 확실한 반증 사례가 발견된다 하더라도 해당 이론을 폐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포퍼의 생각이라면 도대체 “입증과 반증의 비대칭성”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덕하
201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