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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igins of virtue: human instincts and the evolution of cooperation』, Matt Ridley, 1996, Penguins books, 144~146쪽. (후주를 모두 생략했음)
There is a paradox in the common view of self-interest. People are generally against it; they despise greed and warn each other against people who have a reputation for too closely pursuing their own ambitions. Similarly, they admire the disinterested altruist; tales of such people’s selflessness become legend. So it is pretty clear that on a moral level, everybody agrees that altruism is good and selfishness bad.
So why are more people not altruists? The exceptions—the Mother Theresas and saints—are almost by definition remarkable and rare. How many people do you know who are true altruists, always thinking about others and never themselves? Very, very few. Indeed, what would you say to somebody close to you who was being truly selfless—a child, say, or a close friend, who was continually turning the other cheek, doing little tasks at work that others should have done, working for no reward in a hospital emergency room, or giving his weekly pay to charity? If he did it occasionally, you would praise him. But if he did it every week, year after year, you would start to question it. In the nicest way you might hint that he should look out for himself a little more, be just a touch more selfish.
My point is that while we universally admire and praise selflessness, we do not expect it to rule our lives or those of our close friends. We simply do not practise what we preach. This is perfectly rational, of course. The more other people practise altruism, the better for us, but the more we and our kin pursue self-interest, the better for us. That is the prisoner’s dilemma. Also, the more we posture in favour of altruism, the better for us.
I believe this explains the general mistrust in which both economics and selfish-gene biology is held. Both disciplines claim repeatedly and with little effect that they are being misunderstood; they are not recommending selfishness, they are recognizing it. It is only realistic, economists say, to expect human beings to react to incentives with a view of their self-interest—not just or good, but realistic. Likewise, say biologists, it is plausible to expect genes to show an evolved ability to do things that enhance the chances of their own replication. But we tend to see it as a bit naughty to take this view; somehow not politically correct. Richard Dawkins, who coined the phrase ‘selfish gene’, says that he drew attention to the inherent selfishness of genes not to justify it, but the reverse: to alert us to it so we can be aware of the need to overcome it. He urged us to ‘rebel against the tyranny of the selfish replicators’.
If the commitment model is right, though, the critics of selfish schools have a point, for everything becomes normative. If people are not rational maximizers of self-interest, then to teach them that such behaviour would be logical is to corrupt them. Indeed, this is just what Robert Frank and many others have found: those students who have been taught the nostrums of neo-classical economics are much more likely to defect in prisoner’s dilemma games than, for instance, astronomy students.
반드시 아래 단계들을 모두 거친 후 다음 쪽을 읽도록 하자.
1. 사전과 인터넷을 찾아보면서 원문을 정독한다.
2. 초벌 번역을 한다.
3. 원문을 덮어 놓고 번역문을 정독한다. 그리고 수정할 곳을 찾아 밑줄을 쳐 놓는다.
4. 원문과 번역문의 모든 문장을 하나하나 대조하면서 수정한다.
5. 다시 원문을 덮어 놓고 번역문을 정독한다. 그리고 수정할 곳을 찾아 밑줄을 쳐 놓는다.
6. 밑줄 쳐 놓은 문장만 원문과 대조하면서 수정한다.
『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1판 18쇄(2010년 2월), 205~207쪽. (후주를 모두 생략했음)
사리 추구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에는 모순이 많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사리 추구를 반대한다. 사람들은 탐욕을 혐오하며, 자기 야심만 추구한다고 평판이 난 사람을 경계하라고 서로에게 충고한다. 그리고 사심 없는 이타주의자를 존경한다. 이타주의자의 비이기적인 행위는 전설이 되어 남는다. 최소한 도덕적 수준에서는 이타주의가 선이고 이기주의가 악이라는 데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세상에는 이타주의자가 더 많아지지 않는 것일까? 데레사 수녀Mother Theresa 같은 사람은 이타주의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도 아주 특이하고 드문 경우이다. 진정한 이타주의자, 즉 항상 타인만을 생각하고 자신은 돌보지 않는 이타주의자는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주, 극히 드물다. 솔직히 당신의 가까운 사람 중에 진정한 이타주의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할까? 당신의 자식이나 가까운 친구가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고, 자기 일도 아닌 세상의 허드렛일들을 챙기고 다니며, 병원 응급실에서 무보수로 봉사하고 주급을 몽땅 털어 자선 기관에 내준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그것이 어쩌다가 있는 일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그를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해가 바뀌도록 계속 그러고 다닌다면 당신은 그라는 인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할 것이다. 이윽고 당신은 아주 점잖은 말투로 그에게 자신을 좀 더 돌보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할 것이다. 말하자면 좀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우리는 사심이 없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자신의 삶이나 친척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아주 합리적이다.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을수록 나에게 이익이 되며,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이 더 이기적일수록 나에게는 이익이다. 이것은 죄수의 딜레마이다. 더구나 우리는 이타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가장할수록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혐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경제학자나 이기적 유전자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오해를 받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이기주의를 권장하고 있지는 않다.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어떤 행동 동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예측할 때 그 인간의 자기 이익을 잣대로 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거나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자들은 어떤 행동 동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예측할 때 유전자가 복제 기회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진화된 능력을 보여줄 것으로 예측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악한 일이며, 아니 뭔가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기적
유전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도킨스는 자신이 유전자의 내재적
그러나 헌신성 모델이 옳다고 한다면 이기주의 학파에 대한 비판에 정당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진술은 규범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인간이 사리 추구의 화신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사리 추구가 논리적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그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프랑크를 비롯한 학자들의 발견은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묘방을 배운 학생들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천문학을 배운 학생들보다 속임수를 쓸 확률이 훨씬 높다.
<번역 검토>를 읽기 전에 원문과 신좌섭의 번역문을 대조하면서 번역에 문제가 없는지 살펴보자.
그리고 신좌섭의 번역을 참고하여 다시 스스로 번역해 보자.
Matt Ridley: There is a paradox in the common view of self-interest.
신좌섭: 사리 추구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에는 모순이 많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contradiction(모순)”과 “paradox(역설)”를 구분해서 번역하는 것이 좋다.
“view”의 번역으로 “관념”보다는 “견해”가 더 적합해 보인다. 보통 “idea”나 “concept”를 “관념”으로 번역한다.
원문에는 “많다”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그리고 “많다”를 삽입할 특별한 이유도 없어 보인다.
Matt Ridley: People are generally against it; they despise greed and warn each other against people who have a reputation for too closely pursuing their own ambitions.
신좌섭: 인간은 일반적으로 사리 추구를 반대한다. 사람들은 탐욕을 혐오하며, 자기 야심만 추구한다고 평판이 난 사람을 경계하라고 서로에게 충고한다.
“People”과 “they”를 “인간”과 “사람들”로 다르게 번역했다. 원문의 표현이 다양하지 않을 때 번역문에서 억지로 다양하게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원문이 따분하면 번역문도 따분해야 한다.
Matt Ridley: Similarly, they admire the disinterested altruist; tales of such people’s selflessness become legend.
신좌섭: 그리고 사심 없는 이타주의자를 존경한다. 이타주의자의 비이기적인 행위는 전설이 되어 남는다.
“tales”를 엄밀하게 번역하지 않았다.
원문에는 “남는다”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그냥 “전설이 된다”라고 번역하면 충분하다.
Matt Ridley: So it is pretty clear that on a moral level, everybody agrees that altruism is good and selfishness bad.
신좌섭: 최소한 도덕적 수준에서는 이타주의가 선이고 이기주의가 악이라는 데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원문의 “pretty”를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
“~ism”를 무조건 “~주의”로 번역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타성”과
“
Matt Ridley: So why are more people not altruists?
신좌섭: 그렇다면 어째서 세상에는 이타주의자가 더 많아지지 않는 것일까?
Matt Ridley: The exceptions—the Mother Theresas and saints—are almost by definition remarkable and rare.
신좌섭: 데레사 수녀Mother Theresa 같은 사람은 이타주의의 정의에 비추어볼 때도 아주 특이하고 드문 경우이다.
“saints”를 빼 먹었다.
“exceptions”를 빼 먹었다.
“by definition”은 “예외라는 단어의 정의상”을 뜻하는 것 같다.
어떻게 하면 “almost”까지 살려서 번역할 수 있을지는 나도 모르겠다.
Matt Ridley: How many people do you know who are true altruists, always thinking about others and never themselves?
신좌섭: 진정한 이타주의자, 즉 항상 타인만을 생각하고 자신은 돌보지 않는 이타주의자는 세상에 몇이나 될까?
“do you know”를 엄밀하게 번역하지 않았다.
Matt Ridley: Very, very few.
신좌섭: 아주, 극히 드물다.
원문에서는 “very”가 반복되고 있다. 단어의 반복은 시각적 효과를 비롯하여 온갖 효과를 낸다. 굳이 “아주”와 “극히”로 다르게 번역하여 그런 효과를 파괴해야 했을까?
Matt Ridley: Indeed, what would you say to somebody close to you who was being truly selfless—a child, say, or a close friend, who was continually turning the other cheek, doing little tasks at work that others should have done, working for no reward in a hospital emergency room, or giving his weekly pay to charity?
신좌섭: 솔직히 당신의 가까운 사람 중에 진정한 이타주의자가 되려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할까? 당신의 자식이나 가까운 친구가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내밀고, 자기 일도 아닌 세상의 허드렛일들을 챙기고 다니며, 병원 응급실에서 무보수로 봉사하고 주급을 몽땅 털어 자선 기관에 내준다면 당신은 그에게 뭐라고 하겠는가?
“당신”보다는 “여러분”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한국에서는 싸울 때나 부부 사이일 때를 제외하면 웬만하면 “당신”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weekly pay”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주급”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주급으로 지불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월급”이 훨씬 친숙한 단어다. 이 글에서는 반드시 “주급”으로 번역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인다. 이럴 때에는 과감하게 원문과는 약간 다른 “월급”으로 번역해도 큰 문제는 안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주급”을 고집하는 번역가가 틀렸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주급”은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다. 그리고 한국인에게는 낯선 “주급”으로 번역하면 독자에게 약간이라도 문화적 충격을 줄 수 있다.
“되려는”은 아직 그런 사람이 아님을 뜻한다. 하지만 원문에서는 이미 그렇게 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Matt Ridley: If he did it occasionally, you would praise him.
신좌섭: 그것이 어쩌다가 있는 일이라면 아마도 당신은 그를 칭찬할 것이다.
Matt Ridley: But if he did it every week, year after year, you would start to question it.
신좌섭: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고 해가 바뀌도록 계속 그러고 다닌다면 당신은 그라는 인간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할 것이다.
“question it”에서 목적어는 “it(남들만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라는 인간에 대해”는 엄밀한 번역이 아니다.
Matt Ridley: In the nicest way you might hint that he should look out for himself a little more, be just a touch more selfish.
신좌섭: 이윽고 당신은 아주 점잖은 말투로 그에게 자신을 좀더 돌보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할 것이다. 말하자면 좀더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좋겠다고…….
원문에는 “이윽고”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Matt Ridley: My point is that while we universally admire and praise selflessness, we do not expect it to rule our lives or those of our close friends.
신좌섭: 내가 지적하려는 것은, 우리는 사심이 없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자신의 삶이나 친척의 삶이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Matt Ridley: We simply do not practise what we preach.
신좌섭: 우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simply” 같은 단어도 번역해야 한다.
Matt Ridley: This is perfectly rational, of course.
신좌섭: 물론 이것은 아주 합리적이다.
Matt Ridley: The more other people practise altruism, the better for us, but the more we and our kin pursue self-interest, the better for us.
신좌섭: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에 많을수록 나에게 이익이 되며, 나와 나의 주변 사람들이 더 이기적일수록 나에게는 이익이다.
“other”를 빼 먹었다. 여기에서는 “우리와 우리 친족들을 제외한”을 뜻하는 말로 빼 먹지 않는 것이 좋다.
“kin”은 “친족”이다. 친족 선택(kin selection)을 염두에 둔 단어인 듯하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로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문은 “us”인데 “나”로 번역했다. “우리”로 번역해도 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Matt Ridley: That is the prisoner’s dilemma.
신좌섭: 이것은 죄수의 딜레마이다.
“prisoner’s dilemma”의 번역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라:
「진화 심리학 관련 번역어에 시비 걸기」
http://cafe.daum.net/Psychoanalyse/82Xi/38
Matt Ridley: Also, the more we posture in favour of altruism, the better for us.
신좌섭: 더구나 우리는 이타주의를 옹호하는 것처럼 가장할수록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다.
Matt Ridley: I believe this explains the general mistrust in which both economics and selfish-gene biology is held.
신좌섭: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과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혐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biology”를 “생물학”으로 번역해도 되는데 굳이 다른 단어인 “이론”으로 번역했다.
“mistrust”를 “불신”이나 “의혹”으로 번역해도 되는데 “혐오”로 번역했다.
Matt Ridley: Both disciplines claim repeatedly and with little effect that they are being misunderstood; they are not recommending selfishness, they are recognizing it.
신좌섭: 경제학자나 이기적 유전자 이론가들은 자신들이 오해를 받고 있다고 강변하지만 전혀 효과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이기주의를 권장하고 있지는 않다.
“강변”이라고 번역하면 경제학자들이나 이기적 유전자 생물학자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Ridley는 그들의 편이다.
“they are recognizing it”을 빼 먹었다.
엄밀히 말해 “little”은 “전혀”가 아니라 “거의”다.
원문에는 “보인다”에 대응하는 단어가 없다. 원문이 단정적이면 단정적인 표현으로 번역해야 한다.
Matt Ridley: It is only realistic, economists say, to expect human beings to react to incentives with a view of their self-interest—not just or good, but realistic.
신좌섭: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어떤 행동 동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예측할 때 그 인간의 자기 이익을 잣대로 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옳다거나 선하다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with a view of their self-interest”를 엄밀하지 못하게 번역한 듯하다. “view”의 주체가 인간(연구 대상)인 듯한데 번역문에서는 학자가 주체다.
“only”까지 정확하게 번역하면 좋겠지만 나는 포기했다.
“self-interest”를 서로 다른 단어들(“사리 추구”, “이기적”, “이익”)로 번역했다. 전문 용어가 아니더라도 가능하면 이런 단어들도 통일해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물론 억지로 통일하면 오히려 더 해롭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 다르다.
Matt Ridley: Likewise, say biologists, it is plausible to expect genes to show an evolved ability to do things that enhance the chances of their own replication.
신좌섭: 그와 마찬가지로 생물학자들은 어떤 행동 동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예측할 때 유전자가 복제 기회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진화된 능력을 보여줄 것으로 예측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원문에는 “어떤 행동 동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예측할 때”에 대응하는 구절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특별히 인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진화한”으로 번역해도 문제가 없다면 굳이 “진화된”으로 번역할 필요가 없다.
“plausible”을 “타당하다”로 번역했다. “그럴 듯하다”가 더 낫다. 그럴 듯함과 타당함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특히 과학에 대한 글에서는 이런 차이를 무시하면 더더욱 안 된다.
Matt Ridley: But we tend to see it as a bit naughty to take this view; somehow not politically correct.
신좌섭: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악한 일이며, 아니 뭔가 정치적으로 부적절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a bit”을 빼 먹었다.
“사악한”은 “naughty”의 번역어로는 의미가 너무 강하다.
“politically correct”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원문을 병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http://en.wikipedia.org/wiki/Politically_correct
Matt Ridley: Richard Dawkins, who coined the phrase ‘selfish gene’, says that he drew attention to the inherent selfishness of genes not to justify it, but the reverse: to alert us to it so we can be aware of the need to overcome it.
신좌섭: <이기적 유전자>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도킨스는 자신이
유전자의 내재적
원문이 “Richard Dawkins”이기 때문에 “도킨스”보다 “리처드 도킨스”가 더 낫다.
“drew attention to”는 도킨스 자신이 주목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주목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이다.
“but the reverse”를 빼 먹었다.
“us”를 “인간에게”로 번역했는데 원문 그대로 “우리에게”로 번역하면 충분하다.
“can”까지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Matt Ridley: He urged us to ‘rebel against the tyranny of the selfish replicators’.
신좌섭: 그는 우리에게 <이기적 복제자의 전제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촉구한 것이다.
“urged”를 “촉구했다”로 있는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되도록 “것이다”와 같은 번거로운 표현을 피하는 것이 좋다.
Matt Ridley: If the commitment model is right, though, the critics of selfish schools have a point, for everything becomes normative.
신좌섭: 그러나 헌신성 모델이 옳다고 한다면 이기주의 학파에 대한 비판에 정당한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진술은 규범적인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schools”는 복수형이다. 만약 경제학과 이기적 유전자론을 모두 가리키는 말이라면 복수형을 살려서 번역하는 것이 좋다. 확신이 없다면 복수형으로 번역하는 것이 안전하다.
“everything”은 “모든 진술”이라고 번역했다. 있는 그대로 “모든 것”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어도 더 안전하다.
“for everything becomes normative”의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겠다.
Matt Ridley: If people are not rational maximizers of self-interest, then to teach them that such behaviour would be logical is to corrupt them.
신좌섭: 만일 모든 인간이 사리 추구의 화신이 아니라면, 그들에게 사리 추구가 논리적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결국 그들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people”을 그냥 “사람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모든 인간”보다는 나아 보인다. 굳이 “모든”을 집어 넣을 이유는 없어 보인다.
“rational maximizers”를 “화신”이라고 번역했다. “합리”와 “최대화” 같은 의미를 살려서 번역해야 한다.
Matt Ridley: Indeed, this is just what Robert Frank and many others have found: those students who have been taught the nostrums of neo-classical economics are much more likely to defect in prisoner’s dilemma games than, for instance, astronomy students.
신좌섭: 프랑크를 비롯한 학자들의 발견은 이 문제와 관련이 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묘방을 배운 학생들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에서 천문학을 배운 학생들보다 속임수를 쓸 확률이 훨씬 높다.
가능하면 “just”도 살려서 번역하는 것이 좋다.
“many”를 빼 먹었다.
“for instance”를 빼 먹었다.
여기서 “defect”는 “속임수”가 아니라 “배신”을 뜻한다.
사욕에 대한 일반적 견해에는 역설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것에
반대한다. 탐욕을 경멸하며, 자신의 야망을 너무 열심히 추구한다는
평판이 있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서로에게 이야기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사욕 없는 이타주의자(altruist)를 존경한다. 그런 사람의 비이기성에 대한 이야기는
전설이 된다. 따라서 도덕의 수준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이타성은 좋고
그렇다면 왜 이타주의자들이 더 많지 않을까? 예외—테레사 수녀와 같은 사람들과 성자들—는 그 단어의 정의상 범상치 않으며 드물다. 자신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늘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진짜 이타주의자를 여러분은 몇 명이나 알고 있나? 아주, 아주 드물다. 실제로, 가까운 누군가가 정말로 이기심이 없이 살아왔다면, 예컨대 자식이나 친한 친구가 계속해서 다른 쪽 뺨을 내주었으며, 직장에서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잡무를 했으며, 병원 응급실에서 보수도 없이 일했으며, 월급을 자선 단체에 줘 버렸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만약 가끔 그랬다면 여러분은 칭찬을 할 것이다. 그러나 매주, 매년 그랬다면 여러분은 이의를 제기하려 할 것이다. 조금만 더 스스로를 돌보면서, 약간만 더 이기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여러분이 최대한 다정하게 넌지시 이야기할지도 모른다.
내가 하려는 말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비이기성을 존경하고 칭찬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이나 친한 친구의 삶을 지배하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것을 결코 실천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완벽히 합리적이다. 이타성을 실천하는 다른 사람들이 많을수록 우리에게 더 좋고, 우리와 우리 친족이 사욕을 추구할수록 우리에게 더 좋다. 이것은 용의자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이다. 또한 우리가 이타성을 옹호하는 태도를 더 취할수록 우리에게 더 좋다.
나는 이것 때문에 경제학과 이기적 유전자 생물학이 일반적으로 불신을 받는다고 믿는다. 두 분과에서는 자신들이 오해를 받고 있다고,
하지만 만약 헌신성 모형(commitment model)이 옳다면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