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문제가 있다. 닭은 달걀에서 출발하지만 달걀은 닭이 낳는다.
형식 논리로 따지자면 몇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과거는 무한하게 길게 이어진다. 그리고 닭과 달걀의 연쇄는 과거로 무한히 길게 이어진다. 따라서 어느 쪽이 먼저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2. 세상에는 시작이 있다.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에 달걀이 먼저 존재했다. 따라서 달걀이 먼저다.
3.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에 닭이 먼저 존재했다. 따라서 닭이 먼저다.
4.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에 닭 수백 만 마리와 달걀 수 천만 개가 존재했다. 따라서 어느 쪽이 먼저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5. 신이 달걀을 창조했다. 따라서 달걀이 먼저다.
6. 신이 닭은 창조했다. 따라서 닭이 먼저다.
7. 신이 닭 수백 만 마리와 달걀 수 천만 개를 창조했다. 따라서 어느 쪽이 먼저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진화론은 이런 답변들 말고도 대안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라는 질문에 엄격한 형식 논리를 적용할 수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엄격한 형식 논리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개념이 지극히 엄밀해야 한다.
그런데 진화론에 따르면 “닭” 개념은 애매하기 짝이 없다. 닭으로 인정받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을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1억 년 전의 닭의 직계조상을 닭이라고 부르는 생물학자는 없다. 하지만 도대체 언제부터 닭인지 정확히 가릴 수 없다. “대충 몇 년 전 이후부터 닭이라고 부르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양성자가 8개면 산소다”는 산소의 본질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것이 산소의 필요충분 조건이다. 반면 닭의 본질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이야기할 수 없다. 닭은 보통 앞을 볼 수 있지만 눈먼 닭도 닭이다. 닭은 보통 날개가 있어서 조금은 날 수 있지만 전혀 날 수 없는 돌연변이 닭도 닭이다. 닭은 보통 다리가 두 개지만 다리가 하나인 돌연변이 닭도 닭이다.
진화론자는 닭에 대해서 본질론적 사고를 할 수 없다. 개체군(population)적 사고가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개체군적 사고가 애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진화 역사에서 대충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닭이다”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으로 1억 년 후의 닭의 후손은 닭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닭이 아닌지 정확히 이야기할 수는 없다.
철학적으로 볼 때 진화론은 “생물에는 본질론적 사고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인간 개념도 이런 면에서는 닭 개념과 다를 바 없다. 1억 년 전의 인간의 조상은 인간이 아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인간인가? 이것은 거의 엿장수 맘대로다.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인간 개념도 애매하거든...”이라는 답으로 어떤 면에서는 질문 자체가 해소되었다.
생물학자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보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겠지만 결론은 “정확히 정의하기 힘들다”이다.
이것은 생물학자들이 무능하기 때문일까? 생물학이 앞으로 겁나게 발전하면 “양성자가 8개면 산소다”라는 말만큼이나 확실히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할 수 있는 생명의 정의가 생길까?
만약 신이 인간, 침팬지, 고등어 등을 따로따로 창조했다면 인간 개념을 엄밀히 정의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각각의 종들이 서서히 진화했다는 진화론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엄밀한 정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창조론자들 중에는 “좋다. 진화가 일어났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생명의 시초는 신의 창조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어쩌면 다윈도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며 그런 취지의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은 진화론과 창조론의 어정쩡한 타협이다.
하지만 이제는 생명의 탄생까지도 자연 선택으로 설명하려는 과학자들이 있다. 그들에 따르면 DNA나 RNA와 같은 구조도 자연 선택에 의해 서서히 진화했다.
인간의 탄생에 진화론을 적용하면 인간 개념이 원래 애매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체념하게 되면 인간 개념을 엄밀히 정의하겠다고 발버둥칠 필요가 없다. 만약 생명의 탄생에 진화론을 적용하면 생명 개념이 원래 애매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누가 봐도 무생물인 존재에서 누가 봐도 생물인 존재로 이어지기까지 1억 년의 진화가 일어났다고 하자. 이 때 어디서부터 생명으로 볼 지는 거의 엿장수 맘대로다. 인간의 탄생이든 생명의 탄생이든 점진적인 진화에서 정확한 시점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점진적인 변화를 인정한다면 “언제부터 인간인가?”와 “언제부터 생명인가?”라는 질문이 “몇 살부터 노인인가?”라는 질문만큼이나 바보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엄격한 형식 논리는 엄격한 개념에 적용해야 제 맛이다. 애매한 개념에 아무리 엄격한 형식 논리를 적용해보아도 애매한 결과로 이어질 뿐이다.
예컨대 “결혼하지 않은 남자는 총각이다”라는 총각의 정의가 있다고 하자. 만약 결혼 개념이나 인간 개념이나 남자 개념이 애매하다면 이런 정의에서 출발한 형식 논리의 엄밀성을 기대할 수 없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는 과학자는 이런 애매함은 근본적으로 해결 불가능하다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애매함 속에서 살 각오를 해야 한다. 다행히 애매하다고 해서 과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애매함에도 정도가 있으며 덜 애매할 수 있도록 노력하기만 하면 된다. 지극한 엄밀함을 따지는 수학적 지식도 나름대로 맛이 있지만 애매함 속에서 발버둥치는 생물학적 지식도 나름대로 맛이 있다.
생물학 또는 인간학을 배울 때 되도록 덜 애매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지극히 엄밀한 개념이나 이론이 가능하다는 헛된 기대는 버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