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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고 착한 사람으로 보이기 위하여 - 자랑, 수치심, 조롱 그리고 자기 기만
문화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어느 정도 변이가 있기는 하지만 인기 요인에는 보편성이 있어 보인다. 늙은 사람보다 젊은 사람이, 멍청한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이, 빼빼 마르거나 고도 비만인 사람보다 체중이 중간 정도인 사람이, 지위가 낮은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 병약한 사람보다 건강한 사람이, 힘 없는 사람보다 힘 센 사람이, 신체 장애자보다 정상인이, 정신병자보다 정상인이, (특히 남자의 경우) 키 작은 사람보다 평균 키보다 어느 정도 큰 사람이, 좌우 비대칭인 사람보다 좌우 대칭인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보다 이타적인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착한 사람이 대체로 인기 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빈 서판론자들은 이런 문제를 설명할 때 모방이나 학습이라는 말을 주문처럼 왼다. 예컨대 주변 사람들이 늙은 사람보다 젊은 사람을 더 좋아하는 것을 보고 어린이가 그대로 배운다는 것이다. 설사 이 가설이 옳다 하더라도 이 가설은 왜 이런 현상이 인류 보편적인지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냥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모방 가설에는 이것 말고도 여러 문제점이 있다. 사람은 아무 것이나 모방하지 않는다. 어른이 망치로 못을 박으려다가 자기 손가락을 망치로 때리는 장면을 본 어린이는 똑 같이 모방하여 자신도 망치로 손가락을 때리지는 않는다. 어린이는 못을 박는 법은 배우지만 실수해서 다치는 법을 배우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린이는 어른이 못을 박다가 다치는 장면을 보고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빈 서판론자들은 어린이가 어른이 하는 일이면 무턱대고 모방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모방 가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왜 어린이가 못을 박다가 다치는 것은 그대로 모방하지 않는 반면 늙은 사람보다 젊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은 그대로 모방하는지 그 이유를 밝혀야 할 것이다.
또한 좌우 대칭의 경우처럼 모방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사람들이 좌우 대칭인 사람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어린이가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단 말인가? 이런 현상은 과학자들이 대규모 피험자들을 대상으로 엄격한 통계학을 적용해서 연구했기 때문에 밝혀낼 수 있었다.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선호 경향이 결정된다는 가설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이기적인 사람과 사귀어 본 후 된통 당한 다음에 이기적인 사람보다는 이타적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가설 역시 좌우 대칭을 선호하는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좀 더 좌우 대칭인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과 사귀었을 때 더 좋은 경험을 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뚱뚱한 친척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해도 뚱뚱함 자체를 선호하게 되지는 않는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이런 선호들이 대체로 자연 선택에 의해 주조되었다고 믿는다. 그런 선호가 진화한 이유는 잘나고 착한 사람을 선호했던 사람이 그렇지 않았던 사람보다 더 잘 번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폐경이 지난 늙은 여자를 젊은 여자보다 선호해서 그런 여자와 결혼한 남자는 자손을 남기기 힘들었을 것이다. 인간성 더러운 남자를 착한 남자보다 선호해서 결혼한 여자는 남자에게 버림을 받거나 학대 당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러면 자손을 많이 남기기 힘들다. 잘난 자식을 못난 자식보다 편애한 부모는 결국 더 많은 손자를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좌우 대칭인 남자를 그렇지 않는 남자보다 더 선호해서 그런 남자와 주로 성교한 여자는 번식에 이로운 좋은 유전자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장애인을 정상인보다 선호해서 우정을 나눈 사람이 있었다면 우정으로부터 번식에 도움이 되는 이득을 별로 얻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 선택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아주 많은 시행 착오를 통해 작동한다. 따라서 개인이 알 수 없는 정보를 자연 선택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은 그리 많지 않다. 개인이 성인이 되기 전에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많아야 몇 십 명 밖에 안 된다. 이렇게 작은 표본으로는 어떤 특성이 번식에 도움이 되는지 정확히 알아내기가 매우 힘들다. 결혼 같은 경우에는 아예 어린 시절에 경험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어떤 사람과 결혼해야 더 잘 번식할 수 있는지를 알아내기가 힘들다.
사람들의 선호는 거의 한결같이 번식에 이로운 방향을 향하고 있다. 게다가 그 선호들 중 일부는 개인의 경험으로 학습하기도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연 선택에 의해서 선호가 주조되었다고 보는 적응론이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고 생각한다.
잘나고 착한 사람이 인기가 높기 때문에 자신이 잘나고 착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번식에 유리하다. 따라서 인간이 스스로를 그런 사람으로 보이게끔 생각하거나 행동하도록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되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의 장점을 남들에게 널리 알린다면 잘나고 착한 사람으로 보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자랑의 본질이다. 인간은 자랑을 하도록 설계된 듯하다. 아주 어린 아이들도 자랑을 한다. 그들은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부모에게 그것을 보여 주려고 기를 쓴다.
빈 서판론자들은 아이들이 자랑을 하는 것 역시 모방이나 학습 때문이라고 주장할 것이다. 자랑을 하는 문화권에서 자란 아이들이 자랑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으로는 왜 모든 문화권에서 자랑을 하려고 하는지를 해명할 수 없다. 문화권마다 자랑을 금기시하는 정도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어린 아이들은 문화권을 가리지 않고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것 같다. 이것은 선천적인 자랑 메커니즘의 존재를 암시한다. 또한 자랑을 많이 금기시하는 문화권에도 자랑 충동은 존재한다. 사람들은 금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학습 때문이라면 자랑을 금기시하는 문화권에서는 자랑에 대한 욕망 자체도 없어야 할 것이다. 성을 많이 억압하는 문화권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성욕을 억제하려고 애를 쓴다. 이것이 성욕 메커니즘의 선천성을 암시한다. 자랑의 경우에도 상황은 비슷한 것 같다.
촘스키가 언어의 선천성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했던 자극의 빈곤(poverty of stimulus)의 논거를 사용해서 자랑의 선천성을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두 살짜리 어린 아이가 평생(?) 한 번도 남이 자랑하는 것을 보지 않았는데도 자랑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학습 때문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 아이가 남들이 자랑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빈 서판론자의 옳다는 증거일 수는 없다. 자랑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보 처리가 필요한지를 따져야 한다. 만약 자랑을 위해 필요한 정보 처리가 아이의 경험으로 배우기에는 너무 복잡하다는 것이 드러난다면 자극의 빈곤의 논거를 역시 적용할 수 있다.
절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자신이 얼마나 잘나고 착한지 보여주는 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적인 수준이다. 두 명의 자식이 부모의 자원을 두고 경쟁할 때 중요한 것은 “둘 중 누가 더 나으냐”다. 마찬가지로 우정 시장과 짝짓기 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장에 나온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것이다.
남이 자랑을 해서 자신의 장점을 널리 알린다면 자신의 상대적 가치가 떨어지게 된다. 따라서 남이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이 남이 자랑을 하면 기분이 나빠지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남이 자랑을 한다고 무조건 기분이 나빠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형이 부모 앞에서 자랑을 하면 동생은 기분이 나빠질 것이다. 하지만 정작 부모는 기분이 좋아진다. 형과 동생은 부모의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반면 부모는 형과 동생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누구에게 더 투자할 것인지를 평가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따라서 형과 동생은 서로 상대가 자랑하는 것을 막아야 유리한 반면, 부모는 자식들의 장단점을 더 잘 파악하여 더 잘난 자식에게 더 투자하는 것이 유리하다.
짝짓기 시장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작동한다. 남자가 어떤 여자 앞에서 자랑을 하면 경쟁자인 남자는 기분이 나빠지는 반면 어떤 남자를 선택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여자는 기분이 좋아진다. 우정 시장에서도 상황은 어느 정도 비슷할 것이다.
이런 패턴은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듯하다. 그렇다면 빈 서판론자는 그 보편성의 이유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냥 모방과 학습 때문이라는 설명으로는 보편성의 기원을 해명할 수 없다.
자랑에 대한 금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남이 자랑하는 것에 기분이 상하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빈 서판론자는 이런 금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의 장점을 널리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단점을 감추는 것도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수치심이 그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자신의 단점이 드러나는 일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낀다. 그리고 수치심을 느끼면 숨고 싶어진다.
수치심을 느끼는 경향, 수치심을 느꼈을 때 숨으려고 하는 경향 역시 인류 보편적인 것 같다.
남의 단점을 널리 알린다면 결국 자신의 상대적 가치가 높아진다. 따라서 인간이 남의 흉을 보고 조롱하도록 진화했다고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흉 보기와 조롱 욕망 역시 강력한 듯하다. 흉 보기는 보통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반면, 조롱은 당사자가 바로 옆에 있을 때 공개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차이가 있지만 그 목적은 비슷하다.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단점이 널리 알려지는 흉 보기와 조롱이 불리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남들이 자신의 흉을 보거나 조롱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유리하다. 인간은 실제로 이렇게 설계된 듯하다. 남들이 자신의 흉을 보거나 조롱을 하면 사람들은 화가 난다. 분노는 공격이나 위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흉 보기와 조롱에 대한 금기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이 누군가 자신의 흉을 보거나 자신을 조롱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사람들은 장점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느끼고 단점에 대해서는 열등감을 느낀다. 우월감은 쾌감이고 열등감은 불쾌감이다. 이런 현상도 인류 보편적인 것 같다. 따라서 자연 선택에 의해 주조된 적응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우월감과 열등감의 진화론적 기능이 무엇인지는 가설을 세우기도 만만치 않는 것 같다.
자신과 친족의 장점은 널리 알리고, 자신과 친족의 단점은 되도록 숨기고, 남의 장점은 되도록 알려지지 않게 하고, 남의 단점은 널리 알리는 것이 자신의 번식에 유리하다. 여기에 덧붙여서 만약 자신과 남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 알려서 남들이 믿게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서로가 자신에 대해서는 장점의 방향으로 왜곡하고 남에 대해서는 단점의 방향으로 왜곡하는 방향으로 진화한다면 그런 정보에 대한 불신이 맞진화(counter-evolution)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이런 불신을 깰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거짓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기만이 진화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만약 자기 자신이 실제보다 더 잘났다고 정말로 믿는다면 남을 속이기가 더 쉬울 것이다. 20세기에 심리학자들은 온갖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잘났다고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정신분석 계열에서는 이런 현상을 쾌락 원리로 설명하려고 한다.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한다면 우월감이라는 쾌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자기 기만에 빠진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랑들도 소망적 사고(wishful thinking)를 끌어들인 이런 설명을 많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나는 이런 설명에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쾌감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왜 열등감이라는 메커니즘 자체가 존재하나? 그냥 자신이 잘났을 때에도 기분이 좋아지고 못났을 때에도 기분이 좋아지면 더 큰 쾌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쾌감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신을 매우 잘났다고 착각하는 것이 가장 기분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남을 속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실제보다 약간 과장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뻥이 너무 크면 믿어 줄 사람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 지체자가 자신을 천재로 포장한다면 누가 믿어주겠는가? 사람들은 실제의 자신보다 장점을 약간만 과장하는 정도로 자기 기만에 빠지는 것 같다.
만약 남들을 속이는 것이 자기 기만의 목적이라면 자기 기만은 자기 광고와 관련된 메커니즘에서만 작동할 것이다. 광고와 별로 상관 없는 행동과 관련된 메커니즘에서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사용할 것이다. 좀 우스꽝스러운 예를 들어 보자. 어떤 남자가 여자들 앞에서 자기 자랑을 할 때에는 자신이 사자도 맨손으로 때려잡을 수 있다고 믿는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사자를 만나게 되면 자신의 능력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평가에 바탕을 두고 행동할 것이다. 즉 냅다 내뺄 것이다. 광고 메커니즘과 행동 조절 메커니즘에서 서로 다르게 자신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광고에는 과장이 유리하지만 실제 행동에는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유리하다.
심리학자들이 거의 항상 자기 기만 현상을 관찰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연구가 거의 항상 광고와 관련된 메커니즘을 작동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실험을 잘 설계한다면 자기 평가의 이런 분열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자랑, 수치심, 조롱, 자기 기만과 같은 현상은 적응론의 논리와 잘 부합한다. 자연 선택 이론은 이런 다양한 현상을 하나로 꿰어서 설명할 수 있다. 반면 빈 서판론은 모방이나 학습과 같은 단어를 주문처럼 반복할 뿐이다.
그렇다고 위에서 소개한 적응론적 설명을 무턱대고 믿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과학적 검증은 그럴 듯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럴 듯한 이야기 즉 착상은 과학 연구의 시작일 뿐이다. 이 착상에서 시작하여 최대한 명료한 개념들을 사용하여 과학적 가설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가설을 증거들을 바탕으로 검증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나는 위에서 소개한 가설들에 대한 연구를 거의 접한 적이 없다.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어쨌든 적응론적 가설은 현재의 지식 수준에서 볼 때 가장 유력해 보인다.
첫댓글 모방가설의 반박에서 손을 망치로 치는 것을 예로 드는 것은 좀 무리가 아닐까요? 손을 망치로 치는 행위는 흔치 않게 일어나는 일이고 젊은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지속적인 행동이라서요. 만약 어른들이 줄창 망치로 손을 친다면 그것도 모방하지 않을까요? 물론 고통이 수반된다는 것을 안다면 모방을 하지 않겠지만요. 물론 빈 서판론을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잘 모르니까요.
저는 어른들이 계속 망치로 손을 쳐도 아이가 모방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놀리기 위해서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모방을 통한 학습과는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