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가 있어야 악행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생각이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생각을 누가 처음 하게 되었으며, 왜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이런
생각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다.
자유와 책임을 연결시키는 도덕 철학적 입장은
과학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과학을 사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하는 사람들이 자유를 들먹이면서
진화 심리학과 행동 유전학에 반대하는 일이 꽤 있었다. 그들의 논리는 대충 이렇다.
진화 심리학은 유전자 결정론이다.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을 몽땅 결정한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자유가 없다. 어떤
인간의 행동도 유전자의 명령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다. 따라서 인간의 악행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진화 심리학이 악행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고 있다. 따라서 진화
심리학은 엉터리다.
행동 유전학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진화 심리학자들의 이야기를 대충 요약하자면,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하여 심리 기제를 만들어내며 심리 기제와 환경이 상호작용하여 행동을 결정한다. 따라서 유전자가 행동을 몽땅 결정한다는 말은 진화 심리학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과학을 사랑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할
생각이 별로 없는 일부 기독교인들은 아예 유물론에 반대한다. 그들의 논리는 대충 이렇다.
유물론은 물질과 독립된 영혼을 부정한다. 인간의
생각과 욕망도 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과정의 산물이라고 본다. 물질적 과정은 물리 법칙에 의해 정해진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던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물리 법칙에 의해 삼라만상이 절대적으로 결정되든, 양자역학으로 인기를 얻게 된 확률적 결정론에 의해 삼라만상이 비절대적으로 결정되든 자유로운 영혼이 끼어들 자리는
없다.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동은 필연적 물리 법칙과 우주론적 우연의 산물일 뿐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란 없다. 따라서 인간의 악행에 대한 책임도 물을 수 없다. 악행에 대한 책임을 면제해주는 유물론은 엉터리다.
진화 심리학을 싫어하지만 과학을 사랑하는
척하는 사람들은 이 기독교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당신들이 자유를 찾겠다는 목적을 위해
아무리 진화 심리학을 부정한다고 해도 저 멀리서 물리학이 버티고 있다. 만약 신경 과학, 화학, 물리학 등을 몽땅 거부할 생각이 아니라면 진화 심리학을 박살내도
자유는 오지 않는다.
그리고 “유전자가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만큼이나
“문화가 인간 행동을 결정한다”도 자유를 빼앗는다. 문화는 당신들이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진화 심리학이 엉터리인지 여부는
과학 철학의 기준 즉 논리적 일관성과 실증을 통해서 정할 일이지 “자유가 있어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식의 도덕 철학의 기준에 의해 정할 문제가
아니다. 세상은 당신의 도덕 철학에 부합하게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다.
세상을 당신이 창조한 것도 아닌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동기와 능력을
보고 평가하면 된다. 자유 개념이 없어도 지장이 없어 보인다.
A가 B에게 총을 겨누면서 만약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고 하자. 결국 B는
편의점에서 절도를 했다. B는 경찰에게 “어쩔 수 없었다”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B가 자유 개념을 사랑한다면 “나에게는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따라서 나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유 개념 없이도 이 문제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B는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절도를 했다. B의 동기는 “나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다. 내가 보기에는 B의 목숨도 매우 소중하다. 따라서 그것을 위해서는 조그만 절도 정도는
해도 된다.
A가 호숫가에 있는데 B가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옆에 구명 튜브가 있었다. 그런데 A는 나무에 묶여 있어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B를 구하지 못했고 B는 익사하고 말았다.
이 경우에도 자유 개념은 필요 없다. A는 묶여 있어서 B를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책임이 면제된다.
나찌 치하에서 사람들을 마구 죽인 장교들이
“나는 어쩔 수 없었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이럴 때에도 자유 개념 없이 그 사람의
행동을 평가할 수 있다. 두 가지 요인을 고려하면 된다. 첫째, 만약 명령에 따르지 않았으면 그 장교가 어떤 일을 당했을까? 감봉? 파면? 징역형? 사형? 둘째, 감봉 또는 파면 또는 징역형 또는 사형을 면하기 위해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 용서될 수 있는가?
그냥 그 사람의 동기와 능력을 따지면 된다. 그 동기와 능력이 유전자, 문화,
신경 과학 법칙, 화학 법칙, 물리학 법칙 등에
의해 결정되는지 여부를 굳이 논할 필요가 없다.
물론 “결정론이 옳다면 자유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라는 입장이 틀렸음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듯이 도덕 철학은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입장일 뿐이다.
그런 사람의 입장이 내 입장과 다를 뿐이다. 그 사람이 “만약 주사위 놀이는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정말로 옳다면 형법을 몽땅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틀렸음을 입증할 수 없다. 다만
비웃을 수 있을 뿐이다.
이덕하
2012-09-19
첫댓글
고장이 발생해서 급발진으로 사상자를 낸 무인 자동차를 교수형에 처해야 할까요?
유물론적 관점에서 저는 범죄자의 뇌도 고장난 자동차와 마찬가지라 봅니다.
자동차건 사람이건 고장난 부분이 있으면 수리하면 되지요.
고장이 났다고 목을 매달고 두들겨 부수고, 이건 합리적이지 못한 것 같습니다.
“고장난 차를 교수형에 처한다”는 법을 만들어도 차의 행동(?)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차의 경우에는).
반면 “강간을 하면 감옥에 가둔다”라는 법은 강간율에 영향을 끼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