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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회차-白頭大幹 매요-아막산성-구간 | 일시:2019년 4월 21(일요) 기록: 한문희총대장010-7679-7587, | 다음카페- 자유인산악회-백두대간23기종주대-02-834-1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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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頭23期>- 제2회차 아막산성구간 종주일지,
자유인 백두대간 23기-제2회차 아막산성구간 종주기록, ☞일시: 2019년 4월 21일(일요), 기록: 한문희총대장 外 40명 ☞대간숲길: 고남산주차장-통안재-유치재-매요리-유치3거리-618봉-사치재(동물이동통로)-새맥이재-시리봉-781-아막산성-복성이재, ☞도상거리: 14km, 실제: 16km(GPS기록), 6:20분소요, -07:20분, 서울 양재역 최종출발, -10:31분, 여원치(女院峙470m) 운봉읍 준향리, -10:51분, 고남산주차장(남원시 운봉읍 권포리 산 20-1) -11:00시, 통안재 704m, -11:42분, 유치재 540m, -12:08~12:20분, 매요리(梅要里),(남원 운봉읍 매요리452-3 마을회관), -12:25~30분,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유치(柳峙), -12:56분, 618봉, -13:05~40분, 묘지에서 점심,(남원시 운봉읍 가산리 산 41), -13:56~14시, 사치재(沙峙500m),(남원시 아영면 아곡리446-2) -14:12분, 폐 헬기장 625m, -14:30분, 조망봉, -14:52분, 자작나무군락지 농로 임도, -15:19분, 새맥이재 515m, -16:40분, 아막산성(阿莫山城), -17:20분, 복성이재(複星峙),(남원시 아영면 성리) -17:50분, 복성이재 출발, --수고들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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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두23기>- 제2회차, 매요-아막산성 종주일지 - 01,> 권포리에서 1.5km에 서어나무 군락을 이루는 주차장(고남산)입니다. 이곳에서 한컷,
지난 22기수에서 표지판을 달고있는 이형도팀장과 최진호21기수 대원님,(통안재출발 11:00시)
통안재 출발한 대원들의 힘찬 백두 숲길을 열어가고 있습니다.
배경사진 뒷편으로 시원한 88고속도로가 있습니다.
자유인 선배들이 걸어갔던 백두의 탐사길 오늘도 우리는 그길을 이어 걷고 있습니다.
이곳이 백두대간에서 몇군데 아니되는 마을을 관통하는 매요마을입니다. 자연부락으로 큰마을이지요 예배당과 학교(초등폐교)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매요리(梅要里): 지세가 말의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말 마(馬)’자와 ‘허리 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馬腰里)라 칭하게 되었다. 그 후 임진왜란·정유재란이 7년 만에 끝나자 고승 사명당(유정(惟政))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마요리에 당도하였다. 사명당은 매화의 꿋꿋한 정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니 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그 후부터 매요리로 부르게 되었다.
고남산과 황산의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선 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날줄기가 마을을 포옹하듯 휘감고 있다. 북쪽 뒷산이 구릉을 이루어 방풍(防風) 구실을 하니 풍해와 수해가 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농사에 더없이 좋은 환경으로 알려져 있다.[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
운봉초등 분교가 폐교가 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발발과 중심지 남원(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남원은 전라좌도에 속해 있으면서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상우도와 접경을 이루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남원에 근거지를 둔 동학농민군은 주변 고을을 석권하고 나서 지리산을 넘어 안의와 함양으로 진출했다. 또한 전주성 함락 후 각 지역에서 집강소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전봉준은 전라우도, 손화중은 전라 아랫 지역, 김개남은 전라좌도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였다. 특히 부정한 벼슬아치와 횡포한 양반배를 가혹하게 징치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남원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 ‘김개남’ 김개남은 동학농민군의 포(包) 조직의 대표자 격인 대접주였다. 전봉준 등의 인물보다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894년 3월 1차 봉기 이후에 남원에서의 그의 세력이 매우 커져 7월 60여 일 동안 결집한 세력이 적어도 5~6만 명, 최대 7만 명에 육박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또한 남접농민군 지도부 중 유일하게 9월 봉기를 주장한 사람이 김개남이다. 그러나 전봉준 등은 이를 반대하였다. 김개남은 “해산하게 되면 다시 모이기가 어렵다.”고 하여 최대한 빠르게 전투를 치르기 위해 9월 재봉기를 주장하였지만, 전봉준은 “우리가 비록 인원수가 많기는 하나 모두 (신식 무기를 갖춘 일본군에 비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므로 쉽게 무너져” 패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여 결국 이때 재봉기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개남군은 청주성 공격을 위해 북상하였으나 일본군과 조우하여 패배한데다 읍내를 태우는 등의 잔혹한 행동을 하여 사람들의 민심을 잃었고, 결국 해산하게 되었다. 7만여 명이 모인 ‘남원 대회’ 김개남은 7월 15일 전봉준과 함께 대규모 농민 집회인 ‘남원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7만여 명의 농민군이 남원에 모였고, 새로운 집강소 질서가 탄생되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계기로 벼슬아치와 양반들에 대해 강경 노선이던 김개남군의 활동이 유해지는 경향을 띄었다.(중략) |
고남산이 이지역 지주의 산으로 우뚝 솟아 있다.
유치3거리를 지나 올려치면 618봉 이곳에도 이지역 봉우리마다 산성 흔적이 있듯 이곳에도 옛 흔적과 숨결이 느껴진다.
♠사치(沙峙)재와 88고속도로: 운봉읍 가산리 사치마을 앞 사치재, 백두대간에 속하는 사치재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광주에서 대구를 잇는 영호남 화합차원에서 건설한 2차선 고속화 도로였으나 지금은 4차선으로 확장되었고 사치령에는 인공터널이 설치되어 동물 및 산객들의 이동통로가 되었다. 터널 생기기 전에는 휴게소 방향으로 200미터 내려서면 지하통로를 이용하였고 간혹 성질 급한 산객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무단횡단하기도 하였으나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 다행이다. 인근에 지리산 휴게소가 있다. 일명 모래재라 하였고 모래가 날리는 언덕이라 사치재로 표기한 것이다.
사치재 상봉에 있는 헬기장(625봉) 입니다.
백두능선에서 바라보는 88고속도로 지리산 휴게소, 준공 기념탑이 보입니다.
새맥이재(515m): 남원 장수를 넘나들었던 고개로 임도(산판로)가 되어 있다.
♠아막산성(阿幕山城) 전북 기념물 제38호: 전라북도 남원시 아영면 성리에 소재한 아막산성, 복성이재에서 南으로 1.5km지점에 석축으로 쌓은 이 산성은 아영고원 줄기에 자리하여 산봉우리를 에워싼 것으로 둘레633m 가량이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사이에 격렬한 영토 쟁탈전이 벌어진 곳으로 신라에서는(모산산성)이라 불렀고 백제에서는 아막산성이라 불렀다. 성곽 안에는 우물터와 성문터들이 남아 있다. 현재는 석성이 무너지고 숲이 뒤덮고 있으나 신라+백제 양국의 지리적 요충지로 상호 첨예하게 두 나라가 대립한 흔적들이 석성의 요새화에서 숨결을 느낄수 있으며 옛사람들의 치열한 전투가 느껴진다. 이와 같이 소중한 보물을 무너진 상태로 방치해둔 관계기관들 역사를 간직하지 못함은 뿌리가 없음과 무엇이 다르랴!.... |
복성리재(複星峙): 남원시 아영면 성리와 장수군 번암면 복성리 마을을 넘나들던 고개로 복성에서 따온 이름으로 지금도 복성이재로 지명이 내려오고 있다. 유래를 살펴보면 변도탄이라는 기인(奇人)이 나라의 군량미를 관리하는 양관으로 어느날 천기(天氣)를 보니 3년이내에 국가에 큰 재난이 있을 조짐을 파악하고 나라에 상소를 올렸는데 평화로은 시대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한다고 삭탈관직을 하였으니 이후 기인은 지리산의 천기를 살펴보고 북두칠성의 복성(複星)이 빛이 머무는 곳에 멈추어 움막을 짓고 피신을 하였으니 이곳복성이가 바로 북두칠성의 복성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복성리라 하였다 한다. |
> ♪즐거운 산행길/김홍철
백두대간 그 먼~길을 가는 전설의 자유인들 오늘도 그들은 백두대간의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시대 묵묵히 나아가는 작은 영웅들!...
23기-제2회차 통안재-매요-아막산성 구간종주에 수고들 많았습니다. 다음 백두종주: 철쭉명산 매봉-봉화산-월경산 진행합니다. 영상물 보신 느낌은? 멘트 하소절 남기시면 복 받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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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사진 몇장 찿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