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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일국 경전방 원문보기 글쓴이: 대태양/김현수
2. 창조의 원칙과 진화론의 허구성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자신은 보이지 않습니다. 영적인 체험을 한 사람은 알겠지만 영계에 가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그 작용을 통해서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것이지, 실제 우리 눈으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 우주는 존재의 세계라고 오늘날 과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존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배후에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너나 나나, 식자(識者)나 무식자(無識者)나 누구를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생각합니다. 힘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존재하는 물건이 원인적인 것이냐 결과적인 것이냐 하는 것을 두고 볼 때, 현재 존재하는 것은 원인적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어떠한 절대자, 어떠한 주체, 어떠한 원인을 통해 결과적으로 빚어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빚어진 그 존재에게는 반드시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힘이 먼저냐 존재가 먼저냐 하는 문제를 두고 볼 때, 존재하기 전에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대한 이 우주는 이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의 기대 위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우주가 형성되려면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힘이 먼저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가 먼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힘이 먼저입니다.
또한 힘 자체는 그냥 그대로 존속할 수 없습니다. 힘이 계속 존속하기 위해서는 작용을 해야 합니다. 작용을 하는 자리에서만이 힘이 존속합니다. 전기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전기 자체를 보아서가 아니라 그 전기의 작용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힘은 반드시 작용한다는 그 원칙을 떠나서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존재와 작용의 원칙
모든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작용해야 하는데, 작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돼야 하느냐?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혼자서 작용하는 것은 이 우주에 없습니다.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상대적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주체와 대상의 인연 가운데서 작용이 벌어지고, 그 작용을 통해서 힘이 존속하고, 힘이 존속함으로써 하나의 존재물이 형성됩니다.
그러면 그 존재의 배후에 힘이 있기 전에 선행조건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작용입니다. 작용을 해야 합니다. 또 작용하기 위해서 필요한 선행조건이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를 귀납적인 방법을 통해서 추리해낼 수 있습니다. 주체와 대상이 없는 데서는 작용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선생님도 말을 하게 될 때, 듣는 사람이 없는데 말을 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체와 대상 관계가 없는 데서 말을 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입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반드시 서로 주고받는 작용을 영속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주체나 대상이 보다 이익 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런 데서만 작용이 계속됩니다.
작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데서만 작용이 계속되는 것이지, 마이너스되면 점점 작아지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만일에 작게 되는 것을 바라보고 작용하게 된다면 이 세계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곧 주체와 대상이 서로 보다 플러스될 수 있는 목적을 바라보며 작용하지 않고, 서로 작게 되는 목적을 바라보면서 작용한다는 원칙이 성립된다면 이 방대한 우주는 형성될 수 없습니다.
원소면 원소를 놓고 보더라도 그 원소가 어떠한 상대적 원소를 대하여 작용하는 데는, 서로 나을 수 있는 하나의 목적을 바라고 작용해야만 계속적인 작용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지, 보다 더 작아질 수 있는 목적을 바라고 작용한다면 계속적인 작용을 유지할 수 없고 없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원칙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그렇게 된다면 이 우주는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작용하는 데는 반드시 두 작용체가, 주체와 대상이 보다 플러스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작용을 합니다.
손해나는 자리에서는 절대 작용하지 않는다
주체와 대상이 작용하는 목적을 보게 되면, 이는 주체보다도 크고 대상보다도 큰 제3의 존재가 나옵니다. 우리가 어떤 집회에 참석한다면 그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참석할 때의 마음보다도 더 플러스될 수 있는, 좀더 나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찾아서 참석합니다. 만일 그 집회에 참석해서 마이너스의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러한 작용은 점점점 없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상세계에서 보이는 모든 작용은 스스로를 감소시키기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 작용을 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 시장에 나가는 주부가 있다고 하면, 시장에 나갈 때 한푼이라도 손해 보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가는 데는 반드시 이익을 바라고 나갑니다. 이 원칙이 자기 스스로 바라는 목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계속적인 작용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는 손해 나는 자리에서는 작용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천리요, 천칙(天則)입니다. 만약 손해 나는데도 작용을 한다면 거기에는 파탄이 벌어집니다.
친구를 중심삼고 그 친구가 “좋다” 할 때, 두 사람 사이에서 손해 나는데도 좋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든지 플러스되는 면이 있어야만 오랫동안 친구의 입장을 유지할 수 있지, 대하면 대할수록 손해만 보게 되면 갈라지지 말라고 해도 갈라지고 말 것입니다. 끝장을 보지 말라고 해도 끝장을 보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존재 원칙입니다.
남자 여자, 혹은 젊은 청년 남녀들이 서로서로 좋아하는 것을 보더라도, 서로가 대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둘이 보다 이익 될 수 있는 그 무엇을 발견하게 되면 서로 교제를 계속하지만, 손해 나게 되면 그 둘은 갈라지지 말라고 해도 자연히 갈라지게 마련이고, 둘의 사이는 더욱 나쁜 결과를 빚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용이라는 것은 주체와 대상 관계가 있어야 형성됩니다. 그리고 그 작용은 주체와 대상이 서로 이익이 되는 공동목표 하에서만 계속되는 것이지, 손해 나는 공동목표 하에서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주의 존재 철칙이요, 법칙입니다.
또 화학을 공부하는 화학도가 실험실에서 자기가 목적 하는 그 무엇을 연구하기 위해, 갑이라는 원소와 을이라는 원소를 작용시키려고 아무리 힘을 가하고 노력해도 작용하지 않는 원소가 있는가 하면, 생각지도 않고 아무런 힘을 가하지도 않았는데 작용하는 원소가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러냐? 이 화학도는 자기가 바라는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원소와 원소를 합하려고 하지만, 그 원소 자체는 작용하게 되면 자체에 손해를 초래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작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는 다른 원소끼리는 왜 합하게 되느냐? 그것은 플러스면 플러스 원소, 마이너스면 마이너스 원소가 서로 상대적 관계에서 보다 나은 결과를 바라볼 수 있어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작용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주의 존재 원칙을 규정지을 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반드시 하나의 원소가 자기 자체보다 나을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 데서만 작용한다는 원칙입니다. 자체보다 못한 결과가 나오는 데서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마이너스가 되는데도 작용하는 천리원칙을 세워놓았다면 이 우주는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하나의 원소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물질의 구성 단위인 원자는 어떻게 되어 있느냐? 전자와 양자가 서로 상대적 관계를 맺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작용하는 것은 서로가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자와 양자가 작용하는 것은 그 자체보다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모든 존재는 주체와 대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끊임없이 작용을 함으로써 힘이 형성되고, 그 형성된 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주체와 대상이 보다 나아지지 않고서는 작용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힘의 원칙과 사랑의 원칙
아메바가 작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도 작용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체와 대상 관계를 가진 사람이 서로 사랑을 중심으로 생리적 작용을 주고받으면 생명이 태어납니다. 아메바는 아메바 자체에서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주고받아 작용합니다. 두 목적이 하나의 결과가 되어야 발전합니다. 그렇지 않게 될 때는 작용하지 않습니다. 이게 원칙입니다.
아메바를 두고 볼 때, 주고받는 작용을 해서 아메바 이상 큰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그 이상 큰 것이 나와야만 발전합니다. 이 말은 힘이 작용했으면 더 큰 힘이 나와야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에너지가 소모되지 않고 더 큰 에너지가 생겨야 된다는 말입니다. 발전이란 에너지가 작용하면 할수록 자꾸 불어나야 된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 작용하면 어떻게 되느냐? 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작용하게 되면 그 자체에서 소모가 벌어집니다. 흡수작용을 하면 보급해야 하기 때문에 소모가 벌어집니다. 생명의 기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모시키는데 힘이 더 커질 수 없습니다. 입력만큼 출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더 작아집니다. 전기 모터를 볼 때, 들어가는 전기의 힘과 나오는 힘이 같으냐? 소모가 벌어지기 때문에 나오는 힘이 더 작습니다.
그런데 진화라는 것은 뭐냐? 입력보다 출력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느냐? 이것은 힘의 원칙으로 볼 때 불가능합니다. 입력보다 출력이 크게 되려면 제3의 힘이 플러스되어야 합니다. 만약 진화론이 옳다면 우주에는 큰 문제가 벌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3의 힘이 필요합니다.
원숭이와 사람은 종자가 다릅니다. 원숭이가 문화적인 생활을 하느냐? 사람은 생명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종교가 따라다녔습니다. 그렇지만 원숭이는 문화를 가지고서 세계를 통일하자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를 점령하여 자기 나라로 만들거나 국경선을 만들어서 네 나라 내 나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과는 종자가 다릅니다. 원숭이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는 것이 최고고, 먹고 나서 번식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사람과 원숭이는 전혀 다릅니다.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원숭이가 사람으로 진화했다고 억지를 부리면서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입력보다 출력이 작다는 원칙에 벗어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주체가 대상을 대해 열만한 사랑을 주었다면 대상에게서 주체에게 아홉만한 사랑이 돌아오는 법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은 작게 돌아오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최소한 같지 않으면 플러스되어 돌아오는 것이 사랑의 법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은 보통 힘의 작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힘에 의한 작용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사랑은 작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좋아합니다. 부모와 같은 아들딸, 혹은 부모보다 나은 아들딸이 태어날 수 있는 것은 사랑의 법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곤충이나 모든 식물들도 사랑에 의해서 생명을 유지해 나갑니다.
씨는 망하지 않습니다. 작용을 하더라도 망하지 않고 유지되는 것은 주는 힘보다 돌아오는 힘이 더 강하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힘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그 힘을 통해 인간은 퇴화하지 않고 유지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손수건 같은 미미한 것을 하나 줘도 그것을 생명시합니다. 사랑은 그런 무한한 힘이 생기게 합니다. 그래서 모든 번식은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진화론의 허구성
요즘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면서 인간이 아메바에서부터 진화했다고 합니다. 생물학자들은 원숭이가 자기 할아버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사스런 것들이 천하를 망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소탕하기 위해 통일교회 선생님이 나왔습니다.
힘의 이치는 들어오는 힘(入力)과 나가는 힘(出力)이 서로 같은 법이 없습니다. 공식이 그렇습니다. 반드시 들어오는 힘이 큽니다. 이걸 물리라는 과목을 통해서 배웠을 것입니다. 전기를 두고 보더라도 모터를 거쳐 나가는 힘보다도 들어오는 힘이 더 큽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작용하면 소모되기 때문입니다. 작용하는데 더 커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아메바가 작용하는데 어떻게 플러스가 되느냐? 플러스될 수 없습니다. 플러스가 되게 하려면 어떻게 돼야 하느냐? 플러스가 되게 하려면 제3의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들어갈 때보다 고차적인 기준의 힘의 작용체가 가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 원숭이를 비교해 봅시다. 원숭이는 그저 낑낑거리면서 먹고 자고 새끼 낳는 것이 제일입니다. 원숭이가 고향의 어머니 아버지가 보고 싶다고 울고 그러느냐? 그러지 않습니다. 원숭이가 형을 위해서, 혹은 부모를 위해서 죽으려고 하느냐? 그런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습니까? 형을 위해서, 부모를 위해서 죽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원숭이와 사람은 근본이 다릅니다. 종자가 다릅니다. 그리고 원숭이는 모여 앉아 조상이 어떻고, 신이 있느니 없느니 하면서 의논하지 않습니다. 영계가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평화의 세계라든가 하나의 세계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런 원숭이가 진화해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람들은 개나 돼지와 같은 패들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중심으로, 보다 큰 것을 소망하면서 살게 되어 있지 자기보다 낮은 것을 소망하면서 살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인간은 생겨날 때부터 신을 숭상해왔습니다. 신을 숭상하지 않은 종족이 없습니다. 신을 생각하고 우리 인간이 보다 나을 수 있는 우주를 생각하면서 나왔습니다. 원숭이는 그런 것을 생각할 수도 없을 뿐더러 몇천 몇만 단계가 지나가도 안 됩니다.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을 주장하는 교수가 있다면 그 교수가 교단에서 내려섰을 때, “아! 선생님, 훌륭한 강의에 감탄했습니다. 원숭이 손자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하면 어떻게 할 것 같으냐? 그렇게 하면 분명히 “네 이놈!” 하고 욕을 했으면 했지, “야! 학생, 참 훌륭한 학생이구만. 내가 말한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참으로 유망한 학생이구만. 아이구, 참 반가운 말일세. 자네는 틀림없이 내 사위감이야” 하겠어요? 대번에 “이놈의 자식!” 할 것입니다.
인간만이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 대상
천지 만물 가운데 절대자인 하나님 앞에 절대적인 상대의 가치를 지니고 나타날 수 있는 존재물은 어떤 것이냐? 곤충일 것이냐, 아니면 우리집 마루밑에서 콜콜 자는 예쁘장한 강아지일 것이냐? 이러한 것들이 절대적인 하나님의 절대 대상이 될 수 있느냐? 만일 그럴 수 있다면 강아지보다 더 지혜로운 원숭이들이 참소할 것입니다.
그러면 원숭이일 것이냐?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숭이가 진화하여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같은 뼈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차원이 다릅니다.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영적 존재가 아닌 원숭이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근본이 다릅니다. 원숭이의 손과 발의 모양은 사람과 비슷합니다. 이렇듯 많은 부분이 사람과 닮았습니다. 이렇게 많은 부분이 사람과 닮았다는 것을 들어서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과 원숭이를 해부학적으로 보면 48가지가 틀리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화론에서는 원숭이가 비약적인 발전, 즉 돌연변이에 의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논리는 그럴 듯하지만 여기에는 무신론자들의 마술적인 요인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숭이가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는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원숭이를 절대적인 하나님이 절대적인 상대로 세웠다고 하면 사람들이 비판합니다. “하나님 상대가 저게 뭐야! 대변도 가리지 못하는구만. 다니는 것이 저게 뭐야? 네 발로 다니는구만” 하면서 참소할 것입니다. 네 발로 다니는 것은 아직까지 미완성했다는 증거입니다.
인간도 아기 때에는 네 발로 다닙니다. 그래서 원숭이는 형(形)으로 보아서도 미완성형입니다. 사람은 네 발로 다니지 않고 두 발로 다닙니다. 그것은 벌써 원숭이보다는 입체적으로 안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은 하늘과 땅의 연락기관입니다. 하늘을 향해 횡적으로가 아닌 수직으로 다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대자의 자리에 있는 하나님이 그 상대적 존재를 피조만물 가운데서 찾아 세운다면 어떤 존재를 찾아 세우겠느냐? 틀림없이 두 발로 걸어다니는 사람을 선택할 것입니다. 하나님과 통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원숭이가 영통(靈通)해서 방언한다는 말 들어 봤어요? 신약성경 베드로후서에 발람에게 나귀새끼를 통해 증거한 것은 돌변적인 역사(役事)입니다. 나귀에게 영(靈)이 들어가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책임을 못 하니까 할 수 없이 나귀를 통하여 역사한 것이지 본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사람만이 영계를 통할 수 있습니다.
방향이 있다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
아메바가 번식하여서 아메바보다도 큰 존재가 생겨나기 위해서는 다른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러면 아메바 자체가 그런 힘을 가하면서 발전할 수 있느냐? 자체적으로 그런 힘을 보충할 수 있느냐? 자체적으로는 그런 힘을 가할 수 없습니다. 자체가 힘을 창조하여 가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큰 존재가 생겨날 수 있느냐?
어떤 사람이 무하마드 알리와 같은 권투선수와 시합을 해서 이길 수 있어요? 이기려면 무하마드 알리보다 더 큰 힘과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힘과 기술을 어떻게 보충할 수 있느냐? 돌연변이에 의해 힘이 커지든가 아니면 알리보다 더 큰 힘을 낼 수 있는 주사를 맞든가 해서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알리를 이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메바에게도 더 큰 존재가 생겨나게 할 수 있는 다른 힘이 가해져야 합니다.
그다음에 아메바가 발전하는 데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향이 있다면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 동서남북 3백60도가 있는데, 하나의 높은 차원으로 갈 수 있는 방향성을 어떻게 갖게 되느냐? 3백60도를 갔다 왔다, 올라갔다 내려왔다 자기 마음대로 하게 되면 아메바에서 그보다 더 큰 존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면 방향을 누가 제시하느냐? 내가 방향도 정하고 힘도 가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는 존재가 물질세계에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생겨나는 데는 목적이 있습니다. 목적이 있어야 방향도 있는 것이지, 목적이 없는데 방향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도서관을 향해서 간다 할 때, 왜 도서관에 가느냐? 그냥 그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간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갑니다. 다 이렇게 방향이 있다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메바에게는 자기 이상의 힘을 투입할 수 있는 능력과 방향을 가질 수 있는 능력, 그리고 목적을 제시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할 수 없기 때문에 제3의 힘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목적과 방향성을 제시하는 원인적인 존재
이 세상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세계는 어디서 생겨났느냐? 오늘날 과학자들은 자연히 생겨났다고 하는데, 그건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다 속임수입니다. 그러면 그 자연은 어디서 생겨났느냐? 다시 말하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느냐? 과학자들은 그냥 저절로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면 피아노면 피아노도 그냥 생겨나고, 마이크도 그냥 생겨났다는 것이냐? 또 이 인체는 아무리 수백 만 명의 의학박사가 연구해도 해결하지 못하는 신비의 왕궁인데 “너 어떻게 생겨났느냐?”할 때, “그냥 생겨났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결국 원인 없이 생겨나는 법이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동기적 존재가 있다는 이론은 타당한 이론이요, 그러한 이론을 세우는 것은 과학적입니다. 과학적이라는 게 뭐냐? 가설이 현실적 사실로 들어맞게 될 때 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힘이 저절로 나온다는 것은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그건 과학적이지 못합니다. 힘이 나오려면 불을 피우든가 주사를 맞든가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방향성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그 자체가 방향을 가질 수 있느냐? 물질 자체가, 자연 자체가 그런 능동적인 주체성을 가질 수 있느냐? 없습니다. 과학적이라고 하려면 이론에 맞아야 합니다. 이론은 가설과 증명과 현실이 일치돼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이 우주의 원인적인 존재입니다. 이러한 모든 작용의 원인적인 존재, 힘을 가하는, 방향을 제시하는, 목적을 제시하는 원인적인 존재가 있다 하는 것은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인격적인 신이라고 합니다. 그건 왜 그러냐? 반드시 동기를 중심으로 방향을 가지고 목적을 제시하기 때문에 인격적인 신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원인을 통해서 방향을 따라 목적의 세계로 나갑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전체의 원인적인 존재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을 안 계신다고 하는 것은 죄중의 죄
인생에서 제일 문제 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죄인 중의 가장 큰 죄인이 어떤 사람이냐? 하나님이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도 자식이 어머니 아버지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 자식을 효자라고 하겠느냐 불효자라고 하겠느냐? 불효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있는데도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떠냐? 마찬가지로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런 사람은 다 망합니다. 그러므로 있는 하나님을 없다고 하는 것 이상 큰 죄는 없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놓고 하나님과 담판을 지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의 입장으로 들어가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 하는 것을 담판지었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나중에는 하나님도 감탄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보니 하나님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56-131, 41-165, 39-289, 38-139, 89-64, 39-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