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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일국 경전방 원문보기 글쓴이: 대태양/김현수
5. 우주의 근본은 무엇인가
인간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의 상대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고 물으면, “절대자요,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한 분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분과 인간은 어떠한 관계냐?”라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 아버지는 어떤 의미에서 부르는 아버지냐? 다만 존중하기 위해서 부르는 막연한 아버지냐, 아니면 정말 그러한 내용을 가진 아버지냐?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냐 하는 문제는 생각지도 않고 있습니다. 아버지면 어떤 아버지냐? 우리를 낳아준 육(肉)의 부모를 중심삼고 볼 때, 그 부모와 하나님은 어떠한 관계냐? 이것이 막연합니다.
우주의 근본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근본은 무엇이냐? 인간의 근본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근본은 무엇이냐?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생명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근본은 무엇이냐 할 때, 인간 이상의 것으로 올라갑니다. 그 이상의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 있어서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반드시 상대적 관계를 가질 때에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을 할 때,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됩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상대적 여건이 마련돼 있지 않고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데는 상대적 여건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면 그 상대가 누구냐? 그 상대가 동물, 혹은 만물 중의 어떤 것이 될 수 있느냐? 그건 사람 이외에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어떤 동물이든지 하나님을 추앙하고 숭배하는 종교 형식을 가진 동물은 없습니다. 인간만이 하늘을 추앙하고 숭배합니다. 이런 것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이 사랑의 근원지라면 그 사랑에 상대 되는 자격을 갖고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는 답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뿌리를 어디에 내릴 것이냐? 사랑하는데 어떤 자리에서 사랑하느냐? 주종(主從)의 자리에서 사랑하느냐? 주종의 자리에서 사랑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의 주체라면 절대적인 사랑의 상대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 입장에서 사랑해야 절대적인 사랑이 성립합니다.
종의 입장은 거리가 있습니다. 안팎이 하나되어 신경이 한 방향을 통해서 투입되고 주입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각기 다른 목적을 중심삼고 관계되어 있는 것이 종의 자리입니다. 사랑의 흐름에 있어서 그 동기를 같이할 수 없고, 바라는 최고의 상대적 여건을 같이할 수 없습니다. 외적 여건만을 관계지을 수 있는 자리가 종의 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종의 자리에 두고 사랑하려고 했느냐? 그렇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에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양자를 추구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양자로서 사랑하기를 바라느냐? 그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이상입니다. 양자 이상의 자리가 뭐냐?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고, 우리 인간은 그의 아들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외의 길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과 주종의 사랑 관계를 중심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절대적인 상대로서 사랑 관계를 중심으로 태어난 존재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아들딸이 되는 자리입니다. 만일 그 이상의 자리가 있다면 인간의 욕망은 또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최고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하면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응당 하나님은 인류의 아버지고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
우주의 근본은 부자의 관계다
그러면 그 아들의 자리는 어떠한 권위를 갖느냐? 그 아들이 어떠한 권위를 갖고 나오기를 바라느냐? 자녀에게 비판받는 아버지로서의 아들을 하나님은 원치 않습니다. 그런 종족의 대표자, 그런 나라의 대표자이기를 원치 않습니다. 절대자니만큼 절대자의 자리에 선 아들, 그런 권위를 가진 아들을 원합니다. 이런 아들의 권위를 가진 자리는 국가적이 아니라 세계적입니다. 더 나아가 천주적입니다.
우리 타락한 인간도 어느누구를 막론하고 세계를 자기 손아귀에 넣고 싶어합니다. 그런 마음은 어린아이에게도 있습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세계를 내 것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은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하더라도 더 높고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까지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합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렇습니다. 최고 높은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어도 만족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하나님과 나는 영원히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하나되어 “그자 나요, 나자 그다”라고 할 수 있는 자리를 원하는데, 그 자리가 어떤 자리냐? 사랑의 자리입니다. 그런 사랑을 중심으로 영원한 관계가 맺어집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의 주체이므로 우리 인간이 그분과 관계를 맺어 사랑의 일치점을 찾지 못하고는 인간 세상에는 영원한 사랑을 중심한 이상세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상세계는 어떠한 소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평화의 기원이요, 행복의 기원이기 때문에 정서적인 분야를 절대시한 터전 위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세계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상대적 여건을 중심으로 깊고 넓고 높게 세계 이상의 가치를 다짐할 수 있는 심정의 터전을 갖고 나서게 될 때, 그 앞에 외적으로 갖추어진 그 권위가 내적으로도 빛나는 것이지, 내적 기준이 갖추어지지 않을 때는 아무리 외적 기준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리어 불행을 자초하는 조건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부자의 관계인데, 어떻게 해서 그런 관계가 맺어졌느냐?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이 우주의 중심이 뭐냐고 묻게 되면, 부자지관계(父子之關係)라는 답을 얻게 됩니다. 우주의 중심이 뭐냐? 한마디로 부자의 관계입니다.
부자관계라고 해서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의 관계는 보통 생각하는 자기 어머니 아버지, 즉 인륜도덕을 중심삼은 부자의 인연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인간 관계에서 부자관계의 정(情)을 중심으로 하나되어 있는 그 자리가 우주의 중심입니다.
인간이 찾아야 할 우주 최고의 진리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하나님은 인류를 찾아나왔고 인류는 하나님을 찾아나왔지만, 확실한 일치점을 못 본 채 흘러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과 하나님이 주체와 대상 관계에서 합하고자 하는, 하나되고자 하는 공동목적의 자리가 어떤 자리냐? 도대체 인간은 하나님 앞에 어떤 자리에 처하게끔 만들어졌느냐?
우리 인간의 욕망을 보게 되면, 최고의 것을 전부 다 갖고 싶어합니다. 하나님이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점령했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 속에 한 가지라도 남은 것이 있다면 그것까지 점령하지 않고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결국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게 될 때, 비로소 그 하나님은 영원히 내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소유는 영원히 내 소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점령하지 못하면 지금 아무리 하나님을 모시고 있다 하더라도 그 하나님을 영원히 소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주체 되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서로 점령하고 점령당할 수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냐?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인간이 제자의 입장에서 사랑받는 자리냐?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딸이 있고 아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사위가 되고 며느리가 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냐? 아닙니다. 인간은 그보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 이외의 자리는 원치 않습니다. 이런 자리가 바로 하나님과 인간의 부자관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찾아오고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는 최고의 자리가 무엇이냐? 이것은 인간이 찾아야 할 우주 최고의 진리입니다. 이러한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문제를 놓고 누구보다도 고심한 사람이 통일교회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 신비스러운 경지에 들어가서 이것을 심각한 입장에서 추구해서 얻은 답이 부자의 관계입니다.
이때의 부자관계는 오늘날 우리를 낳아준 부모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를 창조한 절대적인 하나님과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류가 도달하여야 할 본연의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요 우리는 자녀라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엄청난 자리를 우리에게 허락하였습니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아버지의 것은 모두 자녀에게 상속됩니다. 세상의 부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생 동안 수고해서 돈을 벌어 집을 짓고 재물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고, 어린 아들딸이 “이건 우리집이야. 전부 다 우리 것이야” 한다고 해서 자식에게 “이 녀석아, 내가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수고한 줄 아느냐?” 하고 책망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녀를 보고 “이 녀석 이거 기특한데” 하며 칭찬을 합니다. 그 아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더 귀엽게 보입니다. 더 큰 소망을 갖고 바라보게 됩니다.
하물며 타락한 인간도 그런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인간의 아버지라고 하는 하나님이야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은 우주는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 속에 있는 하나밖에 없는 사랑, 절대적인 그 사랑도 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도 더 잘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부모의 욕망입니다.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자기보다 더 훌륭하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아들딸이 자기보다 더 높다고 해서 불평하고, 자기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고 자기를 주관한다고 해서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부모는 잘났는데 그 부모에게서 태어난 애기가 못났다 하더라도 이 아기는 어머니 아버지보다 더 잘생겼소 하면 그 부모는 좋아합니다. 그런 마음은 누구를 닮았느냐? 인간이 타락했을망정 하나님의 본성을 닮았습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무가치하게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무가치하게 지었다면 하나님은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에 무엇이든지 다 압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르고 지었다면 그 하나님은 불완전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을 지을 때도 절대적인 상대로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는 것
하나님은 아담 해와의 몸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사랑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인간을 대해 바라는 종착점은 무엇이냐? 그것은 아들딸을 만나 사랑하는 자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바라는 종착점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의 아들딸로서 사랑받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려 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아들딸로 만들려고 합니다. 이 둘이 상봉하는 자리가 부자의 자리입니다. 그 이상의 자리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최고의 욕망은 세계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세계를 지도하는 하나님을 내 것으로 만들고, 하나님 속에 하나밖에 없는 사랑까지도 점령하여 영원히 내 것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면 갈라지려야 갈라질 수 없습니다. 하나의 원소가 형성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모체가 되어 이상적인 실체권을 갖춰 영원히 존속할 수 있게 지어진 존재가 본래의 인간입니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가 형성되는 기준에서 생각할 때, 그 주체와 대상은 반드시 사랑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하나됩니다. 그 외에는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외에는 무엇으로도 하나되는 법이 없습니다. 지식으로도 안 되고, 권력으로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생명이라고 하고,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생명의 본질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인간을 지었지, 생명의 욕구로 인간을 짓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욕구로 인간을 지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적인 문제가 근본이지 외적 지적인 문제가 근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주체적인 존재요 인간은 대상적인 존재로서 서로 상응하고 영원히 일체권을 이룰 수 있는 그 자리는 어떤 자리냐? 그 자리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고 우리 인간은 아들딸이 되는 자리입니다.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종교는 하나님을 대하여 아버지로 신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륜의 원칙을 따른 불가피한 결론입니다.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소망의 자리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내 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영원히 점령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우리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일생을 투입해서라도 점령하려고 할 것입니다. 거기까지 가야 할 인생길이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을 아는 양심은 우리로 하여금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라고 밤낮으로 재촉합니다. 이런 양심작용은 혁명할 수 없습니다. 이 세계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 세계보다 더 큰 것이 있으면 그것도 점령하겠다고 하는 양심작용은 그 어떤 힘으로도 혁명하지 못합니다.
만일 양심이 없으면 악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고통도 안 받을 것입니다. 이 양심이 있어서 밤이나 낮이나 남 모르는 가운데 악한 행동을 하더라도 “네 이놈!” 하고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양심작용은 악한 행동에 대해 언제나 공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를 이 양심작용을 보고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만일 이 악만 없다면 우리 인간은 대단히 빠르게 그 목적지를 향해서 갈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간이 고귀한 양심을 중심으로 찾아가는 본연의 가치의 자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대하고 엄청난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자리는 그 자리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딸의 자리가 우리 인간이 도달해야 할 소망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가 되고 자기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더라도 아버지는 위에 있고 자기는 아래에 있는 것 같은, 상하관계와 같은 그런 기분이 듭니다. 그때 우리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하느냐? “아버지, 아버지가 앉으신 그 자리를 저에게 주세요. 저도 아버지의 자리에 앉고 싶어요.” 하는 욕망이 우리 인간에게는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네 이놈, 안 된다.” 한다면 다 깨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이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서 그래라, 어서 그래라.” 하면서 그 자리까지도 인간에게 부여해줍니다. 그 자리까지 인간에게 주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임재하여 우리의 마음을 성전으로 삼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성전에 임하여 우리 몸과 하나되어야 합니다. 즉 주체와 대상이 횡적으로 하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아담이 모든 만물을 일컫는 바 그것이 이름으로 되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아담에게 “모든 것을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아담이 어떻게 알아서 이 우주 만물을 주관하겠느냐? 그러나 하나님이 아담의 마음에 임재해서 하나되면 하나님이 아는 것을 아담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되면 그것을 누가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만일 그것이 갈라진다면 이상이니 희망이니 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그와 같이 고귀한 자리, 하나님이 처해 있는 동등한 자리까지도 주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을 부모와 아들딸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들이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서서 부모를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한다고 해도 부모는 그것이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절대적인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인간이 절대적인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에 설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
아버지 되는 하나님은 자식을 대해 자기의 제일 좋은 것을 전부 주고파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기보다 못난 자식을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이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을 닮아서 그렇습니다. 자식 되는 사람이 진짜로 나타나면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어하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완성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 자체는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는 그런 상하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사랑으로 하나되면 어떻게 되느냐? 안팎 관계, 내외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우리 인간은 그 하나님의 상대적 관계이기 때문에 외적인 하나님이 됩니다. 이상(理想)을 중심으로 말을 하게 될 때,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하나님은 동쪽에 있고 인간은 서쪽에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은 위에 있고 인간은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한 자리에 있어야 하느냐? 동기가 하나님이요, 결과가 인간이기 때문에 동기는 가운데 있고, 결과는 바깥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적인 하나님이요, 인간은 외적인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머무를 수 있는,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를 맺어 서로 살아갈 수 있는 이상적인 터전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자일신(父子一身)입니다. 일신인데, 상하관계의 일신이 아니라 안팎관계의 일신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는 무엇이 있어야 하느냐? 아담 해와, 그 자녀가 제일 사랑하는, 제일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깊은 곳에 숨겨 놓습니다. 사랑하는 물건을 길거리에 내던지지 않습니다. 귀한 물건일수록 깊이 감춰 둡니다. 그러면 인간에게서 제일 귀한 것이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을 어디에 모실 것이냐? 높은 산중에다 모셔 둘 수 없습니다. 언제나 나와 같이 있는 곳에 모시고 싶어합니다.
또 인간의 욕망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언제나 나와 같이 있어야 함과 동시에 그것을 다른 사람은 볼 수 없고 나만 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제일 사랑하고 나에게 귀한 분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보면 기분 나쁘다.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알 수 있는 그런 자리에 모셔두고 싶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마음 중심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이 나만 볼 수 있고, 나만 알 수 있고, 내 자체 가운데에만 있기를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셔두면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습니다. 나만 알고, 나만 보고, 나만 좋아할 수 있는 곳은 이 우주 공간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 내에서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간이 이상적으로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 곳은 인간의 마음 중심입니다. 그 외에는 모실 수 있는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에 임해야 되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집과 같은 입장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 마음이 보이지 않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이 우주를 창조한 절대자 하나님이 들어와 살 수 있을 만큼 크냐? 마음이 초가집만큼 작아서는 하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크냐? 하나님이 열 분이 있다 하더라도 전부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습니다. 큰 것이 있으면 전부 다 내 것 만들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 앞에 갖다 두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을 모셔 놓고 그 하나님 앞에 따르는 모든 나라까지 다 갖다 넣고, 혹은 세계가 있으면 그 세계까지 모두 갖다 넣고 싶을 만큼 방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모시더라도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분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을 다른 데 모실 데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같이 가고 싶어하고, 같이 있고 싶어하고,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어떻게 같이 살고 싶어하느냐? 하나님을 파고들어가서 하나돼 같이 살고 싶어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
하나님과 인간이 부자의 관계라고 했는데, 부자의 관계가 가진 특정한 내용이 무엇이냐? 아버지와 아들이 만날 수 있는 최고의 장소는 사랑이 교차되는 그 중심, 생명이 교차되는 그 중심, 이상이 교차되는 그 중심입니다. 그렇게 보면 사랑과 생명과 이상은 한 자리에 있습니다. 그 자리에 가면 하나님도 사랑이요 나도 사랑이요, 하나님도 생명이요 나도 생명이요, 하나님도 이상이요 나도 이상입니다. 그것을 결정할 수 있는 최초의 인연이 부자관계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예를 들어서 얘기해 봅시다. 우리가 어머니 아버지를 통해서 태어나려면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이 움터야 합니다. 상대적 관계가 성립해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그 사랑의 환경에서, 생명의 일치점에서 생명이 연결돼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싫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좋아서 못 살겠다고 해야 합니다.
부부가 사랑을 맺고 하나되어야 부부의 사랑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의 사랑은 내 사랑이요, 남편의 생명은 내 생명이요, 남편의 이상은 내 이상이 됩니다. 반대로 아내의 사랑과 생명과 이상도 마찬가지로 남편의 것이 됩니다. 그렇게 하나된 자리에서 자식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의 실현체요 투입체입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의 연장체입니다. 또한 어머니 아버지의 이상의 구현체입니다. 자식은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과 생명과 이상의 기반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부모는 그 자식을 보면 볼수록 사랑스럽고, 보면 볼수록 생명이 약동하고, 보면 볼수록 이상적인 상대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 연결되는가
그러면 하나님과 인간은 어디서 연결되느냐? 생명이 교류하는 곳, 사랑이 교류하는 곳, 이상이 교류하는 곳입니다. 그 점이 어떤 점이냐? 부자관계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랑의 주체요, 생명의 주체요, 이상의 주체이므로 자녀에 대해서는 위신과 체면을 초월합니다. 아무리 죄인 된 못난 자식이라도 하나님을 붙들게 되면 하나님이 야 이놈아, 안 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안고 비벼주고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체험한다면 뼈살이 녹아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고독하고 아무리 고난의 자리에 가더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갈 수 있다면 고통을 모릅니다. 그런 길을 살 수 있다면 억만금을 주더라도 사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돈 가지고 못 삽니다. 뼛골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의 심정을 설명하기 전에 주체요 대상이라는 감정의 흐름이 속에서부터 폭발되어야 합니다.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에는 사랑과 이상이 통하게 돼 있습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이 약동하고, 이상을 중심으로 생명이 약동하게 돼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거룩하며 우리 인간은 죄인이고 피조물이니 가치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말처럼 그런 입장이라면 하나님과 우리 인간은 연결될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한 중보가 있으니 그는 곧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됩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사람이요, 우리는 죄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과 교류될 수 있고, 생명과 교류될 수 있고, 이상과 교류될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요, 우주의 근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우주의 근본이 부자관계라는 것을 알게 될 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됩니다. 또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가치를 알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본향을 찾아가야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가 살 수 있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해야 합니다.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48-200, 54-81, 56-131, 69-71, 84-178, 53-280, 86-9, 104-95, 112-289, 118-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