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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천일국 경전방 원문보기 글쓴이: 대태양/김현수
4. 하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무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우리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세계에서 가장 귀한 단 하나의 보물을 가졌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관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그런 분인데, 어디에 보관해야 하느냐? 누구나 하나님을 갖고 싶어할 텐데, 하나님을 갖는다면 어디에다 보관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보물이 있다면 그 보물을 보관해야 하는데, 보관할 장소가 없습니다. 창고에 보관하면 누가 빼앗아 갈 수 있고, 계속 보관할 가망성이 없기 때문에 창고에 보관할 수도 없습니다. 안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그것을 품속에 안고 다닐 수도 없습니다. 언제 목이 달아날지 알 수 없습니다. 어디 건사할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보물이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자기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절대 안 보이고 내 눈에만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마음대로 건사할 수 있고, 자기만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일 귀한 물건이 있다면 하늘 꼭대기에 갖다 놓고 싶겠느냐, 갖고 다니고 싶겠느냐? 갖고 다니고 싶을 것입니다. 언제든지 가지고 다니면서 한시도 그 물건과 떨어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최고 보물이라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우리가 갖고 있다면, 그분을 어디에 모시고 싶어하느냐?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 창고가 있다면 어디일 것이냐? 그 창고가 우리 마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을 안전하게 모실 수 있는 창고입니다.
그 마음의 창고에다가 보이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모시고 싶어합니다. 보이면 기분 나빠서 안 됩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남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자기가 가졌다면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분밖에 없는 하나님을 모시는데 나만 알고 있고, 나만 비밀로 갖고 있는 분으로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속에 모시게 될 때, 그분은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최고의 분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만 통할 수 있는 분을 갖고 있다고 할 때 비로소 안심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어디에 갖다 모시려고 하느냐 하면, 우리 마음속에 모시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런 것까지 생각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있어야만 둘도 없는 행복을 느낍니다. 그런 자리가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렇게 행복을 느끼려고 마련한 자리가 마음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였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생각해 보십시오. 몇천 년 동안 이 작은 지구덩이 가지고도 서로 많이 차지하겠다고 나라끼리 치고 뺏는 싸움을 했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사람까지 빼앗으려는 싸움을 합니다.
그런 판국인데 천주의 대주재 되는 하나님이 인간의 눈에 보인다면 그 하나님을 서로 빼앗으려는 싸움을 했겠느냐, 안 했겠느냐? 그렇게 되면 이 싸움을 막을 도리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 보이기를 잘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보였다면 나라끼리 서로 자기 하나님이라고 싸울 것입니다. 그 싸움을 누가 말릴 수 있겠느냐? 하나님은 이런 싸움이 있을까봐 무형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있으면 마음이 압니다. 틀림없이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바람벽도 뚫어볼 수 있습니다. 태평양 바다 속도 뚫어볼 수 있습니다. 그런 능력이 인간에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몇천 년 전에 죽은 성인들을 현실 세계에서 운행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분이니까 하나님이 마음속에 들어오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영원을 시간으로는 포착할 수 없습니다. 영원 안에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안 보여도 됩니다.
하나님은 무형으로 계시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
이 우주는 신비에 싸여 있습니다. 그 크기가 2백10억 광년이나 되는 대우주입니다. 이제 과학자들이 점점 지식이 많아지면 더 큰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1광년이란 빛이 1년 동안 나아가는 거리를 말합니다.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빛인데, 이 빛이 1년 동안 나아가는 것이 1광년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큰 우주를 지배할 수 있는 주인은 얼마나 크겠느냐? 키가 크다면 얼마나 크겠느냐?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크다면 하나님 자신이 거추장스러운 몸을 끌고 다닐 수 있겠느냐? 철거덕철거덕 다닌다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 한번 움직이면 우주가 전부 놀라 자빠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그런 불편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주인이 되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2백10억 광년이나 되는 우주를 내 품에 품겨 오라. 넌 내 안에 있어라 할 수 있는 몸을 가진 하나님이라면 얼마나 거추장스럽겠어요? 하나님이 볼 때도 한심할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하나님,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중앙에서 마음대로 거동할 수 있는 무형의 존재로서 우주를 지배하는 것이 제일 편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누가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형이니만큼 존재세계를 마음대로 뚫고 오더라도 아무도 지장을 안 느낍니다. 우리 몸에 하나님이 와서 마음대로 지나가더라도 그걸 못 느낍니다. 그러니 얼마나 편리하냐? 그러니까 하나님이 생각 끝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있는 것이 제일 편리할 것이다 해서 그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됐습니다.
하나님이 커야 된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야 하는데, 그렇게 크다면 거추장스럽기 때문에 제일 작게 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주머니에 들어와서 잠도 잘 수 있고, 재미있게 놀 수도 있습니다. 여자들이 핸드백에 별의별 알록달록한 것들을 넣고 뭘하고 돌아다니는지 하나님이 뭘하고 돌아다니노? 하면서 조사도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냐? 그리고 사람의 몸 마음에 삭삭삭삭 들어가서 마음 보따리에 뭘 품고 다니나 조사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하냐? 그러니 큰 덩치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공기가 통하는 것을 모릅니다. 공기가 통하고 있지만 그걸 못 느낍니다. 공기가 통하는 것도 못 느끼는데 하나님이 통하는 것을 알겠느냐? 이렇듯 하나님은 무형의 신으로 있는 것이 최고 편리한 방법입니다. 그러면서 이 큰 우주를 보자기로 싸고도 남을 수 있는 그러한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무형의 하나님이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은 이 우주도 작다고 보고 더 큰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음 있는 곳에 하나님이, 내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못 봤지만 하나님이 있는 것을 압니다. 어떻게 아느냐? 우리 마음을 보고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기는 있는데, 어디에 있느냐? 우리 몸의 심장 가운데 있느냐? 심장을 쪼개면 마음이 쑥 뛰쳐나오는 걸 봤느냐? 마음은 우리 몸 가운데 어디에나 있습니다. 코에 있다 하면 코에 있습니다. 머리카락에 있다 하면 머리카락에 있고, 발바닥에 있다 하면 발바닥에 있습니다. 내 등뼈 가운데 있다 하면 등뼈에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피가 있는 곳, 내 신경이 가 있는 곳은 전부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 머리카락에 살짝 댔을 때 너 왜 머리카락에 대니? 하지 않고 야, 너 왜 내 몸에 대니? 그럽니다. 또 등에 닿으면 너 왜 내 등을 건드려? 하지 않고 야, 어째서 나를 건드려? 그럽니다. 그건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그것들이 나를 대표해서 있기 때문에, 내 가운데 다 있기 때문에 머리카락 대신 나, 등 대신 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발가락 대신 나, 손가락 대신 나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나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있고, 내가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내 속에 있습니다. 그러면 나라는 것은 뭐냐? 머리카락도 나, 등도 나, 손도 나, 발도 나, 나에게 속해 있는 모든 사지백체는 나입니다. 그러니 내 속에 있다는 말은 전체의 어디든지 있다는 말이 됩니다.
주체와 대상이 완전히 주고받는 곳에 하나님이 임재해
그러면 하나님은 어떠한 곳에 있느냐? 하나님에게 “하나님, 어떠한 곳에 있습니까?” 하고 물어볼 때, “어디 있긴? 나 여기 있다”라고 대답하는 하나님이라면, 점수를 준다면 30점도 안 됩니다. “어디 있소?” 할 때 “여기 있다”고 그러면, “여기가 어디요?”, “그저 여기 있다”, “그러면 하나님 사랑이 어디에 있소?”, “사랑이 나와 더불어 있지”, “나와 더불어 어떻게 있는 거요?”, “그저 있는 것이지” 그렇게 말해서는 백점을 못 맞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를 걸고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살아 있는 하나님인데, 살아 있기 위해서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역시 운동을 하는 우주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 가운데 어디에 있느냐? 우주 가운데 제일 운동을 잘하는 데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맨 처음 운동을 할 때는 왔다갔다하지만 완전히 운동할 때에는 한 자리에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돌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주고받아 돌게 되면 딱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거꾸로 가도 그 자리에 있고, 옆으로 가도 그 자리에 있고, 바로 가도 그 자리에 있고, 변함이 없다면 얼마나 멋지겠느냐? 하나님이 생각하는 분이라면, 운동하는 세계에서 중심의 자리에 있고 싶어할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요, 지극히 타당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있는 곳이 그런 세계인데, 하나님이 운동을 할 때 혼자 할 수 있느냐? 없습니다. 상대적 관계에서 주고받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곳이라야 하나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러한 곳에 들어가 있다면 얼마나 어지럽겠느냐? 그렇게 운동하는 곳에서 따라 돈다면 어지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하는 전체에 맞출 수 있는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세계는 주체와 대상, 내성과 외형으로 되어 있고,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돼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도 그런 우주 가운데 들어가 운동하려면 그런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는 큰일납니다. 파괴됩니다. 거기에 맞추기 위해서 하나님도 내성과 외형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와 대상이 잘 주고 잘 받는 곳에는 하나님이 언제든지 가서 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운동의 중심입니다. 그래서 모든 운동하는 곳에는 핵이 있습니다. 원자를 보면 양자와 전자가 운동을 하는데 거기에는 중심, 핵이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간에 목적이 있는데 목적이라는 것은 핵과 마찬가지입니다. 핵을 중심으로 모든 것이 연결돼 있습니다. 그것이 우주 구성과 발전하는 세계의 운동원리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거처하는 곳이 어디냐? 그곳은 완전한 주체와 완전한 대상이 완전히 잘 주고 잘 받아 영원히 운동할 수 있는 불변의 중심 자리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같이하는 존재는 영원합니다. 왜 영원하냐? 하나님의 성상을 닮아 하나님과 같은 힘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어디냐
하나님의 집은 어디냐? 하나님은 어떤 집을 원하느냐? 사랑의 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살 수 있는 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인간의 몸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성전에 들어와서 누구의 눈을 통해서 보고 싶어하겠느냐? 하나님의 눈으로 보겠느냐, 인간의 눈으로 보겠느냐? 내 눈을 통해서 우주를 보고 싶어하고, 내 귀를 통해서 우주의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내 코, 내 오관을 통해서 우주를 느끼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좋다 하면 몸은 자연히 좋아하게 됩니다. 마음은 어떻게 돼야 좋아하느냐? 사랑이 깃든 곳에 있어야 좋아합니다. 그러면 자유롭습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참사랑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자유가 아니라 구속입니다. 요즈음 미국 청년들이 마약을 먹고 “마약을 먹는 것은 내 마음이다.” 합니다. 그게 자유냐? 자유라고 하면서 마약을 먹지만, 그건 구속입니다. 거기에는 사랑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사랑을 위한 하나님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지은 것도 사랑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 돼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볼 수 있는 내 눈이 되어야 합니다. 공적인 눈이 되어 희생적인 입장에 서야 하나님을 대신해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 순수한 사랑의 창문이 열립니다.
내가 남자로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눈으로 미녀를 보면 “저 사람을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하게 되지, “아, 저걸 내가 어떻게 겁탈할까?” 그러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여자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떨까? 한번 찾아가 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게 공적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느냐?” 하고 알아봤는데, 없을 때에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줘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생해야 됩니다.
여자도 그렇습니다. 미남자를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눈으로 본다면 세계관이 달라지고 생활관이 달라집니다. 그렇게 살면 내가 아무것도 없이 일생 동안 살았더라도 그 뒤에는 세계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 안에 있습니다.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천국이 우리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마음이냐? 공적인 마음, 원리적인 마음, 희생하겠다는 마음 가운데에 천국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천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낙심할 때는 “아,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떠나는구나. 하나님이 보따리 싸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떠나면 다 잃어버립니다.
남자 여자가 하나된 자리에 하나님이 찾아와
남자는 왜 태어났느냐? 남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여자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때문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남자 때문입니다. 존재의 기원은 자기가 아닙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중심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면 남자 여자는 무엇으로 구별하느냐? 머리카락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듣고, 말하고 다 마찬가지인데, 무엇으로 구별하느냐? 남자 여자는 딱 한 가지 가지고 구별합니다. 그게 뭐냐? 가장 귀한 것입니다. 남자로서 주장할 수 있는 특권적인 부위가 남자에게 가장 귀한 것이고, 여자로서 주장할 수 있는 특권적인 부위가 여자에게 가장 귀한 것입니다. 그것이 남자 여자를 규명하고, 남자 여자의 동기와 결과를 규명할 수 있는 가장 귀한 것입니다.
여자에게 가장 귀한 부위는 무엇을 하는 곳이냐? 무엇과 인연짓는 것이냐? 결합하는 곳입니다. 사랑을 연결하기 위한 메인 파이프입니다. 우리 몸의 보이지 않는 4백조 되는 세포가 그 메인 파이프로 해서 딱 한꺼번에 움직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발전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지성소가 어디냐? 하나님이 눈을 부릅뜨고 심각하게 찾아가는 사랑의 지성소가 어디냐? 하나님은 사랑의 주인으로서 지성소를 찾아가는데, 그 지성소가 어디냐? 우리 눈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손도 아닙니다. 그게 어디냐?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여자 남자가 일생 동안 이것을 붙들고 당신 없으면 못 살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주인인데, 어느때에 그곳에 찾아오느냐? 여자만 있을 때 찾아오겠느냐, 남자만 있을 때 찾아오겠느냐? 플러스 마이너스가 하나되어 더 클 수 있는 최고의 자리에 찾아올 것이 틀림없습니다. 추상적으로도 그런 결론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찾아오는데, 여자와 남자가 하나되어 그것이 하나의 마이너스 형태를 갖춘 그 자리에 찾아옵니다. 여자나 남자나 지성소를 갖고 있습니다. 그 지성소가 인간의 생식기입니다. 지성소는 돈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은 무엇보다도 귀하다. 하늘땅을 주고, 뭣을 주고도 못 바꾼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 하나님이 찾아오는 지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는 이 우주의 중심인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되고, 이상이나 모든 것을 소유하기 때문에 특권이 있는 곳입니다. 지성소에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생명과 사랑 중에 어느 것이 더 귀하냐? 지금까지 이것을 몰랐습니다. 사랑이 더 귀합니다. 왜 그러냐? 남자의 생명이, 여자의 생명이 지성소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에는 지성소가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사랑에는 지성소가 연결되기 때문에 사랑이 생명보다 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 앞에서는 자기를 주장할 권리가 없습니다. 순응해야 합니다. 부부 사랑의 원칙에 있어서는 남자도 자기 권한을 주장할 수 없고, 여자도 자기 권한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사랑에는 굴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천리입니다. 영원히 가져야 할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있는 지성소에는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성소만이 전체를 대표하고, 전체를 소유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 밥을 먹기 위해서 사느냐, 살기 위해서 먹느냐? 밥을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요, 살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자기 생명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자기 생명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되고, 여자도 남자를 생명을 바쳐서 보호해야 됩니다. 자기가 죽더라도 사랑을 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내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는 사람은 지성소에 설 수 있는 것이요, 자식을 위해서 생명을 바쳐 사랑을 실천한 사람은 성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효자는 어떤 사람이냐? 부모를 위해서 생명을 바친 사람이 효자입니다. 애국자는 성스러운 국가 사랑을 통하는 사람이고, 성인은 성스러운 세계 사랑을 통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늘과 땅을 합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스러운 아들입니다.
이런 결론은 모든 동물한테 물어 봐도 “하하하! 옳고말고, 옳고말고”, 광물한테 물어 봐도 “그렇지!”, 새들도 “그렇지, 그렇지!”, 전부 “그렇지, 그렇지!”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영계에 가도 “그렇지, 그렇지!”, 하나님이 봐도 “그렇지, 그렇지” 한다는 것입니다.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원칙으로 피조 만물을 지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사랑 때문에 움직이고, 사랑 때문에 살고, 사랑 때문에 태어나고, 사랑 때문에 노래하고, 사랑 때문에 말하고, 사랑 때문에 먹고, 사랑 때문에 호흡하고, 사랑 때문에 춤춥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술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 사랑의 메인 파이프 라인입니다. 메인 파이프 라인이 밤낮없이 프리 섹스하고 돌아다닌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만큼 세상 천지가 깜깜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구, 나 저 남편 싫어” 할 때는 우주가 왕창 깨져 나갑니다. 메인 파이프 라인이 완전히 깨져 나갑니다. 여자가 그러면 그 여자는 이 세상을 파괴하는 괴물이요, 남자가 그러면 그 남자는 세상을 파괴하는 악마입니다.
말씀출처(말씀선집 권-쪽) : 138-141, 85-141, 97-239, 1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