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고약한 인상으로 호통만 친
무지막지한 아빠에 대하여
지명인 한창인 여중고 시절을
얼마나 마음 상하며 보냈을까.
집단생활 속에서 원아들과 아빠 엄마의 중간에 서서
네가 겪은 고초를 알고 있고
슬기롭게 참고 넘긴 너의 심성에 대해서도
무척 고맙게 여기고
착한 내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내 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보낸다.
너의 편지 받고 이 글 쓰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구나.
딸아! 너무나 부족한 게 많은 사람에게
또 한창 자라는 너희에게 얼마나 부족한 게 많을까?
이 당연한 이치를 알면서도
너희 부족한 부분을 크게 확대하여 꾸짖기도 한
엄마 아빠의 심정을 이해하여 주니 고맙구나.
대학에 진학 안되어도 좋고
열심히 살아주면 더 바랄 게 없겠다.
너의 밝은 당당한 모습에서
아빠는 많이도 배우고 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 할 일들을 다 못하고
극히 일부분, 그것도 무척이나 부족한 데로 살아가다가 끝나는 거란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너희 3남매가 원에서 겪은 고초를
마음 아파하고 미안해한다.
그러나 그걸 좋은 기회로 활용하여 성장하는 것 같아 너희 3남매가 늘 대견하단다.
아이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자.
더욱 낮추고 안 보이는 숨은 생활 속에서
남을 위한 마음가짐으로 살자.
그러면 스스로 하늘로서 내려주시는 은총으로
빛이 날꺼야.
기왕에 하고 있는 진학 공부는 최선을 다해보고 안되면 직장인으로 힘껏 살아보는 거다.
지명아! 아빠는 어려운 중에도
또 한 편으로 매일을 감격으로 살고 있다.
지저귀는 새소리, 나뭇잎 하나가,
아이들 눈빛, 새순 자라가는 모습, 구름 한 점,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
모두가 감격이다.
삶의 경이로움, 자연의 오묘함,
인간관계의 깊은 교류와 정.
이것을 감격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할 때
풍요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니겠니.
마음의 절대 평화.
사랑하는 내 딸 지명,
내 아들 지훈, 지성, 엄마 안나, 만세!
1992. 6. 3. 아빠가
고 3 때였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담임 선생님은 숙제를 내주셨다.
한 달에 한 번 부모님께 편지 쓰기.
반 친구들은 낯간지럽게 무슨 편지냐며 아우성이었다.
시를 적어보내기도 하고, 노랫말 가사를 적어보내기도 하고, 이건 담탱이 시켜서 쓰는 거라며 솔직하게 써서 보내는 친구도 있었다.
난 그 시간이 좋았다.
엄마, 아빠께 말로는 표현 못 할 내용을 글로 쓰면서 무언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매월 말 사비로 우리들의 편지를 우편 발송해 주셨는데 나의 3번째 편지에 아빠가 학교로 답장을 보내셔서 담임 선생님이 반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셨다.
친구들은 '너네 아빠 멋지다'라며 부러워했고, 난 어쩐지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아빠는 단체생활의 질서유지 명목으로 자주 단체 기합을 주셨다.
누군가의 돈이나 물건이 없어졌을 때,
애들끼리 싸웠을 때 등등
그때마다 모두 앞마당 집합! 공원 약수터까지 선착순!
우리는 자주 약 2km 거리를 왕복으로, 전속력으로 달려야 했다.
단체로 엉덩이를 맞을 때도 많았다.
오빠들은 남자아이들의 군기를 잡고,
언니들은 여자아이들의 군기를 잡고,
그렇게 폭력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나는 욕먹기 싫어서 항상 단체 기합에 제일 먼저, 제일 앞에 섰다.
맞는 거보다 욕먹는 게 더 아플 때였다.
1~2년이 지나서야, 아빠는 이 방법이 틀렸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그때부터 평화의마을에 조금은 평화가 찾아온 것 같다.
나도 큰언니 대열에 들어서면서 슬슬 어깨가 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이른바, 문화통치 시대가 열렸다.
한 달에 한 번 그 시대의 셀럽을 초대해 강연을 들었던 "평화모꼬지",
등산, 태권도, 합창단, 사물놀이, 바이올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
명절에는 치열했던 방별 장기 자랑과 전국 말타기 대회,
여름방학에는 7박 8일 전국 여행, 겨울방학에는 가정 체험이나 직업체험,
꽃동네로, 소록도로 봉사활동도 다녔다.
하루하루가 시끌벅적, 야단법석, 재미났던 시절이다.
내가 일반 가정집 자녀(우리끼리 '깬집 애들'이라고 표현했다)였다면
이런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을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십 대 시절,
젊고 태산 같았던 우리 아빠가 그리워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