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시골에 사는,
나보다 4살이나 어리고,
몸도 불편한 이 남자는
서울 살고,
힘도 세고,
참하디 참한 나를 불편하게 한다.
어떤 때는 나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나에게 아쉬운 것 하나 없는 듯 행동한다.
나를 자꾸 들었다, 놨다 한다.
이 남자, 뭐지?
한벗재단에서 수많은 행사를 치르며 어느덧 행사의 달인이 되었던 나는
올해 마지막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옆구리가 시린 외로운 솔로들의 심장에 불을 지펴줄
"미혼 장애인 일일데이트"
지난 여름에 큰 호응을 얻었던 행사였고 이번에도 참가문의가 많았다.
사랑의열매회관 대강당을 빌려 풍선아트로 예쁘게 꾸미고,
전문가를 초빙해 화사한 메이크업과 멋들어지게 헤어 스타일링도 해준다.
커플들을 위해 사전에 준비해놓은 휠체어 데이트 코스 지도도 제공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참가한 남여 장애인 20명, 비장애인 20명이
자기소개도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하고 초청공연도 보며 탐색전을 펼친다.
맘에 드는 상대를 1순위, 2순위로 적어내고,
매칭을 해 커플이 되면 둘만의 데이트가 시작된다.
마무리는 다 같이 한자리에 모여 2차 파티를 즐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
이후 애프터는 그들 몫이다.
나와 썸을 타던 이 남자에게 행사에 참가하지 않겠냐고 슬쩍 물었더니
기다렸다는 듯 덥석 나가겠다고 한다.
후회하지 않겠냐는 말을 남기고.
2006년 12월 23일 토요일
아침부터 부산 떨며 준비한 행사장으로
머리에 무스를 떡칠하고 한껏 멋부린 내 썸남이 들어왔다.
모른 척하며 접수하고 자리를 안내한다.
사회자의 노련한 진행으로 1부 순서가 끝이 났다.
드디어 맘에 드는 상대를 적어내는 커플 매칭의 시간.
쪽지들을 거두어 진행요원들과 함께 펼치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펼치던 내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모든 여성 참가자에게 1순위로 선택받은 내 썸남.
자, 그럼 이 남자는 누굴 적었을까?
역시, 모든 남성 참가자들이 1순위로 적은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그렇게 둘이 커플이 되었다.
데이트를 떠나는 그의 입이 귀에 걸린 것을 보았다.
아주 눈꼴 시렸다.
2차 파티 장소에 가서 남은 행사를 준비하며
속이 타들어 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한 팀, 두 팀... 커플들이 돌아오는데
젠장, 그들이 가장 늦게 도착한다.
저녁식사를 하고 술 한 잔 나누면서 점점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오늘이 마지막인 듯, 모두들 너무나 신나게 불태운 밤이었다.
그 시간, 내 속도 하얗게 타버렸다.
행사가 끝나고
애프터 신청까지 받았다는 얘기를 듣고서야 알았다.
내가 내 발등을 찍었구나.
이 남자가 내 눈에만 빛나 보이는 게 아니구나.
왈칵, 눈물이 터졌다.
다른 여자 만나지 말라며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알고 보니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예상했다고 한다.
모든 것은 그의 큰 그림이었다.
그제야 난 깨달았다.
'이 남자, 밀당의 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