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무도 존경하고 자랑스러워하는 아빠.
대전역 몸 불편한 노숙인을 업고 집에 와서 씻기던 아빠.
사람들을 모아 소록도에 10여 년을 찾아가 문드러진 손 잡아주던 아빠.
장애인 이동 봉사대를 만들어 외출을 도와주던 아빠.
그래서 누구보다도 내 결혼을 지지해 줄 것으로 믿었던 우리 아빠가
잠. 적. 했. 다.
퇴소생들로 북적이던 설날, 신랑감을 데리고 나타난 나.
아빠의 표정은 묘했다.
그날 이후, 전화도 받지 않고, 메일 확인도 안 하신다.
주말에 내려가면 집에 안 계신다.
애타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빠 얼굴을 못 본 지 반년이 되어가던 어느 날,
아빠가 서울역이라며 나오라고 하신다.
냉큼 달려가 카페에 마주 앉은 부녀.
"아빠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너 진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아뇨, 저 자신 없는데요"
"뭐라고?
"아빠, 사람마음 어떻게 믿고 자신을 해요, 대신 저는 사람 안 믿고 하나님 믿을꺼니까 걱정마세요"
"..."
할 말을 잃으신 아빠.
아빠는 그동안 틈나는 대로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조언을 구했는데
하나같이 다들 말리더란다.
고생길 훤하니 절대 허락하지 말라고 하더란다.
그럼 그렇지.
아빠도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라 그때마다 마음을 다잡곤 하셨단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때문에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신다.
바로 우리 외삼촌, 김복관 옹.
아빠와 20년 연 배 차이가 나는 외삼촌께서는
눈을 감고 조용히 말씀하시더란다.
"너희 가정에 오히려 큰 축복이라"
그 말씀이 아빠의 굳었던 마음을 녹였다고 한다.
"그 사람이 너에게, 우리 가족에게 축복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얘기하시고
그제야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며 떠나신 아빠.
그날의 벅찬 심정을 잊을 수가 없다.
내 딸이 장애인과 결혼한다니
지난 설에
딸이 휠체어 장애인 청년을 신랑감이라며
불쑥 인사를 드리러 왔다
이후 반년이 흐르는 힘든 세월...
딸이 장애인, 그것도 근육이 퇴화되어 가는 근이양증 청년과 결혼하겠다는
충격에서 헤어나 반년의 숙려 기간을 흘러보내고 엊그제 결혼을 승낙하면서
아버지는
또 한 번 자유와 해방을 맛보며 '영적 진보'를 경험했구나.
그래,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가슴으로 깨닫는다.
처음엔 중도장애인줄 알았더니 지명이가 재직 중인 한벗재단 백 선생님께서 안타까움으로 먼 길 찾아와 권면,
'지명이가 그 청년을 만난 이후 감동의 생활을 하는 것 같다'라고 하며
근육장애인이라고 했을 때에야 처음 알고 더욱 놀랐는데
아버지가 이토록 덜 성숙하게 헤맬 때
엄마와 너희들은 이미 알고 있었고 심정적인 동의를 했다니
내가 부끄럽구나.
그래, 네가
"나도 오빠들같이 평화의마을 마당에서 결혼하겠다"라고 여러 번 말했지.
어디, 우리 식구가 10년 함께 산, 그 마당에서 3남매가 모두 결혼식을 올리게 되다니...
"너희 가정에 오히려 큰 축복이라"라고 격려하신 너희 외삼촌께서야말로 주례를 서실 자격이 있으시구나...
지난 반년
딸의 눈물을, 몇 차례의 찾아옴과 전화와 메일을 듣지도 읽지도 만나지도 않았었다.
이제 둘이는
모든 부정적인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빛으로 살고자 했다.
빛에서 빛으로 사는데 어둠이 끼어들 수가 없다.
놀라운 미래가, 세상이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