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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에 관한 좋은 자료가 있어서 옮겨왔습니다.
이 글을 쓰신 분은 충남대학교내에 있는 충남대교회 정경수목사님께서 한 형제님의 질문에
대한 자료입니다.
너무 길어서 일부만 옮겨왔습니다.
출처: http://cafe.daum.net/cnu.campusworship (말씀 나눔 47번)
샬롬!
한수원 형제님이 십일조 특강 자료를 카페에 올려달라고 요청하셔서
나중에 김인수 자매가 강의 내용을 원고로 작성하여 올리는 수고를 감당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저는 저의 신학대학원 논문 중 십일조 관련 부분을 정리하여 올리겠다고 했습니다.
아래 내용은 84쪽 분량의 논문 중 십일조 관련 부분만을 편집한 것입니다.
참고문헌은 모두 생략했고, 관련 성구 등을 정리한 표들도 생략했으며,
줄 간격을 줄였습니다.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고픈 소망이 있어서
전체 내용을 파일로 첨부하기는 좀 그렇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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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신명기 십일조 제도의 기독교 윤리적 고찰 및 현대적 적용
1) 기독교 윤리적 고찰
신명기 십일조 제도는 여호와께서 땅의 주인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그 땅을 받아 누리고 있다는 땅의 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반면에 당시 주변 국가들은 토지 소유권이 왕에게 있었다. 그리고 그 신민들은 상하 관계로 묶여있었다. 따라서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개념은 주변 다른 나라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땅의 소산물 중 십일조를 드림(실제로는 그들 자신이 먹음)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축복들에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 십일조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신명기 십일조 정신은 현대 교회의 십일조 정신과 큰 차이점을 갖는다. 현대 교회의 십일조 제도에는 십일조를 바치면 축복이요 그렇지 않으면 저주가 임하리라는 기복적 요소가 강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는 십일조의 근거를 신명기에서보다는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하)는 말라기서에서 찾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신명기 십일조의 기본 정신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생활의 터전, 즉 땅에 대한 겸허한 감사요, 그 땅에서 얻은 풍성한 수확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고 그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정신이다. 이것은 십일조를 드려야 축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게 되리라는 긴장이 감도는 그런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신명기 십일조 정신 중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공동체 정신이다. 그해 소산물의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놓은 후 그것을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즉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성읍으로 가져가서 가족이나 친척들과 함께 풍성한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었다. 즉 먹음으로써 드렸으며,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것을 받아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 반드시 자신의 성읍에 함께 사는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아야 했다. 그리고 매 삼 년 마다는 자신들이나 가족이 먹지 않고 전량을 자신들의 성읍에 모아 저축하였다가 다음 “십일조 드리는 해”(신 26:12)가 올 때까지 구제 양식으로 나누도록 하셨다. 이 구제의 십일조를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객, 고아, 과부,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레위인들이었다. 여기서 레위인은 당연히 기업의 땅(경작지)을 소유하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의 종교적 직책을 전업으로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십일조가 중요한 생계수단이 되어야 하는 사회 경제적 약자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고 ‘객’은 외국인 노동자이거나, 혹은 자기 지파의 땅을 떠나 이사와 살고 있는 땅 없이 타지에 가서 살고 있는 가난한 이스라엘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이들 네 부류 즉 레위인, 객, 고아 및 과부는 당시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 십일조는 사회 경제적 약자들을 배려하고 그들과 함께하며 나누는 그런 공동체적 나눔의 정신이 중심을 이루는 제도였다.
2) 현대적 적용
(1) 십일조 신학의 재정립
십일조는 분명 땅과 연관된 제도였으며 신명기가 가르치는 “십일조”는 토지 소유주에게만 의무를 부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국 교회의 오랜 십일조 관행에 친숙해진 사람으로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신명기가 가르치는 십일조는 땅이 없는 임금 노동자나 어부, 상인 등에게는 십일조를 드릴 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어부가 잡아 올린 생선은 당연히 십일조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생선을 들고 중앙 성소(예루살렘)까지 가면 다 썩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부들이 잡아 올린 고기를 팔아서 그것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규정도 없다. 말라기서가 언급하고 있는 십일조도 자세히 살펴보면 땅(토지)과 토지소산을 말하고 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께서 십일조를 언급하신 본문도 자세히 살펴보면 농산물 즉 토지소산의 십일조에 대해서만 언급하시고 계심을 알 수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23:23)고 말씀하심으로써 구약의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인정하심과 동시에 외형적인 것보다는 율법의 정신이 더욱 중요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반면에 현대 교인들은 성경 어느 본문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소득의 십일조’ 관행에 익숙해져 있다. 사실 ‘소득의 십일조’라는 말이 신약 성경에 단 한 번 나타나는데 그것은 성전에 서서 자기 의를 과시하던 바리새인의 위선적 기도에서 단 한번 언급되었을 뿐이다(눅 18:.12).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토지소산의 십일조’가 ‘소득의 십일조’로 바뀌었고, 하나님 앞에서 가족들이 함께 먹으며 즐거워하고 여호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십일조가 ‘드리는 십일조’로 바뀐 것이다. 십일조의 용도 또한 심하게 변질되었다. 봉헌자 자신과 그 가족 그리고 토지 없는 사회 경제적 약자들이 수혜자였던 십일조가 이제는 목회자들만이 그 주요 수혜자처럼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형된 ‘십일조’ 관행이 ‘주일성수’와 더불어 교인들의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처럼 가르쳐지고 있다. 이제라도 한국 교회는 신명기 십일조 제도로부터 배워서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찾고 십일조 신학을 새로이 정립해야만 할 것이다.
(2) 십일조 회계 분리
한국 교회에 있어서 십일조는 교회 수입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으며 다른 명목의 헌금 등과 통합되어 하나의 회계 속에 운용되고 있다. 반면에 신명기 십일조 제도는 다른 헌물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사용처와 사용 방식을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십일조 관행과는 너무나 뚜렷한 대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신명기 십일조는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 축복에 대한 감사 잔치를 위해, 그리고 2) 레위인을 포함한 사회 경제적 약자를 돕기 위해 사용되었다. 반면에 현대 교회의 십일조는 교회 일반회계에 통합되어 목회자 생활비는 물론 교회건축이나 종교부지 매입 등 용처를 가리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사회 경제적 약자를 돕도록 되어 있는 십일조 본래의 목적은 망각되고, 결과적으로 교회의 수입과 부의 축적의 중요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한국 교회는 황금만능주의에 빠져들게 되었고, 스스로 반기독교 운동을 부축이지 않았는지 자성해 보아야할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의 기본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는 십일조 회계를 독립시켜 본래의 목적대로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일조가 본래의 목적에 맞게 성도간의 코이노니아와 구제에 사용된다면, 그리고 이자 금지법과 면제년 제도가 원래 정신대로 시행된다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위에 이루어질 것이고 교회 중에 가난한 자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모습이 재현되고 그 파장은 불신 사회에까지 번져 나갈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주님의 나라가 땅 끝까지 미칠 것이며,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될 것이고, 세상은 그 빛을 향해 나아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맘몬을 끌어안은 채로 지금의 모습대로 나간다면, 한국 교회는 맛 잃은 소금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발에 밟히고 그들의 조롱거리가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한국 교회에서는 생활이 극빈하여 십일조의 수혜자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까지 십일조를 비롯하여 각종 헌금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다. 물론 그들의 아름다운 충성을 통해서 교회가 발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중 일부는 지나친 부담에 못 견뎌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잘못된 십일조 관행을 바로 잡지 못하고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일에만 열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십일조를 교회가 도적질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면 말라기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한다고 외쳤던 그 외침을 이제 한국 교회를 향해 외쳐야 할지 모른다. 지난 몇 년간 교회를 비방하고 헐뜯는 지상파 TV 방송의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방송이 어쩌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 현상이 소금 맛을 잃은 한국 교회를 향한 심판의 전주곡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한국 교회는 십일조 제도를 부의 분배 수단으로 활용하여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의 부가 일차적으로는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고 나아가 세상을 향해 흐르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구제사업의 활성화
대다수의 한국 교회는 구제 또는 사회사업을 위해서 총예산의 3% 남짓한 적은 부분만을 사용하고 있다. 반면에 그런 목적에 사용하라고 허락하신 십일조 제도를 통해 들어오는 헌금은 교회 예산의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면 다름 아닌 교회가 십일조 도적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비단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도 사회와 교회가 예전에 볼 수 없이 더 부유해져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외 원조는 상대적으로 줄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국가 주도의 사회복지 사업은 급속히 활성화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고유한 책무를 국가에게 떠넘기고 안일하게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세심하게 살피기만 한다면 교회가 해야 하고 또 할 만 한 일은 얼마든지 있다. 최우선적으로 교회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체들을 찾아내어 세심하게 보살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은 별로 내색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을 세심히 찾아내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 교인들을 살피고 돕기 위한 기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마치 초대교회에서 매일의 구제에 빠진 헬라파 과부들을 위해 일곱 집사를 임명하여 교회 내 고른 구제 사업을 관장토록 한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이제 바깥을 향한 눈을 안으로도 향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 내에서 소외되거나 그늘진 곳에 앉아 눈물짓는 사람이 없도록 해야 한다. 교회가 작은 이스라엘처럼 되어서 진정한 사랑이 넘치는 평등한 공동체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신정국가가 되지 않더라도 교회 하나 하나가 모두 초대교회처럼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된다면 세상이 교회의 빛으로 나아올 것이며, 교회 안에 맺혀진 풍성한 사랑의 열매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칭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교회는 그렇게 되라고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하 생략>
첫댓글 좋은 글 감사
좋은 글을 가져오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