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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05금-7일) 열자의 4태(太)로 보는 천지 창조의 그림
열자의 4태(太)로 보는 천지 창조의 그림
삼태극 하나님
하나님은 삼태극(三太極)으로 존재한다.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으로, 무극은 무엇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신성의 것을 의미하고, 태극은 법칙, 원리를 뜻하고(성리학에서는 태극을 리理로서 정의한다. 理는 원리 법칙을 뜻한다), 황극(황제의 다스림의 표준)은 무태극(無太極)의 자아와 에너지를 가리킨다. 이 태극(太極)은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로고스와 같다. 로고스도 원리, 법칙, 이성, 말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말하고 있는데, 이 하나님과 말씀이 무극과 태극을 말한다. 황극(皇極)은 이 태극 안에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요한복음 1장 4절)의,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말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을 가리킨다. 말씀과 생명의 관계는 임산부(姙産婦)와 태아(胎兒)를 생각하면 된다. ‘하나님과 말씀’은 하나님의 두 속성을 가리킨다. 부성성(父性性)과 모성성(母性性), 무성(無性)과 법칙성(法則性), 황극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아와 하나님의 활동력, 창조 이전에 말이다. 창조 이전의 하나님의 자아는 창조주 하나님이다. 우주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 무극과 태극의 관계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으로서 말한다. 이는 무극이 곧 태극이라는 말이다. 근데 하나님과 말씀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와 같은 것은 또 브라흐만(Brahman)과 아뜨만(Atman)의 관계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같다는 뜻이다. 이 둘은 하나님을 가리킨다. 세계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하나님과 말씀’을 성부 하나님으로 칭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성자 때문이다. 그 성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이 세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말이다. 그분으로 인해서 창조주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되었다. 물론 우주에 대해서도 창조자로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지만, 예수님에 의한 아버지는 친 아버지로서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호칭이 있지만 이것은 문제가 많은 것이라 새롭게 칭하는 것이 좋다. 삼태극을 이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구 삼태극과 신 삼태극으로, 구 삼태극(三太極)은 창조 이전의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을, 신 삼태극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구 삼태극은 성자에 대해서 성부 하나님이다. 그래서 신 삼태극에서 이 구 삼태극을 성부 즉 부극(父極)으로 하고, 성자를 자극(子極), 성령을 성극(聖極) 또는 활극(活極)으로 하면 된다.
창조 이전의 황극(皇極)은 또는 신약 이전의 황극은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 (the Spirit of God)으로 칭한다. 이 영은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발출 되는 것이다. 성령(Holy Spirit)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발출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과 성령은 그 출처가 다르다. 그리고 권능도 다르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없으나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거룩한 영 성령으로 칭해지는 것이다.
(요한 20:22) -부활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요한 7:39) 이것은, 예수를 믿은 사람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서 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오시지 않았다.
(누가 12:49) 나는 세상에다가 불을 지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바랄 것이 무엇이 더 있겠느냐? 50 그러나 나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괴로움을 당할는지 모른다.
(임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순정 기독교 158) “구약의 말씀에서 성령이 언급된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거룩함의 영(the Spirit of Holiness)으로 그것도 세 곳에, 즉 한 번은 시편서(51:11)에, 두 번은 이사야서 (63:10,11)에만 언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말씀에는 즉 사도행전이나 사도들의 서간에서와 꼭 같이 복음서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처음으로 성령이 비로소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주님만이 거룩하시기(묵 15:4) 때문이며 그 까닭에 또 천사 가브리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거룩한 이가 네게서 나겠다고 말했습니다.(눅 1:35) 또 예수님이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한 고로 성령이 아직 (사람들에게) 없었다고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엘리사벳에게 충만했다(눅 1:41) 그리고 스가랴(눅 1:67), 그리고 시므온(눅 2:25)에게 충만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 여호와의 영으로 충만했다는 뜻인데, 그때 벌써 세상에 계셨던 주님 때문에 성령이라고 불린 까닭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서에서는 아무 데서도 예언자들이 성령에 의해서 말했다고 하지 않고 오로지 여호와에 의해서 말했다고 되어 있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곳에서는 늘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 네게 임했다.], [여호와의 말이다.], [이같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한 점의 의문도 있을 수 없으니 나는 예레미야서에서만 유사한 표현이 있는 곳을 지적하면 대략 예레미야 1장-40장, 42장-51장에 기록된 말씀들을 읽을 수 있겠습니다. 유사한 표현들이 모든 다른 예언서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느 예언서에서도 성령이 그들에 의해서 말했다던가 여호와께서 성령에 의해서 말했다고 한 것이 없습니다.”
동양에서 말하는 창조
(노자의 도덕경 40장)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긴다)
만물은 유(有)에서 생기고, 유는 무(無)에서 생겼다. 무(無)가 유(有)를 창조하고 유(有)는 만물의 근원이다. 무(無)는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을 가리키고 유(有)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나님은 안과 밖이 없지만 절대계(絶代界)를 안이라고 한다면 상대계(相對界)를 밖이라 할 수 있다. 형이상(形而上)은 안, 형이하(形而下)는 밖, 하나님이 안에서 밖으로 나온다. 그것은 황극(皇極) 즉 일기(一氣)다. 이 일기는 남근(男根)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남성이고, 형이하는 여성이다. 생명을 창조하기 위해 하나님이 형이하를 품은 것이다. 그래서 나타난 것이 형이하의 일기(一氣)다. 이 일기는 남녀 관계에서 남근을 상징한다. 사랑하면 사정(射精)해서 정자가 나온다. 그 정자가 형이하에 준비된 곳에 들어간다. 그것은 말하자면 여성의 난자를 가리킨다. 난자는 정자와 만나 수정란(受精卵)이 된다. 이 수정란으로부터 생명체가 나온다. 수정란은 태극으로부터 음양이기(陰陽二氣)와 사상(四象)과 팔괘(八卦 : 소성괘)와 16괘(4획괘)와 32괘(5획괘)가 나오듯이 그와 똑같이 세포 분열한다.
(수정란의 착상 과정) 난자는 정자와 결합하여 수정란이 된 후 30시간이 되면 2개로 분할된다. 50시간째는 4개, 60시간째는 8개로 분열하여 자궁에 도착할 무렵이면 4번째로 세포 분열하여 16개가 된다. 수정란은 세포분열 하면서 커지지는 않는다. 크기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분열할 때마다 세포 크기는 작아진다. 수정란은 여섯 번째 분열할 때 64개가 되고 이때 처음으로 커지기 시작한다. 자궁에 도착한 수정란은 착상하기 위해서 8번째 분열을 하는데 이때 수정란 중앙의 세포가 커져서 태아아라는 작은 덩어리에 모이게 된다. 자궁은 수정란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체로부터 영양분을 끌어내는 기능을 하는 영양아층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수정란은 형이하의 태극(太極)이다. 태극은 이중적이다. 형이상(形而上)의 태극, 형이하(形而下)의 태극으로, 창조의 근원은 형이상의 태극이나 창조의 시작으로서의 근원은 형이하의 태극인 수정란(受精卵)이다. 남근에서 나오는 정자는 남근을 소유한 남자의 것으로 남자의 본질과 같다. 난자와 결합한 정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자식인 것이다. 인간 세계에서는 그것이 진리지만 창조에서는 아니다. 만약 창조의 정자가 창조자의 본질과 같다고 하면 수정란과 그 수정란으로부터 형성되는 생명체는 창조자와 본질이 같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그 생명체 또한 신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범신론(汎神論)이다. 그런 이유로 그 정자는 황극에서 유출된 것이 아니라 창조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창조해서 난자에 주입한 것이다.
창세기 1장은 천지 창조와 인간 창조에 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창조 첫째 날에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가 담겨 있다.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를 운행하고 계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운행하고 계셨다는 것이 그렇다. 2절 전체는 창조가 시작되기 직전의 상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성귀에서 난자에 대응하는 것이 물이다. 하나님의 영이 거닐고 있는 그 물, 이것은 깊은 물과 다른 물이다. 과학에서는 생명이 물에서 나왔다고 추론하고 있다. 그 물에 빛이 들어가서, (3절)에 빛이 있으라는 서술이 나온다. 이 빛에서부터 사실상 창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 빛은 난자와 결합하는 정자를 상징한다. 이 빛은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이 아니다. 창조된 것이다.
중국 고대 도가의 사상가인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도 창조의 직전 상태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상태를 한 마디로 혼륜(渾淪:혼돈)이라고 하는데,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고 있는 카오스 상태와 비슷하다. 천서편에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나온다. 태역은 기가 나타나기 전을 말하고, 태초는 기가 나타난 그 시초를 말하고, 태시는 형체가 나타나는 시초를, 태소는 질(質)이 나타나는 시초를 말한다. 태역은 창조 이전의 상태, 태초는 창조를 시작하기 위한 최초의 움직임을 말한다. 태시와 태소는 본격적으로 창조를 진행하기 전의 우주의 근본 상태를 묘사한다. 열자는 일기에 의해 조성된 카오스의 상태를 즉 형체와 질료가 섞여 있는 무질서한 그 상태를 혼륜(渾淪)이라고 칭했다.
주역에 태극이 나온다. 계사전에 태극으로부터 음양과 사상과 팔괘가 나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길흉화복(吉凶禍福)에 관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을 창조의 시작과 과정으로서 보는 것이 일반이다. 여기서 태극은 (도덕경 40장)의 천하만물생어유(萬物生於有) 유생어무(有生於無)의 그 유를 가리킨다. 태극은 이중적이다. 형이상의 태극, 형이하의 태극으로, 주역의 태극은 형이하의 태극을 가리킨다. 만물의 근원으로서의 유(有) 즉 수정란(受精卵)을, 이 수정란은 씨앗이 뿌려진 밭과 같다. 그 밭에서 나무가 자란다. 이 나무가 음양사상팔괘(陰陽四象八卦) 나아가 16괘, 32괘 64괘(대성괘)다.
(주역 계사전) 시고역유태극(是故易有太極 : 그러므로 역에는 태극이 있는데) 시생양의(是生兩儀 :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생사상(兩儀生四象 :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생팔괘(四象生八卦 :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 팔괘정길흉(八卦定吉凶 : 팔괘는 길흉을 정하며) 길흉생대업(吉凶生大業 길흉은 큰일을 낳는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와의 만남
태극은 리와 기로 설명한다. 리(理)나 기(氣) 하나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둘 다 포함하는 것으로 봐야 하고 황극은 그 태극의 기를 가리킨다. 원래 태극에 대한 중국의 관점은 기(氣)였다. 이것을 리(理)로 방향을 전환한 사람이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다. 태즉리(太卽理) 태극은 리다는 것은 생소한 발상이었다. 근데 그것이 사상계(思想界)에 먹혔다. 중국에도 우리나라에도, 특히 퇴계 이황은 태극의 운동성을 강조했다. 사단(四端 : 인의예지 본성, 성즉리)은 리발기수(理發氣隨 : 리가 발하고 기가 따른다)다라고 하면서, 리(理)는 원리, 법칙으로서 불변부동(不變不動)이다. 운동하는 것은 기(氣)다. 태극을 리라고 하는 입장에서, 또는 태극을 황극과 구분한 가운데서는 이런 이유로 태극이 아니라 황극이 우주를 창조하기 위해서 형이상에서 형이하의 세계로 내려왔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남녀 관계로 치환(置換)하면 자식을 낳기 위해 사랑의 행위를 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남성, 형이하는 여성,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운행하고 있다”는 서술이다.
국어사전적으로만 보면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인간의 창조를 다루는 것으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성경은 영적인 책으로서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 영적 재창조를 말이다. 이 관점에서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킨다(혼돈은 악, 공허는 거짓, 어둠은 무지, 깊은 물은 욕망을 가리킨다). 신성한 사랑을, 물은 인간 안에 있는 남은 것(remains)을 가리키고, 남은 것이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모르게 그 사람 안에 심어 놓는 구원의 바탕이 되는 인격적 요소를 말한다. 말하자면 인의예지의 단서가 되는 사단(四端 :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같은 것, 효성이나 우애, 이웃사랑 같은 것 이런 선한 심성을 말한다. 이것이 파괴되면 구원은 물 건너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심한 보살핌(보호)을 받는다. 그것을 묘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이 물 위를 운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의미에서도 그런 것이지만 생명을 창조하기 위한 움직임도 묘사를 한 것이다. 사랑을 해야 사정(射精)을 할 수 있고 사정을 해야 생명을 잉태시킬 수 있으니, 그 사정(射精)이 바로 (3절)의 ‘빛이 있으라’는 말씀이다. 영적으로는 복음전파를 가리킨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는 가르침, 가르침을 들어야 그 마음에 말씀의 씨앗이 심어져 즉 그 사람 안에 남은 것에 들어가 거듭남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창세기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3)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4)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셔서, (5) 빛을 낮이라고 하시고, 어둠을 밤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창 1장 1절)은 하나님의 창조를 말한다. 태초다. 기가 나타나기 시작한 상태, 이 이전은 열자가 말한 태역(太易)이다. 그 어떤 움직임도 없는 상태, (2) 절에 태시(太始 : 형체)와 태소(太素 : 질료)가 있고 이 둘의 조합으로 인한 혼륜(渾淪)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땅이 혼돈(악)하고 공허(거짓)하다 어둠(무지)이 깊은 물(욕망) 위에 있다(전적타락, 인간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는 말씀이다. (2절)의 하나님의 영은 본격적인 창조를 위한 사전 움직임을 가리킨다. 남녀의 사랑에서 남자의 사랑, (3절)의 빛의 창조는 그 사랑에서 나온 정자를 상징한다. 빛과 물(하나님의 영이 휘도는 물),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생명이 탄생한다. 이 하나가 만물의 근원이고 형이하의 태극을 가리킨다.
(열자 천서편 列子 天瑞篇) 열자가 말하였다. 옛날에 성인(聖人)은 음양 2기를 빌어 천지를 다스렸다. 형체가 있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면 천지[乾坤]는 어디로부터 생겼겠는가? 그러므로 이르기를,‘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태역이라는 것은 아직 기(氣)가 나타나지 않은 상태이다. 태초라는 것은 기(氣)가 나타난 시초이며, 태시라는 것은 형체가 나타난 시초이며, 태소라는 것은 물질의 시초이다. 기와 형체와 물질이 갖추어져서 서로 분리되지 않음을 혼륜(渾淪 : 기와 형과 질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는 상태)이라고 한다. 혼륜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그것을 들어도 들리지 않고 거기에 따르려 해도 따를 수가 없어 이를 일러 역(易)이라고 한다.
(주역정의 周易正義) 건착도(乾鑿度)에 이르기를 “형체가 있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에서 생겼으니, 건(乾 하늘)과 곤(坤 땅)이 어디로부터 생겼겠는가. 그러므로 태역(太易)이 있고 태초(太初)가 있고 태시(太始)가 있고 태소(太素)가 있으니, 태역은 아직 기운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요, 태초는 기운의 시작이요, 태시는 형체의 시작이요, 태소는 질(質)의 시작이다. 기운과 형체와 질(質)이 모두 갖추어져서 서로 떠나지 않음을 혼륜(渾沌)이라 이르니, 혼륜이란 만물이 서로 뒤섞여 있어서 서로 떠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고 좇아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易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로써 易의 이치가 有와 无(무)를 골고루 포괄함을 알 수 있다. <第一 論易之三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