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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8목-0412금) 태극기에 담긴 심오한 비밀?
태극기로 하나님을 표현하기
하나님이란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다. 사람으로 치면 영혼, 육체, 활동력이다. 또는 속사람, 겉사람, 활동력이다. 이 신의 대한 관념을 국기에 투영할 수 있다. 태극기를 바탕으로, 하나님은 절대자, 무한자이다. 형이상(形而上)의 존재다. 형상이 없다. 유한계를 초월한다. 이런 존재를 힌두교에서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범아(梵我)로서 말한다. 동양에서는 하늘 또는 햇님으로 말하고, 중용에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 하늘이 명한 것이 성이다)으로 표현한다. 하늘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말한다. 그런 존재가 인간 안에 성(性 : 인의예지 사덕, 명덕)을 두었다는 것이 천명지위성이다. 성선설(性善說)의 근거다. 브라흐만(Brahman)은 외부에 있는 신이고, 아뜨만(Atman)은 내부에 있는 신이다. 천명지위성의 하늘과 성 즉 천성(天性)과 같다. 아뜨만과 성(性)이 사람 안에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범아(梵我)와 천성(天性)은 이질적인 존재이고 초월적인 존재다. 형이상(形而上)의 존재다.
성리학에서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의 성(性)을 리(理)로서 정의한다. 성즉리(性卽理 : 성이 곧 리다), 이 리(理)라는 것은 원리, 원칙, 법칙을 말한다. 그리고 이 리를 태극(太極)으로도 말한다. 리즉태(理卽太 : 리는 곧 태극이다), 하늘이 성(性)을 부여했고 그 성을 리(理)라 하고 그 리를 또한 태극(太極)이라 하면 하늘에 대응하는 것은 태극 외에 무엇이 있을까?... 무극(無極)이 있다. 태극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극이다. 실제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무극=하늘>이다. 그러면 무극과 태극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둘의 관계를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 무극이 곧 태극이다)으로 말한다. 이것은 브라흐만과 아뜨만은 같다는 범아일여(梵我一如)와 같은 것이다. 범아(梵我), 무태극(無太極), 천성(天性)은 절대자 무한자인 하나님을 두 가지 속성으로 구분한 동양적 사유(思惟)로서 말할 수 있다.
서구에도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이 있다. 성경에, (요한복음 1장 1절)에 ‘하나님과 말씀’이 나온다. 하나님을 성부로 하고 말씀을 성자라고 하는 것이 일반이지만 말씀은 성자가 아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런 서술이 나오기 때문이다.
(요한 1:4) <그(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어떤 성경에서는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라고 하지만 헬라어 원문을 보면 ‘그 안에서(엔으로 1722번)’로 명백하게 말씀 안의 생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영어 성경에서도, 이 말씀 안의 생명(Life in Word)이 세상의 빛이라고 하고, 이 빛으로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다.
[NIV] (요한 1:4) <In> him was life
[KJV] (요한 1:4) <In> him was life
[NASB] (요한 1:4) <In> Him was life
예수님이 말씀에서 나오긴 했지만 말씀 자체는 아니다. 말씀과 생명은 구별된다. 이 말씀과 생명의 관계에 대한 좋은 예는 임산부이다. 임산부(姙産婦) 안에 생명 즉 태아(胎兒)가 있다. 구약에서는 여호와 하나님 하나로만 하나님을 생각했었다. 근데 신약에서 예수님이 나타나므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한 결과 말씀을 상정하게 된 것이고 그것에 더해서 말씀 안에 생명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성자를 있게 한 존재는 인간의 이해에서는 아버지밖에 없다. 원래 하나님은 절대자, 무한자로서 형이상(形而上)의 존재이기 때문에 이원성(二元性)의 성별이 주어질 수가 없다. 중성(中性)이기 때문에, 근데 인간에 대입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 것이다. 성육신 이전에도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 칭하고 있긴 하다.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 또 선택한 자와 선택받은 자로서, 그렇지만 아버지만이 아니라 어머니도 있지 않은가? 왜 어머니로는 하나님을 칭하지 않는가? 이런 와중에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모성성(母性性)을 보았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의 탄생으로 말이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모성성(母性性)을 본 것이다. 그 안에 예수님이 성육신 이전에 있었다고 말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하나님과 말씀’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고, 이 둘은 성부 하나님의 두 속성 즉 부성성(父性性)과 모성성을 가리킨다. 하나님과 말씀, 신(神)과 언(言) 즉 신언(神言)이 앞에 서술한 하나님에 대한 표현들 즉 천성(天性), 무태극(無太極), 범아(梵我)와 연결된다. ‘하나님’은 하늘, 무극(無極), 범(梵)과 통하고, ‘말씀’은 성(性), 태극(太極), 아(我)와 통한다. 우리는 성리학으로 인해서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인 성(性), 아뜨만(Atman)에 대해 그것은 성즉리(性卽理)다고 함으로써 원리, 법칙, 원칙을 말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는데 서구에서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그것을 ‘말씀’으로서 말하고 있었다. 이 말씀의 원어가 로고스(Logos)로서 로고스의 의미는 리(理)와 같이 원리, 원칙, 법칙이고 나아가 이성, 말을 가리킨다.
로고스(Logos) : 모든 사물의 존재를 규정하는 보편적인 원리이자 각각의 사물을 고유하고 일정한 것이 되게 하는 형식 또는 이성과 말
(요한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에 대한 동서양의 인식이 공교롭게도 똑같다. 천성(天性), 무태극(無太極), 범아(梵我), 신언(神言)으로, 근데 기독교가 다른 가르침들과 다른 것이 성자와 성령의 존재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성부 하나님은 둘로 구분되어야만 하는가이다. 성부 하나님은 형이상(形而上)의 존재가 아닌가? 유한자인 인간이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닌가? 근데 주제넘게도 그 하나님이 이러이러하다고 왜 인간이 나서서 말하고 있는가?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인간의 사고(思考) 수준에서는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실제가 어떠하든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리학의 창시자 주자의 말씀으로 족할 것이다.
(주희 태극해의 372) “무극을 말하지 않으면 태극은 하나의 사물과 같아져 온갖 조화의 근원이 되기 부족하며, 태극을 말하지 않으면 무극은 공허하고 적막함에 빠져 만물의 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무극이태극)이야말로 그 표현이 정밀하고 미묘하여 무궁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아래에서 말한 도리가 논리와 맥락이 질서 정연하게 되었으니 그저 지금은 우리 앞에 있으니 고금에 걸쳐 어떠한 경우도 (이것을 무극이태극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해한 것이 이렇게 분명하고 확실하지 않다면 의심스러운 점이 선생에게 있지 그(주돈이)에게 있지 않은 듯합니다.”
중용(中庸)의 천명지위성의 성(性)이 성즉리로서 리(理), 그 리(理)와 의미가 같은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말씀 즉 로고스(Logos), 성즉리(性卽理)는 로고스이므로 그 성즉리를 사람 안에 있게 한 하늘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된다. 마찬가지로 성즉리는 리즉태(理卽太)로서 태극이므로 무극은 그 성즉리를 명한 하늘이 되고, 이 하늘은 인간 밖이고 성즉리는 인간 안이므로 이것은 또한 범아(梵我)와도 연결된다. 브라흐만은 외재아(外在我) 또는 외재신(外在神)이고, 아뜨만은 내재아(內在我) 또는 내재신(內在神)이니, 정리하면 신언(神言), 범아(梵我), 천성(天性), 무태극(無太極)은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절대 무한자를 표현한 것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요한복음에서와 같이 그 하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 인해서 성부 하나님으로 불려진다는 것, 이 점이 기독교와 세계의 다른 종교들과의 차이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신 관념은 세 가지다.
첫째는 무극(無極)이고, 둘째는 태극(太極)이며, 셋째는 황극(皇極)이다. 무태극(無太極) 이외에 또 황극이 있다. 이 셋을 가리켜 삼태극(三太極)이라 한다. 황극은 주체와 활동 두 가지를 의미한다. 서경에서 은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의 현자인 기자(기자 조선의 그 기자)를 찾아가 나라를 다스리는 가르침을 청할 때 기자가 그에게 전한 것이 홍범구주(洪範九疇 : 홍은 크다, 범은 법으로서 큰 법을 뜻한다. 구주는 아홉 가지를 뜻한다 : 아홉 가지 큰 원칙)인데 여기서 다섯 번째로 제시된 것이 황극이고 이 황극에 대한 설명이 천자(天子)의 말과 다스림이다. 이 천자는 문자 그대로 하늘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다르게 말하면 하늘의 대리자로서 말할 수 있다. 하늘이란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불변부동(不變不動)이라면 이 우주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운동성을 부여해야 한다. 그것이 황극(皇極)이다. 또 운동하기 위해서는 주체 즉 자아가 있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황극은 주체와 운동성 이 둘을 포함하는 것이다. 무태극(無太極) 이외는 성경에서 계시되었듯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다. 이 생명이 바로 황극(皇極)이다. 태아도 인격체다. 성육신 이전에 예수님은 이 황극으로 있었다. 근데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다. 하나의 인격만 있어야 한다. 무태극(無太極)의 인격과 그 안의 태아의 인격 이 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무태극은 인격이 없다. 무인격(無人格)이다. 무태극의 유일한 인격은 말씀 안의 생명이라는 그 인격뿐이다. 황극(皇極)의 인격, 태아의 인격, 무태극은 불변부동(不變不動)이기 때문에 우주 창조는 이 황극이 한다. 황극은 기(氣)로서 운동하기 때문이다. 삼태극(三太極) 또는 삼일극(三一極)의 자아는 기본적으로 창조주이다. 이는 공적인 칭호다. 사적인 칭호는 성부 즉 아버지다.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있어서 피조물이기도 하고 자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우주와 지구와 인간의 창조가 나온다. 하나님이 창조했으므로 하나님의 것이 우주에 반영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 창조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창 1:2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그리고 그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온갖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
이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우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투영해서 창조했다. 인간을 소우주라고 하고 우주를 대우주라고 하는데, 소우주든 대우주든 삼태극의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으므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있을 수밖에 없다. 삼태극(三太極)은 창조주 하나님이자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주에 대해서 그런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아니다. 예수님은 피조물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삼태극을 부를 수 없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니지만 삼태극(三太極)의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서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성부 하나님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다. 친자(親子)다. 우리는 아니다. 양자다. 양자(養子, 휘오데시아, adoption)로서 하나님의 자녀다. 친자와 양자의 차이는 본질이 동일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다. 우리는 신성한 본질이 아니다. 피조 본질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우리는 완전히 다른 존재다. 예수님이 인간이라고 해서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예수님은 그 인간성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잠시 입으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그 인성을 벗고 아버지로부터 새로운 인성 즉 신성한 인성을 받아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본질뿐 아니라 겉모습도 우리와 다르다. 즉 하나님에게서 와서 인간으로 있다가 다시 하나님으로 돌아가셨다.
(요한 16:28)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the Spirit of adoption)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삼태극(三太極)은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사람 성자와 에너지 성령은 성육신 이후에 나타났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다고 하는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라는 것은 성육신 이후에 적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생각하듯이 세 분이 아니다. 한 분 하나님의 세 속성, 세 위격으로 봐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영혼과 육체와 활동, 속사람과 겉사람과 활동으로 말이다. 우리가 세 사람인가? 세 인격인가? 나라는 인격밖에 없다. 삼태극 성부는 속사람, 성자 예수는 겉사람, 성령은 활동력으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는 삼인격의 삼위일체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새 용어로 한다면 삼일신(三一神 : 삼일의 하나님)이 있을 것이고 또 삼태극이 성부이므로 이것을 부극(父極)이라 하고, 성자와 성령을 자극(子極)과 활극(活極) 또는 성극(聖極)으로 해서 삼태극(三太極)을 이중적 의미로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태극기(太極旗)로 표현하기
기(旗) 안에는 형이상의 삼태극(三太極)이 들어가야 한다. 무극(無極)은 가장 바깥에 그다음은 태극(太極) 중심에는 황극(皇極)이 있는 그림으로, 무극(無極)은 간단히 말해서 없음이므로 검은색, 태극(太極)은 있음이므로 흰색, 황극(皇極)은 기존과 같이 노란색으로,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음양이기(陰陽二氣) 즉 빨강과 파랑을 태극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태극이 아니라 음양이기다. 물론 태극 안에 음양이기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태극 안에서 기는 이기(二氣)가 아니라 일기(一氣)다. 그래서 이 일기를 태일(太一)이라고 한다. 또는 태극일기(太極一氣), 그러나 황극을 상정하면 이 일기는 황극(皇極)인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황극일기(皇極一氣)가 된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성육신 이전의 말씀 안의‘생명’으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무극과 태극의 비율은 3대 7에서 1대 9까지 할 수 있다. 팔괘(八卦)를 사각형 안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또 검정색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태극기 중심에는 황극이 있어야 하고 노란 원으로, 이 황극으로부터 음양이기와 사상(四象)과 팔괘(八卦)가 나오기 때문에, 삼태극 하나님을 성리학에서는 무극과 태극으로만 생각했다. 황극은 제외하고, 주자파가 그랬다. 주자학을 이어받은 조선도 그랬고, 근데 이 주자에 반하는 이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리적(理的)으로만 보던 시선에서 기적(氣的)으로 보는 이들이 나타났다. 중국 북송의 장재(張載)와 정이천(程伊川 주자학을 정주학이라고도 한다)의 형인 정명도(程明道), 한국에는 서화담 등등, 이들은 리(理)를 기(氣)의 운동변화에 내재된 법칙으로만 생각하며 기(氣)를 전면에 내세웠다. 그들은 리(理)의 자리에 기(氣)를 세우면서 그 기를 태허(太虛)라 칭했다. 창조 이전에 이 태허만 존재했다. 이 태허는 일기(一氣)다. 그래서 태일(太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일(一)로부터 이(二)가 나오고 이로부터 사(四)가 나오고 사로부터 팔(八)이 나오는 것이다.
이 황극 노란색 원은 작게 하고 그로부터 음양이기(陰陽二氣)가 나오는 것으로 해야 한다. 즉 빨강과 파랑은 그 노란색 원보다 조금 더 크게 그리는 것으로, 그다음에 음양이기 주변에 팔괘(八卦)를 그려 넣는 것이다. 처음에 태극기로 할 때 복잡하다고 해서 건곤감리(乾坤坎離) 4괘만 넣었는데, 정석대로 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음양(陰痒), 사상(四象), 팔괘(八卦)라는 것은 삼일신(三一神)으로부터 우주 만물이 생하고 변화하며 번성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상극(相剋) 변화 운동도 있지만, 팔괘는 자연만이 아니라 가정도 상징한다. 자연 : 건곤진손감이간태(乾坤震巽坎離艮兌 : 하늘, 땅, 번개, 바람, 물, 불, 산, 연못), 가정 : 건곤진손감이간태(乾坤震巽坎離艮兌 : 부, 모, 장남, 장녀, 중남, 중녀, 소남, 소녀), 이것은 사회와 국가와 세계로도 확장할 수 있다.
(추가 수정) 결론에 가서 형이하(形而下)의 태극(太極)이라는 것이 추가되어, 태극기를 다시 그릴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형이하의 태극이란 비유하면 수정란과 같다. 수정란에서 생명이 시작되듯이, 태극도(太極道)를 봐도 태극으로부터 음양이기가 나오고 사상과 팔괘가 나온다. 이것은 만물의 근원을 의미한다. 원천, 뿌리, 이 태극을 하나님으로 상정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람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범신론(汎神論 : 만물이 신이다)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진리가 아니다. 우상숭배(偶像崇拜)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형이하의 태극이 필요한 것이다. 이 태극은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그 창조된 유(有), 일자(一者)로부터 세상만물이 나온 것이다. 유출로서, 근원과 그 근원에서 나온 것이 본질이 같다.
이 형이하의 태극을 태극기 안에 무조건 넣어야 한다. 핵심이기 때문에, 그래서 황극은 바탕으로 물러나야 한다. 사각형 바탕색에 황색이 추가된다. 검은색 무극, 흰색 태극, 노란색 황극 이 셋을 넣고 색의 비율은 검은색이 가장 작게 하얀색은 중간, 노란색은 가장 크게, 그리고 중심에 형이하의 태극의 원을 그린다. 이전의 황극 자리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로부터 음양이기가 나오고 팔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 태극의 색깔은 무엇으로 하면 좋을까? 녹색????
삼태극(三太極)의 이중적 의미
전통적인 무극(無極), 태극(太極), 황극(皇極)이라는 삼태극(三太極)은 창조 이전의 절대 무한자에 대한 명칭이다. (요한복음 1장 1절과 4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과 말씀 그리고 말씀 안의 생명으로 있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이다. 그런데 그 삼태극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났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이 발출 되었다(요한 20:22). 이로 인해서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이 되고, 성령은 성령 하나님이 되었다. 이를 기독교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이라고 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삼인격의 삼위일체를 말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이것은 수용할 수 없다. 삼인격의 삼위일체란 성부도 한 존재, 성자도 한 존재, 성령도 한 존재이지만 한 분이라고 하는 즉 1 + 1 + 1 = 3인데 1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신비한 가르침이라고 그들도 말하지만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왜 세 분이 아닌가? 이성에 반한다는 것 이외에 달리 말할 것이 있는가? 삼태극(三太極)은 형이상(形而上)이다. 그래서 인간은 볼 수 없다. 절대 무한이라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다. 물론 생각은 할 수 있다. 무엇인가 있을 것이라고, 나아가 무극, 태극, 황극으로 그 형이상의 존재를 추론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존재를 형상으로 정의할 수 없다. 형이상이니깐, 형상이 있다고 해도 그 형상은 절대 무한 형상일 것이다.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실상 그 존재는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성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 계시를 하고 있다. 이슬람의 알라도 마찬가지다. 여호와가 알라이니깐, 그래서 우상, 형상을 절대불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예수님은 형상이 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이자 몸이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 1: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외아들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려주셨다.
(요한 14:8)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9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네가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면서 자기의 일을 하신다.
(출 33:20) 네가 내(여호와 하나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골로새서 1:15) 그 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골로새서 2:9)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 (고린도후서 4:4)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이 삼태극(三太極)을 둘로 나눠서 적용할 수 있다. 창조 이전의 삼태극을 구 삼태극, 성자와 성령이 나타난 이후에는 신 삼태극으로, 무극, 태극, 황극은 구 삼태극, 성부, 성자, 성령은 신 삼태극, 이 신 삼태극을 앞서와 같이 성부는 부극(父極)으로, 성자는 자극(子極)으로, 성령은 활극(活極)으로, 아니면 구 삼태극은 삼태극 또는 삼일극(三一極)으로 신 삼태극은 삼일신(三一神)으로 할 수도 있다. 구 삼태극은 창조주(創造主) 하나님이다. 창조주이기 때문에 창조력(創造力)이 있고, 그 활동으로 우주를 창조했다. 황극, 그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으로 칭한다. 성령(Holy Spirit)에 대비해서, 구약에는 이 하나님의 영만 나온다. 신약에는 성령만 나오고, 하나님의 영과 성령의 차이는 출처에 있다.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고, 전자는 삼태극(三太極)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또 다른 차이는 성령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왜 성령을 거룩한 영이라 부르는가? 그것은 사람을 거룩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예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기도). 왜 예수님이 내려오셨는가? 사람을 죄에서 물러나게 하여 거룩한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의 영으로는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사람으로 오셔서 사람들과 똑같이 온갖 시험과 고난을 경험하신 것이다. 그래서 성령을 성화주(聖化主)라고도 하는 것이다. 구 삼태극 하나님은 창조주(創造主), 성자 하나님은 구원주(救援主), 구세주(救世主), 성령 하나님은 성화주(聖化主) 이 셋이 신 삼태극(三太極) 삼일신(三一神)이다.
(히브리서 2: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5: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베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하나님의 창조의 그림
삼일극(三一極) 하나님의 창조는 황극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 일기가 하나님 밖으로 나가서 우주를 창조했다. 하나님은 형이상이고 우리는 형이하인데 하나님에게서 안과 밖을 구분한다면 형이상은 안이고 형이하는 밖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으로 일기가 나와서 우주를 창조했다. 동양에서는 태극으로부터 음양이기(陰陽二氣) 양의(兩儀)가 나오고 다음 소음(少陰), 태양(太陽), 소양(少陽), 태음(太陰)이라는 사상(四象)이 나오고 다음에 건태리진손감간곤(乾兌離震巽坎艮坤 복희 팔괘도) 팔괘가 나오는 식으로 말을 한다. 근데 태극 이외에 무극이 있다. 노자도덕경(道德經 40장)에서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 천하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 28장에는 무극(無極)이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온다. 노자(老子)의 의하면 태극이란 무극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무극이 태극을 만들었다, 창조했다는 말이다. 물론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유출된 것으로 즉 무극에서 나온 태극으로, 그런 식이면 만물은 태극으로부터 유출된 것이다. 이것의 문제는 무엇이냐, 범신론(汎神論 : 만물이 신이다)이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범신론은 진리가 아니다. 거짓이다. 그렇지만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의 과정은 유출이 아닌가? 이것을 모두 기(氣)의 운행과 변화로 말하고 있지 않은가?
태극 또한 이중적 의미가 있다. 동양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이나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일반 사람들은 생각을 해도, 학자들은 이 우주 이외의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우주의 존재와 소멸을 기(氣)가 흩어져 있다가 모이고 모였다가 흩어지고로 말할 뿐이다. 이런 하나의 세계라는 틀 안에서 태극(太極), 양의(兩儀), 사상(四象), 팔괘(八卦)는 유출이다. 성즉리(性卽理) 리즉태(理卽太)가 형이상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이 우주 안에서를 말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 관념은 하나님은 이 우주를 초월한다. 형이상(形而上)은 말 그대로 이 우주를 넘어선 것을 이른다. 이 두 가지 관점을 조화시킬 수 있다.
삼일극(三一極) 하나님은 형이상의 초월 존재이다. 이 분이 황극(皇極)을 통해서 우주를 창조했다. 이것이 노자가 말한 무(無)다. 유는 무에서 나왔다고 하므로 이 유는 태극이 될 수 없다. 이 관점에서는, 이 유(有)는 그렇지만 만물의 근원, 뿌리다. 이 유로부터 만물이 나왔기 때문에, 말했듯이 범신론은 진리가 아니기 때문에 무(無)에서 나온 유(有)로서 즉 유출로서 이 유(有)를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다. 그러나 유(有)로부터 만물이 나왔다는 것은 유출로서 생각할 수 있다. 이 우주 안에서의 본질은 모두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유(有)는 근원으로서, 뿌리로서 다른 여타의 것과 그 위상에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열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 사태(四太) 즉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나온다. 태역은 창조 이전의 부동의 상태를 가리킨다. 태초는 운동하는 최초의 상태를 가리킨다. 태시는 그 결과로 형체가 나타난 최초를 말하고 태소는 질료가 채워진 최초를 말한다. 태초, 태시, 태소는 지금의 우주 이전의 초창기의 우주를 말한다. 본격적인 창조가 있기 직전의 상태, 지금의 우주가 코스모스(Cosmos)라고 하면 이전의 우주는 카오스(Chaos)로 말할 수 있다. 이 카오스를 열자는 혼륜(渾淪 : 혼돈)으로 칭한다. 성경에도 혼돈이 나온다. (창세기 1장 2절)에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운행하고 계셨다”라고, 이것은 열자가 말한 혼륜과 같은 것이다. 열자의 태초(太初)의 그 기(氣)가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the Spirit of God)인 것이다. 그렇다면 만물과 본질이 같지만 그 만물의 근원으로서 유(有)에 해당하는 것은 여기서 무엇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감싸고 있는 ‘물’이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남녀 관계로 치환(置換)하면 자식을 낳기 위한 사랑의 행위다. 삼일극(三一極)의 하나님이 창조를 위해서 형이하로 내려오는 것이 그 사랑을 말한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의 황극(皇極)은 인간 남성의 남근(男根)에 비유할 수 있다. 자식을 낳기 위해서는 남근뿐 아니라 여성의 것도 필요하다. 난자(卵子) 말이다. 그것이 ‘물’이다. 그것이 물이고 이것이 (도덕경 40장)에서 말하는 천하만물생어유(天下萬物生於有) 유생어무(有生於無)의 유(有)로서 형이하의 태극(太極)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난자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정자가 들어가야 한다. 그것은 (창세기 1장 3절)에서 말하는 ‘빛’이다. 빛이 정자를 상징한다. 이 빛은 창조되었다. 본래 정자는 그 남자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황극의 정자라면 그것은 삼일극(三一極) 하나님과 본질이 같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범신론(汎神論)이 된다. 성경에서와 같이 그것은 창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빛과 물(light and water)’이 만나서 이 지구에 생명이 있게 되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이 휘돌고 있는 물은 영적으로는 사람 안에 있는 남은 것(remains)을 가리킨다. 이것은 구원받을 수 있는 바탕 성품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효심, 형제애, 우애, 이웃사랑 등등의 애정, 정서를 말한다. 천지 창조는 영적으로는 사람의 재창조인 거듭남(regeneration)을 계시하고 있다. 이 물이 없이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다. 그래서 암탉이 알을 품듯이(라하프) 그 물을 하나님의 영이 소중하게 품고 있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는, 이것에 대해서는 창조 행위와 관련해서 사랑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 난자는 수정란(受精卵)이 된다. 놀랍게도 수정란은 태극이 양의, 사상, 팔괘, 16괘, 32괘, 64괘로 분열 확장되듯이 세포 분열하고 확장한다.
(수정란의 착상 과정) 난자는 정자와 결합하여 수정란이 된 후 30시간이 되면 2개로 분할된다. 50시간째는 4개, 60시간째는 8개로 분열하여 자궁에 도착할 무렵이면 4번째로 세포 분열하여 16개가 된다. 수정란은 세포분열 하면서 커지지는 않는다. 크기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분열할 때마다 세포 크기는 작아진다. 수정란은 여섯 번째 분열할 때 64개가 되고 이때 처음으로 커지기 시작한다. 자궁에 도착한 수정란은 착상하기 위해서 8번째 분열을 하는데 이때 수정란 중앙의 세포가 커져서 태아아라는 작은 덩어리에 모이게 된다. 자궁은 수정란을 보호하기 위해서 모체로부터 영양분을 끌어내는 기능을 하는 영양아층을 만드는데 집중한다.
이 수정란이 태극을 상징한다. 만물의 근원으로서 형이하의 태극,
(주역 계사전) 시고역유태극(是故易有太極 : 그러므로 역에는 태극이 있는데) 시생양의(是生兩儀 : 태극이 양의를 낳고) 양의생사상(兩儀生四象 : 양의는 사상을 낳고) 사상생팔괘(四象生八卦 :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 팔괘정길흉(八卦定吉凶 : 팔괘는 길흉을 정하며) 길흉생대업(吉凶生大業 길흉은 큰일을 낳는다)
태극기에 반영된 한반도의 정세
태극기에 한반도와 주변국의 정세가 반영되어 있다. 이것을 예언이라고 할 수 있는지? 놀라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극기(시작은 1882년, 현재 도안은 1997)를 그렇게 제작해서 그런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 정도로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칼 융(Carl Jung 1875-1961)이 말하는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인 공시성(共時性, Synchronicity 신크로니시티)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은데, 음양이기(陰陽二氣) 즉 빨강과 파랑은 남북을 가리키는 것으로 쉬이 떠 올릴 수 있고, 주변의 사괘(四卦)는 어떤가? 한반도 주변 4개국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와 관련이 있는가? 건곤감리(乾坤坎離) 사괘 이것은 하늘과 땅과 물(달)과 불(해)을 가리킨다. 건천(乾天), 곤지(坤地), 감수(坎水), 리화(離火), 방위도 가리키는데 건(乾☰) 하늘은 동쪽, 곤(坤☷) 땅은 서쪽, 감(坎☵) 물은 북쪽, 리(離☲) 불은 남쪽, 계절도 건은 봄, 곤은 여름, 감 은 겨울, 리는 가을로서, 이 사괘가 한반도 주변 4개국과 상응한다. 만들 때 팔괘(八卦)로 하려고 했지만 복잡하다고 해서 4괘로 한 것인데 이것이 우리나라의 국제 정세와 우연히 일치하게 된 것이 아닌가?
우리와 밀접한 나라 넷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인데 초강대국들이다. 이 네 나라가 건곤감리(乾坤坎離)와 통한다. 천조국이라고 하는 미국은 건(乾☰) 하늘 동쪽이고, 곤(坤☷) 땅 서쪽은 중국, 감(坎☵) 물(달) 북쪽은 러시아, 리(離☲) 불(해) 남쪽은 일본, 우리나라의 동맹국은 미일이라고 할 수 있고 적대국은 중러라고 할 수 있는데, 사괘(四卦)의 태극기에서의 위치도 쌍으로 나열되어 있다. 건리(乾離)가 왼쪽, 곤감(坤坎)이 오른쪽으로, 건(乾)은 좌상, 그 대척점의 곤(坤)은 우하, 감(坎)은 우상, 그 반대편의 리(離)는 좌하, 태극기를 볼 때 곤감(坤坎) 중러가 오른쪽에 있고 건리(乾離) 미일이 왼쪽에 있는데, 현실은 그 반대로 있다. 오른쪽에 미일이 있고 왼쪽에는 중러가 있는, 그래서 위치적으로는 맞지 않는데, 태극기를 사람으로 치고 나를 보는 상태가 아닌 나에게 등 돌린 상태로 있으면 건리(乾離) 미일은 좌(左)가 되고 곤감(坤坎) 중러는 우(右)가 된다.
태극기에서 흰색 바탕은 밝음, 순결, 평화, 백의민족의 정신을 상징한다. 음양은 우주의 두 기운의 순환을 상징하고, 건곤감리(乾坤坎離)는 천지수화(天地水火)와 천지일월(天地日月)과 부모자녀(父母子女)를 상징하여 자연과 가정과 사회와 나라의 상생, 조화를 상징하는데 태극기는 복희선천팔괘도(伏羲先天八卦圖)와 소옹(邵雍, 소강절邵康節 1011~1077, 송나라)의 선천도설(선천역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복희선천팔괘도에서 건곤감리의 위치는 정방위(正方位) 즉 열십자로서 12시 방향에 건(乾)이 있고, 3시에는 감(坎)이 있고, 6시에는 곤(坤)이 있고, 9시에는 리(離)가 있는 그림인데, 이것을 유방위(維方位) 즉 간방(艮方)으로, 반시계 방향으로 돌려서, 11시 동남쪽에는 건(乾☰), 7시 동북에는 리(離☲), 5시 서북에는 곤(坤☷), 1시 서남에는 감(坎☵)을 위치시켰다. 남에 있던 건이 동쪽으로 이동하니 동이고, 북에 있던 곤이 서쪽으로 이동하니 서인데, 리는 동에서 북으로 이동하는데 남이고, 감은 서에서 남으로 이동하는데 북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건곤감리(乾坤坎離)는 인의지예(仁義智禮)도 상징한다. 건(乾) 하늘 동쪽 미국은 인(仁), 곤(坤) 땅 서쪽 중국은 의(義), 감(坎) 물 북쪽 러시아는 지(智), 리(離) 불 남쪽 일본은 예(禮), 이 또한 유사하다. 미국은 자유 민주주의, 개인 인권 존중의 나라로서 인에 부합하고, 일본은 예의를 중시하고, 중국은 공산당은 아닌데 민족성은 의를 따지고, 러시아는???
한반도에 정세가 고착되어 있는 이유라고 할까?
태극음양이기(太極陰陽二氣)는 원래 남북으로 가 아니라 동서로 그리는 것이 정석이다. 그리고 음양의 동그란 머리 부분에 상극(相剋)의 작은 원을 넣는다. 즉 양의 머리에는 작은 원의 음을 넣고, 음의 머리에는 작은 원의 양을 넣는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강양(强陽) 중에도 음(陰)이 있고, 강음(强陰) 중에도 양(陽)이 있다는 음양 원리에 따른 것이다. 여름에는 가을이 배태(胚胎)되어 있고 겨울에는 봄이 배태(胚胎)되어 있다. 대길(大吉)에는 흉이, 대흉(大凶)에는 길이 잠재되어 있다. 사람은 좋을 때 언동(言動)을 삼가야 하고, 나쁠 때 희망의 끊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음양지도(陰陽之道)라는 것은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변한다. 고정된 것은 없다. 이 원리는 사람에게도 적용된다. 선한 이에게는 악이, 악한 이에게는 선이 내재되어 있다(성선설도 진리고 성악설도 진리다).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 교만하면 안 된다. 나쁜 사람이라고 정죄만 해서는 안 된다. 부정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 사형을 내려서는 안 된다. 중보기도(仲保祈禱)라는 것은 바로 이를 보고서 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이라도 그 안에 선이 있다. 성선설(性善說), 하나님이 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악에서 선으로 얼마든지 갈 수 있다.
그리고 태극기에서 음양이기의 방향이 반시계방향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태양계 안의 행성의 자전과 공전의 방향과 일치한다. 다르게 도는 행성이 있는데, 그것은 금성과 천왕성(Uranus)이다. 공전방향은 반시계로 일치하나 자전방향은 시계방향으로 다르다. 금성은 자전(243일)이 아주 느리게 진행되고 공전(225일)의 시간보다 더 흘러야 하루가 지난다. 천왕성은 가로로 누워서 돈다. 자전축이 공전궤도면에 대해 98도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은 시계방향으로 돌고, 자연적인 것은 반시계 방향으로 돈다. 아래에서 위로 가는 것은 전자이고 위에서 아래로 가는 것은 후자다. 반시계 방향으로 도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영적인 것은 진리에서 선으로 가는 것이 정도(正道)다. 좌(左)는 진리, 믿음이고 우(右)는 선, 사랑이다. 사람은 믿음에서 사랑으로 가야 성숙한 인간이 된다.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이 거듭남(regeneration)이고 구원(salvation)이며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이다.
(240410) 22대 총선에서도 공시성(共時性, Synchronicity)이 떠오른다. 과거 조선은 당쟁(黨爭)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왜란, 호란으로 나라가 거덜났었다. 그 이후에도 당쟁으로 시간을 보내다가 민씨 외척으로 인해 조선은 종말을 맞이했었다. 당쟁이라는 것의 본질을 따지면 이황의 주리파(主理派)와 이율곡의 주기파(主氣派)의 갈등과 대립이다. 주리파는 영남학파라고 하고, 주기파는 기호학파라고 하는데, 지역적으로는 경기와 호남을 가리킨다. 근데 선거 결과를 보니 과거부터 그랬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민주당이 서울, 경기, 호남을 먹고 국민의힘이 영남을 먹었다(충청도는 절반정도 민주당이 더 가져갔지만). 의미심장한 부분이 또 있다. 지도를 보면 중국쪽 방향 좌측에는 민주당 파랑색 물결이고, 일본쪽 방향 우측에는 국민의힘 빨강색 물결이다. 정당을 상징하는 색깔의 경우 민주당은 파랑색, 국민의힘은 빨강색인데, 사회적으로 파랑색은 남자로, 빨강색은 여자로 하고 있지만 음양론(陰陽論)으로는 반대로 남자가 빨강이고 여자가 파랑이다. 정당을 성별로 특정한다면 민주당은 친 여성적이고 국민의힘은 아니어서 이를 남성적으로 본다면 남성적이라 할 수 있고 또 진보를 여성적이고 보수를 남성적으로 또 볼 수 있으니, 50대 이상의 여성들은 보수적이지만 그 이하의 여성들은 민주당으로 기우는 투표율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렇게도 볼 수 있다.
(도덕경 42장)의 창조론과의 조화
(도덕경 42장)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도생일(道生一) 도는 하나를 낳는다.
일생이(一生二) 하나는 둘을 낳는다.
이생삼(二生三) 둘은 셋을 낳는다.
삼생만물(三生萬物) 셋은 만물을 낳는다
만물부음이포양(萬物負陰而抱陽) 만물은 음을 등에 업고, 양을 안는다
충기이위화(沖氣以爲和) 비어있는 기가 (만물의) 조화를 이룬다.
(도덕경 42장)의 일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에서 기본적으로 드는 생각은 태극팔괘론(太極八卦論)과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라고 해서 태극으로부터를 말하나 했는데 갑자기 삼(三)이 나오고 그 삼(三)으로부터 만물이 나온다고 하니, 태극팔괘론(太極八卦論)하고는 어긋나는데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내용이 유사한 것이 앞서 인용한 같은 책 (40장)의 천하만물생어유 유생어무(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 천하만물은 유에서 나오고, 유는 무에서 나온다)인데, 이 말씀과는 불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조화를 생각한다면 (42장)에서 삼생만물(三生萬物)의 삼(三)이 40장에서 말하는 만물생어유(萬物生於有)의 유(有)와 같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도덕경에서는 삼과 유는 만물의 근원으로서 말해지고 있다. 이렇게 정리하면 42장의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는 40장의 유(有)를 있게 한 유생어무(有生於無)의 무(無)를 가리킨다는 것 또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40장에서 말한 무(無)를 노자는 42장에서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로 구체적으로 서술 것이다.
유생어무(有生於無)의 무(無)는 앞서 말한 바 삼태극(三太極) 하나님을 가리킨다. 창조 이전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40장)의 무(無)가 (42장)에서 도생일(道生一), 일생이(一生二)다. 도(道)는 무극(無極)이고 일(一)은 태극(太極)이며 이(二)는 황극(皇極)이다. 도무극(道無極)은 하나님이고, 일태극(一太極)은 말씀이고, 이황극(二皇極)은 말씀 안의 생명이다. 이 황극이 형이하로 내려와 (40장)과 (42장)의 유삼(有三)을 창조하였다. 일반적으로 태극으로부터 만물이 나왔다고 하니, 이 유삼(有三)은 형이하의 태극으로 말할 수 있다. 앞서와 같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남녀의 사랑의 행위를 투영해서 묘사했었다. 형이하의 황극은 여자와 사랑하기 위해 발기된 남근을 상징한다. 이를 (창세기 1장 2절)에서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를 운행하시느니라>’로서 말이다. 물은 여성이고 난자를 가리킨다. 이 난자만으로는 생명 활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난자가 수정란(受精卵)이 되기 위해서는 정자가 필요하다. 그것이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있으라’ 는 빛의 창조다. 이 창세기 1장 2,3절의 본격적인 창조를 위한 사전 작업을 열자 천서편(天瑞篇)에서는 태초(太初 : 기의 처음 활동), 태시(太始 : 형상의 처음), 태소(太素 : 질료의 처음)로서 설명을 하고 이 초기 상태를 혼륜(渾淪)으로 칭하고 있다. 과학에서 빛과 물이 만나 생명이 나왔다고 하듯이 창세기에서는 빛과 물이 나오는 것이고 사람에게서는 정자와 난자의 결합으로 인한 수정란(受精卵)을 말하는 것이고, 생명의 시작은 이 수정란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으로, 이 수정란의 의미와 같은 것이 (도덕경 40장과 42장)에서 말하는 만물생어유(萬物生於有)의 유(有)와 삼생만물(三生萬物)의 삼(三)인 것이다. 이것들은 만물의 근원으로서 오직 하나인 형이하의 태극을 가리킨다.